창세기 22:1-4 “최고의 희생적인 믿음”
(2017.01.15. 메디윌병원)
본문은 성경에 기록된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을 유태인들이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든 것을‘미드라쉬’라 하는데, 미드라쉬는 성경말씀은 아니고 전설로 성경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드라쉬에는 창세기 22장의 기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다. 이때 가나안에 훌륭한 사람들이 다 초대되었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초대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사라는 이삭에게만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도 거지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없자 이를 본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한다.
하나님, 아브라함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그는 가난한 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조그만 음식도 같이 나누어 먹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천사에게 말씀하시길 아브라함처럼 너그러운 사람이 땅에는 없다 말씀하시자 천사가 너무나 인색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좋다 내가 아브라함을 시험하리라.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받치라 하겠노라“고 하셨다는 미드라쉬에 전설이 있습니다.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서 “그 일 후”란 아브라함에게 이제껏 있었던 모든 어려움과 역경이 지난 후를 말합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여 겪은 갖가지 시련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특히 이삭이 출생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둘러싼 모든 긴장과 위기는 지나갑니다.
또한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의 언약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찾은 뒤를 가리킵니다.
문제는 이 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부르십니다.
여기서 시험하다는 ‘심사하다’, ‘검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전의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굴욕이 그 대가였다면 22장에 시험의 대가는 아브라함 자신의
죽음보다 훨씬 더 크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시험이 가혹했던 이유는 육적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야 하는
것이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모든 언약과 축복의 상실이요, 더 나아가서
는 온 인류의 구속의 포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포기와도 같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런 면에서는 고난과 시험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생각할 점은 믿음에는 반드시 시험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이 없이는 믿음이 확증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시험들은 연이어서 그것도 점점 더 강도를 강하게 다가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러한 시험의 의도를 알았을까요?
당연히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것은 이미 시험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12절의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
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1절 하반절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말은 “말씀 하옵소서 제가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라는 뜻이지요.
아브라함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대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요구에 기꺼이 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를 통해 준비를 강조하신 것과 같지요.
이 말은 아브라함의 준비된 상태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에, 하나님께서 아시고 아브라함이 통과해야 할 마지막 시험을 말씀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최대의 시험을 제시한 새로운 계시가 갑자기 임합니다.
그동안 직면했던 많은 시험이나 위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명령이요, 시험입니다.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떤 심정으로 이해했을까요?
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잡으라는 무섭고 비정한 일을 시키실까요?
무슨 연유일까요?
이 명령은 절대적인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런 명령을 받는다면 어떻게 행동하시렵니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마음을 그 속에 전달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아픔 속에 같이 참여하게 하는 하나님의 시도입니다.
사랑하는 자식, 하나뿐이기에 그를 죽이면 대가 끊기는 위험 앞에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기보다 하
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중 네 번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12:1 그는 갈대아 우르에 사는 모든 친척들을 떠나라는 시험입니다.
당시 부족민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데 그는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로 13장의 조카 롯과 헤어지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사랑했기에 롯을 데리고 다녔지만 서로 나뉘어져야 할 때가 왔고 결국 롯은 소돔으로 갔습니다.
셋째로 17장의 하갈에게서 난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관련한 시험입니다.
17:18절에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 원한다며 그와 결코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했습니다.
넷째로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시험이요, 위기입니다.
당시 고대 제사는 장자를 드리는 제사로, 가장은 제사장 임무를 수행했고, 자식을 제물로 드리는 원시 종교행위였습니다.
인간의 제사 행위가 신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은, 어린아이들이 울며
떼를 써 부모의 동정을 유인하는 행위와 일맥상통합니다.
눈물을 보이고 스스로를 자해하는 것은 신들의 환심을 겨냥한 당시 종교의 제사 행위였습니다.
왕상 18:28에 바알 선지자들의 응답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자해하며 피를 흘리는 제사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로 볼 때, 자식을, 특히 장자를 바치는 행위는 인간이 신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구조 요청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동안 직면해야 했던 많은 시험이나 위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을 명하셨습니다.
충만한 자신감으로 대답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들, 그의 유일한 소망인 약속의 후손인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만을 바라고 살아왔으며 그 아들은 그의 꿈과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귀한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하지만 반문하지 않았고, 그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카 롯을 위해서는 그토록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간구했으면서도 독자 이삭을 위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을까요?
물론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명령은 내용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 여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고후1:20의 말씀인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심정은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운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지금 요구하시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는 3중의 표현에서 잘 드러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번제의 장소를 지정하셨다는 점입니다.
4절 말씀대로 거기까지 가는데 3일이 걸립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선택할 시간적 여유가 3일이나 된다는 말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그에게 3일간의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15장 횃불 언약에서 번제를 드려 잘 압니다.
번제는 제물을 잡아 각을 뜨고 불로 재물이 재만 남을 때까지 온전히 태우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손으로 직접 그 과정 전부를 실행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지켜봐야만 합니다.
1절에서 가졌던 넘치던 자신감은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진공 상태가 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진공의 자리를 후회와 죄책감이 파고듭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이 명령을 듣는 순간 영화의 장면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 잘못했던 부분들이 크게 클로즈업 되면서 가슴을 짓누릅니다.
잘못 산 삶의 결과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게 된다는 엄청난 죄책감이 휘감아 칩니다.
이 순간 그의 입은 얼어붙어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롯이나 이스마엘의 경우와는 달리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습니다.
그 밤에 사탄이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많은 걱정과 근심을, 또한 의심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의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이것은 살인을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가?
- 어떻게 내가 나의 목숨과도 같은 내 자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그 대신에 내가 죽을 수는 없을까?
- 하나님의 요구는 모순되지 않는가?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고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되고 그의 자손 을 통해 약속의 씨인 구주가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일 이삭을 제물로 드린다면 어찌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단 말입니까?
- 내가 어떻게 사라를 다시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 또한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 세상을 향해 외쳤던 나의 증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를 알고 있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증거가 될 것인가.
(잠시 침묵)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렇듯이 그는 밤새 한잠도 못 잤습니다.
생각하고 마음을 다지고 또 생각하고 다시 마음을 다지고 그렇게 하길 몇 번이나 했을까요?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자책과 고통으로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아브라함은 감정과 온갖 이유와 생각들로 밤새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이 아닌데도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는 건 큰 명예입니다.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따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높이뛰기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들은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섭니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고 마냥 고민하며 미루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를 시행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즉각적인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를 보였습니다.
22:3절을 보면 아침 일찍 아브라함은 준비를 서둘러서 출발합니다.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의 일러 주신 곳으로 갑니다”
우리는 세상 삶에서 미로같이 얽혀 풀리지 않는 문제로 생각과 감정이 앞설 때 차라리 아무런 생각
이 들지 않도록 바삐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바로 그 심정입니다.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것은 여전히 그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을 인정하지만, 그의 마
음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때론 우리의 감정도 다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내 소유를 잃을 수도 있고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도 잃기도 합니다.
때론 비인간적일 때도 있지요.
타인에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막 8:34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래도 아브라함의 결론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셨기 때문이지요.
약속과 반대되는 명령을 하셨지만 결국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고,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부
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히11:19은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설득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면 어떤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모리아 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과 두 종과의 2일(이틀)간의 동행에 그 어떤 대화나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싸움이 극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길고 긴 2일(이틀) 길, 얼마나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까요?
2일 동안 아브라함은 믿음의 싸움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자신과의 처절한 전투를 했습니다.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합니다.
네 사람이 가는 여정의 2일(이틀)간 아무런 대화가 없을 수는 없었겠죠?
두 종과 이삭과의 일상적인 대화는 했겠지만,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며 일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는 이 갈등의 싸움을 끝내고 이긴 것이 아닙니다.
모리아산이 보이자 아브라함은 종들을 남깁니다.
끝까지 데리고 갔으면 분명 종들이 말렸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5절에서 그는 종들에게 이삭과 함께 경배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말을 했으며,
8절에서는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냐고 묻는 이삭의 질문에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실 것이라고 우
문현답을 합니다.
물론 이 대답이 거짓말로 보기는 어렵지요.
왜냐하면 그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죽은 이삭을 하나님이 도로 살리실 줄 믿은 확실함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실행할 순간이 올 때까지 침묵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켰습니다.
결국 2일 동안 그의 심경은 “믿음! 믿음! 믿음!”이라고 외치는 설득의 시간이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요?
전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든 응답하셨고 해결해 주셨는데 이번은 아무런 대응이 없으십니다.
더욱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낀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 애써 모른 척 하시는 하나님, 하지만 동시에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더욱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지만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순간은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누가 알더라도 전혀 도움을 줄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지키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라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떠났습니다.
육정에 끌려 간섭받고 제한받는 것이 싫었고 또한 결심을 막아 마음이 흔드는 것이 싫었습니다.
욥의 아내를 보세요.
그녀는 욥에게 차라리 믿음을 버리고 죽으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욥보다 더 마음이 찢어집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만 참으면 됐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고통까지 함께 끌어안고 견뎌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은 외로움과 고독, 갈등과 죄책감, 그리고 후회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 둘의 비중을 달아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도 바로 이것이지요.
영원히 죽었던 우리를 고귀한 보혈의 공로로 구원하셨는데 그 은혜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무엇이든 못하겠는가요?
아들 이삭을 제물로 요구할 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의 입장에서는 기꺼이 순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비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요?
(침묵)
아브라함은 모리아산 정상에 단번에 선 것이 아닙니다.
쉽지 않은 걸음과 걸음이 모여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믿음의 높이뛰기 선수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눈물이 모아져 모리아산 정상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아니하는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신앙에 대한 테스트는 신앙의 본질을 확정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입니다.
시험에 담긴 참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과 유사 신앙을 구분하는 절대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 받은 성도 자체를 탈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을 시험을 하시는 이유는 구원 받았음을 보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너무 귀한 것이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만큼 귀한 것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절대적인 복종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숨 막힐 듯하고, 살을 에는 듯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절망 가운데 빠질지라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단절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절대적인 복종의 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 안으로 던져 넣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알았고 우리를 참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에 감사하며 참 하나님을 발견하고 고백하며 순종하는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복된 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 살면서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주를 바라보며 사는 믿음 주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비난이 있을 지라도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믿음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 우릴 붙들어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어떤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주의 능력에 힘을 얻어 사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사고와 인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절대적인 순종을 하는 굳건한 믿음을 갖길 원합니다. 절대적인 순종과 온전한 순종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기 원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에 주님의 은혜를 덧입혀 주옵소서.
새로운 새해를 주시고 이 새해에 펼쳐지는 어려가지 상황속에서 항상 감사하게 하시고 날마다 기쁨으로 드릴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이시간 주님에 감사하며 드립니다. 받으시고 믿음의 자녀답게 사는 삶에 되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나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드리는 순종의 자세로 살아가길 다짐하는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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