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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한복음 4장 3절-42절(5-14) “늘 비어있는 물동이에?”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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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 3-42(5-14) “늘 비어있는 물동이에?”

(메디윌병원 2017.05.21)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었고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뿌리 깊은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사마리아 사람들은 혈통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혼합 종교, 양다리 신앙, 진리가 아닌 거짓의 영역에서 우상 숭배로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적대감정이 일어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유대인에게 적대감정이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는 길입니다.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길은 약 6일이 걸렸지만 사마리아를 통과할 경우 3일 걸리는 길로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이 길로 가야 빠른 것을 알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통과하기보다는 돌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예수님이 아니신데 주님은 사마리아를 통하여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주님께서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시며 통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해야만 한다라는 말은 필요성, 강제성, 운명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과하고자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굳이 이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의도는 이 길이 단지 지름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길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때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모든 벽을 허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담을 허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은 세상 사람들의 죄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담을 허물었고,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1:8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고, 예수님 먼저 친히 본을 보이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역시 따른 지역들과 같이 복음을 필요로 했기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이 길을 택했습니다.

 

힘든 다리를 이끌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마리아의 작은 마을 수가성입니다.

수가성에는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주었던 밭과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야곱의 우물이 언급된 점입니다.

야곱의 우물을 말한 것은 사마리아 지역의 위치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자존심 즉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면서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있다면 사마리아인에게는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것이죠.

유대인, 사마리아인 모두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원의 의미를 삼았습니다.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우물은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배경이며,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생수를 말할 수 있는 좋은 소재를 제공해 주는 장소입니다.

우물은 나를 발견하는 곳이며 가족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을 얻는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성경에서 중요한 만남은 우물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아비멜렉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은 라헬, 모세는 르우엘의 딸 십보라를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 수가성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 도착한 예수님은 여행에 지친 나머지 우물가에 앉으셨고, 제자들은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휴식을 갖기 위해 우물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물에는 수가성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미쉬나라는 유대인의 책을 보면 이 여인은 매우 부정한 여인으로 부정한 여인 중에서도 가장 부정한 여인이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넴으로 시작이 됩니다.

당시의 문화는 먼저 남자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는 일은 유대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수가성 물 깃는 여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적한 대낮에 자기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 한 젊은 유대인이 물 한 모금 청합니다.

거들떠도 안보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 듯 말을 꺼내시는 예수님께

이 여인은 이거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유대인 남자가 내게 물을 달라고 하다니 깜짝 놀라 당황합니다.

얼마나 놀랍고 두려웠으며 당혹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셨고 마음을 열고 싶으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은 우연히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된 모든 것이 은총의 사건인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갈증으로 마실 물이 필요해서 그 여인에게 물을 요구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심한 갈증을 느껴 물을 요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에 먼 길을 와서 목이 말랐다면 제자들이 먼저 스승이신 예수님께 물을 떠 드리고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가러 가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제자들의 도리 아닙니까?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전도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항상 물주머니를 준비했을 것으로 예상되기에, 예수님의 필요가 목마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면서 물을 마셨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요구한 궁극적인 이유는 갈증 해소를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수가성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 중 하나는 물 문제 해결 아닙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에 물 부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강수량의 1/4 ~1/5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지요.

동네 안에 수도시설이 없었기에 수가에 사는 모든 주민들은 동네 밖에 있는 우물에서 매일 가서 물을 길러야 했습니다.

물이 없으면 식사도 할 수 없고 씻을 수도 없으며 빨래도 할 수 없습니다.

물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며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주저 없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분주히 하루를 보내고 있지요.

지금 당장 돈이 절실히 필요한데 누가 돈을 좀 달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절박한 상황에서 돈이 필요해 돈을 구하는데 주님께서 돈 좀 달라시면 무슨 말을 하겠나요?

수가성 여인의 심정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물론 수가성 여인이 황당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예수님이 오히려 요구했다는 점도 있지만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 대한 강한 정서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는 점이 더욱 놀랄만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물에 대한 요구는 단순히 마시는 물에 대한 요구보다 더 귀한 생수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군지 모르는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는 말씀 앞에 자신들에게 있는 귀한 전통의 우물인 야곱의 우물에서 난 물보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물이 더 귀한지 반문합니다.

이 여인은 세상의 상식 수준에서 생각하고 대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세상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생수는 야곱의 우물에서 나는 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인에게 마실 물조차 전혀 없었다면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일이 있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가 필요 없다 말하지 않는가요?

그렇기에 마음속에서 점점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밀려나고 세상의 물 만 가득 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물은 반드시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총족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사야 5811절 하반절을 보면,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이 예언했던 샘물 역시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우리 인생의 모든 필수요소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나의 필요가 해결되고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관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물질과 돈의 추구보다 진정한 삶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수가성 여인은 채워도 채워도  인생의 갈증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여섯 번째 남편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남편 다섯이나 갈아 치우는 대단한 여성으로 부러움의 대상일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통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생의 갈증을 느끼며 살아온 여인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다시  만족을 채우기 위해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섰지만 

용 없는 일입니다
사실  여인은  남자에게서 만족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남자들마다 자신의 만족을 채워 주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자신을  누구도 이해하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더러운 년이라 욕하며 침을 뱉고 수군거리며 비아냥거립니다

 여인은 자신을 이해하고마음속의 진정한 속내를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필요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여인과 상대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찾지 않은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유대인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녀는 같은 민족, 자기 동네사람들에게까지 멸시와 천대를 받는 부정한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물을 달라 해도 거절할 판에민족의 갈등을 갖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어림없는 일 아닌가요

 

그녀는 예수님의 요청에 거절을 합니다.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왜냐하면 물을 달라고 요청한 예수님이 자기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들처럼 멸시와 조롱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내심 자신에게 물을 달라 말을 걸어주는 주님이 한없이 고맙기에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은데 정작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예수님의 음성이 꼭 너는   마른  인간을 보지 못하느냐?” 라고 묻는  들렸고, 그 이야기가 귓가에 맴돕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나에게 오히려 물을 구하였을 것이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기 때문이라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신을 동등한 인격체로 봐주시는 주님을 동경하게 됩니다.

자신을  동일한 인간으로 대해주시는 주님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것은 그저 고마워하는 마음만이 아니라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는 귀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사람들과는 다르게 죄 많은 여자를 똑같은 한 인간으로 봐주시는 예수님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며 사람들처럼 똑같이 인정해주는 예수님에게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에 압도된 여인은 15'주여' 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 어린 고백합니다.
반면에 마을에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31에 보면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는데 말이죠.
이것은 수가성 여인이 삶의 의미를 되찾고삶의 활기를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마땅한 호칭이 없었을까요?
예수님께 주여라 부른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진정성과 경외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표현이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과거 허물과 현재의 치부를 다 알지만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련과 고초를 다 아시고 '네 말이 참되고 옳도다'라고 감싸주셨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이해하고 이제껏 억눌렸던 가슴속 한을 단숨에 씻어주고 달래주는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엘리야 같은 선지자로만 여기고 진정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했지만, 이 여인은 바로 '선지자'19절에 고백합니다.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신에게 메시야 주님이 찾아오셨고 생수를 마심으로 메시야를 찬송하는 심령이 되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벗어 던지고 마을로 향합니다.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은 물은 긷지는 않고 가장 먼저 물동이를 버리고 우물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에게 물동이가 얼마나 소중 존재입니까?

이 여인에게 물동이는 단지 생활에 필요한 마실 물을 담는 도구 이상입니다.

어쩌면 여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에게 물동이는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물동이는 마실 물을 옮기는 도구일 뿐 아니라 내면의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고, 아무리 많이 담아도 늘 부족한, 그래서 그 무엇인가를 채우고 또 채우는 물동이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우물가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요,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늘 빈 물동이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헤매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물동이는 필요가 없습니다.

여인은 이미 예수님으로 자신의 영과 혼과 육을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인의 처지와 버려진 물동이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멀쩡하지만 사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는 아닌가요?

몸도 지쳤고 마음도 지쳤으며 신앙도 지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상처와 괴로움이 우리의 물동이가 되어 하나씩 붙잡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발부둥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인의 것과 비교하면서 때론 억울하게 빼앗기기도 하며 이리저리 채울 것을 찾아다니지 않습니까

새 삶을 주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처럼 그 예수님을 이제 우리가 만나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짊어지고 있던 그 물동이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삶에 가득 채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붙잡고 있던 빈 물동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변화된 여인은 그 즉시 동네로 달려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사람들을 끌고 와 말씀을 듣게 합니다.
졸지에 최초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모습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듯이  여인은 마을에서 행실이 좋지 않아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을에 내려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인간적인 대우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마을에 많은 사람들은  여인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가져 귀를 기울였고 여인에게 힘의 원동력이 된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에 바램이었소♬♪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노사연 잘 알 겁니다..

그녀는 지난 세월 수없이 자신의 히트곡 만남을 불렀습니다.

만남이란 노래는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줬고 그는 이유 없이 그저 세상을 향해 만남을 불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모친 권사님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심폐소생술로 생명은 건졌지만 스스로 호흡을 하지 못하는 시련을 겪게 되면서 하나님을 붙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세상을 향해 부른 노래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그 때서 알게 되었고 기도하며 항상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편을 위해, 매니저를 위해, 동료들을 위해, 심지어 집에서 일하는 중국인 아줌마를 위해서 기도하는 변화된 삶으로 바꿔 매일매일 감사의 삶을 산다고 간증하며 그가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가져라,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라, 그리고 만남의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자들은 삶의 변화를 통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여인의 삶 깊숙이 스며든 생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담을 통한 교재와 사귐의 열매였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군가 한 모금 청하는 것이 귀찮아서 나 몰라라 하시겠나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찾아오시는 주님을 외면하시렵니까?
그토록 오랜 시간 신앙생활하며 신앙의 연수를 자랑하지만 아직도 이 여인의 과거의 치부처럼 감추며 숨어 다니는 신세는 아닌가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삶이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일시적이거나 한순간의 깨달음과 은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삶이 변화를 통한 예수의 향기를, 진가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통해 변화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새롭게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내 계획에, 내 결정에, 내 행동에 예수님을 앞장 세워 보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사도바울은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시는 주님은 실패자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재차 거듭, 거듭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물음에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 대답하며 세상의 헛된 것을 빈 물동이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방황하지 말고 과감히 빈 물동이를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로 채움 받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을 갖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목마름을 외면치 마옵소서.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으며 눈앞에 보이는 물질과 명예로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내 삶에 무늬처럼 새겨진 목마름으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가 수가성 여인처럼 만나주시기를 간구하오니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가득 채워주옵소서 
참된 생수를 주시는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의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는 우리의 갈증과 부족함을 주님의 능력으로 채움 받아 살아가는 인생길 되길 원합니다. 헛된 것에 미혹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님 안에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고 아무리 담아도 늘 부족한 물동이를 벗어버리고 작은 것에 감사하며 주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것 중 일부를 구별하여 드립니다. 받으시고 주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빈 물동이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세상에서 방황하기보다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수를 넘치도록 채움 받아 능력과 기쁨으로 살아가길 기도하는 심령들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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