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창 13:5-13 “함께 머물 수 없을 때”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4. 28.
728x90
반응형
SMALL

창 13:5-13 “함께 머물 수 없을 때”
(메디윌병원 2017. 6.18)

갈등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심지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갈등은 존재합니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갈등 앞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리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본문을 보면 갈등으로 아브라함 일행은 애굽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정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 갈등의 정체는 6절에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소유가 갈등의 원인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재산이 늘어가면서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이 증가하게 됩니다. 
거주지는 좁은데 가축이 많아지면서 서로 초장과 물을 확보하려고 다투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매우 일반적인 우리들 세상 삶의 모습이지요. 
가난하게 살 때 화목했던 형제들이 좀 살 만하니까 재산 문제로 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드물지 않게 볼 수가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물질적 풍요가 형제의 조화와 연합을 깼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언제나 그런 불완전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죄악과 부패성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 속에서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갈등이 올 때 어떻게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갈등이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등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게 됩니다. 

오늘 분문에 갈등을 해결하는 아브라함의 일화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삶에 지금도 존재하는 갈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모본으로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갈등을 겪고, 함께 머물 수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함께 찾고자 합니다. 

첫째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갈등으로 불편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에 휘말리면서 겪게 되는 최대의 비극은 인생의 커다란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갈등에 빠져 버린 나머지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 비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치면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또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문제에 빠져 버리지요. 
문제 속에 빠져 버리면 그 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되는데 이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을 겪을 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 내 삶에 더 중요한 문제가 무얼까? 
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내가 붙들고 계속해서 나가야 할 인생의 비전이 무엇일까? 
이 순간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히기에, 내가 저 사람과 불편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이슈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촌으로서 얼마든지 조카 롯을 혼낼 수 있었고, 강압적으로 명령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땅만 바라봤다면, 소유만 생각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은 땅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삶의 문제와 갈등의 문제를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우리는 한 친척이 아니냐. 다투지 말자. 우리는 골육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형제다 이 말이죠. 

너와 나는 형제, 
이 형제 관계는 재산보다 더 중요 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와 나, 형제라는 인간관계를 보존하도록 하자. 
더 중요한 이슈에 그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다퉈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왜 섭섭함이나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롯은 싸워서는 안 될 친족’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가서 땅의 문제, 가난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땅보다 관계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는 어떤 사람은 돈이 더 중요하다고 우겨댈지 모릅니다. 
형제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냐?  뭐니 뭐니 해도 money지. 

그래서 그 관계를 단절해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적어도 돈에 의해 지배를 당할 수는 없잖아요? 
그보다는 더 중요한 어떤 가치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인간의 관계, 이 얼마나 중요한 관계 입니까? 
이 관계를 상실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 암시하는 아브라함의 행동의 배경을 설명하는 7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지금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다투고 있습니다. 
다투고 있는 것 뿐 아니라 그 곳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거한다 말합니다. 

왜 이 말을 기록했을까요?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갈등할 때 거기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있다는 것이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거기에 있어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다투고 갈등할 때 우리의 행동을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의 눈이 오늘 나를 향하고 있고,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교회가 부끄러움의 대상으로서 쓰임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삶이 부끄럽지 않게 세상 속에 간증으로 나타나기 위함이라는 더 큰 이슈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동이 달라지겠습니까? 
부끄러운 일로 크리스천끼리 아픔과 갈등의 모습이 세상에 노출될 때 우리는 얼마나 괴로워하고 아파합니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보하고,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더라면 이 사건의 행방은 얼마큼 달라질 수가 있었을까요?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 갈등의 한 복판에 설 때 나와 그 사람, 이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큰 그림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도 내가 붙잡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커다란 그림과 비전을 볼 때 우리는 갈등을 넘어서는 어떤 해결책을 붙잡을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갈등을 푸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현실적인 대안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비현실적인 대안이지요. 
비현실적인 대안, 즉 비현실적이란 무엇입니까?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비생산적인 노력들로, 어떤 것이 비현실적인 노력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경우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누가 옳으냐?, 누가 틀리느냐? 
여러분,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갈등이 해결이 됩니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켜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됩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선택은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큰 악과 적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문제뿐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롯이 피가 터지도록 서로 싸웠다고 가정해볼까요? 
그거 나쁜 일, 악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예 관계를 단절하기도 합니다. 
그 관계 단절도 악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말이지요.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둘 다 나쁜 것인데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하자는 것이죠. 
우리도 언제 갈림길에 서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런 갈림길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롬8:5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등으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서로가 싸우는 것보다 우리가 헤어지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완전한 결별, 완전한 단절을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친척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서로 떠나자고 제안 합니다. 
이는 완전한 단절이나 완전한 결별이 아니라 갈등을 줄여 생산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일단은 떠나서 좀 살아보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를 후일에 도모하자는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14장에 보면 롯이 전쟁포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보다 더 좋은 땅을 가진 롯이기에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봐라 버릇없이 제멋대로 자기만 위해 좋은 것을 선택하더니 잘됐다 며 박수치고 좋아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땅으로 간 롯이 전쟁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출하여 여전히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한 단절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관계의 단절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계속되는 갈등의 증폭을 막기 위해 잠시 우리가 서로 떠나서 생산적인 관계를 한 번 도모해 보자는 것이죠. 
굉장히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일 하다가도 서로가 갈등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하다 마가 요한이라는 청년으로 갈등을 빚게 됩니다. 
마가 요한은 전도 여행하다가 그만 무단이탈을 했습니다. 
땡땡이를 친 것이죠. 
그러니까 바울은 아주 단호하고 엄격한 사람이라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이 사람 데리고 가지 말자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기독교는 이런 사람을 받아주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냐며 기회를 줘서 데리고 가자 합니다. 
그래서 둘이 싸우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여러분, 누가 옳습니까? 
바나바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둘 다 옳을까요? 

선택한다면 어느 것이 옳은 것 같습니까? 
바나바적인 사람은 바나바가 옳다고 할 것이고 바울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바울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방법론의 차이이지요. 
사고의 차이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며 옳고 그름의 차이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간혹 항상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전제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 참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틀릴 수가 있습니다. 

나도 잘못 할 수가 있고 당신도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다 건강한 대안을 함께 현실적으로 모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선이고 당신은 악이라 소리치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더 좋은 의견을 찾아야 합니다. 
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믿음에 근거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대안만으로 족하지 않고 이젠 어느 한순간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결단하느냐? 는 점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됩니다. 
믿음의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결단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10~11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라함은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측을 택하겠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자기가 양보합니다. 

양보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주관적으로 책임져 달라는 간구입니다. 

일단 롯에게 선택권을 주고 나머지 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거기서부터 믿음의 선택이 시작된 것이지요. 

10절에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여기서 “바라본즉”이란 단어가 중요하죠. 

거기 호수도 있고 땅의 모양과 생김새가 아주 좋아 보였지요. 
아주 비옥한 땅 같았습니다. 
저기가 좋겠다.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쪽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롯의 선택은 보이는 것에 의한 선택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선택했는가요? 

아브라함은 선택이(choice가) 없습니다. 

롯이 선택하고 난 나머지를 아브라함이 차지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쪽이 아닌 땅, 헤브론 쪽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18절.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헤브론은 오늘날 뉴스 기사가 많이 나는 분쟁의 도시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과 붙어있는 곳으로 헤브론 쪽의 땅은 지금도 아주 안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곳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헤브론을 선택하고 나서 장막을 짓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비록 안 좋은 땅이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이상 여기가 하나님 주신 땅으로 믿습니다. 
여기서 살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택입니다. 

고린도후서5장7절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은 단순히 보는 것에 의해서 무엇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롯은 딱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보기에 좋았거든요. 
아주 비옥한 땅이라,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으로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이것이 안 좋아도 하나님 내가 하나님 손에 의탁합니다.

이것이 손해 같지만, 나에게는 희생 같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쪽 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우리가 너무 잘 알잖아요?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나중에는 불바다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믿음의 선택은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장의 이익이 되기에, 당장에 이것이 편리하기에 선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장에 손해가 되더라도, 나에게 불리하여도 선택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투명한 선택을 하는 이런 믿음의 선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로 인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롯은 지금까지 잘못한 선택의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갈등을 넘어선 아브라함의 최후의 승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장에서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 속에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갈수록 더 많은 갈등이 증폭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의 갈등, 백성들의 장로들과의 갈등,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음모하는 무리들로 예수님의 입지가 자꾸만 좁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또 이들과 대결할 수 있는 어떤 전략을 구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갖고 계셨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을 용서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원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만약 만화 같은 상상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비틀고 이단 옆차기로 십자가를 부수고 나와서 요 놈들 하고서 로마의 병정들을 그냥 작살을 내버렸으면 얼마나 통쾌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무력하게 그냥 당하시고 죽어 용서하신 바로 그 분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고,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실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당신과 저라면,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의 장에 어떤 갈등이 있습니까? 
그 갈등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 이슈를 바라보시요. 
우리가 붙잡아야 할 더 위대한 가치, 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최선이 무엇인가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십시오. 
그리고 결단의 그 순간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당장은 나에게 불리한 것 같아도 정당한 선택을 하겠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주님을 신뢰하겠다. 

믿음의 선택을 했을 때 마지막에 웃는 자,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삶, 그리고 더 중요한 하나님의 가치를 붙잡았기에 하나님의 평화 속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한평생을 살겠다. 
이런 더 위대한 삶의 축복을 붙잡고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는 인생의 삶속에서 언제나 갈등으로 흔들립니다. 우릴 붙들어 주시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바라보며 주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를 생각하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음 주옵소서. 
내 가슴을 찢고 누르는 갈등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를,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우리가 말씀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날마다 주님께 물으며 살아가는 인생길 되게하옵소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하나님이 인도하심 속에 거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줄 믿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주님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귀한 삶의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물드립니다 받으시고 주의 은혜가 임하게 하옵시고 우리의 삶에 풍성한 주의 능력으로 덧입혀 주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은혜가 우리의 삶이 갈등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기며 슬기롭게 살아가기로 기도하는 모든 심령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