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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3장 1-10절 망각속에 묻어버린 참 소망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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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절 망각속에 묻어버린 참 소망

(2016. 8.7 예수사랑교회 주일낮, 8.28 메디윌병원)

 

자리, 목은 중요합니다.

같은 물건을 파는 상점도 자리, 목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유명한 상권이 있는 장소에 상점은 더욱 그러합니다.

유동인구가 많은 목좋은 자리에는 그 만큼 물건을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상점만 목좋은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걸하는 사람에게도 목좋은 자리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목좋은 자리, 또 인정이 많고 주머니가 넉넉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자리가 목좋은 자리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활동 중 최초로 교회의 이적을 기록합니다.

성전은 구걸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고의적으로 저지른 죄를 상쇄하는 길은 구제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지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성전 문에는 많은 거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중입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다다랐을 때, 그 곳에는 항상 구걸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못 걷게 된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를 받아주며 도와줄 재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 가난했고 무시를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결코 사회에 적합한 자가 아니라하여 그 누구도 받아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구걸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많은 거지들 중 한 사람으로 구걸하기 좋은 미문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구걸하기에 이만큼 좋은 자리도 없기에 그는 날마다 미문으로 나옵니다.

쉬고 싶어도 벌이가 너무 좋았기에 쉬지 못하고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는 구걸의 행위로 연명합니다.

 

422에 보면 이 앉은뱅이의 나이는 마흔 살쯤 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40여 년간을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생계수단은 구걸이기에, 절망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앉은뱅이였기에 40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걸음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를 구걸하는 성전 문까지 누군가가 옮겨주었는데 그런 생활을 몇 년간이나 했을까요?

10년간?

20년간? 아니

40년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십년 동안 거지로 생활해왔음을 10절의 말씀인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라는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로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참으로 그가 바랬던 희망은 무엇일까요?

많은 재력을 가진 자의 적선으로 풍족해지는 것일까요?

오늘도 인심 좋은 후원자를 통해 많은 벌이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가 변함없이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며 진정한 바라는 소망은 있었을까요?

그에 망각 속에 묻어둔 소망은 무엇일까요?

앉은뱅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희망은 금, 은 보화도 아니요. 돈도 아닙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는 것, 오직 일어나 걷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소망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희망을 둘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뿐입니다.

나면서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에 스스로 돈을 벌 수 없었던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란?

성전 미문에서 예배 자들에게 구걸하는 행위입니다

진정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희망을 잊어 버렸고 그 대용품으로 돈을 택하였습니다.

대리만족인 돈에 희망을 두고 구걸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은과 금을 구하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잊고 산 삶입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 문에는 앉아 있지만 사실 성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았으나 성전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날마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과는 단절된 존재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그를 봐왔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 그는 자신이 다른 존재이며 사회에 적합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애초부터 아니, 어린아이일 때부터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며 수줍어하고 잘 당황하는 소극적인적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선을 구걸하면서도 쳐다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이 두 제자가 다른 예배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한 푼만 달라고 구걸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걸인들도 많이 있는데, 왜 이 사람을 응시하였을까요?

그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4에서 우리를 보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들려졌을까요?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참된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참된 희망을 찾게 해주고자 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들은 앉은뱅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별한 적선가가 나타났는가? 생각하며오늘 대박이야생각하고 밝은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는 변함없이 돈에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자 베드로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평생 처음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이 앉은뱅이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은과 금이 없다면서 왜 불러. 화가 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모든 희망을 접어둔 채 은과 금에만 희망을 걸고 살던 자신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앉은뱅이를 놀라게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렇게도 바라고 원했던 자기만 알던 소망이었기 때문이죠.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속으로만 삭히던 절실한 자신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원했지만 무엇으로도 치료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는 자신의 장애입니다.

한 번 일어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망각 속에 묻고 희망을 접어 뒀습니다.

그런데 깊은 망각 속에 잊혔던 소원이 다시 꿈틀거리며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15년 전 교통사고로 병원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사고 전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걷고 뛰어다니던 제가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병상에 누워 문병 오는 사람들 중 어린아이의 아장아장 걷는 걸음걸이를 보며 얼마 걷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심정으로 걷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바로 이 사람의 심정이 그런 것일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을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이 말에 그는 큰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이 전해옵니다.

걷게만 된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어찌하면 걷게 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해야 걸을 수 있다는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해 옵니다.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베드로가 자신의 오른팔을 잡아 일으킵니다.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 서라는 명령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벌떡 일어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이미 포기한지 오래 되었던 그 소원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억만금을 준다 한들 걷고 뛸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을까요?

이 사람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뻤습니다.

11을 보면 그를 걷게 해준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너무 감사했기에 베드로와 요한을 떠나지 않고 잃어버린 희망을 찾은 후 주님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따라다녔습니다.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구걸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런 삶이 그에게는 편하고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변함없이 미문 앞에서 자신의 불쌍한 모습만 보여주면 돈이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남들처럼 자기 스스로 걸으며, 때로는 뛸 수 있는 다리를 갖는 일입니다.

일어나 걷고 뛰는 것이 구걸하는 것보다 수입이 적을 수 있습니다.

더 가난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이 응어리로 남아있던 소망을 이뤘다는 사실이 그보다 더 귀하고 소중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인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 한계 속에 갇혀 상실과 두려움을 품고 희망과 용기를 잃어버린 나는 아닌가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바로 성전 미문에 앉은 걸인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선 성전 문에 앉아 있으면서도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경험 할 수도 없어 은과 금만을 구하는 영적인 걸인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그러나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주목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주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마주칠 때, 주님께서 내미시는 손을 굳게 잡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차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16을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앉은뱅이는 예수의 이름을 믿었고 그 믿음을 통해 역사를 이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기호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베드로도 현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그 이름의 권세로 명령했고 앉은뱅이도 권위 있는 명령 앞에 순종함으로 기적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엇을 줄 수 있으며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돈이 없다고 했지만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시기 이미 사도들은 헌신자의 도움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재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에 보면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유대파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정말로 돈이 없어서 은과 금은 내게 없다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앉은뱅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를 걷게 해 주는 것이요.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사실 은과 금은 베드로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줄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을 가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충분히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줄 수 없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진정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4주목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 주목의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자신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며,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줄 수 있는 것이 물질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물질적인 베풂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중요한 삶의 특징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도 그것이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구원의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그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우선적인 의무요 사명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부름을 받아 모인 무리로, 성도 한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자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인간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곳이 아닙니다.

그 곳은 그 이상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으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움직이는 곳, 바로 교회와 성도이어야 합니다.

그 능력을 힘입기 위해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함과 삶의 본질과 의미를 해결받기 위해 오늘도 헤매고 있지요.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오늘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영혼의 목마름과 갈급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인간의 욕망과 욕심, 만족을 채워 줄 수 있나요?

이들의 망각 속에 갇혀 있는 참 소망을 찾게 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근본적인 갈급함과 영혼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잃어버린 나의 참모습을 찾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인생의 방황이 해결되며 참다운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나의 참 소망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뿐입니다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참된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이 능력에 의지하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망각 속에 묻어 버린 참 소망을 찾게 되며 그 소망을 이루기 오늘도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의 참 소망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참 소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심 감사합니다. 참 소망되신 주님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냥 내 망각 속에 묻어두고 이방인처럼 살아 왔음 고백합니다. 우리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용서해주옵소서.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시고 세상에서 갈급함으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요 능력이 되심을 알게 하시고 주님으로 만족하며 힘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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