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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감사 불감증”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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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19감사 불감증

(2017.01.29 메디윌병원)

 

현대인들은 감사불감증의 시대에 살다보니 하나님께는 물론이거니와 가정과 사회에서 진정한 감사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우리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요.

물론 인생을 힘들게 살다 보니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시대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감사불감증이라는 병에 걸린 채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네 삶은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거리마다 자동차가 차고 넘쳐나고, 날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남아도는 음식을 어떻게 처리 할지 고민하는 실정입니다.

30년 전만 비교해보면, 지금 우리가 얼마나 부유하게 살고 있나요?

그런데도 우리에겐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쉽게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오고 있지요.

 

인격의 척도는 감사가 있고 없음에 따라 가름해 볼 수 있기에 혹시 나는 감사불감증에 걸려 있지는 않은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사회학자 스탠디는이 시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있는데 그것은감사 불감증이라고 말했습니다.

옛적에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고 고마움을 표현했는데 요즘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저는 어릴 적, 밥상에서 밥알을 떨어뜨리면 어머님은 그 밥알 한 알을 위해 99번의 손길이 거친다시며, 먹기까지 수고한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내 돈 주고 산 건데, 왜 농부에게 감사해야 하냐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은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불평하는 생활, 원망하는 생활,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든 먼저 감사부터 하는 것이 성도의 특징 아닐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는 서로가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이인데 이들 10명은 문둥병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심을 알고 기다렸다가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자신들의 간곡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목청껏 외칩니다.

문둥병자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극히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물론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가까이에 가지 못하며 최소한 2미터 이상 떨어져야 했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때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던 자들로, 이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던 자들로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진심담은 외침에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가시는 길을 멈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게 웬 말씀인가요?

자신들을 가까이 오라하지도 않으시고, 또한 손수 상처를 만져주시며 치료하지도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멀리 떨어져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아직 이들의 온 몸에는 문둥병이 하얗게 여전히 피어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온 몸에 문둥병이 피어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바꿔 걷기 시작합니다.

문둥병자들은 치유 전 몸이지만 무슨 배짱으로 담대하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 오랜 기간 동안 문둥병에 시달려 사리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 진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지긋지긋한 문둥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표현이었습니다.

레위기 13을 보면 당시, 문둥병자가 자신의 병이 다 고침을 받았다는 확증을 받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선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왜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시는지 납득은 되지만 지금은 그런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상황임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문둥병이 완치된 후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가라는 명령과는 전혀 다르며, 지금은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들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기 때문이죠.

그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그 순간에 치유되고, 회복되는 놀라운 기적인데, 오늘 이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문둥병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때 이들은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모험적인 상황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의아해 했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지금까지 들었고, 보았던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기에 의심나지만 흔들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다잡고, 모두가 격려하며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문둥병자와 같은 불안감과 번민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능력과 응답 때문에 불안해하고, 의아해 하면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문둥병자들이 보여주는 믿음의 결단과 순종의 발걸음이 필요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결단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순종의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그럴 때 문둥병자들이 경험한 그 놀라운 치유와 기적이 오늘 우리도 그대로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 못가 이들은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나은 것을 발견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가슴 벅찬 감격일까요?

 

그 문둥병자들의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동안 문둥병자로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아픔을 무슨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친구들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 왔습니다.

 

또한 그들이 받은 감정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문둥병자는 부정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어떤 의술로도 고칠 수 없어,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문둥병이라는 것 때문에 검은 옷을 입고 죽은 자로 취급받아온 세월입니다.

 

그들 모두는 기뻐 소리치며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자신들의 몸에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꿈은 아닌지 서로의 얼굴을 꼬집어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들은 이 은혜가 누구로부터 시작된 것을 잊었습니다.

단 한명만이 이 은혜가, 이 능력이 방금 전에 만났던 예수님을 통해서 흘러나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그 마음을 뒤로 하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의 몸이 다 나왔음을 증명받기 보다 먼저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자신의 몸에 정상 판정을 받기보다 예수님께 감사가 먼저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 돌아 왔고 주님께 엎드리어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평소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와 문둥병자라는 이유로 그가 받은 멸시와 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능력으로 치유를 경험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동안 가족들에게 전염될지 몰라 가족과도 담을 쌓고 살아온 수많은 세월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예수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나서 제사장에게 가도 늦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았고 무엇이 먼저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은 후, 집에 돌아가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젠 사람답게 살수 있다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고침 받은 9명의 문둥병자만의 생각일까요?

이 모습이 우리의 본래 참 모습이 아닐런지요?

사람처럼 살지 못한 옛 과거를 벗어 던지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는 사실은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지금 자신들이 깨끗해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감사하겠다고 한 사마리아인을 향해 온갖 멸시와 욕을 합니다.

이방인인 주제에 혼자 잘난 체한다고 핀잔을 합니다.

문둥병에 걸렸을 때는 몰랐지만 치유 받고 나니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이 다시 살아 꿈틀거립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무지한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 안에 살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불만만 토로할 뿐, 진정한 감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지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챙기시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데도 우리는 그 은혜와 감사를 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 홀로 주님을 찾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묻습니다.

열 사람들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에 대해 섭섭함을 표현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감사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은 고침을 받았음에도,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버린 9명을 생각하며 안타까움과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대인도 아니고,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와서 당신께 감사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하셨습니다.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탐욕과 세상의 가증함으로 똘똘 뭉친 우리들을 향해 안타가워 하시면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잊지 않고, 자신에게 감사를 표현하러 온 그 이방인을 일으켜 세우신 후 축복하시고 그의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질병도 치유해주셨습니다.

19절에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이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닐까요?

아홉은 먼저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난 후 어련히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생각이 저만의 착각이라면 다행인데 오늘날 모두가 이런 모습 속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감사를 모르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가 감사의 대상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불만만 쌓여갔습니다.

인간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병의 치유가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감사를 회복시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다리시고 돌아온 그 한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머지 아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찾아오지 않자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진정한 기쁨의 선물, 구원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나병 치유는 일도 아닙니다.

나병은 그저 감사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육신도, 더 중요한 영혼도 고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내일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기회의 문과 미래의 문을 열게 하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은 감사에 대해 탈무드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빵을 먹기까지 밭을 갈고 씨앗 뿌려 가꾸고 거둬들여 빻아 반죽하여 굽기까지 15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빵집에서 빵을 사서 먹을 수가 있다. 빵을 먹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15단계의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대신해 주기 때문에 빵을 먹을 때는 그 사람에게도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불의도 결국은 감사 불감증에서 생긴 현상입니다.

마음속에 감사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탐욕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농부에게, 근로자에게, 조상과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감사는 우리와 이웃을 연결하여 결속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윤활 접착제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어둠 속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잃어 버려 죽어가는 이 땅을 회복시켜주시려 오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감사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감사의 자리,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만이 감사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사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감사는 조건과 선택이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몸도 영혼도 치유 받았습니다.

감사를 회복한 그는 평생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감사의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감사가 없이 빡빡하게 각박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루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갑니까?

만일 감사불감증에 걸려 살아간다면 그것은 본인에게도 불행이요, 가족들에게도 불행이며, 함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살전5: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정말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듯 감사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하루가 잘되고, 일 년이 잘되고, 평생이 잘되려면 감사의 습관화와 체질화가 필요합니다.


감사는 모든 문을 여는 만능열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 깊은 감사로 나아가보세요.

기적같이 열릴 것이며 구한 것 이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감사도 훈련이며 습관입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기에 감사 할수록 감사가 늘어나고 깊어지게 됩니다.

우선 작은 것부터 감사합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아무리 감사한다 해도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넘치는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심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감사의 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숨 쉴 수 있음을 감사하고, 심장이 뛰고 있음을 감사하고, 살아 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을 산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인생입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지 않는 것은 풍요로움 속에서 감사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감사해야 할 때,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돌려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이며 감사하는 자에게는 영적인 유익과 축복이 있습니다.

 

성도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나병환자 같은, 바로 그런 성도를 기다리십니다.

감사는 우리 삶의 최우선입니다.

선택이 아닌 필수요 의무입니다.

감사는 말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올 때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다보니 그 은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15년 전 교통사고로 사모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제 곁을 떠났고, 하루아침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를 입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심정으로 암담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목숨을 거둬달라고 원망 아닌 원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고 당시 나름대로 감사한다했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 침대에서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전신마취를 10번이상하는 수술과 뼈를 깎는 아픔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감사가 그 상황에서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은혜만 구하고, 은혜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받은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 말씀인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에 감사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감사가 빠진 믿음, 감사가 결여된 소망, 그리고 감사가 상실된 사랑이 과연 진정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제아무리 그럴싸한 논리로 무장하고 해박한 성경지식이 있다고 해도 진정으로 드리는 감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울리는 꽹가리이며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04절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얼마나 감사를 표현하며 살고 계십니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언제 여러분은 감사하다고 말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랑받는 남편과 아내가 되고 싶으십니까?

나이 어린 자녀들에게나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 보셨나요?

감사한다고 자주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줄 하는 성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과 가족들이 보여주는 작은 배려와 은혜에도 풍성한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치유를 받았음에도 감사불감증에 걸려 예수님께 합당한 감사를 돌려 드리지 못한, 9명의 유대인들이 아닌 사마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즉시로 와서 합당한 감사를 주님께 드린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삶에 감사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할 이유를 찾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주님 감사하는 삶이 우리 삶 속에서 넘쳐나길 원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전심을 다해 감사하며 그 어느 순간에서라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을 주옵소서. 감사 속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감사 속에 주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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