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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눅 15:11-24 “아버지를 떠난 나”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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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24 “아버지를 떠난 나

(메디월병원 2017.7.16.)

 

 

부모의 사랑 그것도 아버지의 폭넓은 사랑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연 AD 1세기 이런 아버지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인권존중이 대두되는 사회에서도 불가능한 아버지의 사랑을 어찌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2천 년 전에 그려낼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너무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로,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그 재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출해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자체가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그는 느꼈던 것이죠.

나는 자유롭지 않아. 나는 매인 몸이야! 나는 자유를 찾아 떠나야 해!

그래서 자유를 찾아 먼 나라로 떠나갑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 내 귀에 거슬리는 목사님의 설교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나라, 찬양소리도, 기도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먼 나라, 예수가 아닌 내 맘대로 삶을 살아도 되는 먼 나라, 자유의 먼 나라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은 떠나는 것이 자유를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내용이 과연 둘째 아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도 역시 떠나야 자유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떠남으로 인해 우리에게 잃어버리는 자유가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는 채.

작은 아들은 뿌리를 끊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근본 되는 뿌리와 단절하는 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죠.

 

둘째 아들은 뿌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내 인생은 나의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떠나면 그냥 떠나야 되는데 아버지 품은 떠나지만 아버지 재산과는 결별하지 못합니다.

 

그는 아버지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산은 언제 주는 것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받는 것이 유산이잖아요?

유산을 먼저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물리적으로 죽은 것이요, 자신의 뿌리인 아버지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탕자의 화려한 외출이었고 당당한 독립선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독립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젠 내 멋대로 살기위해 독립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떤가요?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과 의식을 잃어버린 채..
세상에서 나의 꿈을 펼쳐보겠노라방황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렇게 떠난 자의 결과는 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순간, 죄의 시작입니다.

설사 독립한들.. 무슨 일을 하며 살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이야 말로 죽음의 시작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을 잊어버리기에 자기의식만 가득 차게 됩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진리를 알 길이 없습니다.

- 내가 가진 내재적인 자원만을 가지고 살기에 항상 허덕이게 됩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의존자가 아니라 자존자로서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지냅니다.

 

그런데 본문 1511 이하의 말씀을 보면

본문의 초점은 둘째 아들의 떠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떠나갔던 둘째 아들이 이상하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의 드라마는 결코 가출의 드라마도, 반항의 드라마도 아니요,

이것은 귀향의 드라마, 회심의 드라마 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타난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생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물음, 세 가지를 던지고자 합니다.

 

첫째 물음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가?’

두 번째 질문어떻게 그가 돌아와야 했는가?’

그 다음에 세 번째 질문어떻게 그는 영접 되었는가?’

이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함께 던져 보고자 합니다.

첫째 질문,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을까요?

이렇게 떠나갔던 둘째 아들을 무엇이 돌아오게 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는 흉년이고 하나는 생각입니다.

흉년과 생각, 그것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가지고 투자해서 증식할 풍요를 꿈꾸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가지고 대박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풍요함이 아니라 흉년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가 되어 쪽박을 차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적당한 흉년이 아니라 큰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므로 말미암아 한 해 농사 흉년이 아니라 인생의 흉년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자유를 꿈꾸며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그 나라, 자유를 위해서 떠나갔지요.

둘째 아들에게 자유란 아버지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그 곳,

아무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는 그 나라,

아버지의 자리와 아버지의 권위를 없애버리고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쥐엄나무 열매를 놓고 돼지와 갈라먹고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돼지와 형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1세기 랍비 격언에쥐엄나무 열매를 먹어보아야 이스라엘은 비로소 회개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그는 돼지를 치고 있는 노예의 자리에서 인간으로서 가장 쓰디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났던 그가 이제 자유를 상실하고 돼지보다 못한 신세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랑을 꿈꾸며 떠났습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펼쳐지는 그런 사랑을 꿈꾸며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뼈저리는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에게 자유가 떠났습니다.

그는 사랑도, 양심도 버렸습니다.

그는 가치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순간, 그는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되었지요.

그것이 흉년입니다.

탕자는 먹을 양식이 없는 흉년을 넘어서서 인생의 흉년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커다란 흉년, 지금 먼 나라로 떠났던 탕자는, 큰 흉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를 꿈꾸며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가 만난 것은 자유와 풍년이 아니라 속박과 흉년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의 뿌리이신 하나님을 버릴 때,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그런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분은 안 계신가요?

그런데 이 흉년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흉년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흉년과 더불어 이 흉년 속에서 둘째 아들은 생각을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17을 보면내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정말 잘못이야, 어떻게 하지?“

 

자기의 처지,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양식이 많은가,

거긴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이건 독백으로 혼자 한 말인데, 역설적이게도 흉년이 인생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흉년 속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이 탕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기고만장함은 사라지고 인생의 흉년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깊이 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를 회고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누렸던 그 풍요함이 생각났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그 마음 따뜻한 안식을 생각해 냈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자기의 마음을 감쌌던 평화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와 더불어 있을 때가 자유였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둘째 아들은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렇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돌이켜란 말은 먼 나라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살았다고 하지만 그는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의 상실이었습니다.

근데 실로 오랜만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현재 참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아를 성찰하며 잃었던 자아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 앞에 도달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어

탕자의 고백은 독백으로 그치지 않고 드디어 실행에 옮겨집니다.

 

얼마나 중요한 생각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흉년은 탕자에게 오히려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흉년, 궁핍,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어떤 고통은 때론 변장된 축복이기도 합니다.

이 흉년으로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진정한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여 돌아올 생각을 했으니까, 그 흉년이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렇지 않아도 오만과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다면 얼마나 교만할까요?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요.

고통 속에서, 역경 속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흉년이 필요합니다.

궁핍도 때로는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요소입니다.

 

지금 당신의 인생에 흉년이 왔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왔으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흉년 속에서 내 삶에 내가 내려야 할 결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복된 사람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시나요?

흉년 속에서 비로소 주 앞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또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매 맞고 돌아오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오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싸인을 주시고 알려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우둔하게 생활하다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메가톤 파워에 버금가는 엄청난 매를 맞고 아무것도 할수 없어 두 손 들고 다시 신학의 길을 가야만 했던 미련한 몸입니다.

 

그를 돌아오게 했던 것은 흉년과 생각으로

내 인생에서 내가 경험하는 흉년 그리고 내 진지한 생각이 돌아오게 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어떻게 그는 돌아와야 했는가요?

떠났기에 돌아와야 합니다.

떠남과 돌아옴이 두 가지를 통해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20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왜 일어났습니까?

그 먼 나라에서 떠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습니다.

떠남은 출발입니다.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행동이요, 액션입니다.

이것은 떠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생각만이 아니었고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정말 일어나서 돌아오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18절과 19절을 보면 둘째 아들은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해야하겠다는 생각합니다.

아버지 내가 죄를 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봐주세요라며 아버지께 말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미리 리허설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돌아왔습니다,

액션을,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있으렵니까?

생각은 참으로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생각만 해선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도적으로든,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불순종하고 살아왔던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던 반역의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이 결단이요, 회개이며, 내가 영원히 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땅을 준비하셨을 때 그는 먼저 지금까지 살아왔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약속의 땅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만 합니다.

갈대아 우르파괴의 잿더미란 말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가 파괴의 잿더미는 아닌가요?

내 인생이 상실되고 찢어지고 부서져 나가는 파괴의 잿더미,

삶의 분명한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없는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 거기 계시겠습니까?

일어나세요.

그리고 이제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십시다.

떠나야 살길입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단순히 종교에 귀의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만 아닙니다.

 

여전히 예배처소에 머물지만 지금 당신의 마음은 방황하며 떠돌고 있지는 않은가요?

아버지께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내 삶의 뿌리, 나의 창조자 그리고 나의 심판자, 그리고 나의 구원자 그분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가 무엇일까요?

아버지를 믿고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와야 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세 번째어떻게 그는 영접되었나요?

기다리심과 완벽한 회복입니다.

아버지의 무한한 기다리심을 통한 완전한 회복으로 영접되었습니다.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향해 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옵니다.

가장 좋은 옷 입고 머리에 젤 바르고 돈으로 가득 채운 가방을 메고 나갔던 부잣집 아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돌아오는 탕자의 몰골은 어떤 모습입니까?

양복은 커녕 거의 벌거숭이고,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그야말로 노숙하는 걸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누가 만신창이로 변한 이 사람을 부잣집 아들이라고 하겠나요?

아무도 이 탕자가 부잣집 둘째 아들이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이는 실제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심적인 거리입니다.

글쎄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

내가 얼마나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정말 하나님을 무시하고 비웃고 살았는데,

내 마음 속에 느끼는 무거움,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에 마음의 거리와 심리적인 공간의 거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면목이 없어서, 지은 죄 때문에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을 알고 매일 목 놓아 기다립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재산을 챙겨 달아난 아들이 그 재산을 탕진할 것을 알면서도 밤낮 생각하며 기다리십니다.

이 모습이 당신을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이십니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나,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어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참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먼저 알아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건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몰골을 한 아들을 보며 가슴이 저미는 통증을 느꼈습니다.

아들이 너무도 가련하고 불쌍했습니다.

아들은 지은 죄가 있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가 얼싸안았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일까요?

21:18이하를 보면 부모에게 행패를 부린 놈은 돌로 쳐 죽이라 율법에 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 상속을 요구한 패역한 아들을 동네사람들이 먼저 발견하여 돌로 죽여도 말을 못하는 상황이기에 아버지는 그를 감싸 안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간신히 어렵게 한걸음 내딛는 순간 아버지는 열 걸음 달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냄새로 찌든 악취 나는 뺨을 비벼대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림으로 맞아주셨고 아들로 완벽한 회복을 해주셨습니다.

입을 맞춘 행위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그동안 모든 일들을 용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습이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완전한 회복입니다

아버지는 좋은 옷과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잔치를 베풀어 종이 아닌 아들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아버지는 사실 오래전부터, 아니 떠날 때부터 기다리심으로 그 아들이 돌아오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큰 장애물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죄의식, 죄책감입니다.

내가 이 지경으로 인생을 살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지?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를 짓누르는 죄책감이 가장 심각한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용서를 이미 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죄책감이 없도록,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그 분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 우리가 받아야할 채찍, 대신 맞으시고 다 형벌을 받으시고 네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단다 어서 돌아오기만 해길을 닦아 놓고 목 놓아 기다리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해줄게가 아닌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께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회개의 비밀이 있습니다.

회개란 죄의 본질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죄를 깨닫고 후회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후회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회개했다고 말은 하지만 그 삶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바로 이것이 회개의 결정체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직도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라도 용서하시고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한없는 은혜로 감싸 안으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우리의 잘못된 죄악을 떨쳐버리고 주안에서 참된 자유를 찾는 귀한 인생길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세상의 자유가 그리워 내 맘대로 살고자 아버지를 떠났던 우리가 주님께 돌아옵니다. 이 불충한 죄인들이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용서하신다 약속하셨기에 기다리시는 주님을 믿고 돌아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다시는 주님의 손을 놓지 않는 굳센 믿음 허락하옵소서.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참자유요 진정한 평화임을 알게 하시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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