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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창세기 16장 8절 “적절한 타이밍에 물으시는 하나님”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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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8적절한 타이밍에 물으시는 하나님

 

 

여러분,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을 의심해 본적은 없으십니까?

혹은 이것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이 점점 성취될 가망이 없어서 절망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다가 성령께서 어떤 말씀을 내 마음속에 아주 강렬하게 주실 때 !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약속이다.’라고 그 말씀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는데도 세월이 흘러도 그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는 커다란 허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15)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저 하늘의 별을 세어 볼래?” 그래서 그는 별을 세기 시작합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하나님 너무 많아요.

셀 수가 없겠는데요.” “그래? 그런데 네 자손이 그와 같을 거야.”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에게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육체적으로 더 이상 자손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 약속을 한 뒤로도 어느 새 십년,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가능한 세월이 이미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초조해진 이 부부는 당시의 사회적 풍속대로 자식을 얻을 다른 궁리를 시작했습니다.

응답이 지연된다고 사람의 지혜대로 일을 처리하면 금시는 해결된 것 같아도 많은 다른 문제들이 생기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응답이 지연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워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린 결과

16:2 “여호와께서 나의 출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우리는 약속의 성취가 지연되자 이에 저항하는 사래의 몸짓을 볼수 있습니다.

이 제안은 당시 사회 관습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사라의 제안을 따라서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얻게 됩니다. 그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이 결정은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정당합니다.

먼저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사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알았습니다.

사래의 생각은 당대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종을 통해 자식을 얻는 것은 당시 아주 합법적인 행동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브라함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동침시켜 자기들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래의 당돌함!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맞선 우리들의 죄악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이루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거한지 10년 만에 사래의 말을 듣고 자식을 낳기 위해 하갈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본문에서 엿볼 수  있는 사래의 마음은 본인이 잉태할 수없는 여자였음으로 남편에 대하여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여호와께서 그의 생산을 허락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었다면 겸손하게 여호와의 뜻을 찾으면서 순종하거나 여호와의 도움을 구해야만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래는 여호와를 믿는다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자식이 없을 때 씨받이를 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이 즐겨 사용하던 인간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가져야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방법만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래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주겠다(12:2).
네 자손에게 주겠다(12:7).
네 자손을 티끌처럼 많게 해 주겠다.(13:6)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이다.(15:4)
이 말씀은 단수로서’, 즉 아브람 개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너희 몸이 아니거나 사래의 몸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므로, ‘아브람의 몸에서 나오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하갈과 동침하게 하는 사래의 행동이야말로 눈물겨운 헌신이라 할 수 있으며, 아내의 간구를 수렴한 아브람을 결코 믿음이 없는 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이 곧 사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2:44).

성경속의 모든 말씀이 곧 나를 위한 말씀임을 믿지 못할 때, ‘아브람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결코 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은 성경속의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백성만을 위한 말씀, 혹은 성경 속에 나타난 인물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곧 나를 위한 말씀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2절의 말씀은 마치 창세기 3장에서 하와로부터 선악과를 받아먹는 아담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양식은 남자의 손에 달려 있지만, 신앙에 관한한 여자의 영향력이 훨씬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신의 결과는 어제나 자리 이탈로 나타납니다.
45절은 사라와 아브람이 인간의 뜻을 쫒아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라-아내의 자리를 이탈하고 첩을 제공했음, 주인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갈을 학대했음,  
아브람-남편의 자리를 이탈하여 첩과 동침, 주인의 자리를 이탈하여 방관했음,
하갈-종의 자리를 이탈하여 주인을 멸시함, 종의 자리를 이탈하여 도망을 감,
믿음을 지켜야할 윗사람이 믿음을 지키지 못할 때 관련되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자리를 이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3절에서 ‘10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10년씩이나 한결 같이 믿고 기다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끝까지 믿었습니다.
만약 현실적으로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식이 없다고 하면 이로써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리라 믿고서 20년이든 30년이든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브람은 왜 아이를 가져야 하는지 당위성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아이를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끝까지 믿을 때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결정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더 커다란 문제들을 야기 시키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사라와 하갈이 서로 고통을 받습니다.

막상 자녀를 얻은 다음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인 사라를 전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고 사라도 하갈을 구박하기 시작합니다.

이 두 여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 부부는 그 결정을 통해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그들이 치러야 했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아픔을 무엇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분명 아브라함의 실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실수는 결국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갈등이 자손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얻은 후, 14년 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게 됩니다.

불신의 결과는 개인적인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의 비극으로 확산됩니다.
아브람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므로 민족적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갈등이 시작되고, 이것은 민족적 싸움으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계속 내려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싸움의 역사가 바로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

그렇게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이 오래도록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인간적으로 궁리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이나 뜻과 상관없이 여종을 통해 자식을 얻었지만 그 결과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던 우리들도 한순간 내 삶이 여의치 못하면 나의 잔꾀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 망가뜨리고 절망과 좌절과 불안 속에서 헤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실수는 바로 우리의 실수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 아브라함이 왜 실패를 한 것입니까?

첫째로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너무 빨리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빨리 해결해서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인간의 초조함과 답답함이 일을 오히려 그르쳐 버립니다.

엉망진창이 되면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빨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힘의 낭비요, 일을 더디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쥴리안 헉슬리라는 유명한 학자가 런던에서 열리는 학술 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기차가 연착되어 시간이 늦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마차에 타서 마부에게 부탁합니다. “이보시오. 내가 큰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시간이 늦었소. 빨리 달려가 주시요. 빨리!” 그래서 이 마부가 빨리 달리기 시작합니다. 한참 가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갑니다. “아니 마부 양반, 어디로 가는 것이요?” 그가 깜짝 놀라 물었더니 마부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저보고 빨리만 달리라고 하셨지 어디로 가라는 말씀은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두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쁩니까?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그렇게 달리십니까?

이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내 삶을 어제와는 다른 삶으로 창조하기 위한 창조와 묵상의 시간이 당신의 삶속에 준비되어 있습니까?

서두르지 마십시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디서 좋은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고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가 다 우리에게 유익한 소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제안이 아무리 솔깃한 제안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경적인가를 검토한 흔적이 있습니까?

기도의 씨름이 있었습니까?

2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라.”라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유감입니까?

그가 귀 기울이지 않으므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교통하심이 있습니까?

음성을 들으십니까?

들려오는 복잡한 시끄러운 소리에만 귀를 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사람들의 소리, 심지어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부모, 친구, 형제, 자매, 선생님의 충고와 조언일 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전혀 유익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이가 던져준 최선의 충고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까?”

 

여러분! 시내 산에 올라갔던 모세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러 갔습니다.

곤란과 역경에 처한 민족의 앞 길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그는 시내 산을 올랐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동안 그의 형 아론은 산 아래에서 누구의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는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더 이상 기대할 이유가 무엇이냐?

아론이여, 금송아지를 우리의 신으로 세웁시다. 그래서 그의 지시를 받읍시다.”

이 백성들의 못난 소리, 유익하지 못한 충고에 귀를 기울인 아론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좌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홀로 시내 산 높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를 가지고 내려옵니다.

 

3. 응답이 지연될 때 선택해야 할 길

우리의 삶에 장애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삶의 궁지와 난처함에 빠질 때 어떻게 그 문제에 접근하시겠습니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먼저 환경을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내가 처한 이 어려운 환경, 나의 모습을 쳐다봅니다. 한심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상황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것이 환경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볼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두 번째 길은 먼저 하나님을 보고 환경을 보는 방법입니다.

주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 오르는 겁니다.

영광의 주님의 보좌를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는 겁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사건을 시작하기 전에, 하루의 모든 삶의 문제들과 씨름하기 전에 전능하신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니까?

그분의 보좌를 향해서 무릎을 꿇습니까?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그 다음에 환경을 봅니다. 보았더니 주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헤쳐 나갈 기회임이 보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갈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좌절과 방황과 낙심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먼저 기도하십시오.

약속의 응답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이 낙심과 절망의 환경 속에서 먼저 주님의 얼굴을 구했더니 보좌에서 들려오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더니 주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나는 이제 이 환경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이 막연한 상황 속에서, 이 낙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역사 하실지, 그 영광을 얼마나 놀랍게 드러내실지, 그 영광을 말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주님을 향해 당신을 시선을 드십시오,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정상일 때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내 곁에 계시는데, 그 분이 내 삶을 인도하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서두르지 마시고 그 분의 인도를 기다리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어두운 후에 빛이 있고,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이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습니다. 연약한 후에 강건하고 애통한 후에 위로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으며 씨 뿌린 후에 추수합니다.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고 십자가 후에 면류관과 숨 진후에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더딘 응답으로 인한 초조함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오직 당신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늘 기도하며 승리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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