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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내가 올라야 할 돌 무화과나무는?”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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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내가 올라야할 돌 무화과나무는?”

 

 

여리고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길르앗에서 유입되는 향유와 여러 상품에 통관세를 징수하여 유대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징수하는 곳이었지요.

그래서 모든 세리들이 경쟁적으로 근무하고 싶었던 곳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정해진 세법과 세율이 없이 로마의 할당량에 재량껏 세금을 부과하여 사리사욕을 챙겼습니다.

3:12-13에 어떤 세리가 세례요한에게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 묻는 질문에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고 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온갖 부정한 수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을 '허가낸 도둑'이라는 불렀고, 세리장이 받는 원성은 더 많았지요.

세리장이 누리는 ''는 동족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하여, 매국노, 배교자, 반역자라 낙인찍혀 죄인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5:30-32)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 그와 그 집안을 구원하시는 내용입니다.

가버나움에 근무했던 주님의 제자 마태도 능력이 있던 세리이었지만, 그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삭개오입니다.

그는 세무서장입니다.

그 직함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착복하였는지, 한 마디로 성경은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고난을 같이 하기보다는 불의와 타협해서라도 세상의 행복과 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욕망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름으로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에는 순수하다는 뜻이 있지만 그는 순수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이름과는 정반대의 부정한 욕심으로 자신의 인격과 운명을 더럽혔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 돈도 있었고 권세도 있었지만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습니다.

권력, 부요함,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며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대명사로 통했기에 아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며,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했습니다.

아무튼 자기 나름대로 기회를 보던 중 그에게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지요.

예수님이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합니다.

삭개오는 부자 관원처럼 예수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주님 앞에 나서서 죄인이라는 것도 밝힐 수 없는 신분입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 열망은 강했지요.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의 가는 길에 그는 장애물과 부딪칩니다.

본문에 삭개오의 키에 대한 언급이 아마도 그의 실제 키보다 그의 직업과 더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요.

군중은 아마도 삭개오가 행한 일 때문에 그의 길을 막고 바리케이트를 치려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한 시도는 방해를 받았습니다.

 

3절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되는 상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 요인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지요.

이미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 든 무리가 예수님을 가리고 있기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믿는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과 이기심으로 새롭게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여 예수님을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암시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키가 작은 점입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 미친다는 말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지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세리 출신인 마태를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레위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를 따라서 많은 세리와 창녀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레위와 죄인들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삭개오가 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아마 그를 지나쳐갔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에 관해서 분명히 뭔가 들었고, 그래서 직접 보고 싶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그 동기가 다양하였지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올 때 병을 고치든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많은 사람들에 비해서 가장 순수한 동기를 가졌지요.

예수님이 누구인가 알고자 나왔습니다.

그는 병 고치러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권세나 돈 때문에 나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어떤 명예를 얻으려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심이 있어 예수님을 알고자 했지만, 예수님을 보는 데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까치발을 뛰어도 볼 수 없고, 세리 장부를 놓고 올라가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키로 많은 무리에게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그는 궁리하던 중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 , 주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과 그리고 자신의 키가 작다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올랐습니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으로 주님의 길을 간파하였고 나무에 오름으로 그런 장애물을 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잘 보이는 곳을 차지하려고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갈망해서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갔습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겠다는 각오로 올랐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짐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애타게 찾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한번 만났다고 만족하지 마십시요.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거저 얻으면 감사한 줄을 모르지요.

때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주님을 만나기를 열망하여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뿌리치고 주님을 만나는 자리로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하필 삭개오는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을까요?

올라가기 쉬워서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서요?

놀랍게도 후자가 맞습니다.

돌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너무 떫어 먹을 수 없지만, 열매가 익을 때에 바늘로 작은 구멍을 내고 올리브기름을 바르면 먹을 수 있는 무화과가 됩니다.

그래서 인부들이 그 작업을 하려고 나무에 올라가 일하는 것에 삭개오가 편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삭개오는 티도 내지 않고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잎이 무성하니 사람들의 시선도 피할 수 있고요.

 

삭개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뵙기 위해 나무 위라도 개의치 않고 올라갑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체면과 위신을 생각했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체면과 위신을 버리고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은 자기의 핸디캡을 극복하고자한 시도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호기심으로 그랬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그를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느꼈을까요?

4절에 예수님을 보기 위해앞서 달려갔다라는 말처럼 그는 열성을 보여 줬고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이기에 그는 급히 나무에 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마음, 갈급한 마음으로 올랐습니다.

우리가 삭개오처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힘쓸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며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누구도 예수님이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아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만남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보고자 했던 예수님은 삭개오야, 삭개오야, 부르십니다.

이 때 삭개오가 받은 충격은 어떠했을까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부르실까?

예수님은 우리 개인 한사람 한사람을 잘 아시기에 이해하시고 찾아오십니다.

당신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당신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당신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당신의 삶의 슬픔을 이해하시고, 당신이 삶의 벽 앞에서 나갈 출구가 없어 쩔쩔매며 답답해하는 당신의 모습을 아시고 찾아오셔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아무개야 빨리 내려오너라, 속히 내려오너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겠다

예수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와 시선을 맞추고 그를 불러 내려오게 하여 그의 집에 초대되어 가는 것을 아무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예수님은 삭개오를 처음 보았지만 그의 이름을 아셨습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전지하신 능력으로 그를 보는 순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삭개오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고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결이라는 그의 이름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73억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나를 아시는 분. 내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 분이.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당신 곁에 조용히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죄인과는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멀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와 가까이 하는 사람까지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가 회개하고 새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거하심으로 그가 지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유하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를 의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머무르므로 그와 깊은 교제를 통해 그 집을 천국처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알고자 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직접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유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삭개오는 자신을 영접하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급히 돌 무화과나무에서 내려옵니다.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주님은 삭개오에게 회개하라, 청산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내려오라. 내가 너희 집에 유하겠다"는 말씀 앞에 삭개오는 너무 기쁘고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 자리에서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계속 추구하고 있었지요.

바로 만족감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많았지만 자신의 인생에 만족할 수 없어, 만족감을 얻기 위해 애썼지만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에 모신 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던 중 삭개오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찾고 있던 게 바로 이거였어!”

그는 예수님을 만나 각성의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애써 추구해온 것이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지요.

또한 자신에 관한 곤혹스러운 진실과 마주했습니다.

사실 그는 동포들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였고 그 사실에 대해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동포들은 그의 행동으로 더욱더 가난해졌고, 간신히 연명하던 소작농들은 그의 탐욕 때문에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되었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다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야이심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삶에 자신의 신앙고백이 반영되어야 완성됩니다.

 

그는 이 순간에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되어 예수님께 선뜻 고백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19:8)."

 

그는 깜짝 놀랄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삶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정했고 곧바로 행동에 옮깁니다.

 

당시 기부금은 수입의 20%라는 랍비의 규정이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와 출애굽기에 따르면 부당이득은 1/5를 더하여 상환해야 하고, 도둑질한 것은 4로 갚아야 한다는 규율이 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기부한다는 그의 자선금은 파격적이고, 네 배로 갚겠다는 불법 수익에 대하여서는 최대로 변상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남는 재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18:22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 관원이 하지 못한 숙제를 삭개오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온갖 욕과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자 뭇 사람들이 수근 대었잖아요?

여태껏 수근 대고 손가락질 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유대인, 자기나라의 종족들입니다.

그가 얼마나 원망의 대상이었는지 알만한 합니다.

그는 자책감과 소외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를 초청했다는 사실은 어두운 밤바다에서 헤매던 조난선이 구조선을 만난 것 이상이였습니다.

더욱이 남편을 잘 못 만나서, 아버지를 잘 못 만나서 죄인처럼 살았던 자녀와 아내, 그리고 그 집안에 모든 권속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주님을 만난 돌 무화과나무 위였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갖고 살아온 가치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지요.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외부자극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가치관일 것입니다.

삭개오의 경우 주님을 만나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이 재물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결심대로 실행하여 모든 재물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삭개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의 가치관은 재물이었는데 그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이런 삭개오의 행동이 여리고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하는 간증과 증거가 되었을까요?

 

그들은 좀 점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죄인, 그 세리장, 그 삭개오가 밖으로 나와 자기가 결심한 것들을 공포합니다.

그때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실상을 깨닫고 그 실상에 대해 모두에게 정직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삶의 모든 태도를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한 채 죄를 짓고 방황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각성과 정직으로 우리 삶이 완전히 변화될 때, 그 변화가 우리의 능력이나 결연한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변화된 제자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으로 인한 변화된 삶이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었던 사람을 살리신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곤 동족인 유대인들조차 꺼리는 자신의 집에 주님께서 하루 밤 유하신 것입니다.

그 만남에 제일 먼저 깨진 것이 자신의 자존심이며, 인생의 목적이며, 보상이며, 생명이라고 해도 될 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돈이 한 순간에 무참하게 가치 절하되었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에 정면으로 부딪힌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언제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대해 보셨나요?

정말 진실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드리지만, 언제 참회와 함께 진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바른 자세로 나가보셨나요?

또한 예배의 삶을 살고 있기는 한가요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에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종종 읽지요.

그런데 간혹 말씀을 내 입장에서 묵상하지는 않는가요?

하지만, 내편에서의 접근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느끼고, 찾고, 깨닫는 것은 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은 부딪히는 돌이십니다.

이제야 그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 돌에 부딪힌 사람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그 부딪힘이 있고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가치관이 일시에 바뀌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깨어짐으로 자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편에서도 좋지만, 주님 편에서의 접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을 통해 내가 감동받는 것도 좋지만, 말씀이 나를 감동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돌에 부딪힐 것이 아니라, 부딪히는 돌이 나를 부딪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으로, 성령으로, 감동으로 우리를 부딪쳐 주시길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출근길, 등교 길에, 시장가는 길에 보이는 나무마다 삭개오가 오른 돌무화과나무가 되어 그런 기도를 하는 당신이길 축복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얼마나 은혜스런 말씀입니까?

욕심과 증오와 부끄러움, 고통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는 그런 기쁨의 순간입니다.

또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고 회개가 열매 맺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아들을 영접하면서 잔치를 베풀던 그런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과거를 청산하며 회개한다는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용돈이 모자라서 돈을 구하려고 집에 온 것이 아닙니다.

머슴이 되어도 좋으니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삭개오는 돌 무화과나무에 달려 기어 올라가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삭개오는 겉모습을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만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려고 했고, 그는 예수님을 보기만을 원했습니다. 군중들이 방해가 되었고, 그래서 그는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직장에서, 혹은 시장에서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 키 작은 삭개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항상 우리 삶에는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군중들의 등을 보는 것에 지쳤다면, 올라갈 나무를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제일 만나고 싶은 분이 주님이 아니라면 그 시간들은 얼마나 헛된 시간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 만할 때 찾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변했다면 당신도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가는 인생이 되도록 날마다 변화시켜 주옵소서. 날마다 낮은 자의 마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죄인을 위하여 오는 주님처럼 연약한 저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에 힘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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