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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무엘상 3장 1 ~1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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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이번 주 본문은 매우 극적이고, 사실적이고, 생생한 세부적인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 어린 소년 사무엘은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던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살면서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의 보호 하에 있었다. 그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세 번 연속 듣고 세 번이나 침대에서 일어났다. 신비와 공포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서두에서 독자들은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부드러운 분위기도 느껴진다. 엘리 제사장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 기관의 사감과 같이 야비하고 성질이 고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친절했고, 좀 느리긴 했지만 사무엘에게 좋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반복적인 부름에서도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천둥이나, 불이나, 폭풍이 나오지 않고 “오즈의 마법사”나 “인디아나 존스: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에서와 같은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본문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본문의 내용을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다. 소년 예언자 사무엘은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 가문을 버리시겠다는 선언을 하고, 이것은 사무엘이 생애 후반에 <군주제 수립과 첫 번째 왕의 폐위와 관련하여 맡을 중요한 역할>의 전조가 된다. 사무엘은 성서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전환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이동식 법궤에서 고정된 성전으로; 사사의 시대에서 왕의 시대로; 알파에서 오메가로; 처음 일에서 마지막 일로.

 본문의 종교-정치적 의미는 후기 교부시대, 중세, 종교개혁, 근대 초기의 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 신의 명령과 권리 등의 주제에 관한 대결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본문에 주의를 기울였다. 특별한 부름을 받은 소년은 후에 군주제의 수립을 가능케 했지만, 그는 통치자에 대한 저항과 질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또 다른 주제는 사무엘서와 신명기역사 전체에 깔려있는 보상과 징벌의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매우 단순해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선행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다; 악행은 마땅한 징벌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욥기,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 등을 관통하는 신정론의 문제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셔서 잃은 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보이신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가문에 대해 내리는 심판의 예언을 포함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사건만을 서술한다. 이 이야기는 부름과 관련하여 대표적인 모델이 되는 이야기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 (특히 성직으로의 부름을 받을 때) 본문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소명의 이야기의 모델로서의 내용이 풍부하고 완전하여서, 이 이야기와 관련된 신학적인 논쟁은 많이 출현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첫째 되고, 높고, 힘 있는 자를 택하지 않으시고 작은 자를 택하신다. 하나님은 계속 참으시면서 꾸준하게 부르신다. 사무엘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응답은 계획되고, 계산된 직업선택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손해 볼 각오를 하고, 기꺼이 따르려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행위이다. 이 내용은 교회에서 직업, 소명, 안수 등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소명에 관해 주의할 점이 있다. 사무엘의 부름은 너무 특이하여서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 중재자가 없는 하나님과의 1:1의 직접적 만남) 그 내용을 오늘의 교회 상황에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교회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했었다. 반대로, 수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자신은 사무엘과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름 받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소명에 응답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직접적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전자의 부류는 종종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도, 그들이 응답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음으로 잃게 되는 영적 자원을 고려해본다면 교회에 큰 손해가 된다. 사무엘의 경우를 모든 소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바울-자신이 직접적인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여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은 교회를 많은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 묘사했다각 지체는 성령에 의해 부름 받아 몸 전체를 위해 다양한 은사를 행사한다예언자도 그 지체 중 하나이다공동체적 성격이 여기서 강조된다모두가 평등하고서로 세워주며자율적이고몸 전체를 위해 봉사한다성직의 소명에 관한 신학적 논의는 그것을 교회 내 지도력 역할 중 최고의 것으로 여겨왔다그러나 바울은 각 지체가 서로 조화하며 상호교정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사무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명의 전형적인 모델을 보여준다그러나 사무엘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일 수는 없다사무엘의 부름에 관한 이야기는 소명에 관한 논의의 결론 보다는 서론으로서 더 의미가 있다.

 

주석적 관점

 

사무엘상 3장의 역사적, 성서적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먼저 삼상 1-2장은 사무엘의 탄생에 관련한 특별한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고, 삼상 4:1에서부터 이어지는 부분은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와 그의 가족들의 멸망,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판관으로써 사무엘의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이 –신정체제로 여기던-카리스마적인 판관들에 의해 다스려지던 때에서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의한 군주정으로 이행되던 역사의 중심기였다. 4:1부터 이어지는 성서정과 바로 뒷부분의 상황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기는 구약성서에서 언급된 것 중 가장 큰 정치적이며 신학적인 위기의 하나이다. 사울왕을 세우기 위하여 사무엘의 판관역할은 결국 거부당하게 되지만(삼상8:4 후반), 사무엘은 그의 당대에 가장 중요한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계속했다. 사무엘은 "모세 이래 가장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베른하트 앤더슨(Bernhard Anderson)의 평가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사무엘상 앞 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주로 주전 1050-1020년의-실로가 망하고 사울왕이 세워지던 때의-사건들이지만, 이 기록이 실제로 쓰여진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토론주제였다. 어떤 고대의 탈무드 전통에서는 이 책이 사무엘 자신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확언하고 있다. 이 책의 이름은 원저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사무엘이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해 보인다.

획기적 저작인 ‘오경 전승의 역사’(A History of Pentateuchal Traditions)에서 독일 학자인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사무엘상과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하, 열왕기 상하서가 주전 550년 경 바빌론 포로기의 한 명의 역사학자(, 신명기‘ 사가, 종종 Dtr 또는 DtrH로 줄여서 부르는)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신명기 초고가 주전 7세기 말 요시아 왕대에 씌여졌다고 주장한다.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을 제외하고삼상 3:1-10에 등장하는 유일한 등장인물들이다연로한 부모의 아들로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드려져제사장 엘리의 지도하에 실로의 중앙성소에 있었다성서정과 이야기의 배경은 실로의 성막으로 엘리는 입구에서 자고 있었고사무엘은 성막 안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근처에서 자고 있었다동트기 전 새벽에 사무엘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고엘리라고 생각해서 대답했으나엘리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이런 일이 두 번 더 있은 후에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사무엘에게 다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말씀하십시오야훼 하나님당신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사무엘은 이 가르침을 따랐고 10절에서 야훼 하나님은 분명하게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고사무엘은 "듣거나또는 "순종하려는"(히브리어 솨마의향을 보인다이것은 모세(3:1-15)나 이사야(6:1-13), 그리고 예레미야(1:4-10)의 예언자를 부르시는 전형적인 이야기 내용과 비슷하지만엘리나 사무엘 둘 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 점이 특이하다사무엘이 어려서 분별력이 부족했고 "사무엘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친밀하게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못했다(7)."는 사실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엘리가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그의 연로한 나이의 문제 또는 1-2절에 강조되어 있었던 것 같이 그 때는 하나님이 말씀이나 환상을 거의 보여주시지 않았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10절까지만 읽게 된다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신다는 것은 알지만 메시지의 내용은 그 장의 남은 11절을 읽어야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장의 뒷 부분을 성서정과와 비교해가며 같이 읽거나 최소한 내용을 요약해보는 것이 좋다.

사무엘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놀랍게도 곧 있을 엘리와 엘리의 후손들이 엘리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아들들의 죄로 인하여 곧 망하게 된다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의 정신(ethos)은 강력하다. 그의 멘토에게 큰 존경심과 사랑을 갖고 있던 사무엘은 그가 받은 메시지를 알리기를 꺼린다. 엘리의 집요한 요구로 사무엘은 메시지를 말하고, 엘리는 명백하게 포기하며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장은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세워졌다는 것을 말하며 끝난다(15-21).

사무엘처럼 극적인 부르심을 경험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불의에 대해 인식하고 말할지 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사무엘의 경험에 대해 알 수 있다. 안전한 길을 찾아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는 유혹이 있다. 사무엘상과 다른 성서정과 본문들이 보여주는 것은 비록 메시지가 나쁜 소식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라는 부르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성경에는 에덴동산에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부터, 불타는 관목에서 모세를 부르신 야훼(YHWH)의 부르심, 성전에서 본 이사야의 비전, 예수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그를 기뻐하신다고 했던 음성에 이르기까지, 부르심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오늘의 이야기야말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매력적인 이야기 중 하나다. 누가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성모 마리아의 마그니피카트의 원형으로 사용한 것처럼, 실로의 성전에서 하나님이 밤중에 어린 사무엘을 찾아오신 이야기 또한 누가복음 2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우리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본다. 예수의 부모가 유월절 잔치에서 열두 살 된 예수를 잃어버리고서, 사흘 동안 미친 듯이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 사이에 앉아 있는 예수를 발견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누가는 예수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2:52)는 언급으로 이 짧은 막간극을 마치는 데 비해,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 기록된 사무엘서는 “어린 사무엘은 커 갈수록 주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삼상 2:26) 그리고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삼상 3:19)고 기록하고 있다. 부르심에 관한 좋은 이야기는 되풀이해서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우리 예배 인도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행한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1)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어딘가에 숨어서우리에게 신적인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게 아니기 때문에하나님을 우리 가운데로 부를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사실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이다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우리를 “사도로 부르시는”소명을 주어서혹은 우리가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어서 보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교회의 고전적인 기도문이 있다“주 하나님주님은 주님의 종들을아직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야하고알지 못하는 위험을 통과해야 하는끝이 보이지 않는 모험으로 부르셨습니다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오직 주님의 손만이 우리를 인도하고 주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도우실 때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는 믿음을 주옵소서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이것이 바로 사무엘의 기도였다.

하버드의 구약학자인 폴 핸슨은 사무엘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부른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예언자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2) 사무엘은 늙은 엘리의 지도 아래 제사장 훈련을 받은 것에 더하여,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군주제를 시작하고 사울과 다윗왕의 통치 아래 정치적으로 성육신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이야기의 산파 역할을 하는, 세 가지에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매력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이야기를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는 해설자의 경고로 시작한다. 우리가 머리를 끄덕이는 정도만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1b).” 아무도 지금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듣기로는 사무엘이라는 아이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는데(3), 그곳은 어린 소년이 잠을 자기에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무엘은 대답하고서, 연로한 제사장인 그의 멘토 엘리에게 달려갔다. 엘리는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잠에서 깨어야 했다. 엘리는 마침내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다(8b). 그래서 그 목소리가 네 번째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불렀을 때, 소년은 늙은 제사장이 가르쳐 준 대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의 정확한 내용을 지금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정도였다(11). 이 이야기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목회적인 이유로 연결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도록 초대되었다.

감사하는 어머니에 의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으로 훈련받고 있는 사무엘은 그날 밤에 특별한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신실한 예배공동체의 일부였다는 것을 주목하라하나님이 오셨을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주목하라하나님은 여러 번 부르실 만큼 충분히 참아주셨고사무엘이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알게 된 데에는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의 특별한 분별력이 필요했다이 이야기의 진정한 강조점은우리 마음에 바로 떠오르는 세 개의 찬송에서처럼듣기-우리가 “경청”이라고 부르는-에 있다생기 넘치는 탄자니아 사람들의 찬송가 “들어라하나님이 부르신다,” 경쾌한 하시딕 가락으로 부르는 “귀를 열라오 신실한 백성이여,” 그리고 프레드 프랫 그린의 “우리의 소명이 얼마나 분명한지요주님.” 그러나 그 후에 댄 슈트의 유명한 찬송가 “제가 여기 있습니다주님”의 후렴처럼신실한 대답을 하게 된다알버트 슈바이처마틴 루터 킹 2레이놀즈 프라이스가 부름 받은 이야기처럼 잘 알려지고 감탄할 만한 이야기는 되풀이해서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경청하라고 우리를 깨우쳐 준다.

 

설교적 관점

 

오늘 성서정과는 먼저 괄호 안에 있는 삼상 3 11-20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이 괄호는 우리들에게 익숙하고 놀라운 이야기의 절반을 접고 있다. 왜 그럴까? 먼저 10절에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끝내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설교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를 깊이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들을 수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도 역시 많이 말씀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1절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1)

  하지만 10절에서 성서정과본문이 끝나게 되면 11절에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재미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설교자는 소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괄호로 이 부분을 묶었을까? 이 이야기는 1절부터 20절까지를 하나로 해야 더 잘 이해가 된다. 그래야 빠지는 이야기도 없고 얻어지는게 풍성해진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가? 어떻게 그 부르심을 구별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요나같은 사람들은 짐을싸서 다른 길로 달아났고 우리 가운데도 요나처럼 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때로는 평생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맡긴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여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곧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 우리는 성직자나 평신도들 모두 “부르심을 알게 된 것” (sense of call)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많은 교회들은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사역에 부름을 받았으며 복음을 위해 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강조한다확실히 대부분의 성직자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낀다많은 교인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낀다성서에서 예언자들이 부름을 받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패턴을 보여주는 것 같다(비록 우리가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는 일이 사무엘처럼 극적이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지만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이 분명하고 또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보다 어떤 강렬함이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보다 열정적이고 긴급하고 또 항상 선택의 기로가 있다. 성서의 이야기는 이런 예언자적 부름을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묘사한다. 반면 우리는 매일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사역으로 부름을 받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직업선택의 형태를 띤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종종 수입, 편리함, 시설, 가능한 기회, 직업리스트, 이직 가능여부, 대학이나 신학교에 갈 수 있는지등이 주요요소로 작용한다.  

  이 본문을 20절까지 한 번에 읽고 설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성서에서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거기에는 힘든 직무가 뒤따르고 있다. 예언자들은 때로 나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고, 국경선에 집결한 군대나 또 침략을 준비하는 이방인 통치자를 만나야 한다. 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좇았던 왕들 그리고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도 상대해야 한다. 이러한 예언자적 직무에 대한 성서적 부름은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가진 성서본문은 가족 내 비극적 이야기 (엘리와 그 아들들)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게 되는 비참한 전쟁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약궤의 상실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가혹한 심판(엘리 가족), 전쟁, 상실이라는 험난한 상황에서 주어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많이 배운 자나 종교지도자들이 아닌, 이런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순진한 소년에게 말씀하신다. 늘 그러하듯 하나님께서는 예상치도 않았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바로 소년 예레미야, 농부 아모스, 사라와 룻, 어린 마리아, 어부, 세리, 죄인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님은 오늘날 문제가 있는 곳에서 한 예언자를 불러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여전히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준비를 한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절망적인 시대에 예언자들을 세우는데 이들은  예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부름을 받는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몇 사람의 이름을 알고있지만, 그 밖의 예언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름도 없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다.  

 사무엘은 성장한 후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일어날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사울을 기름붓고 다음에는 다윗에게 그렇게 하지만, 백성들에게 왕정이 지닌 위험한 요소들이 그들을 부자유하게 할 것을 경고한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나귀들을 끌어다가...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8:10-17). 진실로 이 말씀들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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