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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2장 1 ~2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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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성령강림절은 종종 교회의 생일이라고 불린다. 예수의 승천( 1:6-11) 후 오순절에 성령의 권능이 제자들과 세계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임했다. 그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2:4) 이것은 예수가 말한 약속, 즉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면, 그들이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1:8)의 성취로 여겨진다. 그들은 다른 여러 언어로 말했는데, 그것을 자기네 지방 말로 들었다.( 2:6)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모든 이, 즉 아들과 딸들, 젊은이와 늙은이, 심지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그들이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할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2:17-21)

  신학적으로, 교회는 성령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할 능력을 그들에게 줌으로( 1:8)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성령에 의해 탄생되었다. 성령은 성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자들을 불러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해 증언하게 하였다. 오순절은 사도행전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을 촉발시킨 빅뱅과 같은 사건이다.

  세상을 위한 영: 오순절의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는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하는 언어와 유사하다. (바람, , 충만, 생명의 숨 등;  1:2; 2:7)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창조나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이 세계에 충만하게 임한 하나님의 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러 나라와 언어가 언급됨으로 성령의 역사가 전 세계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에너지이다.( 5:5)

  또한, 오순절 사건은 예언서의 언어와도 연결된다. 이 사건은 마지막 날에 새하늘과 새땅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가리키는 사건이다. 메시아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 2:31-36) 온 세계에 가득한 성령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활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다가올 시대의 징표(사랑, 평화, 정의의 사역)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의 첫 열매들을 받은 자들이 소망 가운데 사는 것처럼, 피조세계도 미래 구원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8:23)

  교회를 위한 영: 오순절은 신학적으로 볼 때 교회를 위한 탄생시킨 사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어 모든 사람들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구원을 주도하신 하나님이 오순절 사건을 주도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신자들을 택하여 부르고,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도한다. 성령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의 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지에 관한 지침을 준다.

  랍비 전승에 의하면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한 소리를 통해 주어졌는데, 그 소리가 일곱 목소리로 나눠졌고, 다시 70개의 방언으로 나눠져서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자신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첫 보리 수확을 바친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 여겼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다. 따라서 지금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이다.

  모든 백성을 위한 영: 누가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드러나고 성취될 주님의 날의 도래를 예언한> 요엘과 관련시킨다. 메시아의 통치의 표지는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은 것이다. 성령은 예언, 환상, 꿈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렸다. 인류는 성령 강림을 통해 나이, , 사회적 지위 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오순절 사건을 언어가 혼동되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바벨탑 사건( 11:1-9)이 역전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을 요엘이 예언한 하나님의 영의 강림과 연관시켰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지금 탄생한 공동체는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영의 왕국에서는 모두가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을 체험할 것이고, 모두가 서로 새로운 교제를 경험할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성령의 은사가 인식되고 이런 새로운 교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곳이다. 하나님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내리겠다는 예언에 힘입어 우리는 큰 소망을 갖고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하여 다른 이들과 연합할 때 성령은 분명 우리 가운데 역사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문학적 맥락.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재현하면서 계속된다(24; 1:1-11). 그 후 누가의 사도시대에 대한 기록은 맛디아가 유다 대신 선택되었다는 보도로 시작하며 오순절 성령 강림을 전한다. 이 바람(프노에)과 불의 출현은 예수가 "성령(프뉴마)과 불의 세례"라고 말하던 세례요한의 예언의 성취이며,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1:4-5)이라고 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베드로의 군중연설(2:14-36) 후 그는 세례를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2:38)고 강력히 권고한다. 누가는 독특하게 격렬한 갈등으로 인한 고난과 죽음의 "세례"  받는 예수의 사역을 "땅에 불을 가져온다"(12:49-50)고 표현한다. 비유적으로 누가는 성령의 오심을 세례와 연결하고 또한 불의 이미지와 연결한다.

이런 누가의 문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오순절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1) 예언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극적인 성령의 강림으로 예수의 부활과 예수가 메시아로 임명된 것에 대한 증거가 된다(2:36). (2) 첫 번째 제자들이 경험한 형식상의 의미가 뒤이은 제자들의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3) 사도들의 교제 안에서 제자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특정한 형태로 분명히 나타난다(2:42-47). 이런 공동생활 속에서 그들은 설교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을 창조적으로 인내하면서 예수를 닮아가며, 증인이 될 힘을 얻는다(1:8).

본문분석. 본문은 성령이 오시는 장면을 첫째 모여있는 제자들(2:1-4)과 둘째 모여있는 군중들(2:5-21)의 두 가지 장면으로 표현한다. 제자들이 모여있는 때는 오순절 잔치 또는 오순절 주간으로 유월절 축제 이후 50일의 기간이었다. 오순절은 원래는 추수축제였지만 어느 순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성령이 바람과 불처럼 오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과 역사, 특히 창조, 출애굽 그리고 계약을 맺는 장면(예 창 1:2; 15:8; 18:7-15; 104:4;  19:18-19)과 유사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강력한 바람소리와 불의 혀 같은 모양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표현하는 예시이다.  한 장소에 모두 함께 모여있고, 바람이 집 전체를 감돌며, 모두가 성령 충만하고, 불같은 혀가 각 사람에게 따로따로 왔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임하는 것 등 제자들은 다른 여러가지 측면에서는 동일한 경험을 하지만 오히려 대조적으로 성령은 언어의 다양성을 살려낸다. 그렇게 함으로 성령은 다양한 문화적 양식을 통해 그들의 독특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자들의 연합된 공동체를 이끌어낸다.

제자들이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소리는 "하늘 아래 모든 나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이 모인다. 둘째 성전기의 유대교는 범세계적인 종교운동이었고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많은 다른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모였다. 유대 달력에서 세 가지 주요한 순례 축제(34:22-23;  16:1-17) 중 하나인 오순절에는 또한 여러나라에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던 때 였다. 놀라운 것은 계약 공동체가 인종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고-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로서 그들의 말을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들도 "오순절"을 경험했을 때 또한 계약 공동체에 속하게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알게해준다(10:44-48). 이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 다양함이 있지만 상호 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을 때 혼란스럽고 놀라워하면서도 술취한 것이라는 냉소적인 조롱도 일어났다.

이런 비난들에 대하여 베드로는 오래전 예언된 신탁의 성취로 일어난 것이라 설명한다. 예언자 요엘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느 한 때에 이 사회 안의 모든 계급들에게 바람과 불과 같이 나타나는 성령으로 능력을 주어 예언하게 할 것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받게 될 것이다( 2:28-32a). (1) 하나님이 여전히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2)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공통된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3) 이것을 여러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한다는 면에서 제자들은 모두 예언자가 되었다. 예수를 보내시고 일으키시는 것(2:22-24)도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2:11)이며 그 목적은 모든 이를 구원하는 것이다(2:21, 40).

결론 요약. 이 본문이 세례를 받는 이들을 위해 문학적 맥락에서 해석될 때는 이 구절은 성령을 최초로 경험한 첫 제자들의 관점에서 세례란 성령을 받는 사건을 재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다 더 자세하게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들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분별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가지며 이것을 말과 행동으로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예언자적 능력을 배양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가? 이런 능력을 개발하는 필수 요소는 말씀속에서 현재와 미래에도 분명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발견하려는 예언자적 접근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의 삶 속에서-새로운 창조, 억압에서의 해방, 함께 하는 삶 속에서의 복된 질서, 그리고 갈등 속에서의 창조적인 인내를 통하여-분명한 모범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이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지금도 일하시는 지를 구별할 수 있다.

 

 목회적 관점

 

성령강림절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대해 설교하는 것만큼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잔칫날은 기쁜 소식과 할렐루야에 익숙하지 않으며 교회 전통에 따른 세속적인 휴일도 없다. 아마도 그래서 더 잘 된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절의 초점은 교회라고 알려진 제자들의 공동체인 우리를 직접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복음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정체성과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이 기적적인 은사에 관한 사도행전의 말씀은 해마다 설교하기가 무척 힘들다. 어쨌든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 교회와 별로 닮지 않았다. 가장 충실한 기독교인조차도 때때로 교회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탄생의 유감스러운 껍데기이며, 천둥소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으며, 분열과 내분이 교회의 통일성과 생명력을 제거했다는 아픈 느낌을 표현한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는 문화의 세속화에 직면하여, 기독교적인 세상의 마지막에 있는 교회와 그 쇠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적 성장, 교회 갱신, 복음 전도와 같은 가장 고무적인 징후조차도 성령강림절에 폭발한 에너지에 비하면 시들한 것 같다. 성령강림절에 사용하는 장식들을 어떻게 불의 혀과 비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포르투갈어나 한국어처럼 낯선 언어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서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복음은 그러한 비교가 불필요하다. 성령강림절의 이야기는 교회가 어떤 일요일에나 그래야 한다는 기준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그리스도와 얼마나 불가분리한 곳인지를 전하려고 한다. 성령강림절은 교회가 정체성과 목적을 갖게 하는 전통을 지키도록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매년 성령강림절에, 우리는 교회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선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선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상기한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모든 세대의 교회에서 교회로 전해 온 메시지다.

성령강림절 이야기를 전해주는 목소리는 경이적인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권한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부인하던 제자 베드로조차도 대담한 설교자가 된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회개와 용서가 주어진다. 하늘이 열리고, 뭔가 새롭고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 누가-행전을 통해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침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세례( 3:16)와 그의 기적과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 23:45)과 같은 신의 현현은, 깨뜨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준다. 사도행전 2:2-3에서 제자들에게 임한 세찬 바람과 불의 혀는 이 일의 연속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하신 일은 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으로 부르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정체성과 권위, 그리고 선포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강조한다. 성령강림절에서 이러한 기독론적 초점은 본질적으로 교회론이며, 목사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다양한 측면에서 설교할 기회를 제공한다. 교회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차원은 보편성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암송할 때마다 이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성령은 땅 끝가지 복음을 선포하라고 교회를 주셨다. 성령강림절은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가 지역의 상황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체성은 모든 회중, 교파, 문화적 전통을 넘어선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성령강림절은 전 세계의 모든 신학, 문화, 생명의 다양성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찬양한다. 또한 그것은 북미 기독교인들에게 남반구 교회의 부상하는 생명력에 동참하라고 도전한다.

교회의 두 번째 차원은 지역 교회이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몇몇 지역 교회들, 특히 교인이 줄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들이나,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만큼 계속 성장하지 못해서 걱정하는 교회들이 스스로를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전체 교회의 사역과 예배에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교회 갱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사도행전은 성령 충만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선물이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사도행전은 또 그러한 변화가 결코 쉽거나 조화롭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성령은 교회들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며 변화의 한가운데에 계신다는 약속 안에서 살라고 도전한다.

마지막으로, 성령강림절은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 또한 교회에 대해 낙담하거나 환멸을 느끼거나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말한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는 개인들을 교회 공동체로 초청하셨다. 성령강림절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되게 하실 우리를 교회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교회의 정체성의 다양한 차원(지역, 지역, 개인)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본질적인 것이다. 아무도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예배라는 측면에서 성령강림절은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여 사순절과 성금요일과 부활절로 이어지는 사이클을 완성한다. 그것은 재에서 불로 상징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의 여정의 절정이다. 성령강림절은 복음을 단순하고 대담하게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셨고, 교회는 그것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령강림절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교인들에게 그 약속 안에서 살도록 도전하며, 교회의 전지구적인 증언을 세상에 알리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설교적 관점

 

  사도행전 2:1-21은 중요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목격한 경건한 유대인이 당황했던 것처럼  세심한 설교자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표적과 놀라운 일들”은 이제 세찬 바람, 불꽃같은 혀, 그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는 기적을 통해 놀라움과 의심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구약성경 예언자 요엘의 말씀에 근거한 베드로의 설교는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 (19)로 가득찬 성령충만의 비전과 꿈으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이 본문으로 회중들과 소통하려는 설교자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여기에는 이 사건이 보여주는 단순한 신비로움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신비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소비중심의 테크놀로지 사회에 살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오순절의 광경과 소리는 설교자와 회중들에게 거룩한 것에 대한 느낌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 강단으로부터 회중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들려지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설교는 신비로운 것을 갈급해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것을 다시 느끼게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움으로 이 본문에 기초하여 하는 설교는 재미를 추구하면서 영적으로 덜 성숙된 회중들을 진실하시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안내할 수 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의 놀라운 선물을 통하여 믿는 자들의 무리 속에 언제나 함께하심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예배 중에 어떤 수단을 써서 애써 감정을 고양시켜 “영” (spirit)을 만들어 내려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설교자는 회중들의 눈을 얼게 하여 믿는 자들에게 온전하게 임하는 성령의 놀라운 선물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 본문으로 할 수 있는 두 번째 접근은 오순절에 일어난 외국어로 말하고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언어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것처럼(고전 12-14) 알려지지 않은 언어가 아니다. 오순절 언어사건은 비록 이 일이 처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 간에 알아듣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본문은 중동 모든 지역(all parts of the Middle East)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들 지방의 고유언어로 들을 수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일은 오늘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적 장벽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각 개인의 독특한 언어로 들려진다는 것이다. 오순절은 성탄절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모양으로 모든 것을 감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문화적 다양성, 종교적 다원주의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과의 나눔을 원하신다. 보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통하여 성령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심지어는 분열된 회중이나 공동체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온전한 약속을 이루신다.    

  세 번째로 할 수 있는 오순절 설교는 베드로가 회중들을 위해 선포하고 있는 예언자 요엘의 꿈과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가는 베드로와 초대교회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구원이야기를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요엘의 예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상황 안에서 “주님의 날”에 이스라엘의 적대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임한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위해 담대한 예언의 영을 부어주셨다.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 중요한 점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취했던 사회적 평등성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42-47에 서술하는 이야기 속에서 더 분명하게 보여진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여자나 남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 때로 하나님은 큰 꿈을 꾸는 사람 즉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인간공동체 개혁에 대한 비전을 새롭게 하면서 그들의 삶과 말을 통하여 세계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평범한 신자들 즉 설교자 앞에 있는 강단 밑에서 앉아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기도 하신다. 그들도 역시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고 교회와 주변 공동체를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 (20)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오순절 주일에 설교자는 이러한 꿈이 성취될 수 있도록 회중들이 지닌 환상들이 무엇인지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순절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본문에 나타난 긴장으로 특히 21절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선포한 것을 믿은 유대인들과 그것을 믿지않은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관계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문제를 평이하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면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반유대적으로 해석하는 가장 잘못된 신학적, 사회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열매가 사랑과 지혜인 성령의 은혜를 입은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복음의 “적대자들”로 규정할 수가 있다. 그러한 입장은 기독교 승리주의에 배어있다. 베드로는 유대인 형제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유대인 가족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예수를 거부했음을 강조한다(23). 그는 이스라엘의 저주가 아닌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이다” (21)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심판에 관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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