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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창세기 3장 8 ~1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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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 본문을 모든 것의 기원을 다루는 더 큰 단위의 이야기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했다. 더 큰 단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내용과 그 목적에 관한 사항을 다루고 있다. 만물이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할 때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물의 지금의 상태를 살펴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의 본문은 창조와 죄와 구원과 종말론에 관한 기독교 가르침을 형성하는 데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교리가 형성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낙원의 삶, 원죄, 타락, 자유의지와 예정, 전적 타락, 구원의 언약, 계약과 세대주의 신학. 본문이 어떤 내용을 암시하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왔다. 그 결과 Augustinianism, Pelagianism, Arminianism 외에 다양한 관점들 사이 다방면의 논쟁이 있어왔다.

  또한,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모든 시대에 걸쳐 시각예술, 문학, 고등문화와 하위문화적 풍자 등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신뢰성은 오늘의 모더니즘이나 포스터모더니즘의 풍토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성에 대한 이해와 성평등에 관해서도 오늘 본문은 많은 난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확인한 후 독자/설교자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을 배우고, 설교하고 가르칠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본질에 관해 어떤 결단을 해야 하는가이다.

  초대 기독교는 창세기 본문에 관해 몇 가지 접근을 시도했다. 중요한 접근 방식의 하나는 바울의 "유형학 해석학(typological hermeneutics)"의 모델을 따르는 성찰로서, 아담 때문에 생긴 일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일을 대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 방식은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것으로, 예수가 다윗의 가문에서, 그리고 그를 넘어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을 족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방식은 적대적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방식인데, 여기서는 죄의 기원을 <하나님의 강요나, 부주의, 무능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선택에 둠으로, 창조와 창조주의 본질적 선을 강조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 세 가지 신학적 관심은 기독교 교리가 확립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동했다. 본문의 어느 부분이 강조되는가에 따라 각 진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매우 비중 있는 해석의 전통 중 하나는 15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상처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 승리자이고, 뱀은 유혹하는 자, 죄의 주동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런 해석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그 이후의 역사비평학을 비롯한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따라서, 이런 해석을 반대하는 관점에서 본문을 읽거나 설교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학의 최종적 토대는 기독교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인간의 상태가 "아담"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 "창조" "새로운 창조" 상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이런 대조되는 용어와 묘사가 하나님의 기쁜 복음을 알기 쉽고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타락 이전 에덴의 낙원에서 누렸던 인간의 무죄성(innocence)으로 복귀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상태로 (인간의 시행착오의 경험과 모든 피조물의 화해를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에 의해 열려진) 발전하는 것이냐에 관하여 한 고전적인 논쟁이 있었다.

  똑같이 고전적이지만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민감하게 다뤄지는 질문은 인간의 죄성더 구체적으로는 죄죄지음죄악성(sin, sinning, sinfulness)의 복합적 역동성-에 관한 것이다하나님의 심문저주그 이후의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명백한 명령을 위반한 데 따른 것으로법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죄를 법적혹은 준-법적(quasi-legal) 위반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당연하게 여겨지는 매우 지배적인 해석이었다.

  또한, 현대적인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해석에 균형적 관점을 추가하는 새로운 해석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평소와 같이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시원한 저녁의 산책을 즐기신다.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이 하나님의 이미지는 성서에 나오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의 중요한 예이다. 이런 접근은 교리적 관심을 엄격한 법의 적용에서 인격적인 -I/Thou라고 할 수 있는- 관계로 돌린다. 죄란 근본적으로 규칙을 깨는 것인가, 신뢰와 사랑을 배신하는 것인가? 이 주제- 죄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깨어진 관계, 소외라는-는 바울에서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전통의 핵심이다. 이 입장은 수 세기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물론 반대를 받은 적도 있었고, 때로는 반문화적 소수의 견해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하나님과 인간 간의 "수직적 관계"의 단절은 아담, 이브, 뱀으로 연결되는 삼중 비난 게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수평적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뱀의 갑작스러운 웅변적 침묵을 포함하여 자유 의지를 가진 자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식에는 참회하거나 교정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았다. 여성신학자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이 본문에 이브(특정한 여자)를 비난하는 역사적 편견, 불의, 여성혐오증의 오류가 있다는 항의는 분명히 적절하다. 아담은 비난 전가 게임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비난함으로, 신정론의 문제를 제기했다.

  어떤 피조물도 죄가 없다 할 수 없다. 속임수와 자기기만을 낙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이미 앞서 하나님의 준-법적 명령이 범해졌을 때도 그랬었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죄와 죄성의 다양한 측면을 규명하기 위해서 더 깊고, 다차원적인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요구된다. 어쨌든, 신학적으로 볼 때, 비난 전가 게임 자체는 신-인과 인-인 간의 단절된 관계의 명확한 증거다.

  

주석적 관점

 본문의 배경은 창조 직후 에덴 동산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구절을 정확한 역사적 진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창조가 일어난 날짜를 주전 4004 10 23일로 계산한 17세기의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결론을 종종 따른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평가에 동의하며, 창세기의 앞부분 11개의 장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담지 않은 "전설"또는 "퇴색한 신화" 특징 지어져야 한다는  동의한다. "원역사(Primeval history)"  창세기 앞부분을 서술하는데 사용되는  다른 측면이다. 신약 성서의 비유들이 진리를 가르치는데 적합한 도구인 것처럼, 창세기 3장이 역사적인 진술이 아니라는 주장은  본문이 종교적으로 지니는 중요한 가치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지난 100여년간모세가 성경의  다섯 권을 썼다는 관점은오경이 여러명의 저자를 가졌다는 연구 결과에 자리를 내주었다마틴 노트(Martin Noth) 분석에 따르면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 3:8-15절이 주전 950 경의  J(야웨스트전승에 속한다고 여긴다최근의 연구들은 보다  오래된 구전이나 기록된 전승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늦은 시기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J 전승의 저자는 언어유희를 즐기는데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매우 명확하지만영어 번역본에서는 조금 불투명하게 나타난다예를 들어 창세기 2 마지막 25절은 "그리고 남자와 그의 아내는   벌거벗었고(아루밈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끝난다다음 절인 창세기 3:1에서 뱀은 어떤 다른 동물보다 "명석"하거나 "교활"(아룸)하다고 기술되어 있다저자는 털이 없어서 동물 중에서 가장 벌거벗은 뱀이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음"(죄없음 또는 취약함) 이용하려는 교활한 면을 함축해서 보여주려 한다창세기 2:23에서 남자(이시) 지은 여자의 이름(이샤) J기자가 언어를 매우 흥미있게 사용했음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예이다.

남자와 여자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 하나님은 뱀에게 말씀하시며 "모든 동물과 피조물 중에 네가 저주(아룰) 받아"(3:14)라고 말씀하시면서 창세기 3:1 뱀이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교활(아룸)하다" 써있는 창세기 3:1 떠오르게 한다. 남자와 여자는 질책을 받았지만 그들은 뱀처럼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주후 2세기의 이레니우스 때부터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뱀의 저주를 원시복음 또는 "첫번째 메시야 언약"으로 해석해왔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뱀은 사탄이나 악마를 나타나고 여자의 ""(제라)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이해된다. 이런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제롬, 칼빈 그리고 많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인, 본문이 사탄이 아닌 진짜 뱀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여자의 씨는 미래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자손"(모든 인류) 대해 언급한다고 하는 입장을 따른다.

이런 견해는 히브리어에서 ""라는 단어가 다음 세대의 후손을 말하기 위해 사용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개인보다는 집합적인 후손들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본문이 고대의 병인학적(etiological) 전설로 무엇보다, 인간과  사이에 존재하는 적개심을 설명하는 것이라는데 공감한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익숙한 본문들처럼, 우리는 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없는 생각을 추론한다. 예를 들어 "아담" "이브" 이름들은 본문에 없다. 첫번째 남자는 단순이 "남자" 또는 "인간"으로 첫번째 여자는 "그의 여자" 또는 "그의 아내" 언급된다. 창세기 3:20까지는 그녀는 이름이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뱀은 후대 우화적(allegorical) 해석이 주장하듯 사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한 동물  하나로 확인된다. 고대 근동의 많은 곳에서 뱀은 다산, 지혜 그리고 불멸의 힘으로 숭배되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뱀이 위대한 가나안의 다산의 여신인 아세라의 동물적 상징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종교에 대한 반론을 발견할  있다.  

 본문을 본문의 배경 안에서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2:4b-3:7 그리고 창세기 3:16-24 선행되고  따라오는 구절들에 대해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고원(Gowan) 다른 학자들에 의해 언급된 바와 같이  본문은 "원형적(archetypal) 이야기"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일어난 일이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순수함을 잃고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해서 좀더 알게될 , 일어나는 인간과 동물(자연)세계로부터의 소외, 독립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두려움이 모두  본문에 담겨있다. 이렇게 볼때  본문이 예수가 우리의 소외의 경험들을 화해로 변화시키는  아담으로 이해되는 유형론적인 해석을 뒷받침 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목회적 관점

Sicut Deus-독사의 교활한 말, “너희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3:5b)- Dietrich Bonhoeffer에 따르면, 인간을 창조주의 말씀에 반역하는 타락(혹자는 “도약”이라고 하는)으로 이끄는 교활한 유혹, “종교적” 속임수다. 선과 악을 아는 “하나님처럼(라틴어로 sicut)” 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일, 심지어는 경건한 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경건한 뱀’은, 인류가 “단지” 모습만 하나님을 닮게 창조된 것에 불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죄로 오염시킨 책임자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왜 금지된 열매를 먹고 하나님을 “중간자”에서 완전히 배제해서 하나님 말씀이 없어도 선과 악을 알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초기 교회가 부활절 전야의 찬송가에서 felix culpa, 즉 “행운의(혹은 적어도 필요한) 실수”라고 노래한 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가져왔다는 것 아닌가?

구약학자 Samuel Terrien 이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話者)의 의도가 “인류의 종교적 상황을 보여주고”, “교만이라는 죄는 자기 합리화에 대한 욕망으로서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Terrien은 이 일의 목회적인 중요성에 대해, “예전적 행위와 도덕적 미덕은 인간이 시작한 구원을 위한 기술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은혜에 대한 겸손한 반응을 대신하는 도덕성의 사용은 궁극적으로 우상 숭배”라고 한다. 이 “고대 설화”는 원죄를 발생하게 한 행위에 관한 역사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지만 매일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신화”라고 결론짓는다. [Samuel Terrien, Till the Heart Sing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24-27.]

그러나 라틴어가 당신의 관용구가 아니고, “원죄의 교리”라고 불리게 된 복잡한 내용이 이 “엄청나게” 풍성한 텍스트를 설교하기 위한 당신의 선택이 아니라면[이에 대한 논쟁은 Elaine Pagel Adam, Eve and Serpent, New York : Random House, 1988)을 참조하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처음으로 직접 하신 말씀이 가진 목회적 함의를 고찰해 보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인류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흥미롭게도 질문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선포하신, 성육신하신 나사렛 예수의 방식이 될 것이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인류가 자기가 한 행동의 의미에서 도망쳐서 숨어 있으려는 헛된 시도를 드러낸다. 이것은 아담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순종적인 신뢰보다는 창조주를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관행의 핵심에 있는 전통인,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희비극이 되었다(10). 죄는 또 우리를 서로에게 소외시키고, 우리의 피조물다움을 수치심으로 표현한다.(11)

구약학자 브루지만 (Walter Brueggemann)은 이 이야기의 뱀을 창조의 첫 번째 신학자로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신학자는 하나님에 관한 신학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도록 인류를 설득한다. 이처럼 뱀의 이야기는 “신실함의 문제를 분석하고 객관화하려는 신학적 대화는 위험한 모험”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것은 걱정이라고 하는 목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산상수훈에서 걱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를 참조하면서 (마태복음 6:25~33), 브루지만은 창세기의 이 이야기가 “걱정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것에서, 그리고 그의 돌보심을 거절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뱀은 인류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이 있다고 믿게 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믿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Walter Brueggemann, Genesis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4748, 5455.]

예일대에서 문예 비평을 가르치는 블룸(Harold Bloom)은 이 이야기를 전혀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라 “‘불행하게 끝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통찰력 있게 보았다“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는 어린 아이가 되기 위해 심한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인류가 처음으로 불복종한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그것은 “실패가 아니라우리를 집에서어머니이시며 아버지이신 야훼가 저녁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면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 정원에서추방당하게 하는상처를 주는 불화”다“가족 로맨스”로 시작한 것이 “가족의 비극으로 변모했다.” [Harold Bloom, The Book of J (New York: Random House, 1990), 18586.]

창세기 3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진실을 말하자면, 앞선 세대의 입문서들에서 인용된 옛 말, “아담의 타락 안에서 우리 모두는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가 나쁘거나 악하지는 않더라도,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류에 대해 뭔가 잘못되었고, 뭔가 비틀려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DNA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의도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게다가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는 우리 자신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부터의 소외되면서 우리의 본질적이고 창조된 자아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느끼고, 우리끼리 서로를 소외시키는 행동을 한다. 더 나아가 라인홀드 니버가 현실주의 신학이라는 공공 신학의 기초를 만들었듯이, 우리가 옳은 행동을 하려고 하고, 우리의 의로움을 확실하게 할 때, 악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상대적 선과 상대적 악을 구별하려는 탐구는 타고난 인간의 욕구일 수 있지만, 선과 악을 알고 있다고 가장하는 것은 우리를 신성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바벨로, 하늘의 문으로 돌진하는 과도한 욕망으로 이끄는 우상 숭배 행위다.(현대 문화에서의 유비에 대해서는 Crash Babel과 같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영화를 참조하라.)

 

설교적 관점

 

주 하나님께서 동산을 걷는다면 그 소리는 어떤것일까?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사귀, 나뭇가지 걸리는 소리, 키가 큰 잔디를 건드리는 소리? 땅을 내딛는 신발소리 혹은 맨발?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쓰여진 언어 속의 하나님은 페이지에 갇힌 채로 침묵하고 있고 이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그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나님의 소리는 진짜로 무엇일까? 이 질문에 우리 교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때로 우리들이 질문을 던질 때 그 답을 얻을 수가 있다: 아기가 외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 (남성과 여성!), 천둥소리,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 어떤 사람의 할머니, 바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 놀랍고도 신화적인 이야기 속에서, 교활한 (악한 것은 아니고)뱀을 만난 뒤에 이 남녀는 이제 처음으로 그들의 창조주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중 대다수처럼 그렇게 행동한다: 그들은 숨는다. 사실 너무 잘 숨어서 이 하나님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급기야 그들을 부른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서 남자는 첫 번째로 심각한 몇가지 잘못을 범한다.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 숨었던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질문을 함으로써 숨은 장소를 드러낸다. 만일 조용히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상상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남자는 그들이 벗었음을 드러내게 되고 게다가 여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다. 물론 이 행동은 오늘날까지 모든 문제에 대해 그 여자가 하나님의 질문에 바르고 정직한 대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떠안게되는 뜻하지 않은 유익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뱀이 나를 속였고 나는 먹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하나님의 본질, 인간실존의 본질, 인간생명의 기원등에 관해 깊은 인식을 가능케하는 풍성하고도 매력적인 개념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지니고 있다. 교인들은 설교자가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하면 대체로 받아들인다. 이 본문에서 사람들은 어느 구절에서 그런 질문을 제기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본문의 모든 구절은 설교와 관련하여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이 본문을 두고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본문은 우리 신앙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라는 점이다. 단순하게 사람들을 이 이야기 세계로 초대하는 것만으로도 보다 심원한 인식, 놀라운 계시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이 본문은 성서적인 유머 -특히 히브리어 아룸(arum, 교활한)과 아롬 (arom, 벗은)을 이용한-의 대표적 예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이미 언급한 본질적인 질문이외에 하나님의 전지(omniscience)와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몰랐을까 또는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시험하고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뱀을 만나고 그 나무로부터 먹었던 일을 몰랐을까? 우리의 하나님 인식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만일 하나님이 창조때부터 모든 것을(우리에 관한 것을 포함) 알고있는 분이 아니라면 그 인식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여전히 변화가 없는가 아니면 우리 생각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는가? 분명히 이 본문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분이 아닌 여지가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설교를 통해 우리는 만일 그 여자가 나무로부터 열매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점에 연루되어 있고 오늘 본문 역시 그녀의 용기있는 행동 (또는 도전, 우리가 어떻게 규정하든간에)에서 비롯된 무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든 일들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인간은 온순하게 순종하면서 누군가의 동산에 영원히 갇힌 채로 복된 무지 속에서 남아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낙원이 아니다. 다름도, 반대도, 새로움도, 창의성도, 다양성도, 반항도 없기 때문이다.

 왜 인간들의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과도한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었는가? 이 곳은 하나님에게는 최초의 용서와 자비를 보여줄 멋진 자리는 아닌 것처럼 보였나? 이들을 시험하려고 그랬나? 진리에 이르기보다는 그런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한 뱀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서 남자는 여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단지 방관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예측불가능하고 신중하지 못해보인다. 여기서 얻어지는 신학적 교훈은 하나님을 고정화시켜 생각하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치료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설교자나 교인들에게 적합한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의 청중들이 모든 것의 최초에 대한 생각 즉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어왔고 많은 미지의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가등의 질문을 제기하게 하는 것도 좋다. 이 본문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이고 이 이야기가 지닌 깊이, 영향력, 그리고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어리석음 속에 가두는 것이다. 하나님과 뱀, 남자와 여자, 동산과 광야, 축복과 저주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실존을 보여주는 요소들이고 우리들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인식과 깨달음이라는 주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모든 시대에 걸쳐 회자되었던 이야기이고 신학적 만나이며 그 속에는 최초의 동산을 거닐었던 하나님의 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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