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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1 장 15 ~17, 21 ~ 26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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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사도행전 1장이 초대교회 지도력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데 많은 성서신학자들이 동의한다. 1-14절에 의하면 예수는 40일 동안 교회 지도력의 변화에 대해 제자들을 준비시키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에 관해 가르쳤다. 예수는 곧 그들을 떠나 승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은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때 겪게 될 급박한 상황에 대해 인지를 하게 돕고,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 그들의 스승이요 주였던 예수가 늘 그들과 함께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1:1526에는 예수의 승천 이후 교회가 지상에서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 사도들이 조직을 재정비하는 모습이 나온다. 예수는 그들의 지도력의 범위를 이렇게 규정했다: “너희는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 승천 이후 시기의 지도력의 개편을 위해서는 조직 개편, 구조조정과 같은 세속적인 작업이 따른다. 유다의 죽음으로 사도의 수가 1명 감소한 것에 관해 사도들은 두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베드로가 다락방에서 행한 설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 것처럼, 새로운 사도는 예수를 직접적으로 알던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새로운 사도는 이스라엘 12 지파에 속해 있어야 한다. 새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는 12 사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이루어진 메시아적 왕국의 출범을 알리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유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지위를 이용하여 유다의 자리를 메꿀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유다 대신 사도가 될 사람의 자격과 역할에 관해 성서를 근거로 설명한 후(21-22),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신도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물론 몇 가지 제한조건은 있었다. 12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동행했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포함한 다수의 여성도 예수와 동행했었다. 그러나 본문은 여성이 교회의 사도가 될 자격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후 120 신도들은 요셉과 맛디아 2인을 추천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특히 맛디아는 성서 다른 곳에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맛디아를 최종적으로 선택한 결정이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지도력에 관한 결정을 해야 할 때야말로 가장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이럴 때 기도함으로 교회는 앞으로 갈 방향을 정하는 데 교회를 초월한 분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맛디아가 이후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교회가 성령의 인도함을 더 기다렸어야 했나? 11 사도와 120 신도들은 다락방에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고, 공동체의 기도에 힘입어 새로운 지도자 베드로가 사도의 수를 12로 완성하기 위한 업무를 처리하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만일 그들이 결정을 미루고 좀 더 확실한 성령의 인도를 기다렸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Justo L. Gonzalez는 새로운 사도의 선출 과정을 통해 그들이 교회의 사명보다 구조 개혁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성령의 은사를 좀 더 기다리지 못한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을 향한 교회의 새로운 사명보다 교회 조직의 구조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성령의 권위를 제한했다. Gonzalez에 의하면 사도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을 뽑으려 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성령은 종종 이와 다른 방식으로 역사한다.

  성령의 인도로, 교회는 새로운 사명이 <전세계를 변화시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과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의 교회가 명심해야 할 교훈은 교회가 그 구조를 사명보다 중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서 생기는 모든 종류의 임직과 관련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누가 교회의 사명을 더 잘 수행할 것인가>보다는 <누가 이전까지 해온 방식으로 지속적인 관리를 잘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맛디아가 성경에서 다시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을 이용하지 말라. (Acts: The Gospel of the Spirit, Maryknoll, NY: Orbis Books, 2001, 31.) Gonzalez의 해석은 맛디아의 실종에 관한 너무 주관적인 해석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서에서 더는 언급되지 않는 다른 사도들도 있지만, 오늘 본문은 교회의 지도력은 성령의 인도함과 영감에 의존해야 함을 강도하고 있다.  

 

주석적 관점

 나사렛 예수와 관련한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논점 중 하나는 계승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왜 오직 예수만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로마에 대항한 죄로 처형되었는가?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확실히,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당국이 다른 제자들(심지어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에게조차)이나 예수의 다른 가족(그의 형제나 자매)를 주목했다고 말해주는 기록은 거의 없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부재에 관해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와 함께 십자가의 발치에 "사랑하는 제자"를 배치하여 작별 이야기(Farewell Discourses)를 그림으로써 공동체가 예수를 계승하는 장면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 공관복음서는 이 공동체가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는 장면에서 조금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기억하는, 좀 더 발전된 형태의 공동체를 볼 수 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승계 문제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제자나 가족들 중의 누군가가 메시아로 임명되어 예수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계(relationship)나 가계(descent) 또는 지명(appointment)을 통해 왕위를 이으려는 시도나 제안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우리는 사도행전 1:15-26에서 초대 교회가 열 두 사도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배반한 사도 유다를 대신하여 다른 이를 데려오려는 관심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누가의 기록을 보게 된다. 이 일은 꽤 급박하게,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 사이 10일 간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며 기도하던 예수 공동체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15에서 시작하지만,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그들이 머물던 곳 다락방으로 다시 모이는 바로 앞 절의 내용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누가는 가롯 유다가 빠져서 이제 열 한명인 이들을 각각 적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아직까지는 열 둘이라는 숫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세 번 언급된 누가 22장에서 두 번은 가롯 유다가 "열 둘 중의 하나"(3, 47)라고 기록하는 반면, 세 번째는 마태의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19:28에서 예수는 "나를 따르는 너희들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약속한다. 누가는 그의 이야기에서 유다의 배신 이후 이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가 "너희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30)고 적는다. 누가복음 24장의 부활 이야기는 열 한 명을 두 번 언급하면서(8, 33), 제자들이 "열 둘 중의 하나"가 예수를 배신했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기쁨을 잃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에 그들의 수를 하나하나 세진 않지만, 열 한명이라 불리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상실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형제들을 포함하여 몇몇 여인들과 함께" 전심으로 기도한다(1:14).

성서 정과 본문은 사도행전 1:15-17에서 시작하여 1:18-20을 제외하고, 1:21-26에서 끝난다. 앞 부분의 두 절은 120명 가까이 되는 수의 무리 앞에서 발언하는 베드로의 주도권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성령에 의해 유다의 행동이 예언되었다고("성경이 실현되어야 한다.") 전제한다. 여기서 "성경"은 아마도 1:20에 인용된 시편 68:26(70인역 기준이며, NRSV에서는 69:25이다.)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개정공동성서정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위원회가 18-19절의 유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내용을 (성서정과본문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것을 존중하더라도 본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하여 1:20을 넣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위원회는 회중들이 마태복음에서 유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는 내용(27:3-10)과 다른 내용으로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에 이 부분을 제외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제외된 부분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설교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성서 속에서 명확하게 모순되는 내용을 접하게 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유다의 죽음은 조화되도록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특히 유용한 예이다.

설교자들이 18-19절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것 외에도 20절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논점은 베드로의 주장(21절의 "이러하므로"로 시작하는) 중 나머지 뒷 부분에 대한 성서적 증거가 되는 두 번째 성서 인용(70인역 시편 109:8 "다른 이가 감독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이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성령에 의해 예언된 열 두 사도를 완전하게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하여야 한다")에 대해 주장하면서, 유다를 대신할 후보자는 요한의 세례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으로 부활을 증인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베드로의 제안과 기준은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이 기준에 적합했는데, 유스도라 불리는 요셉 바사바 그리고 맛디아 였다. 다시 한번 우리는 야고보와 다른 예수의 형제들은 분명히 이 자격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공동 기도를 드렸다고 보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오래된 성서적 관행인 제비를 뽑는데, 맛디아가 뽑혀서 그가 "열 한 사도에 더해졌다." 누가는 원래 열 둘에서 열 한명만 있는데 이후에는 언급되지도 않는 맛디아가 더해졌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담고 있다. 요약하면 베드로의 지도 아래 있는 공동체가 오순절 전 열 두 사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했을까? 훗날 일례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의 죽음(12:2)의 경우처럼 본래의 열 두 사도 중 다른 이들이 죽었을 때 이런 대체 의식이 반복되지 않았다. 열 두 사도의 의도적 복원은 오히려, 성령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정확히 열 둘을 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6절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것에 대해서 부활하신 주님에게 질문하는 장면은 예수의 제자들이 이미 이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목회적 관점 

 

휴식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모든 사람들이 발야구 경기를 위해 팀을 뽑으려는 두 명의 주장을 보고 줄을 서 있다. 각 주장은 가장 잘하는 선수부터 그 다음으로 잘 하는 선수를 차례로 자기 팀에 합류시킨다. 가능한 가장 강한 팀을 구성하기 위해 가장 강한 선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명의 후보 선수가 기다리는데 채울 자리는 하나뿐이다. 누가 선택될 것이고, 누가 벤치에서 지켜보게 될 것인가?

성인들의 세상에서 정치 시스템은 종종 발야구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적자생존"을 반영한다. 지도자를 뽑는 것은 가장 적합한 후보를 뽑는 행위가 될 것이지만, 그 과정은 불완전하다. 이상적인 것은 아이들이 언젠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꿈꿀 수 있는 세상이지만, 현실은 엄청난 양의 돈과 정치적 기구들에 의해 왜곡되고 끊임없는 타협으로 인하여 이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시스템에 참여한다.

교회 역시 지도자를 선발하기 위한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후보추천위원회와 후보들에 대한 자격 규정과 교인들의 투표에 이르기까지, 부름 받은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 고안되었다. 우리는 신중한 분별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후보자가 부르심에 대한 인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지역 사회에서도 그 부르심을 확인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신중하게 검토하고 민주적으로 선출한다”는 것은 많은 교회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학교 운동장의 발야구 팀이든, 국가의 선거든, 교회의 지도자를 청빙하는 것이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선택하거나 표현하곤 한다. 최고의 팀을 구성하고, 최고의 후보자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최고의 지도자를 찾기 위해 최선의 판단을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은 그렇지 않다. 제자들에게는 유다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열두 제자는 이제 열한 명뿐이었고, 승천하신 예수는 더 이상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120명 정도 되는 신자(15) 가운데 두 명이 베드로가 말한 기준(21-22)을 충족시켰다. 똑같이 자격을 갖춘 후보자 두 명 가운데 한 명만 선발될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대신하여 이미 선택하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24~25).

다음에 일어난 일은 계몽된 우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대체할 제자를 뽑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26). 그들은 동전을 뒤집거나, 빨대를 뽑거나 주사위를 던졌다. 승자는 행운에 의해 선택될 것이다. 이 결정이 너무 사소한 것이어서 우연에 맡겼던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떻게든 이 ‘도박’의 결과를 이끌어 가시는 것일까?

본문이 증언하는 것은 열한 명의 제자들과 전체 회중이 모두, 제비를 뽑는 이 간단한 과정이 실제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방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맛디아가 열두 번째 사도로 선정되었다. 성경에 그 선택이 옳지 않다고 암시하는 증거는 없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 맛디아에 대한 다른 언급은 없다.

사람들은 사도들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이 순간을 자세히 이야기한 후에 성경에서 맛디아에 관한 기록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그가 선택된 방식을 감안할 때,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에스더, 어부 야고보와 요한,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은 올스타들의 소명 이야기 가운데서 맛디아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특하게 부름받은 이 제자는 가상의 익명성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2위를 차지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은 그가 성취한 것이나 성취하지 못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지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역사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놀라운 인물이 되었다. 우리는 그가 맛디아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세례 받을 때부터 예수와 계속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 하나라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요셉/바사바/유스도가 제비뽑기에서 뽑히지 않았을 때 어떻게 느꼈을지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발야구 경기장에서 뽑히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두 아이 가운데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경기에 나가고 싶어 하지만, 팀에는 한 자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한사람이 마지막 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택되면, 다른 사람은 벤치에서 경기를 보면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고 있어야 한다. 바사바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을 선택받지 못한 사람만큼 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맛디아를 선택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원시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님이 그처럼 단순하게 결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분별력 있게 사용하는 방법들은 상황과 결과를 통제하려는 우리 자신의 욕구에 어느 정도까지 얽혀 있을까?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공동체가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기도는 우리의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이야기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중요한 기로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는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의 불확실성이라는 시련 속에서 제자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신실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날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같은 초점을 가지고 지탱할 수 있기를.

 

 설교적 관점

 

  주사위를 던져 제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 무언가 엉뚱한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누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결정하는데 눈을가리고 다트를 던져 결정하겠는가? 당신같으면 감독을 정하는데 제비뽑기를 하겠는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제자들이 유다를 대체하는 경우처럼 중요한 지도자를 정함에 있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자리에 지원한 두 후보자들이 아주 특별하고 또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날부터 하늘로 들려올라갈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한데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있었던 제자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해설자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맛디아는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 제자가 되었고 상대방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가는 정확하지 않다: 그의 이름은 바사바라고도 불리운 요셉이라고도 하고 또 유스도라고도 한다. 분명한 일은 우리는 이 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음 장에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를 함에 있어 열 한명과 함께 서서 한다. 이 말은 맛디아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뜻한다. 유스도는 어디에 있었는가? 아마 그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해설자가 그들 모두가(all of them)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모두” (all)라는 말이 맛디아를 포함한 열두제자만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스도는 그들이 제비를 뽑을 때 그들과 함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 방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한 몇몇 여성들과 함께 그들과 함께 있었다. 맛디아가 뽑힌 뒤에 본문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2:4)  

   우리는 이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고 실망하기 보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들에 대한 여러 증언자들로 인해 감사해야한다. 설교는 이 특별한 복음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한 보통사람들을 고마워하고 축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신앙여정에 있어 유스도는 누구인가?[유스도는 평범한 보통사람 신앙인을 의미-역자 주] 작은교회라면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자고 제안하거나 후에 기도시간에 그 이름을 하나씩 부를 수도 있다. 여성참정권이 허락되지 않던 때에 40년 이상을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던 여교사가 있다. 자신의 아내가 죽은 이후 예수께서 자신을 언제나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했던 우리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남자교인도 있다. 언제나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고 신학교 동문모임에도 할 말이 없다고 참가하지 않았던 어느 목회자도 있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해 앉아있는 각각의 교인들이 있다. 그 들중 몇 명은 거의 모두가 알고있는 알려진 지도자들이다. 이들외에 자신들을 지도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    

   평범한 신앙인들에 대해 가장 사려깊은 묘사는 리차드 리셔 (Richard Lischer)의 책 ‘알려진 비밀: 한 시골교회를 통해 본 영적 여행’ (Open Secrets: A Spiritual Journey through a Country Church)에 잘 나와있다. 이 책은 그가 교회당국으로부터 사역을 위임받았던 일리노이주 New Cana에 소재한 작은 시골교회에서 처음받았던 불편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결국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들 농부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물론 나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작은교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 고 하면서도 “하지만 나의 재능을 바로 보지못하고, 나와 계약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를 이런 시골에 묶어두려고 했던 교회당국자들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했다.1) 자신의 첫 설교에서 그는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하이데거, 까뮤 그리고 워커 퍼시 (Walker Percy)를 인용하였다. 리셔목사는 그 설교를 돌이켜 생각해보면서 자신이 교회에 앉아있는 평범한 신앙인들을 존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나는 작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는가? 우리 공동체에 있는 누구나 뇌성마비 환자인 한 어린 소녀가 어떻게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비가오기 전에 건초를 준비하듯 서로서로 그녀를 도왔다. 우리는 또 한 이웃이 농장을 잃고 슬퍼하고 있을 때 경매에 나온 그가 사용하던 장비를 구매하기를 거부했다. 농부인 우리들은 매년 4월에 들판으로 걸어가서 씨앗을 뿌리기 전에 축복하고 땅 위에 뿌린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주일 설교에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교회의 “표지” (signs)가 아니겠는가? 교인들의 바램이 무엇이었든간에 나는 늘 설교에서 이러한 일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실천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들을 [계시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2)

  놀랍게도 리셔(Lischer)는 이 책을 그가 New Cana에 있는 그 작은 교회를 떠난 지 25년도 더 지난 뒤에 썼다. 그가 그 교회에 있는 동안 그는 거기서 여러 차례 유스도 즉 그에게 거룩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가르쳐 주었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떠나던 마지막 날, 그는 교인들의 얼굴을 보았고 바로 거기서 예수를 보았다: “우리를 다른 그룹이나 공동체와 다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는 예수이다. 우리는 그의 모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보통의 세상은 무한한 존재를 품을 수 있다. 마지막 주일 내가 우리 교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을 때, 나는 이 신학적 명제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3)  

  유스도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졌지만 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는 어떤 기록도 없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둣이 예수 이야기를 전달했던 수 백명의 이름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유스도보다 덜 알려져있다.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 끝까지” ( 1:8)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외롭고 힘들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오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바로 그 자리[예루살렘, 유다, 땅 끝에]에 있는 사람들인데 왜냐하면 평범한 우리들이 예수에 관해 누군가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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