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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이사야 6장 1 ~ 8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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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환상은 깊은 신학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 의미는 여러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칼뱅은 이 본문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룬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불가해성, 삼위일체, 마땅한 예배의 본질, 예정과 영원한 형벌, 신약과 구약에서 교회의 권위.

  성서정과가 삼위일체 주일에 이사야 6 1-8의 본문을 택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께”라는 찬송은 스랍들이 삼중 영광의 존재인 하나님에게 삼중 찬양을 드린 것을 잘 반영한다.

  삼위일체.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가 성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해 왔는가를 설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이 교리의 성서적 근거는 중요하다. 성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로 나타나신다는> 고백의 기초가 된다. 이 교리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수많은 신학적 설명을 제시했으나 대부분은 성서나 교회의 신조와 맞지 않아서 거부되었다. 대부분의 설명은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의 필수 요건이라고 여기는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1) 하나님은 한 분이다. 즉 다신교나 이원론은 비성서적이다; (2)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서로 명확히 구별되는 삼위로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렇지만 이 삼위는 모두 똑같이 하나님이고, 이 삼위는 성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신다. 삼위로서의 하나님의 활동은 여전히 유일신 하나님의 활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은 나뉘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다. 하나님은 삼위의 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신비에 속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삼위일체를 하나님에 관한 믿음의 근본으로 채택했다.

 이사야의 환상 : 오래전부터 오늘 본문은 장래 삼위일체 교리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여겨졌었다. 물론 본문이 영원히 삼위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서의 다른 구절들(특히 신약성서)과 비교하며 살펴볼 때 본문은 교회가 점진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로 확정한 (특히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의 문서의 표현)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신약에는 이사야 6장에 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온다. 성서 해석자들은 <요한복음 12:39-41이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환상을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이사야에게 들린 음성이 성령의 음성이었다고 여긴다.( 28:25). 주님의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6:8)라는 질문과 창세기 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 나오는 1인칭 복수의 표현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학적 해석 : 칼뱅이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는 교훈적이다. 이사야 주석에서 그는 이 구절을 요 12:41에서처럼 그리스도와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절대적인 단정을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15;  14:9) 이사야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삼위 전체라고 볼 수 있다. 칼뱅은 초기 신학자들이 본문의 “거룩, 거룩, 거룩”(6:3)이라는 표현이 삼위일체와 관련 있다고 해석한 것을 알고 있다. 칼뱅은 스랍들의 찬양이 삼위이신 한 하나님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확실한 표현을 담은 구절들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칼뱅은 이사야 본문에 기초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단들이 이 언어에 관한 다른 설명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뱅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것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가 칼뱅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성서 본문(구약)과 기독교 교리(삼위일체)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주일에 이사야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본문을 이사야 자체나 이사야를 해석하는 신약의 신학적 배경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David Steinmetz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교회 신학의 역사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니케아 신조가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지만, 하나님이 니케아 종교회의 때 삼위가 되신 것이 아니다.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영원히 삼위이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이사야의 환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고 타당한 해석이다. 구약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는 교회의 믿음의 법칙(regular fidei, rule of faith)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설교는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찬송이 보여준 것처럼, 이사야서의 이미지들을 근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주로 담을 수도 있겠다. 설교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겠다. 이사야의 환상과 부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한 예이다. 이사야 본문이 삼위일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본문은 이사야의 부름과 그 후 계속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에 관해 증언한다.

 

 주석적 관점

문학적-수사학적 배경. 이사야 6장은 예언자가 유다에게 정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철저히 고통받게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임명받는 모습을 서술한다. 이 예언의 실현은 이사야 7-8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이사야가 그들의 이웃나라에 의해 나타나게된 위험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유다를 설득하지 못했다고 서술한다. 만약 그들이 과민하게 반응하면, 유다는 멀리에 있는 더 위험한 적들에 의해 파괴되는 길로 갈 것이다. 오직 소수의 남은 자들은 이 적들이 물러간 이후 새롭게 시작하게 될 것이다. 본문은 독자들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본문은 이사야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보며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패턴을 정의하면서, 독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진정한 계시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한다.

역사적 배경.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40년 경 이 환상을 보았다. 예언자로서의 부르심은 이것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예언자로서의 과정의 매우 초기 부분에 해당한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주전 742-735) 때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유다를 침입하기 시작했다(왕하 15:37). 시리아-에브라임의 위협은 요담의 아들 아하스(주전 735-715)가 다스리기 시작했을 주전 735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사야는 이 침략에 대항하도록 아하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아하스는 앗수르에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초강대국은 쳐들어와서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물리쳐 이웃나라들이 유다를 위협하지 못하게 했지만 또한 유다에게 불편한 동맹을 강요했다. 아하스의 후계자 히스기야(715-687/6)의 통치기간에 앗수르는 침략하여 유다의 대부분을 거의 점령했지만, 신기하게도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중 중단함으로 도시가 함락되지 않았다(왕하 18:13-19:27). 훗날 이 모든 일은 유다가 시리아-에브라임 위기의 진짜 위험한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고, 결국 앗수르인들에 의해서 소수의 남은 자들을 제외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 그려졌다. 야훼 하나님은 그 후 앗수르인들로부터 주도권(hegemony)을 가져오실 것이고 이로인해 남은 자들이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앗수르인들을 물러가도록 만든 사건들을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되짚어가며 해석하는 것은 훗날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편집자들에게 해석의 틀을 제공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말엽의 앗수르인들에 의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파괴된 유다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개입을 분석했다. 이것은 주전 6세기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비슷하게 파괴된 유다(36-55)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을 후대의 편집자들이 분석한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이사야 40:1-11에 유배생활에서의 귀환을 예언하도록 명령받는 부분은 이사야 6:1-13에 남은 자들이 유다가 황폐하게 되고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들을 견딘 후 회복이 가능하다고 예언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장면(1-4). 예루살렘의 왕실 성전은 하나님의 천국 보좌의 지상의 예시로 여겨졌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함께 만나는 축이 되는 지점이기에 이사야는 이 지점에서 위에 있는 왕좌를 볼 수 있다. 이사야는 희생 제물과 향을 태우는 연기와 예배하는 흥에 겨운 군중들의 소리 가운데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의 왕좌를 둘러싸고 있는 스랍들로 대표되는 천상의 존재들의 찬양을 반영한다(29:1-2, 9b-10).

이런 이미지는 세계 질서를 정의하는 권력구조를 암시한다. 왕좌와 "성전"(hkal)에서 쓰이는 왕실 언어들은 야훼 하나님의 대리자(2)로 다윗왕조에 의해 행사되는 정치적 권력을 암시한다. "만군의 야훼 하나님"으로 인한 "거룩함"과 모든 곳에 충만한 "영광"은 성소와 정결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제 권력을 보여준다. 남성의 성적 우월성은 스랍의 덮여있는 "" (드러난 또는) 덮여진 생식기(예 렘 13:22; 3:5; 28:33, 34, 42)와 관련된 용어인 하나님의 옷(slmh, NRSV에서는 "옷자락")으로 또한 완곡하게 암시되어 있다. 이런 집중된 권력구조는 처음엔 경이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행동(5-8).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이사야는 생명이 위험할만한 금기를 깼음을 알아차린다(참조 출33:20; 13:22). "부정한 입술" "할례받지 않은 입술"(6:12, 30), 말을 더듬는 (예 시12:2-4; 140:3, 9)것과 같이 정결법을 어긴 것에 대한 은유표현이다. 유다는 자신들의 상황의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의 죄가 있고 이사야도 그러므로 거룩한 분 앞에 설 수 없다. 정치적, 사제적, 그리고 성적 권력이 너무나 훌륭하여 유다는 그들의 구조가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허락하신 것처럼 말했다. 유다인으로써, 이사야는 이 거짓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그의 죄는 스랍에 의해 비유적으로 불태워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천상의 회의에 남아 있을 수 있고 -기꺼이 그가 대답하는- 사자(messenger)로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이 유다를 파괴당하도록 놓아두실 것이라는 것을 더욱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훗날에야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주시며 다스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구조와 지혜를 초월한다.

결론. 이사야의 환상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적용점이 있다. (1) 천상 회의의 신화적 이미지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단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판단은 함께 협력하며(collaborative) 진행된다. (2)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구조 안에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 구조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향한 더 큰 목적들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지는 계속 시험된다. (3) 하나님은 때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이라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그로 인해 고통을 받도록 놓아두신다. 이런 경우 숙고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자기 기만을 내려놓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천상 회의의 신화적 이미지는 삼위일체적 사고의 선례이다. 삼위일체의 개념을 그 뿌리와 밀접하게 연관하여 갖게 됨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적 개념이 지적 난제가 아니라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신과 인간이 만나는 신비라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목회적 관점

 

삼위일체주일에 설교하는 것은 도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내면의 신비한 역학을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청중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삼위일체주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본성의 다양한 국면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사야 6:1-8은 하나님의 철저한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는 그가 본 비전에서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인 만군의 주님과 마주치게 되는데, 하나님은 찬란한 영광으로 지극히 높이 들리셔서, 천사들조차도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하나님]의 영광 가득하다”라고 선포한다.

6장의 처음 여덟 절은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 가장 잘 알려 진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로 소환되어 주님께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에 둘러싸인 이사야는 자신과 그의 백성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지만, 지금 주님의 임재 안에 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다른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때가 아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화를 말할 때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여기에는 깊은 신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사야의 평정심을 심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중에도 이사야는 죄를 고백할 수 있고, 죄를 씻을 수 있으며, 정결한 마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만 그는 명확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이사야가 본 환상은 우리와 같은 땅 위의 독자들을 위한 것이며, 이 이야기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특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알려지며,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먼저, 이사야의 상황이 왜 중요한 지가 1절에서 언급된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비전을 받는다. 역대기하 26장에 따르면, 웃시야는 유다를 52년간 통치하며, 나라를 경제적 번영,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새로운 정점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웃시야는 자기가 지상의 왕이라는 것을 망각했다. 그는 성전의 거룩한 예배에 도전했다가 패배했다. 그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기는 했지만, 하나님께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교만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예언자들은 종종 거룩하신 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차별성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는다. 웃시야 왕에 관한 역사적 언급에서 하나님의 하늘 보좌로 갑자기 이동하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압도적인 힘으로 이사야를 강타한 것은 슬픈 깨달음이다. 우리는 죄인들이고, 죄인들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죄악으로 가득 찬 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더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고, 애통하면서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사야에게 용서받을 가능성을 열어 준 것도 바로 이런 깨달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개입에 접촉하고서 정결하게 되었다.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이 부르실 때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고백과 용서, 그리고 위임을 통한 이사야의 여정은 거룩하신 분에 대한 예배라는 맥락에서 발생한다. 이사야는 주님을 완전하게 그리고 신적인 타자로 묘사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한 예배와 영광과 찬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시다. 다른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보좌 아래서 비슷한 예언을 했고(왕상 22,  1장 이하,  4), 비슷한 주제를 공유한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 거기 예배가 있다. 하나님 찬양은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장소가 된다고 이해한다. 사실, 우리의 주일예배의 순서는 이사야가 주님 앞에서 했던 경험과 비슷하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해 모인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복음에 응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우리의 예배는 하늘 궁정에서처럼 중요하다. 우리 예배의 요소들, 곧 모임, 찬양, 고백, 기도, 듣기 그리고 응답은 모두 우리를 주장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셋째, 이사야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은 우리가 변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런 종류의 변화는 거의 항상 예배,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증언하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분별력 있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훈련을 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노력일 뿐만 아니라 예배 공동체의 공동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사야를 오늘의 본문으로 선택한 설교자들은 찬양, 고백, 말씀 듣기와 같은 우리 자신의 예배 패턴과 이사야의 비전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싶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찬송, 고백/용서, 말씀 듣기 그리고 말씀에 대한 응답. 찬송, 기도 그리고 연도 litany 는 이 움직임을 따르도록 선택될 것이다. 고백의 기도는 5절에 나오는 이사야의 애통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를 고백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사야가 유다의 정치적 오만, 영적 자랑, 경제적 불평등을 비난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용서에 대한 확신은 고백보다 더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그만큼 강력해야 한다. 스랍이 타고 있는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생생하고 강력한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 않고 예배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은 우리의 관심을 우리 자신을 넘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끄는 중보기도를 포함하게 한다. 이번 주일은 또 교인들에게 특정한 사역을 맡기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특정한 소명을 가진 사람들을 알아보기에 적절한 시간이 될 것이다.

 

 설교적 관점

 

  목회자들은 삼위일체주일에 마치 나침반이 북쪽을 향하듯 이 본문을 향하여 마음이 끌린다. 이 본문은 구약성서 내에서 전형적인 부름을 받는 이야기로 설교자는 여러 번 그것을 읽고 또 설교를 하더라도 그 속에서 늘 새롭게 우리의 소명에 대한 신비, 능력 그리고 순종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사야와 함께 그 성전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1) 보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있는 천사들을 보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이라 부르며 화답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로 인해 우리의 무릎이 문지방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제단 위의 연기를 맡으면서 우리는 힘없이 나아온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죄많은 백성가운데 있는 우리의 무익함을 고백한다. 우리의 죄가 깨끗해진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8) 놀라서 말을 더듬으면서 숯불을 입에 댄 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나님이 부르신다. 충분히 두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응답한다.  

  신앙인들은 자주 자신의 소명에 대해 의심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신자를 부르시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들으며 우리가 들은 것이 하나님의 소리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설교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이사야서에 나타난 소명의 거룩함에 관하여 설교자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그 설교는 (만일 신중하게 작성되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신자를 부르는가에 대한 이사야의 기록을 회중들이 듣고 보게 할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그리고 두려운) 현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죄에 대한 확인과 고백, 용서를 받아들임,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순종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름과 우리의 응답이 언제나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사야나 이후의 많은 사람들이- 즉 다메섹의 바울부터 정원에서의 어거스틴에 이르기까지-이와 비슷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회중 가운데 누군가 개별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다.  

  주석들은 이사야가 부름을 받은 배경은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 신학 그리고 소명은 예배로부터 시작된다. 예배 중 이사야가 부름을 받는 다는 이야기는 청중들이 기독교 예배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교가 자기역할을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설교를 단순히 예배 전 과정중 일부라고 이해하는 설교자는 설교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임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8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명령형으로 해석한다. 이본문이 삼위일체주일용으로(곧 성령강림절 후 첫째주일)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설교자는 기독교교리라는 렌즈를 통해 이 본문을 해석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아직 믿음에 대한 핵심적 교리가 형성되기 전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전통적인 유대교 상황에서 이사야가 부름을 받는 이야기가 지닌 풍성함이 단지 삼위일체라는 기독교교리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을 하는 시도 속에서 상실되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대한 다른 관점은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설교에 있어 걸림돌은 어떤 면으로 보면 디딤돌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해 설교할 때 특히 이사야 6장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될 때 설교를 듣는 회중들 중 몇몇은 배제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비롭게 만난 이사야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은 아니지만, 그들 자신의 종교적 체험 속에는 천둥치는 것과 같은 소리나 날개달린 메신저는 없었다. 쉽게 말하면 회중 가운데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만남을 촉구하기 보다는 설교를 통해 침묵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곧 이사야의 부름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침묵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한 분을 성찰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테일러 (Barbara Brown Taylor)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휴대폰 소리, 라디오 토크 쇼의 장황한 이야기, 전쟁으로 인한 폭발음, 정치집단의 싸우는 소리등이 있는데 설교는 이런 오늘날의 불협화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여 청중들에게 확신을 주는 역할을 한다. 설교를 통해 이런 방해자들을 규명하고 제거하게 될 때 많은 청중들은 침묵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깨닫고 새롭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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