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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에스겔 17장 22 ~ 24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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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다른 예언자들의 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소망>을 증언하는 기독교 신학의 흐름에 속한다.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컨텍스트를 관통하는 복합적이지만 생생한 이미지 덕분에 본문은 더 매력있게 다가온다. 넓은 컨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높이 솟아 오르는 독수리, 먼 거리를 이동하는 잔가지와 씨앗, 식물이 자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척박한 환경, 야생에서 온갖 새들의 도피처 역할을 하는 큰 백향목 그늘, 키 큰 나무가 낮아지고 작은 나무가 높아지고, 푸른 나무가 시들고, 마른 나무가 무성하게 되는 놀라운 역전.

  이 모든 표현들은  "비유(Allegory)" "수수께끼"(17:2)라고 명명된다. 비유의 의미는 <초강대국의 위협 속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고대 이스라엘 통치자들의 권력>과 연결되어 설명된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 비평적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어서, 우리는 신학적 숙고를 해야 한다. 우리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정치가들이 실패하고, 또 하나의 재앙이 쓰나미와 같이 몰려 올 때, 사람들은 - 신앙을 가진 우리도 포함해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나?  

  본문의 내용과 신학적인 동기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핵심적인 신학적 과제이다. 전통적으로 본문에 대한 두 가지 신학적 접근이 있었는데, 둘 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 해석은 너무 잘 알려진 것인데, 본문의 가장 중요한 의미만을 강조하여 본문을 다음과 같은 경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신다-혹은 행하실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수많은 개인, 단체, 운동이 본문에 기대어 자신들이 하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최근에는 본문의 생생한 내용은 무시하고, 유행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삶의 밝은 면을 보라" "내일은 또 해가 뜬다"라는 식의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로 해석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아졌다.

 진지한 신학자는 그런 말을 듣고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이게 단가?" 또는 "알맹이는 어디에 있나?" 그게 다가 아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외치는 예언의 절정에 해당한다. 인간에게 희망의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할 때뿐이다. 하나님은 높은 자(초강대국을 포함하여)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실 능력이 있고, 그렇게 행하실 의도를 갖고 계시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일찍부터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전통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피조계 전체와 모든 나라들에 관한 하나님의 보편적 주권의 의미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에스겔의 선포의 의미를 옛 상황에서 전이시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에 적용했다. 그 사례는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언으로부터 증명론"(proof-from-prophecy,약속과 성취와 유사), 유형론, 다양한 새대주의적 해석학, 정경해석학 등의 많은 이론으로 신학적 자료들에 접근하여 이룬 교리들은 신학 역사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콘스탄틴 시대 이후로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주권에 관한 믿음이 교회나 국가 지도자의 위상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일종의 낙수효과 논리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그리스도에게로, 그다음 지상의 통치자에게로 이전되었다.

  불행하게도 -매우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 주권의 논리에 대한 신학적 반론과 저항은, 성서적, 신학적 타당성 자체에 근거하기 보다는, 그 논리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을 비판하는 데 더 비중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몇몇 신학자들은 - 루터가 대표적인데- "예언으로부터 증명론"을 유지하지만, 영광의 신학을 뒤집어서 십자가의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Kierkegaard가 그리스도는 역설(paradox)이라고 강변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덴마크(더 나가 전 세계)의 위선적이고, 독선적이고, 자기정당화적인 기독교가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독교 평화주의와 비폭력 저항의 흐름에서도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현대 (혹은 후기 현대신학에서는 고대 세계에 기반하여 왕정체제와 같은 질서를 강조하는 예언자의 메시지는 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수많은 다양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약속과 인류의 미래에 관한 본문의 예언특별히 군주제의 상황에서 낮은 자가 높아지고 높은 자가 낮아진다는 예언-이 갖고 있는 효과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해방 신학-흑인여성혹은 세계 다양한 지역의-은 그 점을 매우 강조했다이 세상의 권력과 지배자가 정한 규범에 따른 "높음"과 "낮음"은 하나님의 최종적 뜻(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과 맞지 않는다.  

  20세기 중반의 비유에 관한 연구, 특히 "새로운 해석학" 학파는 이와 유사한 관심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비유를 분석하면서 <세상의 방식에 기반한 전통적이고 일상적인 예상과 기대>를 뒤집은 역전에 촛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예수의 겨자씨에 관한 비유는 에스겔의 메시지에대한 비()군주적 응답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거창한 형태로 - 독수리, 나라의 통치자들과 같이 탁월한, 그렇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이미지에 의존하는-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사람과 다르다. 그들은 이미 좌절된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믿음이 위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얽혀진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한편으로는 본문을 너무 영적으로 해석해서 아무 실제적 의미가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막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을 이 세계 내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데 이용하는 것을 막은 것이다. 또한, 도전되는 신학적 관점은 하나님의 나무 그늘의 보호를 받는 존재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이 나무는 한 종류의 조류가 아니고 "온갖 날짐승"의 안식처가 된다. 우리가 본문을 기독교 신학의 규범으로 여기든, 좌절된 세상적 희망을 넘어서는 종말론적 희망에 관한 메시지로 여기든 상관없이, 본문은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품을 넓게 펼쳤나 (교회적으로, 에큐메니칼적으로, 다종교적으로)에 대해 중요한 도전을 준다. 

 

주석적 관점

 

에스겔의 사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본문 자체에  기록되어있다. 에스겔 17 : 22-24 포함하여 모든 예언에 정확하게 기록  것은 아니지만 14번의 예언에는 에스겔이 주전 593 (1:1) 주전 571(29:17) 사이에 활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짜가 주어져있다.  때는 성서 역사에서 격동적이고 어두운 시기였다. 주전 598, 바벨론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에스겔과 같은 유다의 지도층 시민들을 데려갔다. 예언자로 부름 받은   후인 주전 587,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파괴 되었고, 마지막으로 기록된 예언은 주전 571, 바벨론 포로기의  년째로 기록되어있다.

에스겔 자신의 부분이 책에서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의 후기 추종자들에 의한 것은 어느 부분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학자들은 오랫동안 에스겔서가 주의깊게 구성되어 왔음을 주장해왔다에스겔서  번째 24개의  대부분은 유다를 비판하면서 예루살렘의 다가오는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리고 25-48 장에서 유다의 주변의 적들(25:1-32:32) 대한 고발의 형식으로포로기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환상(37), 다윗 왕조의 회복(34),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대규모 재건이라는 형식으로 구원의 예언들이 열거되며 분위기는 변화된다.

성서정과 본문인 에스겔 17:22-24 당대의 문학적 맥락에서 흥미있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민간전승의 형식과 은유적인 이미지를 채용하여 "이스라엘 " 임박한 포로생활과 "" 죽음을 기록한  장의   일곱 장들과 달리 22-24절은 여전히 은유적으로 다가오는 회복에 대해 말하면서 주제를 극적으로 변화시킨다. 문체, 언어, 그리고 신학적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1-21절과 22-24절이 서로 독립된 것이며 1-21절은 시드기야 통치의 후반부에, 22-24절은 포로기의 더욱 늦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주장한다.  구절들이 독립된 문학적 단위라 할지라도, 22-24절은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징벌과 뒤따라오는 회복이라는 성서 예언의 익숙한 방식을 따른다.

저명한 성서학자 발터 침머리(Walther Zimmerli) 다른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에스겔서에는 광범위한 종류의 문학적 양식과 장르가 채용되었다. 에스겔 17:2 독자에게 "이스라엘 " 대한 뒤의 이야기가  "비유" 또는 "우화"(mashal)형태의 수수께끼(chidah)라는 것을 미리 알려준다. 비유는 1-10절에 위치하고, 11-21절에는  해석이 뒤이어 나온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독수리들, 백향목들 그리고 인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포도나무들에 대한 언급은 기괴하지만, 식물이나 동물이 의인화된 특성을 가지는 것은 고대 근동의 우화에서 상당히 흔한 모티프(motif)들이다. 11-21절은   마리의 독수리들이 바빌론(독수리 #1) 이집트(독수리 #2) 나타내며, 하나님보다 이집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러간 불안해 하는 포도나무(시드기야) 하나님의 의해 뽑혀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유다의 왕은 하나님과 바빌론 양쪽의 계약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그는 새처럼 던져질 것이고 그의 군대는 학살되며 생존자들은 흩어질 것이다.

절의 본문에서 독수리들(바빌론과 이집트) 대한 언급은 없지만 대신 "우뚝 솟은 백향목" "가장 높은 가지"에서 " 어리고 부드러운 가지" 취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는 "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심으신 백향목 가지는 다윗 왕조의 재건을 나타낸다. "우뚝 솟은 "(22) "이스라엘의 높은 "(23) 드러나진 않지만, 성전과 왕궁의 터인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대한 언급이라고   있다.  미래에 대한 환상은 이사야 2:2-4에서 언급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무는  넓고 깊은 의미에서 시드기야라는 신임받지못한 계보가 아닌, 여호야긴을 통한 "진정한" 다윗 왕조의 회복을 분명히 말한다. 일반적인 거대한 백향목처럼 위엄있는 백향목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무를 심어서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고" 모든 종류의 새와 동물들에게 그림자와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무는 선사시대부터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종교적인 표상에 대한 우화적 이미지인 생명나무의 모습(2:9)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절은 인용된 구절의 절정부이다. "땅의 모든 나무들이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24). 여기 "땅의 모든 나무들" "땅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될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상징적인 어법이다.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알게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행위를 보는 것이다. 22-24절의 말씀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절망적인 포로기를 보내며, 미래가 매우 어두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낮은 나무를 높이시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겠다" 약속은 주전 6세기의 난민들과 21세기의 억압받는 이들 모두에게 희망의 소식이다. 마찬가지로 "높은 나무를 낮추시고" "푸른 나무를 말려버리시는" 약속은 고대와 현대의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부와 권력이 덧없는 것이라는 경고이다. 권력자들을 낮추시고 힘없는 자들을 높이시면서 궁극적으로 땅의 모든 족속들은 세계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목회적 관점

 

텔지버세이션 (Tergiversation)은 십자말풀이 중독자들이 대화 중에 사용할 기회를 찾거나, 내 오래된 친구인 Nels-그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지만 여전히 Scrabble(철자가 적힌 플라스틱 조각들로 글자 만들기를 하는 보드 게임의 하나)을 하면 나에게 이긴다-와 같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다. 이 단어 자체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인과 관계의 이탈”이나 “변절”, 혹은 “회피” 또는 “핑계”라는 의미다. 바빌론과 이집트, 그리고 유다의 왕 두어 명을 포함하는 우리의 본문이 언급하는 역사에 대한 해석학 및 신학적 설명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겠다. 대신에 이 세상에서 경쟁하는 주권들과 현실정치에 관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백향목 가지의 우화를 통해 목회적으로 살펴보자. 그것은 유다가 고질적으로 tergiversation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다.

예수께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헤롯당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재치있는 대답,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12:17)”는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는 에스겔의 우화를 떠올리셨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 17장의 마지막 구절들은 17장 전체의 긴 본문에 나오는 수수께끼 혹은 우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포괄적이고 초월적이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다른 모든 주권들을 포함한다는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겔은 동시대의 예레미야와 같이, 국민과 통치자들이 직면한 정치적 선택에 대해 중립적인 척 하지 않고, 그를 신임하는 사람들조차 반역으로 여겼던 바빌론과 이미 맺은 조약을 존중한다.

그의 시대 정치의 잔인함에 대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에스겔은 유다가 처한 정치적인 음모를 통해서, 또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새롭고 영원한 일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거기에서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메시아 예언을 약속하셨다. 그 결과, “들의 모든 나무가 내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오래된 약속( 12:3b)을 예언으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와 거의 동시대 예언자는 그것을 “이방의 빛”이라고 불렀다( 42:6b). 에스겔은 그가 예언한 메시아적 “가지”가 미래에 올 다윗과 같은 왕(예레미야 역시 비슷한 언어로 다윗을 “의로운 가지”[ 23:5]로 말하고,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과 “그 뿌리에서 자란 한 가지”라는 이미지를 그린다[ 11:1])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에스겔의 “가지”가 아름다운 백향목이 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적 성취를 이룬다는 예언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23절 하반절에 들어 있는 보편주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이다.” 이 말씀에서, 새들로 가득 찬 “생명의 나무”를 묘사한, 사랑스러운 양식의 나바호 인디언의 직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56:7b)라는, 귀환 이후 예언자의 잊지 못할 말씀을 예상하게 한다. 이 예언은  우리의 신앙 공동체들이 가진 수많은 완고한 배타주의를 향한 도전과 약속으로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Marty Haugen의 찬송가 “누구나 환영합니다”는 모두를 빠짐없이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나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나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마리아의 마그니피카트에서 되풀이 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정상적인 기대를 뒤엎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메시아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오래 된 실망스러운 견해 속에서 예수를 일하게 하실 것에서도 보듯이, 놀라게 하는 하나님이고, 예상을 뒤엎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문화”(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새로운 번역)의 전복적인 특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많이 불려지는 Rory Cooney의 찬송 “전환의 찬양”은 마리아의 혁명적인 자장가를 신선하고 활기찬 현대 언어로 표현한다.[William Sloane Coffin, Credo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53.]

에스겔의 예언은 우리 목사들이, 우리 국민과 국가가 우리 자신이 관여하고 있다고 여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황들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너무 열광적이지는 않게!) 인정하라고 격려한다. 아마 우리는, 에스겔 같은 사람들조차도, 이미 불안한 상황을 향해 불난 집에 부채질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수수께끼를 사용했던 것처럼(예레미야를 참조하라) 위로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요 교사였던 Fred Craddock은 목회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비유나 이야기를 능숙하게 사용했던 것처럼, “완곡하게” 선포하라고 조언한다. 혹은, 뒤엉켜있고 변절하는 우리의 정치 상황을 향해 유머와 비범한 재능의 경구로 성경의 말씀을 선포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언자적 설교의 모델로 생각하는 William Sloane Coffin의 예를 생각해 보자. 지옥은 너무 늦게 보이는 진리”라는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설교적 관점

 

에스겔 본문의 시작은 이러하다: 그 예언자는[에스겔] 포로로 끌려와 강가에 앉아있다. 하늘이 열리고 황홀한 환상이 펼쳐진다. 바람과 불이 보이고 4개의 얼굴과 4개의 날개를 가진 4개의 생물체가 있다. 그리고 바퀴 하나에 4개의 바퀴들이 있고 그 바퀴들은 크고 놀라운 눈들로 가득 차있다. 이것들은 영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인다.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 1:28) 에스겔은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얼굴을 조아리고,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성서이야기인지 아니면 헷세의 황야의 늑대(Hesse, Steppenwolf)에 나오는 장면인지 의아해하게 된다. 에스겔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았고 두루마리에 관한 또 다른 환상을 보고 영에 의해 들림을 받아 델아빕 (3:15)으로 가는데 그 곳에서 그는 다시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과 함께 얼이 나간 채 앉아있는다.  

  이들은 물론 주전 587-586에 예루살렘 멸망 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유배자들이다. 그들의 고난은 컸고 고난에 대한 질문도 많이 있었다. 에스겔서의 서두는 그의 백성들의 비참한 패배와 끝이없는 고통과 더불어 이 환상적인 비전과 영광에 대한 소식을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병렬로 배치한 이유는 특히 이스라엘의 패배가 그들 자신의 불신앙에 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셨다는 예언자의 설명에서 분명해진다. 힘든 시기에 거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온 직설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에스겔의 시대같은 어려운 시기를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미국인들은] 침략을 당하는 것에 대해, 강제로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 , 성전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의 근간을 성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이 중요했던 것처럼]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 전쟁으로 인한 포위, 굶주림, 세상 속에서의 죽음과 죽어가는 것들, 우리 문명사회의 종말등에 대해 알지못한다.  우리 중 대다수는 어느 지역을 지배하는 초법적인 권력에 의해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작고 무기력하게 되는 것, 피흘리고 지속적으로 매를 맞고 짓밟히고 침략을 당하고 정복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은 이런 것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꼐서 특별한 보호하심과 관심을 가지고 선택한 주목받지 못하는 아주 적은 민족,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성서 속에서 강력한 제국의 권력 하에 억압의 삶을 사는 민족이었다. 족장들, 이집트에서의 히브리 노예들, 광야에서 헤매이던 사람들, 가나안의 초기 정착자들 심지어 다윗과 솔로몬 왕조 하의 군주들도 당시 세계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보잘 것 없고 중요해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 모두 세계적인 제국들과 그들의 정복이야기에서 보았을 때 주변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 자신도 그의 시대를 기록했던 역사적인 자료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부유하고 힘이 막강한 땅에서[미국] 설교를 한다. 성서이야기를 적용시켜 우리를 표현한다면 우리는 적, 억압자 또는 그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포로들이 잡혀와 있는 제국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언자적 진리가 선포될 대상이다. 우리들은 에스겔의 백성들이 아니다. 서구 기독교는 제국이 주는 풍요함과 평안함 속에 적응하면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에스겔의 백성이라는 관점에 서서 설교하는 일은 어려운 과제이다. 예언자가 선포한 목적을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이기란 쉽지않다는 말이다.    

 패배와 포로생활이라는 배경 하에서 쓰여진 오늘의 본문은 얼마나 특별한 본문인가! 성서 어느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토록 부드럽게 묘사된 곳이 있을까? “내가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겠다.” 에스겔이 민족적인 재난을 상세히 열거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17:11-21)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직접적인 개입은 깊은 모욕과 절망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방식은 바벨론을 공격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만든 사람들을 쳐부술 많은 군대를 불러모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미지는 힘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고 가꾸는 하나님이다. “내가...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내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산 위에 심겠다.  

  17장은 두 마리 큰 독수리와 하나의 포도(썩고 메말라버리게 될)에 관한 수수께끼 [히브리어 추드, chud]와 은유 [또는 비유, 히브리어 마샬, mashal]로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심은 것은 번성할 것이다. 그것은 “가지를 낼 것이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새”를 위한 그늘을 만들 것이고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할 때 이 이미지가 나온다 ( 4:32). 하나님은 이렇게 심음으로서 널리 그리고 멀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될 것이다. (24) 이 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끝나고 있다.  

설교자는 이 아름다운 본문을 그 상황과 연관하여 보아야 한다하나님의 온유한 응답은 포로된 사람들에게 직접 들려졌다이 말씀들은 그들이 당하는 깊고 강력한 고통과 패배라는 아픔의 상황에 대한 응답이다세상의 권력이 엄청나고 궁극적인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예언자는 하나님이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부드럽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오늘날까지 세계사를 통하여 모든 강력한 권력들은 이런 부드러운 말씀으로 인해 내적으로 흔들리곤 한다.

  한편 우리 교인들은 기회와 폭력, 선과 악, 아름다움과 파괴라는 세상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백향목을 심어 언젠가 우리 모두가 그 가지의 그늘을 보게 될 것이라고 희망을 전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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