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4장 26 ~ 28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17.
728x90
반응형
SMALL

마 14:26-28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물 위를 걸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해질 무렵에 제자들과 군중들을 보내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밤 사경입니다. 그 사이의 많은 시간 동안 예수님은 해변가를 계속 걷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밤 사경에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계속 제자들을 추적하셨습니다. 풍랑을 만나고 있는 것을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갔지만 예수님은 해변가를 걸어가면서 제자들 쪽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에게 걸어가셨습니다. 산에서 순간적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제자들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추적하고 계십니다. 무서움과 고난과 패배 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추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세계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바람과 풍랑 때문에 물에 빠졌다고 한 걸 보면 이 바다가 격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이성으로, 경험으로,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성경기록이 잘못된 것입니까?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기에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해변가를 걸은 것인데 사람들이 환상 속에서 꼭 물위를 걸어온 것처럼 느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는 물가에 위치한 갈대 숲이나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물 위를 걸어오심은 실제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믿어야 합니다.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를 떠나 있었고, 베드로가 물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하나님은 그 이상의 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날았다고 해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정복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지난 번 마 8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께서 거센 바람을 뚫고 성난 파도를 발로 밟고 걸어오셨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민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질병이 있고, 아픔이 있고, 부딪쳐야 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머리에 이고 있느냐, 발 아래 깔고 있느냐’, 그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계속 이고 삽니다. 어떤 이는 자기의 문제 많은 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문제 보따리를 다 풀어놓았다가 끝나고 나갈 때 다시 싸 가지고 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피할 생각을 하지 맙시다. 문제를 발 밑에 두고 그것을 밟아 버려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내 머리에서부터 발 밑으로 내려 놓읍시다. 파도를 정복하신 예수님, 환경을 지배하신 예수님, 모든 문제를 지배하시고 정복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 모두 맡깁시다. 책임져 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오셨다는 것은 성도의 삶이 마치 물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신 것처럼 먼저 우리는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위를 걸어가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봉사와 구제를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찾아다니고 자기의 명예와 재산을 희생하면서 아무 이익도 없는 일에 열심히 하며, 아무도 칭찬해 주지 않아도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칭찬해 주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조건 없이, 이름 없이 할 때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살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물든 본능대로 살지 않고 놀라운 성령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6절에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지칠 대로 지치고 배고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물위를 걸어오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라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24절에 보면 “고난을 당하더라” 이는 원어의 뜻은 ‘고통을 받다’, ‘동요하다’라는 뜻으로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보고 괴로워한 상태를 묘사한 마8:29의 단어와 같은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하여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음을 말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들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막상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막상 주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기적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말세 지말의 시대입니다. 이 시간 주님이 오시다면 지친 모습으로 고통스럽게 맞이하시렵니까? 아니면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맞이하시렵니까?
IMF라는 현실 속에서 직장을 잃었다고, 봉급이 떨어졌다고, 상급학교에 진급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업마다 실패의 연속이라고 절망하지는 않는가요.
어둠 속에서, 고통 속에서, 괴로움 속에서 서있다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지는 안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상식적이고, 일상적이고,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틀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세상은 갈수록 살기 편한 세상, 안락과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 돈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돈이 많이 있어서, 권력과 명예가 있다고 주님이 찾아오심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27절에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였던 그 순간에 주님은 유령처럼 오셔서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이기십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역전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불을 내리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공포심과 두려움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고
이 ‘안심하라’의 원어의 뜻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 의 뜻으로 힘을 얻고 즐거워하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과 파도를 만나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물위로 걸어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실 때 쓰는 용어로 바로 ‘나’를 말합니다. 출3:14에서 모세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안심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친히 ‘나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 앞에서 만물의 근원이신 ‘내’가 있기에 너는 안심하라 십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고 너와 함께 하기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