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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4장 28 ~ 33절 믿음의 눈과 마음을 가지라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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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과 파도를 만나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8절에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실수가 많고, 인간적이고, 미성숙한 베드로의 모습에서 불 신앙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불 신앙에 빠진 베드로는 당황하고 두려워했기에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기적을 목격했다고 체험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 불치병을 고쳐 주시면 믿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믿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물위를 걸어오신 주님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주여, 당신이 주님이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기적이 보이고 믿음이 있기에 기적으로 해석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을 때 모든 기적은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없이 의심에 가득 차 있던 베드로를 보고 계셨던 주님은
29절에,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의심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에게 응답해 주시며 기회를 주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라 하셨나요?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를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음보다 더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둘째, 이런 실수를 통하여 참 믿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성숙하지 못한 믿음의 가지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랑과 결단이 있기에 주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격 없는 베드로, 믿음 없는 베드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영접하셨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베드로처럼 믿음이 불안하고 미성숙하고 허물이 많고 근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면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라”하시면서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미성숙은 성장하며, 불안은 완전으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굳은 사람입니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물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놀라움의 현장을 만들었고 그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최초로 물위를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물위를 걷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믿음’ 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습니다. 히 11:8절에 구약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 11:29절에 모세는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믿음으로 배에서 내려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니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물위로 발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밤이 맞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데로 던지라는 말씀에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다’라 하며 행동으로 옮길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말씀에 신뢰하면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은 동일하게 역사 하십니다. 내가 추측하고, 내가 생각하고,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울 때는 이룰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기에 순종했을 때 격동하는 파도의 물결을 걸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광풍의 갈릴리 바다를 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았고, 생각했고, 예수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환경을 떠나서 살수 없고 환경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볼 때 태산과 같은 세상의 염려와 걱정은 가장 작은 것으로, 아니 완전하게 없어집니다.
물위로 걸은 베드로의 심정은 엄청난 기쁨으로 어찌 할 줄 몰랐습니다. 놀랍고 감격스럽고 황홀했습니다. 이런 기쁨을 우리는 누려야 합니다. 이런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큰 감격의 기쁨을 주십니다.

많은 이들은 베드로의 물위로 걸은 기적보다는 물에 빠진 사건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을 아픔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래동화처럼 Happy ending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물에 빠졌고 주님은 구원의 손길을 펴서 생명을 보존시켜 주셨기에 실패의 베드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는 베드로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비정상입니다. 물에 빠진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위를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거두려면 실패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합니다.” 에디슨도 발명가 되기 위해서는 실패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 모두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성공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통해 아픔을 경험하고 내 자신을 보게 되며 알게 됩니다. 이럴 때 발전을 가져옵니다.
이제까지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았던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교활하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잘 압니다. 우리는 모두 물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가슴을 열고 형제를 껴안고 나를 내어 주기 시작하고, 손해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한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닌 주님이 하셨기에 남을 흉을 보고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남이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보다 못하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육신의 눈입니다. 성도는 사랑이 있습니다. 나의 기준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그 사람의 기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럴 때만이 주님의 진정한 구원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보다 베드로의 신앙적 용기와 열정을 더 높이 보아야 합니다.
컴퓨터는 사는 순간에 중고가 됩니다. 중고가 되는 것이 두렵다고 사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컴퓨터를 소유하지 못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가을이 되면 여집사님들은 된장과 고추장을 담급니다.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놓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벌레가 생깁니다. 이런 것이 생긴다고 고추장과 된장을 담그는 일을 주저하는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다고 나도 똑같은 전철을 밟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했기에 말씀에 거울삼아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주를 의지할 때 연어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헤음쳐 올라오는 것과 같이 무서운 파도와 폭풍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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