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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6장 13 ~ 16 예수님께 대한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은? 1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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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대한 나의 진정한 신앙고백은?(1)

마태복음 16:13-16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요한 순간의 장면입니다. 수난을 준비하실 무렵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아들로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나를 어떤 자로 보고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주님은 알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물으셨던 질문으로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사랑하던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의 물음에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고백만이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의 교회의 시작을 만듭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팔레스틴의 최북단 헬몬산 밑에 위치한 지방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구약에서는 “라이스”(삿18: 7, 29) 혹은 “단”이라 불렸으며 AD 20년경 로마가 헤롯 대왕에게 하사한 지역으로 목축신 ‘판(Pan)’ 신을 숭배하던 중심지로 ‘판’ 신의 명칭을 따서 4세기 이후에 ‘바네아스(Baneas)’라 불렀습니다. 그후 분봉왕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도시를 확장하여 이 도시를 ‘가이사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해안 지역의 ‘가이사랴’와 구별키 위해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케 된 것입니다.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전역을 적시는 수원지인 요단강으로 흘러나오는 3대 샘(이온, 단, 바네아스) 중의 하나로 일년 내내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물을 내는 샘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요단 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북행하셔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이사랴 빌립보는 페니키아와 수리아의 접경으로 변방 지역입니다. 변방 지역이다 보니 자연히 이방민족의 종교에 오염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또한 로마 황제 가이사와 분봉왕 빌립을 기념하는 의미의 지명을 갖는 신격화의 현장입니다. 그보다도 중요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던 지역이며 ‘판(Pan)’신의 신전이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혼잡하고 추잡함을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더럽고 타락한 장소로 가장 조건이 좋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을 데리고 찾아오셔서 바로 그곳에서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물음이 꼭 이 장소에서만 하셔야 되나요? 다른 장소에서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 장소에서 묻습니다. 가장 조건이 좋지 않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알고 싶었고 확인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마14:1절에 보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에 관한 사람들의 견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주저 없이 일반적인 대답으로 답변합니다.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를 들어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 중 하나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모두 영웅적이며 신화적인 이상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인물로 침례 요한 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그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과 비슷한 점이 많았기에 예수님을 침례 요한의 부활 체로 생각했습니다.(마14:2)
두 번째 인물은 엘리야 입니다. 그는 에녹과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이며(왕하2:11) ‘불의 사자’로 유대인의 심층저변에 자리 잡아 영향력을 주던 선지자로 메시야 출현이전에 나타날 인물로 믿었습니다(말4:5).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침례 요한을 말라기에 예언한 ‘엘리야’라 마11:4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행하시기에 엘리야라고 보았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예레미야 입니다. 임박한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눈물 흘렸던 예레미야의 모습은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던 예수님에게서 재현됨을(눅19:41) 보았기에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 선지자 중의 하나입니다. 신18:15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실 메시야와 관련하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시던 예수님과 병자들을 고침을 보며, 또한 많은 기적 행함을 보았기에 이 분 만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정치적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불의 메시지를 주는 사람으로, 기적을 베푸는 사람으로, 애통과 인간적인 눈물로, 애정을 가진 인격적이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던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들의 이해는 자신의 먹고 마실 것에만 치우친 자기 주관적인 삶에 기초를 두고있는 생각입니다. 이들의 고백은 불완전하고 부분적이었습니다. 진리를, 생명을 주시기 위해 3년 동안이나 기거할 처소도 없이 다니시던 주님을 올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소경과 같이 주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류의 메시아를 알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알고 믿었던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세상에 살면서 도덕적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존경받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선생은 아닙니까? 물질적인 축복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은가요?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지는 않은가요? 진정한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이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제는 좀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3년 동안이나 항상 나를 따라 다니는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물으십니다. 매일 기도하며 예배드리고 봉사하며 주를 따른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의 대답을 듣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진정한 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의 대답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몸으로만 따르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모두 원하십니다. 몸은 이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가정에, 자녀에게, 사업장이나 일터에 쏠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됩니다.

왜 좋은 조건과 좋은 분위기에서 물으셔도 되셨는데 무슨 연유로 우상의 소굴에 직접 데리고 와서 물으셨나요?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우상과 거짓 신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관심과 초점과 목표를 주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이방신상에 절하고 경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이라고 나의 마음과 뜻과 생각이 따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헛된 망상과 썩어질 것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치 말라하십니다.

그러면 주의 일은 어떤 것이고 세상일은 어떤 것입니까? 주의 일은 교회에 관련된 일이 주의 일 일까요? 주의 일이란 어디서든지 주님을 위한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일입니다. 전도를 하면서도 행동과 생각이 따로 놀고 있다면 이는 주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모두가 일치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교회 일이나 가정 일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함을 원치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고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나오는 고백이 진정한 우리의 속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이방인들이 섬기는 거짓 신들과는 어디서든지 구별이 됩니다.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든지, 말하든지 우리는 올바로 믿고 고백합시다.
단 3:18에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노니”라고 하냐나(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백은 어려운 핍박의 환경 속에서도, 죽음이 그들을 위협하는 환경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며 믿음을 지킨 진정한 신앙 고백 이였습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결단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의 결단이란 단독 자로써 하나님 앞에 서는 고독한 결단이라’ 말합니다. 참된 고백과 결단을 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16절)” 이 고백을 할 수 있던 베드로는 온전하게 주님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온전하게 믿었습니다. 온전하게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많은 무리들이 생각하던 한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은 깊은 심장 속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이 진정한 고백을 원하십니다. 듣고 싶어하십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아니 고백해야만 합니다.

청춘 남녀가 연애를 하는 중에는 남자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모양의 행동과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할 수 있으며 가능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고백합시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가슴으로 해야합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뜨거운 눈물이 나는 고백을 말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가증스런 고백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마음 중심에 우러나는 고백은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성화의 삶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요20:28) 고백하는 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자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자 죽음이 닥칠지라도 뒤돌아 서지 않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고백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결정됩니다. 순교자들은 순교의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의 질문은 모든 세상의 세속화되는 이 종말의 때에 성도의 신앙에 방향을 잡아주는 경종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모든 이에게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의 수단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계시의 은혜를 받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고백합시다. 주는 나의 주인이십니다. 영원한 나의 반석이시며 요새이시며 생명이 되십니다.

바네아스의 샘의 물줄기는 끊임없이 솟아나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온 전역을 적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우상의 소굴 속에서 주를 향한 베드로의 진정한 고백은 믿는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 되고 있으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게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주를 믿으며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를 향한 진정한 고백을 할 때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적시고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온 세상에 생명의 말씀을 전함으로 구원의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전역을 적실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주님은 진정한 고백을 하는 자를 세워 주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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