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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16장 1 ~ 8절 가야하는 이유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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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유대인 여인들에게 흔했던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살로메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도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는 여인은 악령에게 붙들려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써 그 악령들을 쫓아 내셨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후로 줄곧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선교를 도와 드렸습니다.
이들이 예수께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로 어떻게 예수님을 도와 드렸는지, 복음서들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썼던 저자들이 남자 제자들의 활동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인들의 이야기가 사라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 여인들이 드러나게 활동하기보다는 숨어서 예수님의 일을 도와 드렸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이 여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줄곧 따라 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손빠르게 그 일들을 맡아 처리하는,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실 때, 함께 따라 왔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두 독신이었다면 그 일은 쉬운 일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오기를 꺼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고 따랐는지를 반증해 줍니다. 그 여인들은, 비록 그 활동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열 두 제자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한 사랑과 존경으로 예수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충성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충성 경쟁을하던 남자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 앞에서 주님을 홀로 두고 도망갔지만, 이 세여인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수제자도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그 상황에서, 이 여인들은 끝까지 주님의 재판과 죽음과 매장 과정을 따라 가면서 지켜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도
끌려가는 주님의 십자가를 와락 품에 안고, "내 주님은 안돼!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외치는 담대함을 보여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한국 어머니들이, 자식이 형사들에 의해서 끌려 갈 때 형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내 아들은 안돼! 차라리 나를 끌고가!"라고 떼를 쓰는 것을 가끔 봅니다. 중요한 고비에서 여인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인들도 그러고 싶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워낙 로마 군사들의 기세가 등등하였기에, 만일에 그랬다가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너무 거셌기에, 그 여인들은 멀리서 지켜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남자 제자들처럼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예수께서 죽음 당하시는 모든 과정을 그리고 그분이 매장되는 모든 과정을 묵묵히, 눈물을 흘리며, 깨어지는 마음을 부여 잡고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 위에 그대로 매달려 있지 않게 된 것이 그래도 그 여인들의 위로였습니다. 당시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매장이 되지 않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형에 죽은 사람은 정식 매장을 해 줄만한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로마 정부는 시신의 매장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려 새에게 쪼이다가, 어느 정도 부패가 되어 스스로 허물어져 내리면, 그 자리에 그냥 버려 두고 흙으로 덮어 두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누가 그 자리에 와서 시신을 수습하려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들판에 버려져, 지나가는 승냥이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그 과정도 고통스럽거니와, 죽은 이후에 사람 대접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것을 보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길을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에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하룻밤을 추위에 떨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그렇다고 주님을 십자가에서 부패되도록 그대로 둘수도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왔을 것입니까?
다행히도, 하루가 지난 다음, 어떤 지체 높은 사람이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이 여인들이 놀라고 당황스러웠겠죠. '아니, 저 사람들이 주님을 죽인 것만으로 부족하여, 시신에까지 손을 대려 하는가?' 안절부절 못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의 하는 행동이 그런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마구 다루는 병사들을 책망하면서,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욕을 행하려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마음을 다시 가라앉히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 귀인과 병사들은 예수의 시신을 잘 묶어서 어느 곳을 갔습니다. 여인들이 멀리서 따라가 보니, 그들은 미리 준비된 어느 동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그 무덤에 고이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세 여인은 이 광경을 보고, 그제서야 집에 가서 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주님이 편히 무덤에 누우셨으니, 이제야 집에 가서 자신들도 발뻣고 잘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평안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갔습니다.

집에 돌아와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그 시신에 값비싼 향유를 바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최후의 예의였습니다. 여인들은, 그 귀인이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면서 향유를 바르지 않았음을 기억해 냈습니다. 주님을 지성으로 사랑하던 그 여인들에게는 그것이 또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주님을, 향유도 바르지 않고 매장을 하다니,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베다니에서 어느 여인이 이미 예수께 향유를 바른 것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야, 그것을 바르든 안 바르든, 그것이 죽은 사람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보내고 나면, 해 주지 못했던 아주 작은 일까지 생각이 나며 마음을 짓누르듯, 이 여인들은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지나는 대로 가서,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향유를 마련하는 데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그 향유들은 대부분 인도에서 수입을 하였기 때문에 값이 비쌌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산과 가족을 갈릴리에 두고 예루살렘에 와 있던 그 여인들이 그 향유를 마련하는 것은, 그것도 짧은 시간 안에 마련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 값비싼 향유를 마련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룻밤 만에 그것을 마련했습니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 강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만들면,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뚫고 그 일을 이루고 맙니다.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 이 여인들은 걸음을 재촉하여 예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덤에 가까이 이르자,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떠 올랐습니다. 준비한 향유를 바르려면 그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야 하는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 남정네들이 도와주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뵈려는 마음으로 급히 달려오는 바람에 그런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값비싸게 마련한 향유도 모두 무익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무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덤에 당도한 그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덤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여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뿔사, 누군가가 선생님의 시체를 훔쳐 갔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생각 때문에 그 여인들은 황급히 뛰어 무덤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 갔을 때, 더 놀라운 일이 그 여인들 앞에 벌어졌습니다.
누워 있어야 할 주님께서 앉아서 그 여인들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누워 있는 시체는 없고, 어떤 사람이 앉아서 그 여인들을 보고 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설사 그것이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 앞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기쁘기보다는 먼저 놀랍고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음성을 들어보니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으시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십시오.
실제로 그곳을 보니, 그 귀인이 병사들을 시켜 예수님의 시신을 싸맸던
세마포가 고이 개켜져 있었습니다. 말하는 그 사람을 보니, 예수님이 아닌 것 또한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의 표정이나 말의 느낌으로 보아, 속이려거나 위장하려는 기색이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 청년이 계속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확인을 하셨으면 가셔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부활하신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빨리 갈릴리로 가서 그분을 만나뵈라고 전해 주십시오.

여인들은 그 청년에게 떠밀리다시피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직도 사건의 전후좌우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들은 제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나도 놀랍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여인들은 한 동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인들은 마침내 그 동안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들을 되돌아 보면서, 그들이 무덤에서 보고 들을 일들을 하나씩 확인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개, 두려움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여인들도 무덤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는 두려웠으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되씹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해가 되었고, 그러한 이해는 두려움을 몰아 내었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가시고, 예수께서 이미 예언하신 대로 살아나신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에 이르자, 그 여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기쁨에 흥겨웠을 것이고, 그러한 기쁨은 그 여인들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가서, 빨리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자고 재촉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셨고, 이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믿음과 열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금 부활한
주님과 함께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고, 그 사역은 세계 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성공을 이룩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당시의 대부분의 종교들이 자취를 감춘 상황에서 왜 유독 기독교만 세계 종교로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따져 묻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명쾌하게 해명될 수 없는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놀라운 성공이 부활 이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시작함으로써 그 놀라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로 다시 불러 모았을까요? 왜 그분은 무덤에 그냥 앉아 있으면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 대신에, 그분은 갈릴리로 먼저 가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기다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갈릴리가 선교 활동을 시작했던 바로 그 지점이라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광야에서 세례 요한과 할동하시다가, 요한이 잡히시자, 갈릴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왜 갈릴리를 선택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만, 가장 쉽게 대답하자면, 그곳이 바로 그분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가장 잘 아는 곳, 당신의 삶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발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릴리는 또한 제자들이 부름을 받고 그들의 사역을 시작했던 곳입니다. 그렇지만 갈릴리에서 주님과 함께 사역을 하는 동안, 그들은 줄곧 실패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습과 전통을 깨뜨리는 '순수 진리'와 모든 장애를 거두어내는 '강한 능력'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루신 데 반하여,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능력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실패와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고개가 돌려지는, 다시는 가 보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곳으로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들이 실패했던 그 자리, 절망했던 그 자리,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던 그 자리로 다시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써 그들과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만드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억지로 갈릴리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변하자 그렇게도 암울하게 보였던 갈릴리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이제는 그 갈릴리를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갈릴리 뿐만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했고, 그들의 새출발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무덤으로 부르시지 않고, 저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오늘 부활의 새벽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인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 문을 나설 때, 여러분이 만일, '아, 나는 새벽 예배에 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경배했으니, 이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이 빈무덤의 이야기는,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우리에게, '너희의 갈릴리로 가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너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예배당 안에 가두어 두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을 박차고 나가셔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은,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예배당 안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우리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기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시체로서 만나지 말고, 박제가 되어 버린 예수를 만나지 말고, 우리가 살고 일하는 바로 그곳에서 살아계신 분으로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말입니다.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몸이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만일에 십자가에 예수님의 몸이 걸려 있으면, 우리는 예배당에 올 때마다 주님을 만나러 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은 그 십자가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뒤집으면, 예배당 밖에는 예수님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십자가 상에 예수의 시신을 걸어두지 않고 있는 우리 개신교의 전통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십자가 위에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그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십자가 위에 예수의 시신이 없습니까? 부활했기 때문이죠!
당연하죠! 그러면 부활하신 그 예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죠! 옳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셔서 우리와는 완전히 끊겨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셨다는 말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승천하기 이전까지 40일 동안만 제자들과 함께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본성으로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여전히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텅빈 십자가 상을 볼 때마다, '맞아,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그곳에 계셔!'라는 깨달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의 여인들처럼 그리고 제자들처럼 그곳을 가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예배당 안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특별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이 함께 모인 곳에 부활하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가 열심히 모이는 것이고, 모이기를 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로 알면 안 됩니다. 믿음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서로 위로하고 힘을 얻은 후,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갈릴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그분이 저 옛날에 시작하신 그 일을 계속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일 때마다 갈릴리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일하면서 또한 함께 모이기를
사모하고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모이고 흩어지는 이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갈릴리'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땅을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우리가 가장 잘 일할 수 있는 그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부활 이전의 제자들처럼, 부활한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을 잊고, 혼자서 일하고 애쓰면서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그냥 그곳에 머물러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잃은 영혼을 살리는 주님의 사역자로서 능력있게 일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낙심과 한숨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대개 이런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 아침에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어떤 도피적인 심정으로 이곳에 와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당에 함께 모일 때마다, 지속적으로 '너의 갈릴리로 가라. 그곳에서 너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만나라'고 말하는 어떤 청년을 만나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러분은 힘찬 발걸음으로 여러분의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와는 달리,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이 살고 있는 현장에서 만나셔서, 그분과 함께 그 동안 실패했던 그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도 제자들처럼 과거와는 전혀 다른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아침에 우리가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음성은 '갈릴리로 가라!'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에 순종하고 자신의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면,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사건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새출발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예수께 일어난 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나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2천년 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리 확고하게 믿은들, 그것이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아침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른 이유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이유에 대하여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살아있는 음성으로 들리거든, 여러분의 갈릴리로 재빠르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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