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이 본문은 하나님의 주도로 영적 리더십이 전환됨에 따라 예언자의 계보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한 시대가 끝나지만, 아직 다음 세대는 시작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계승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중간 시대에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등장한다: 시간의 흐름과 불변하는 영원의 대조, 무한한 영과 유한한 인간성의 관계, 미지와 불가사이에 대한 신앙적 대응의 성격.
첫째, 엘리야가 곧 떠나게 된다는 사실은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던진다. "예부터 도움 되시고"라는 찬송가에서 와츠(Isaac Watts)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 천지 만물 있기 전 주 먼저 계셨고, 온 세상 만물 변해도 주 변함없도다." 분명 하나님은 엘리야의 활동 기간에 현존하셨다.(왕하 1:1-16 참조) 미래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의 시간적 도구가 사라지고 있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배빗 (Natalie Babbitt)의 소설 턱 에버래스팅 (Tuck Everlasting)에 나오는 유한한 위니(Winnie)와 불멸의 제시(Jessie)의 만남만큼 부자연스럽다. 거침없이 흐르는 시간은 영원자와 유한자 사이의 지속적 관계를 방해하는 것 같다.
엘리야의 시대가 끝난다는 것은 놀랄 일도,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다. 1절은 그것을 담담하게 진술하고, 6절에서 두 번 재확인된다. 엘리야, 엘리사 및 모든 예언자들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 떠나간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과 계속 동행하실 것이냐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떠나는 순간에 슬픔과 불안감에 빠져 소리를 지른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11장에서 이것을 시간과 영원 사이의 신학적 긴장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시간도 피조된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에 묶여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 임재하시는 것은 신비한 진리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시간에 속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늘 본문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시간에 속한 것은 아닌 (in time but not of it) 하나님의 이러한 활동의 특별성에 관해 강조하고 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엘리야의 승천을 한 왕의 통치의 종결(1:17-18)과 다른 왕의 통치의 시작(3:1-3) 사이에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활동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측정하는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났음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이 사건이 일상적 달력 밖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엘리야가 요단강을 건너 왕의 통치 영역을 넘어갔다는 사실(8)을 통해 다시 암시된다. 하나님은 항상 최적의 시간에 오시지만, 어떤 시계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시간에 묶여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아주 작은 시간의 창, 즉 현재에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지나가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틈새에 끼어 있다. 오늘 본문은 고정된 과거와 무형의 미래 사이에서 실존적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지에 관한 답을 제시한다. 시대와 시대의 간격에 위치하여 미지의 것에 둘러싸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없는 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나?
오늘의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다. 본문은 하나님이 왜 엘리야를 떠내 보내는지, 왜 엘리사가 조용히 하라고 말했는지, 엘리야의 상징적 행동들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침묵한다. 엘리야는 자신의 영이 엘리사에게 전수될지 알지 못했다.(10) 그들은 하나의 길이 마쳐지는 것은 볼 수 있었지만, 새로운 길이 시작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침묵은 중간기에 필요한 또 다른 신실한 태도이다. 엘리사는 예언자들에게 그의 스승 엘리야가 떠나갈 것이라고 답은 했지만,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3,5) 말하며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말고 평정을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입을 열어 어리석은 말을 한 것에 반해, 엘리사는 조용히 하라고 답변을 했는데 (막 9:5~6), 이는 엘리야가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sheer silence)"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왕상 19:12)을 연상시킨다.
엘리사는 그 보상으로 시간과 무시간, 한계와 무한을 접목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곧 그는 하나님의 영이 계속 남아, 그에게 임함을 발견하게 된다.(왕하 2:4)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날까 염려한다. 그러나 영은 계속 머문다. 떠나야 하는 것은 엘리야나 우리다.
많은 주석가들이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서 주로 엘리야의 승천과 그 이후의 그의 삶에 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죽지 않고 승천하였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성경 속에서도 발견된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책도 그런 기대로 마무리를 한다.(말 4:5-6) 신약성서는 그의 영이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고, 변화산에서도 출현했다고 보고한다.(마 11:13-14) 엘리야의 승천은 역사 안에서 단절 없이 하나님의 영이 계속 임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출 17:1~15), 여호수아(수 3), 엘리야와 엘리사(왕하 2:14)가 물을 가를 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내려왔고, 예수의 변모 시에도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재확인되었다. 예수가 승천할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눅 24:49)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체험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약속받았다.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은 교차대구형식으로 배열된 더 큰 본문의 일부이다.
A.엘리야와 엘리사가 길갈을 떠나다(2:1-2)
B.벧엘의 엘리야와 엘리사(2:3-4)
D.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을 건너다.(2:7-8)
E.엘리야의 승천(2:9-12)
D1 엘리사가 요단을 다시 건너다.(2:13-18)
C1 여리고의 엘리사(2:19-22)
B1 벧엘의 엘리사(2:23-24)
A1 엘리사가 사마리아로 돌아가다.(2:25)
교차대구 형식의 이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바람을 타고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이 놀라운 사건을 진술하고 준비하기 위한 내용이다.
이 본문에 언급되는 도시들은 이야기 내용상 중요하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언급된 길갈이 여호수아 시대 땅의 점령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길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 길갈은 여리고의 동쪽 경계에 있었다(수4:19). 이 본문의 길갈은 벧엘의 북쪽 사마리아의 구릉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여진다(2절). 벧엘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많은 전통이 엮여있는 곳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후, 제단을 쌓은 곳이 여기이고(창12:8), 야곱이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보았던 곳(창28:11-19)이다. 사사기에서 이 지역은 중요한 성소였으며(삿20:18), 다윗왕조의 통치로부터 북쪽 지파가 탈퇴할 때 여로보암이 세운 두 중요한 예배 장소 중의 하나였다(왕상12:19). 이 본문 속 시대에는 예언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여리고는 요단 건너편에서 유다지파의 고지대(highland)로 진입하는 전략적인 진입로였다. 요단강과 근접해있고 넓은 평지로 되어있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기에 이상적인 교두보였다(수4:13).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파괴된 이후,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기까지 4 세기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그 때에 예언자들의 무리가 거기 살게 되었던 것이다(왕하 2:5). 예언자들이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에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그들이 엘리사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이 도시들은 이 본문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엘리야의 여정과,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에서 정식 후계자가 되기 위한 여정의 절차에서 중요한 기점이 된다. 여정의 각 단계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한다(2, 4, 6절). 매 순간에 엘리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당신이 살아있음을 두고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2, 4, 6절)” 맹세로 응답한다. 왜 엘리야가 그를 떠나려고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언자로서의 그의 길에 생길 장애물들을 잘 이겨낼 수 있는지 보기 위해 시험했던 것일까? 둘이 주고받는 이 대화는 단순한 반복의 의미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벧엘과 여리고의 예언자의 무리들은 엘리야에게 무엇이 일어나게 될지 아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똑같이 이 문제에 대해서 엘리사의 생각을 물었다. 각각의 무리들에게 엘리사는 똑같이 대답했다. “알고있다. 잠잠하여라(3, 5절).” 이 반복은 아마도 다가오는 사건에 대한 기대와 신비를 더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것이다.
요단강을 가르는 사건은 홍해를 건너가는 이스라엘을 생각나게 한다(참고 출14:15-22). 그의 전에 있었던 모세와 같이 엘리야는 물을 가르고 엘리사와 마른 땅을 건넌다(왕하 2:8). 모세는 그의 지위의 상징인 지팡이를 사용해서 기적을 행했고 엘리야는 말아올린 겉옷을 회초리처럼 사용했다. 이 겉옷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임명할 때 던져주던 바로 그 외투였다. 이 행동을 통하여 엘리야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보이게 된다. 이 일이 요단강 건너편 이스라엘 땅 밖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마치, 땅을 목격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던 모세를 새롭게 떠올리게 되어 흥미롭다.
이 본문에서는 엘리야가 “바람으로 하늘에 들려올려졌다.”는 진술은 두 번 나온다(1, 11절). 이 사건에 대한 진술은 단순히 사건이 일어난 것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불병거와 불말들이 나타났고 이 예언자들을 서로 떼어 놓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불은 엘리사가 모든 것을 보지 못하도록 했지만 그는 눈을 들어 마지막 시험을 맞이했다. 이 본문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바람에 의해 들어올려지는 것을 그가 보았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엘리사는 그의 멘토가 사라졌을 때 추모의 전통적인 행위로 그의 옷을 찢었다. 엘리야는 떠났고 엘리사는 예언자의 책임을 넘겨 받았다.
주요한 주제는 엘리야의 승천이지만 다른 주제들 또한 중요하다. 첫째는 예언자 승계의 문제이다. 엘리사는 예언자의 역할을 독자적으로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엘리야에 의해 선택된 존재라는 것이다. 비록 선택되었지만 그는 거절을 견뎌야 했고, 다른 이들(예언자들의 무리)의 요구에 저항해야 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대면하면서 그의 용기를 증명하는 행위를 해야 했다.
목회적 관점
오늘 본문이 산상변모주일 성서정과에 포함된 이유는 아주 간단해 보인다. 엘리야가 마가의 변모 이야기에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것을 말하지만, 엘리야보다 엘리사의 이야기다. 실제로 변화된 것은 엘리사다. 엘리사의 모습은 엘리야의 도제 역할을 거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위치로 옮겨진다. 사실, 엘리사의 변모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의 공동체로서 우리 자신의 변모를 설명하는 비유가 될 수 있다.
여행에 의한 변모. 지도에는 작게 표시된 장소가 있고, 굵게 표시된 곳이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정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 강을 건넌 뒤 진을 친 길갈과, 성지인 베델과, 이스라엘이 유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 이런 곳들이 신학적으로 지도에 굵게 표시된 곳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승천한 곳은, 그곳들 넘어, 요단강을 지나,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다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교인들과 함께 이 길을 탐구해보면, 변화사건이 잘 알려진 장소나 미리 정해진 시간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장소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알게 된다. 그 때 거기서, 삶이 장엄하고 충격적으로 멈춘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떠날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주었고, 그 때마다 엘리사는 거절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심과 스승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4,6절) 엘리야와 함께 이곳에서의 삶과 저 너머 세계 사이의 좁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 열망의 동기를 엘리사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의 스승에 대한 단순한 헌신일까? 아니면 엘리사가 끈질게게 지속적으로 계속 태그를 붙이는 “공유”를 추구하는 것일까?
공동체의 변화. 예언자들의 무리가 엘리사에게 두 번 말하였다. 두 번 모두 동일하게, 엘리야를 데려가실 것이라는 것이었고, 엘리사도 같은 말로 대답한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 예언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공유했고, 엘리사가 그것을 확인했다. 조용히 하라는 요구가 있었고, 여정은 계속되었으며, 그런 과정이 반복되었다. 주고받는 대화가 동일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사가 그것을 다른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새로운 장소로 달려가면서 다르게 듣지는 않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들의 대화는 교리문답의 리듬을 가졌다: 질문하고, 대답하고, 침묵; 질문하고, 대답하고, 침묵. 예배에서 이 리듬을 좀 더 분명히 보여 주면 어떻게 보일까? 우리가 한주 전의 우리는 아니지만, 주일마다 공동체로 신실하게 모인다.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인다; 믿음의 이야기들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다시 듣는다; 믿을 수 있고 진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진술한다; 우리의 믿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기도와 침묵 속에서 말씀 속에 우리를 잠기게 한다. 예배는 역경이 닥칠 때, 이 이야기들과 기도들과 약속들이 우리의 제2의 본성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고 준비하게 한다.
세 번째로, 엘리야가 승천할 때, 침묵은 절대적이다. 예언자들의 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언이 효력을 가질 정도의 거리에, 그러나 멀찍이 서 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이 공동체는 엘리사의 경험을 명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이름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는” 핵심 구성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명명은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떠나는 것을 직접 보아야 하고,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변화된다.
고독한 변화.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갑절로 받을 것을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받는 것은 엘리야가 지금까지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에게 충분해야 한다는 자각이다. 그는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 그가 받은 것은 슬픔이다. 엘리사가 옷을 두 조각으로 찢은 것을 본문은 꼼꼼하게 지적한다. 어쩌면 갑절을 표현하려는 행동은 아니었을까? 엘리사는 틀림없이, 앞으로 여러 가지 큰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의 겉옷은 슬픔을 표현한다. 그것은 사르밧의 과부를 목회하면서 슬퍼했던(왕상 17장) 사람을 멘토로 가진 사람을 위해 적절한 출발이다; 그 멘토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광야에서 홀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깊은 침묵의 소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왕상 19장).
위 아래가 뒤바뀐 하나님의 통치에서, 강함은 약함에서 오고, 영광은 절망에서 온다. 엘리야를 잃었다고 해서, 엘리사가 해야만 할 일을 단념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이 그가 하게 될 목회를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다음 부분에서는 변화된 엘리사가 땅으로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취할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강물을 치고, 강을 통과하고, 여행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멘토와 목자가 되도록 이끌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회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길을 갈 수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증거를 보도록 초청할 수는 있다.
설교적 관점
-횃불이 옮겨지는 것을 묘사하는 장면은 보통 조용히 진행된다.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게 예언자들간의 놀라운 친밀함을 보여주면서, 이스라엘의 대예언자인 엘리야의 겉옷을 받는 엘리사를 그리는 이 장면은 동시에 한 시대의 전환, 가슴아픈 이별 그리고 연속적인 지도력을 유지하는 것등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상세한 이야기는 많이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 간의 냉철한 대화는 주목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불말과 불병거로 엘리야의 떠남을 보여주는 장면이 인상적이기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관계적” 현상이 눈길을 끈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해 낙담하지만, 스승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그는 단념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 (double portion)을 요청한다. 그것은 그가 엘리야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명기 21:17을 보라). 엘리야는 그가 받는 분량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엘리사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사는 슬픔과 놀라움으로 그의 영적 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자신의 지위를 인정한 채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외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 관계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보게된다.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단지 비슷한 기적을 행하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엘리야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가는 것이고 [엘리야가 가졌던 것과]같은 짐을 지는 것이며 동일한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궁극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고독함과 함께함(solitariness and solidarity)라는 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 장면을 통하여 우리는 예언자에 대하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어도 예언자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세상과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는다거나 주님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예언자로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의 현실과 관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강력한 것은 아마 이 까닭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위대한 하나님의 구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던 것의 불일치를 목격함으로 인한 분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언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놓여있는 상황을 진실되게 말해줌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엮여있고 크게는 예언자 그룹과 그들의 가족들과 (왕하 4:1-7을 보라), 나아가 이스라엘과 심지어 이웃 나라들과 관계 속에 있었다.
-나아가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연약함을 느끼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사가 갑절이라는 “어려운 것” (a hard thing)을 요청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엘리야의 후계자 곧 영적 아들이 되길 요청했다. 엘리야는 그러한 요청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오히려 엘리사의 운명과 행운은 주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홀로 서는 일을 받아들이면서 엘리사는 드디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고 그의 스승이 떠나가는 장엄한 장면을 목격하고 번민에 찬 놀라움으로 울부짖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설교적 관점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설교자가 만나는 회중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연약하게 여기며 의존적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드는 첫 번째 생각은 이 질문이 회중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보다 신뢰하고 의존할 수 있도록 하는 처방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적합한 처방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회중들이 연약함, [인생의] 어려움, 갈등, 도전등을 경험하느냐를 물을 때, 그것들을 단지 회중들이 극복할 장애물로 여기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에 포인트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회중들은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설교자들도) 예언자들처럼 인생의 역경에 익숙해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현실을 하나님이 당신이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장으로 받아들이기를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강함 (strength)이라는 일반적 이해에 도전을 준다는 것이다. 즉 신앙에 있어서 강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모든 예언자들과 그리고 후에 “힘” (power)이 아닌 연약함과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선택했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약한” (weak)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이 어려움들 한가운데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우리가 가장 온전히 알고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자신을 던져서 우리와 세상을 위해 온전함과 생명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선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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