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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신명기 18장 15 ~ 2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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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모세의 죽음을 보고하는 신명기의 마지막 장은 그가 매우 특별한 예언자였음을 묘사한다: "그 뒤에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모세와 말씀하셨다."(34:10)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에서 큰 표적과 이적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 사이 중보자의 역할도 정기적으로 수행했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호렙에서의 중재이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때에 당신들이 그 불을 무서워하여 산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주님과 당신들의 사이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5:5) 예언자로서 모세를 따라올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였다.(34:11-12)

  신명기 18 15~20절에서 우리는 모세 사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언자 없는 상태로 놔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을 전할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다.(15, 18) 호렙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재자를 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얼굴을 다시 마주 대하게 된다면 분명 죽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 요청을 들어주셨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는 모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예언자라는 단어의 히브리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부름을 받은 사람" 또는 "부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부름을 받음(called)" "부름(calls)"의 결합은 예언자의 이중적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예언자는 백성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체이다. 두 번째로,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무엇을 하실지를 예고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는 공동체를 언약으로 다시 부른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신적 개입과 목적에 관한 유일한 합법적인 중재자이며, 그의 말은 궁극적으로 백성을 위한 희망과 약속의 말이다.

  신명기 18 15~20절은 하나님, 예언자, 백성에 관한 네 가지의 신학적 성찰을 포함한다. 첫째, 신적 계시는 호렙에서 하나님이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4:12) 호렙에서의 하나님이 현현(5:1-21)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그리고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최종적인 말은 아니다. 예언자를 통한 (개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도 포함하여) -인관계는 하나님에 의해 여러 번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지속해서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하나님의 행동은 정의와 자비의 행위이다.

  두 번째 성찰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수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고통스러울 때도, 우리의 안위를 위한 것이다.(4:40)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가 아니고 중재자를 통해서 받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17) 우리는 예언자가 하나님께 나아가 심오하고 인격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한 후 우리에게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언어로 혹은 유형의 형태로 전해주기를 원한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요청에 응하신다.

  세 번째 성찰은 예언자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언약적 역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전통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백성들의 갈망과 상처를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해한다. 따라서 예언자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막연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언자가 현재 공동체의 문화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불과 같은 하나님의 현현은 모든 죄를 태우기 때문이다.(이사야 6:7 참고) 따라서 예언자는 백성들 가운데 선택되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곧 정의와 희망을 가져오고 약속을 성취시키는 말씀-을 선포한다.

  마지막 성찰은 하나님이 우리가 예언적 말씀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신다는 것이다중재자를 보내심에 대응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주의와 준행을 하기를 명하신다우리는 예언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왜냐하면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그는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18b)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19) 소통의 통로가 이것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예언자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첫째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예언자는 진리의 말씀을 어떤 다른 이름으로 전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하면 죽음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또한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된다이 또한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일이다구약의 예언자 중 누구도 그 일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된다예언자는 지원서를 제출하여 선발되지 않는다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질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중보자에 대해 아주 많이 허기져 있지만, 예언자라는 직책을 갖고 있지 않다. 신약 시대에는 거짓 예언자들의 증가로 공동체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적 예언자로 인식되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테레사 수녀, 랍비 아브라함 헤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옛 예언자들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세우셔서 우리가 신-인 관계를 깨뜨린 것에 대해 (특히 폭력을 통해)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예언자들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관한 환상을 보여주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다음과 같이 예언한 것처럼.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아래 앨라배마 주에서... 흑인 소년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자매로서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주석적 관점

 

신명기 18:15-20의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앞 9-14절의 탐욕적인 의식과는 완전히 상반된 내용이다. 앞의 본문에서는 점술, 자녀를 바치는 제사, 예언과 마법 등 하나님의 활동보다 인간의 노력이 중심이 되는 의식으로 신들과 연결하려 한다. 본문은 이런 의식들이 역겹다고(9)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고, 이런 의식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행위라고(12-13) 선포한다. 15-20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경우는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의식행위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행위로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전달한다. 이 예언의 소리를 대면한 사람들의 책임은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의 기원이나 발달과정은 복잡하다. 오늘 본문은 예언에 권위가 부여되는 전형적인 법적(canonical) 근거를 보여준다. 법적인 맥락에서, 모든 예언적인 능력, 예언자가 하는 행위에 대한 이해까지도 이 모세의 승인으로부터 나온다. 본문에 따르면 예언자는 모세와 같이 될 것이며, 예언자들에 대한 법적인 면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소명과 사역이 모세를 모델로 할 때 인정된다(4-10). "너희 백성들 중에서 나오게 될" 예언자는 말하자면 예언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투쟁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주전 6세기의 신명기 텍스트와 이보다 이른 주전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등장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 불분명하다텍스트보다 먼저 출현한 예언자들은 신명기 텍스트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기존의 신명기적 전통은 초기 예언자들의 활동과 결과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변하지 않는 사실은이스라엘의 신앙이 시험을 받았던 역사적 위기의 상황에 존재했던 예언자들의 활동은 민족의 초기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주전 6세기 포로기의 위기에 대한 신명기적 답변은 신뢰할만한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의 입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의 왕들, 제사장들, 판관들 등 다른 권력의 형태와 비교할 때 예언자들의 힘은 포로기의 혼란 속에서 파괴된 정치적, 종교적 구조와 연관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오히려 예언자의 권위는 신성한 말씀의 진실된 선포에 기반한 것이고, 그 말씀은 성전이나 군대에 의존하지 않았기에 타국 땅에서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카리스마적 능력은 국가의 역사적, 실제적(궁전과 군대), 신앙적(성전과 제사장) 기반을 잃고 절망한 백성들을 치유하는 수단이었다.

예언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과 임재에 두려워 뒷걸음질 칠 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했던 것 같이 백성과 신적한 능력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16). 그러나 오히려 주전 6세기 백성들의 문제는 성산에서 두려운 신의 현현을 경험하는 성격의 문제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포로기 백성들의 물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대할 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은 우리에게 이 일이 일어나게 한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디에 계신가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본문이 답해주는 것은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라고 주장했던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는가? 신명기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처럼 기만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보다 다른 신들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을 향하여 한 가지 명령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예언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18:20). 백성들이 예언자의 말씀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간단한 방법은 그 말이 실제 이루어지는가이다(22). 그런데 이 말씀은 이 전의 본문(13:1-5)과 긴장관계에 있다. 이전 본문에서는 청중들이 설사 그 말한 것이 이루어지더라도 믿을 필요가 없다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본문에서의 시험은 예언자들이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따르라고 요구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이 실제 일어난다 하여도, 그것은 참된 말씀이 아니고 예언자들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에 의해 주어진 말씀에 응답하는 이스라엘의 중대한 임무는 듣고(쉐마)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동사 쉐마는 이 본문에서 세 번(15, 16, 19) 등장하고, 단지 듣는 것 뿐 아니라 응답하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암시한다.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는 것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관한 죄의 처벌은 다른 많은 범죄와 달리 백성들에 의해 화형이나 투석형으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시게 될만큼 중요한 것이다(19). 제사장이나 왕이 없는 때 포로기 백성들의 공동체를 일으키고 발전시켜가는 것은 바로 듣고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듣지 않는 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배반행위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벌하시게 된다.

이 본문은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이 극적이거나 경이로운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그 말씀은 예언자들을 검증하고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들은 권위를 가진다신실한 백성의 역할은 단지 단순한 듣기가 아닌 신중하고 용기있게 듣는 행위이다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인식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나님 자체(존재)를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목회적 관점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금세기의 마틴 루터 킹 2세는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예언자들과 늙은 예언자들, 체제에 도전하고, 백성들에게 신실하라고 요청하는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왜 우리는 세상을 바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찾기 위해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나는 확실히 일을 잘 하고 있는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릭 워렌의 새들백 교회, 빌 하이벨스의 윌로우 크릭 교회, 그리고 브라이언 맥라렌의 이머전트 운동은 목회와 교회 생활을 수천 명의 사람들을 위해 재구성하면서 미국의 공공 생활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 나는 카메라 불빛 밖에서 일하면서, 교인수로 성공을 계산하지 않는 예언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카고의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의 예레미야 라이트는 최근 교단 모임에서 “대형교회의 목사 중에 예언자는 없다”라고 말했다. 예언자들은 대개 인기가 없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서는 예언자들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언적인 목회가 무엇인지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목회자들이 오늘의 교인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예언적인 목회를 선포할 기회이다. 설교자가 예언적인 목회의 설교를 할 수 있는 방향은 많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고려해야 할 기본적인 질문: 예언적 목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때로는 위험하고 외롭지만, 순수하고 진실된.) 누가 예언자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2절에 의하면,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루어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언적 목회는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관한 것일까, 혹시 그 이상이라면, “이상”이란 무엇일까?

설교는 설교자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회중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가 예언자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설교자/예언자가 모세와 같은가? 하나님과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에 대부분 저항하고, 행동을 촉발하기 위해 덤불이 타는 뜨거운 열기 같은 표징을 요구하는가? 설교자/예언자가 하나님과 잡담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의무를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세처럼 겸손한가? 설교자/예언자가 하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처음에는 이상하고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목적이 분명해 지는가? 설교자는 체화된 설교이고, 그 설교는 설교자와 신자들에 의해 체화되는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한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있다모세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다그들은 너무 큰 그릇들이다더 중요한 기준설교자/예언자가 예수 자신을 닮았는가물론그들의 설교자가 모세나 예수와 같은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회중에게 납득시키려 하는 바로 그 행위가 실제로 설교자가 앞서 말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할 것이다겸손함은 요즘 찾아보기 힘든 예언적 특징들 중 하나이다이것은 설교의 방향으로 권할 만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도움이 되는 설교 방향은 예언자들이 설교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언적 목회를 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회 회중석에 앉아 있는 예언자는 어떤가? 말과 함께 행동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이웃과 지역 사회를 책임을 지게 하는 공적인 봉사를 하며 사는 사람들. 예언자 모세는 선포와 설교 이상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전했다. 그는 광야에서 유목민 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제정하고 다툼에 대해 판결했다. 심지어 그는 심지어 사람들을 먹여 주고 그들의 불안과 걱정을 보살펴 주었다. 어떻게 하면 행동이 말처럼 예언적이 될까?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아마도 그들은 거리에 있고 무료 급식소에 있고, 법정과 정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매일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일하는 것 같다.

어떤 설교자는 오늘 본문을 이 시대의 예언자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타당성에 대해 논평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결국, 이번 주일 본문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21-22)은 어떤 예언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멋대로 말할 수도 있음을 시인한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설교자들 가운데 자신을 예언자라고 주장하지만 그 행동과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함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목사가 그의 신도들이나, 좀 더 넓은 사회나, 공익을 위해 책임 있는 태도일까? 목사가 다른 설교자들의 예언적 목회를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틀리거나 무례하게 될까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예언적인 설교에 대해 염려한다. 그들은 신도들의 신념과 세계관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설교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신도들을 지도하는 그들의 능력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설교단에서 해고될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것은 교인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소외되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가 교인들이 믿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의 목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까?

예언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어쩌면 그들은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할 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 이 긴장감이 설교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설교자들은 오늘날 세계의 긴급한 관심사와 필요성에 대해 그의 신도들에게 예언자적인 말을 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느낄지도 모른다. 가난, 중동에서의 전쟁, 미국의 문화 전쟁, 탐욕, 남용, 세계화, 폭력 같이, 하나님은 들을 필요가 있는 단어들-많은 단어들-을 설교하라고 주셨다.

 

설교적 관점

 

-한 목회자가 떠날 때는 언제나 회중 안에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녀는 언제 떠난대? 다음 목회자는 언제 오시나? 누가 다음 목회자가 될까? 이렇게 좋은 목회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목회자가 와서 편안해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를 한 번 생각해보라.

-모세는 백성들의 딜레마를 예상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15) 다른 말로 하면 앞 날을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고 선택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이다. 종종 우리는 적합한 인물을 찾기위해 밖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 내부에서 한 사람이 지명을 받아 사역을 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이것은 교회와 청빙위원회가 앞으로 지도자가 어디서 오는가를 걱정하기 시작할 때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왕을 찾고 있을 때 자신의 종 사무엘을 통하여 하신 것처럼 그렇게 부르시는 분이시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대신한 청빙위원이다. 물론 들에서 뛰놀던 코흘리개 소년이자 붉은 얼굴의 다윗을, 새총 하나와 가슴가득한 열정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를 선택한 것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일이었고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확신하였다.

-이 일은 모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영원히 지도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시간이 다했다고 생각한 것은] 몇몇 목사들이 말하듯이 모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지쳤다거나 백성들이 설교 도중 말을 끊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이 전환의(transition) 시기이며 은퇴를 발표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가 보낼 것이라고 알게하라 그래서 걱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목회자/지도자를 보내실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에게 말할 것도 아울러 주신다.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는,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일러줄 것이다. (18) 설교자들이 주일 아침 강단에 서있을 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빛이 비추일 수 있는 창(window)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들이 매주 그리고 매일 전할 말씀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회중들은 앞 날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하고 또 하나님이 부르시는 설교자도 그/그녀가 말할 내용에 대해 걱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누리는 가장 큰 영예는 죽어가는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목회자들은 웅장한 오페라가 공연되려는 공연장의 안내인과(usher) 같다. 안내인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 일어날 무대 위의 웅장한 장면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회중들을 전능하신 분의 현존으로 안내하는 것인데 죽어갈 때 뿐만이 아니고 예배에서도 그러하다. 설교자에 포인트가 맞춰지는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포인트이다. 우리의 할 일은 길을 비키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언의 삶을 사는 평신도에게도 동일하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 지를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 자신을 성서에 열어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말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첫째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목회자/지도자를 부르셔서 보내주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 새로운 지도자가 말할 말씀을 함께 주신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그 새로운 지도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공적 말씀은 사람들이 모인 공적인 자리와 주목하여 듣는 일이 없으면 선포되지 않는다. 이것은 쉐마 (Shema)가 강조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 6:4).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서 듣는다는 것은 또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heed) 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을 위해 해석해 줄 대리인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으로 진실되게 다가가는 사람들은 그 분의 앞으로 가는 권한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18:16). 왜 그들은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시했다. 그들은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아가는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듣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새로운 목회자/지도자가 공동체에 새로 와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더라도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어느 주일 아침 한 설교자가 날카롭고도 재미있는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들이 들어 본 설교 중 가장 훌륭하다고 말했다다음 주에도 그 설교자는 같은 설교를 했고 또 다시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듣고 감동했다그러나 같은 설교를 단어하나 안 바꾸고 셋째 주에도 계속해서 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마침내 교인 중 한 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적은 무리들 사이에서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목사님그 설교는 훌륭합니다사려깊고 통찰력도 있고 또 영감을 줍니다하지만 왜 같은 설교를 계속 반복해서 하시는 지 궁금하네요.” 그 목사는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그것은 내가 말한 것에 관해 무언가를 행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보내시고 해야 할 말을 주신다. 우리는 듣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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