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구약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 열방의 관계 회복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범위가 세계적이지만 (여러 민족에 관한 언약이므로), 화해의 약속은 특정한 민족, 즉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심겨 있다. 이 이야기의 전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신적인 자유에 근거하여 한 민족에게 다가오심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축복을 받는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출발점에 아브라함이 있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처럼) 은혜를 고집스럽게 피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스스로 얽매이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신적인 사랑과 신실한 약속의 본질 무엇인지 알게 된다.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화해는 한때 존재했지만 해소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적인 화해는 하나님이 쇠약한 아브라함과 사라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영원한 언약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언약"(berith)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약속, 축복, 계명 및 자유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관계 맺기를 시작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죄를 대적하면서 신적인 자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운명에 자신을 얽매이시고, 이 특수한 관계를 통해 인류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구원의 드라마의 주역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의 파트너로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 중에서 "모든 민족에서 공의를 가져다줄"(이사야 42:1) "고난당하는 종"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맺은 이 언약이 지닌 중요한 특징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특수하고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절대 유일신주의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철학적 반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신실함에 관한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다. 신명기 4장 32~39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분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역사하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간단히 말해 아브람에게 자신의 나라와 친족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라고 선포한 바로 그분이다.(17:1b-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볼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 평화, 구원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땅, 가족, 전통과 연관된 잡다한 신의 존재를 믿었던 고대 근동의 상황과 대조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의 본토와 친척을 떠나면서 친족이라는 자연적 관계가 주는 안전이나 민족신, 지역신, 가족신이 제공하는 보호를 모두 내버렸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는 하나님의 선언 속에는 아브라함이 다른 모든 신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는 요구가 내포되어 있다.(수 24장 참고)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첫째, 우리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인류에게 회복과 화해를 가져다주기 원하는 분이 유일한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헌신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순종을 요구한다. 구약성서의 여러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에 대한 불변하는 사랑과 예배의 중요성은 몹시 어렵게 배운 교훈이다. 너무 자주, 우리의 행위는 Hendrikus Berkhof가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피조물의 불충의 다양한 방식의 충돌"을 노출하고 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피조물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는 창조, 화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즉, 우리의 거룩함의 근거는 우리 밖,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영으로 우리와 함께하여 우리가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아브라함은 축복, 순종, 샬롬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8)는 하나님의 약속과 떨어져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에 성경 다른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그리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참조, 렘 24:7; 31:33; 32:38; 겔 11:20; 14:11; 37:23; 스가랴 8:8)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영원한 언약은 화해를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일방적인 언약의 수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본질상 우리를 위한 (pro nobis)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언약이 이스라엘(혹은 교회)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짐을 부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신적 행위의 혜택을 최종적으로 받는 자는 우리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영원한 언약을 은총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요약하자면, 언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 은유이지만, 이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용서, 교제, 자유의 약속으로 인도하는 구체적인 사건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비판적인 학자들은 흔히 창세기 17장을 사제문서(P)로 본다. P문서의 특징 증거들로는 야훼(YHWH)를 엘 샤다이(전능한 신)로 언급하는 것, 영원한 계약(7, 13, 19절)이라는 어휘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할례를 요구하는 구절들(9-14, 23-27절)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에서 이런 자료비평적인 발견에 대해 하나하나 지적을 받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심층적인 배경연구를 통해 땅에 대한 약속 그리고 할례에 대한 요구와 마찬가지로 국가 영토가 실제로 상실되고, 유대인으로서의 규범들이 이방의 환경에서 실행되어야 했던 바빌론 포로기의 후기 또는 포로기 이후기의 초기 작품에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는 것이 유의미하게 되었다. 이 본문은 원래, 족장들에 대한 목격자의 진술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후대의 이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고적이다.
이 창세기 17장 본문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누락된 것이라는 점이다. 기독교 독자들과 설교자들이 상대적으로 불편해하는 세 개의 모티브들이 제거되어 왔는데, 곧 땅의 약속(8절), 할례(9-14, 19-24절) 그리고 웃음 속에 함축된 의심(17절)이다. 드러난 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겠다고 약속하신 후계자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언약의 정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본다. 이 허락은 족장과 그의 부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중요한 이름들로 완성된다.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심(17:1).
아브람/아브라함은 지시하시거나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음성 뿐만 아니라 현현(하나님의 출현)이라는 시각적인 부분이 더해져 보다 더 풍성한 방식으로 계시된다. 앞 부분의 아브람의 “환상”(15:1)도 후손과 땅에 대해서 약속하는 말씀을 소개한다. (땅만 관련된 하나님의 현현은 12:7에 나타난다.)
이 두 현현 사이(역자 주 : 15장과 오늘 본문 17장의 현현 사이)에 비이스라엘인(이방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특별한 내용으로써 이집트인 후처로 임신한 하갈에게 나타난 내용이 있다. 거기에도 주제는 또한 후계자에 관한 것이다. 하갈은 이것을 경험하고 몹시 감격하여 “내가 정말 하나님을 보고도 살아있을 수 있다니?”(창16:13)라고 소리쳤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주님은 엘 샤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신다. 오경의 후기 P문서 부분에만 전형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아주 오래된 이름으로 “산들의 신”이라는 의미를 가짐에도, 통상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다. 샤다이는 고대의 시에 등장하며(창49:25, 민24:4, 16) 초기 사람의 이름에 인용되던 어휘이다(민1:6, 12절의 예).
출애굽기 6:3에서 오경의 저자들은 ‘엘 샤다이’를 호칭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이 창세기에 여섯 번에 걸쳐 사용된 용법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샤다이는 욥기 하나에서만 31차례 등장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호칭이 되었다.
영원한 언약(17:2-7).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내 계약”언급 하시는데, 이런 표현은 17:2-22에만 13번 사용될 정도로 지배적인 모티브로 17장 전체에 퍼져있다. 오늘 본문에 인용되었듯이 오늘 말씀의 계약은 아브람이 “여러 나라들의 조상(4절)”, “크게 번성(2, 6절)”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과 허락이 기록되어있다. 노년의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이 약속의 가능성은 매우 의심스럽고 심지어 우습게 여겨졌다(17절). 그러나 창세기 12:1-3의 우주적인 복의 약속이 족장사 전체와 성경 끝까 이어져 내려가야 한다면 후손은 필요한 것이다. 계약이 “영원할 것이다.”(7절, 또한 13, 19절을 보라.)는 사실은 저자가 하나님의 돌보심과 올바른 관계맺음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어, 심지어 땅과 성전의 상실을 견뎌내야 했던 세대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7절의 “후손”(히브리어로 “씨”)이라는 단어가 단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단 한 사람 그리스도(갈3:16)”라 말하며 이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했다. 객관적인 해설자로써 우리는 “씨”라는 단어가 집합적 명사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간과했다는 것을 기초로 창세기 17:7의 바울의 해석에 도전해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 설교자로서 우리는 바울의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정도로 자유롭지는 않다. 많은 경우 성서는 우리에게 “쌍안경같은”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가 기독교 정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이 나라들을 향한 복이 될 것이라 하신 말씀의 연장으로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위치한다고 단언하지만, 우리는 “씨”가 아브람의 후손 전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새로운 정체성들(17:5, 15-16절).
아브람을 향한 주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의 말씀은 족장 아브람의 개명이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나타난다(5절).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다시 짓는다는 사실은 인간 영웅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경험이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브니엘)과 씨름한 자라는 “이스라엘”로 개명될 때 일어난다(창32:22-32).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분투한 자”라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여기 족장의 이전과 이후의 이름들에 또한 중요한 의미들이 있다. 하나님은 익살스럽게 새로운 이름을 설명하신다. “더 이상 너의 이름은 아브람(예, 높은 아브- 고귀한 아버지 또는 조상)이 아니다.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아브- 다수의 조상 또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왜냐면 내가 너를 많은 나라들의 조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5절)
하나님의 선택된 첫 가족의 개명사건은 17:15-16에 끝난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사래는 사라가 된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과 달리 그녀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종속은 후손에 대한 복과 함께 온다.
목회적 관점
여름 방학의 마지막 여섯 주 혹은 크리스마스 전의 여섯 주와 같이 여섯 주는 가끔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갈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한 후 여섯 주 혹은 학교가 끝나기 전 여섯 주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사순절은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교회력에서 준비와 회개의 또 다른 중요 절기인 대림절 4주간이 휴일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순절로 가는 여정은 더 느리고 더 신중한 여행이다.
사순절의 속도는 아브람과 사래에게 제격이다. 그들은 삶의 황혼기인 90대였다. 노인들은 대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반성적이며, 더 관조적이고, 그들이 한 실수와 그들이 만든 상처를 더 잘 안다. 이 모든 것이 사순절 여정에 적합하다. 때때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듣고 기도하며,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기 전에 하나님을 향할 더 느린 속도와 장소가 필요하다. 아마 이것이 창세기 17장을 시작할 때 아브람과 사래의 상태일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은 아흔 아홉 살인 아브람에게 나타나시고, 불과 몇 절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미래는 이름 지음과 언약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극적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처음으로 하나님은 “산의 신”으로 번역 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이라는 이름을 가졌다(1절).1) 저자는 이 하나님이 창세기 1장의 하나님,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깊은 계곡의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사순절에 적합한 이미지다. 아브람과 사래도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아브라함과 사라(5절, 15절). 차이는 작지만, 신학적 함의는 심오하다. 오늘날에는 이름이 유행, 발음, 향수 nostalgia 를 근거로 선택되는 상표일 뿐이다. 구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반영한다. 이 경우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 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들의 운명은 보장된다. 그들의 삶의 황혼에서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그들에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많은 나라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들의 상속자는 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새로운 이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우시는 언약과 연결되어 있다. 17장에 있는 언약 이야기는 창세기 15:18에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되풀이한다. 15장에서 언약은 주로 땅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삶의 모든 면을 해석하고 하나님, 땅, 그리고 서로에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식별하는 렌즈가 될 것이다.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이라는 선물, 그들의 정체성의 근원, 그리고 창조 세계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제공한다.2)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인데, “너와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에게 하나님이 되겠다는 영원한 언약이다.”(7절)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은 하느님과 전 이스라엘과의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한 교회와의 관계, 교회를 통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언약은 창조와 연결되어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첫 열매로 아브라함과 그의 조상을 선택하셨다.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 그리고 다윗의 집을 통해 예수와 연결되는 왕실의 약속이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시는 영원한 약속이다. 야훼와 아브라함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것이다.3)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신실함은 언약의 열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신실함에 달려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언약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이 언약은 우리의 운명이다.
사순절의 두 번째 주는 느린 주일 뿐 아니라, 힘든 한 주다. 십자가로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성주간의 드라마는 멀리 있고, 부활절 아침의 영광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사순절 동안 교회는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고귀한 부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죄와 무너짐에 대해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회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사순절의 자기반성은 현기증 나는 일일 수도 있는 일이며, 잘 하게 되면, 종종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는 공개되거나 감춰진 상처들과 함께, 또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은 채 남겨두어서 하나님 나라를 망치게 하는 일들과 함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창세기 17장의 목회적인 은사는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축복과 약속, 이름 지음과 언약을 기억하도록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분을 따르고 있다.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 이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과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교회의 삶과 세례의 물을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와 맺은 언약이 우리에게 열렸다. 사순절의 어둠과 십자가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남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은 깨질 수 없는 언약이다. 심지어 우리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 십자가, 무덤, 하늘 같은 그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인 분을 따를 때도 말이다.
설교적 관점
-하나님이 아브람과 하는 세 번째 계약선언은 아브람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회중들에게 신앙과 지식 (faith and knowledge)간의 다른 점을 생각할 여지를 준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났을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음을(창 12:4)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이어 창세기 15장에서 갱신했던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따라서 상속자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가 85세였다(창 16:15-16). 이제 세 번째로 (이 과정에서 이스마엘 건은 무효화되고) 아들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아브람의 나이 99세가 되었을 때이다. 아브람이 처음으로 이 약속을 들은 이후 24년이 흘러갔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오랜 약속을 마리아와 하였더라면, 그녀는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아마 흰머리를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브람과 사래는 이 오랜기간동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결과가 어떻게 될런지를 분명히 알지못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일들을 겪었다. 이 신뢰로 인해 그들은 하란에서 지도도 없이 약속의 땅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 신뢰가 이집트가 자신들의 후손들을 위한 땅이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면서 거기서 견디게 하였다. 이 신뢰는 심지어 아브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파라오에게 아브람이 거짓말을 한 후에도 결혼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 오랜 부부는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다. 한 민족의 부모는 고사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리라는 어떤 근거도 없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신뢰 (trust)는 무조건적이었다. 추후 세 개의 구별되는 종교들이 이 신뢰로부터 출현할 것인데 모두 아브라함을 신앙에 있어 자신들의 조부(grandfather)라고 주장하게 된다. 세 종교의 조모들 (grandmothers)은 다르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계약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현현에 있어서 아브람과 사래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하나님이 갱신하는 계약을 받고 있다: 아브라함, 많은 사람의 아버지(father of multitude) 그리고 사라, 왕비(princess). 그 전에 사라의 참여는 예상되지도 않았고 암시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그녀를 온전한 파트너가 되게하여 새로운 이름을 주고 사라 자신이 받을 축복을 약속한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90세이다. 남편은 99세이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오랜 약속이 이제 끝날 시점에 와있다. 이들의 이름변경은 그 관계가 무르익었다는 것과 영원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관련한 병행성서구절은 야곱(이스라엘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과 호세아 (여호수아가 되었다)이다. 오늘날 이와 비슷한 것은[이름변경] 결혼할 때뿐만 아니라 출생, 할례, 세례 그리고 성인식등에서 종교적인 이름을 지어주는 의식의 경우이다. 왕, 왕비 그리고 교황은 종종 새로운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이름을 택하곤 하는데 그것은 수도원 서약을 통해 종교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삶의 목적을 뜻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러한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은 이름을 변경하는 예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 본문 서두에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각주를 살펴보면 이것은 전통적으로 히브리어 엘 샤다이 (El Shaddai)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모세 5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약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나 엘 샤다이는 너희 아브라함과 사라...). 이 짧은 계약을 통한 하나됨은 한 아들 곧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이삭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전반부 이야기이고 후반부 이야기가 또 있다. 창세기 주석을 쓴 테렌스 프레데임 (Terrence Fretheim)은 이것이 아브라함과의 계약에 대한 갱신(renewal)이 아니라 개정(revision)이라고 말한다.4) 이스마엘은 14년간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와 어머니 하갈은 이제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성서기자들이 하갈과 이스마엘의 교체를 기술하면서도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비록 사라가 이들이 아브라함의 천막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미래를 또한 약속하신다 (16:10과 21:18). 하나님은 베풀어 줄 한 가지 이상의 축복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후반부 이야기는 계약의 표시로 남자들이 할례(circumcision)를 받도록 한 것이다. 계약의 처음에 나오는 2개의 반복구절은 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 할 일에 대한 것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땅을 얻게 될 것을 보여주고, 그를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별처럼 수많은 자손들을 줄 것이다. 하지만 오직 여기에서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을 위해 하게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 (17:12). 토라는 이 계명에 대해 어떤 근거도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할례를 받지않은 사람들은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17:14).
-우리는 왜 이 구절들이 성서정과로부터 빠졌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아마 주된 이유는 공적 예배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이유야 어떠하든간에, 이 생략은 청중들로 하여금 새롭게 진전된 계약에 있어 아브라함의 응답을 생각해보는 여지를 주지않고 있다. 그의 신실함 (faithfulness)은 이제 그가 받은 새로운 이름에 대해 응답하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제 몸으로 응답하려고 한다.
-사순절 둘째주일에 이러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찜질방이나 백화점에서 부활절로 곧장 가는 게 아니다. 대신,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계약의 본질을 성찰하면서 40일간을 보내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 관계는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몸으로 응답하기 위해 어떤 구체적 실천이 필요한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요청한다면, 어떤 이름이 될 것인가? 그 이름이 뜻하는 새로운 삶의 목표는 무엇이 될 것인가?
-사순절은 자연히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예수는 아브라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 8:11). 자신의 신앙의 선조처럼, 예수는 꾸준한 신뢰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걸어갔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역시 새로운 이름을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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