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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이사야 40장 21 ~ 3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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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2 이사야서 도입 부분은 아름다운 시다. 40장에서 우리는 인간과 대비되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초대되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이와 대조되는 인간의 무력함이 그것이다. 이사야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시의 융단을 직조한다. 하나님은 하늘을 뼘으로 쟀으며, 온 땅의 티끌을 됫박으로 재어 보셨다.(12) 하나님은 능력의 팔을 갖고 오시며 세상에서 누구도 이 하나님께 권고나 가르침을 줄 자격이 없다. 더욱이 이 땅의 규모를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 그것은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다.(15)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무나 진공보다 더 하찮은 것이다.(17) 신학적으로, 이 시는 이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과 이 세상 안에 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인 인간을 명확하게 대조시킨다.(22) 이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시며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시가 제시하는 희망의 핵심적 근거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무력함을 파악한 이후에만 희망의 언어가 등장하게 된다.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31)

  언뜻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다 같이 기립하여 환호를 보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그러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교적 안락하고, 평화로우며, 부유함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분명 능력의 하나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관심은 능력 자체가 아니다. 이 시의 원래 청중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다.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 - 하나님의 백성이든 포로든 -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공동번역, 6)

  모든 포로들에게 바벨론 유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그들은 성전이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고향을 떠나서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져 난민 생활을 해야 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사람들이다.( 137:1) 그들은 피곤하고 기력이 없었고, 그들의 자녀들도 피곤해하고 지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36:1) 이런 조건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체념한다: "주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27) 그들은 바벨론의 신들이 그들의 신보다 능력이 있다고, 혹은 하나님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이 세상 위 높은 곳에 앉아계시는 분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멀리 높은 곳에 계신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된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의 관심과 고뇌에 초연하다. 20 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우리가 하나님을 "완벽한 타자"로만 믿는다면 그것은 이교적이고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사야가 읊은 것처럼, 땅 위 높은 곳에 앉아 계신 분은 동시에 부드럽게 양들을 부르시고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는 목자이다.(10-11) 시인이 우리에게 눈을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라고 할 때, 우리는 절대 타자가 동시에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세고 호명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빠지거나 잃어버린 피조물이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으로, 무한하면서 유한하게, 높은 곳에서와 동시에 낮은 곳에서,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으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으로, 그리고 신적이면서 인간적으로 존재하시며 행동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존재하며 행동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은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40장에서 이사야는 겉으로 볼 때 역설적인 하나님의 현존을 시적으로 표현하면서 두 번씩이나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묻는다이사야가 시를 통해 직조하는 융단을 바라보면서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우리는 당면한 고난에 빠져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고 살지 않았나이사야는 우리의 망각과 착각을 지적한다우리는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혹은 어떤 다른 국가나 인간이 만든 체제)가 권능자라고 착각할 수 있다그러나 확실한 진실은 다음과 같다. "그는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시며땅의 지배자들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신다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풀 포기와 같다심기가 무섭게씨를 뿌리기가 무섭게뿌리를 내리기가 무섭게하나님께서 입김을 부셔서 말려 버리시니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23-24) 더욱이 이 주권자 하느님은 땅의 위에 앉아계신(22) 막강한 권세를 가지신 분일 뿐 아니라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빠짐없이 부르시는 분이기도 하다.(26) 다시 거듭 묻는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그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은 이것이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28)

  이 시의 끝부분은 <자신들의 호소와 탄원이 가려지거나 무시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라고 노래한다.(27) 이사야를 따라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지치고, 피곤하고, 기운을 잃은 사람들이 새 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이 올라가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뛰어도 지치지 않게 된다는> 복된 소식을 깨닫게 된다.(31) 시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31)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양들을 모으시는 일에 지치거나 피곤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석적 관점 

  2이사야서의 말씀인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증언의 한 가지 핵심인 '믿음은 기억에서 시작한다.'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신앙도 흔들린다. 공동체의 신앙은 정치, 사회적 위협, 편안함과 안락함의 유혹, 다른 신들의 유혹 등 많은 것들에 의해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여기 주전 6세기 예언자가 있던 시대 파괴당하고 포로가 된 이스라엘에 절망하고 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미래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사회체제를 위협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은 기억해야 한다는 요청을 담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전해들은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의 기초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지 못하였느냐?"(21)

본문은 이스라엘의 불평이 들어있는 27절로 연결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21-26)은 세상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 창조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라들을 만드시고 다스리신다고 한다. 두 번째 부분(28-31)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곧바로 이스라엘의 부흥과 회복을 생각하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술로 넘어간다. 두 부분 모두 질문들로 시작되고 이 질문들은 뒤이어 나오는 증언들의 기반이 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모든 나라의 창조자시라는 것을 선포한다. 시작되는 21절에서 예언자는 이 질문들이, 이스라엘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 지식들은 "태초부터", 그리고 "땅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알던 사실들이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역사와 삶 속에서 일하시는 내용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현재의 위기와 연관된 것이다. 한 때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을 이스라엘이 잊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바벨론이 강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위협은 이스라엘의 망각이다.

창조의 신학에 대한 웅장한 언어 속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경이로움을 증언한다(22). 땅에 사는 인간들은 그 힘 앞에서 벌레 같은 존재들이다. 창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힘과 의지는 창조의 역사를 행한다. 여기 서술들은 앞 부분(12)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불러온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비교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인간이 대항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언자는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능력을 서술하는 것에서 국가간의 일들에서도 놀라운 역사를 행하신다는 주제로 넘어간다(23). 나라들과 왕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그루터기나 겨와 같은 존재들이다. 우주 자체를 지으신 이의 능력과 비교해서 국가와 통치자들의 가시적인 힘은 일시적이고 하찮은 것들이다. 25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비교불가능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하늘의 주인이시고 천체의 수효를 세시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는 분이시다(26). 이 말은 곧 이 일들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를 끌어낸다.

이제 27절에서, 예언자 자신은 이스라엘을 의심에서 확신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꺼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소리는 이 구절에만 있는데, 이것조차 예언자가 백성들에게 연설하면서 인용하는  형식일 뿐이다. 21-26절에서 예언자는 이미 창조자와 나라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을 청중들에게 상기시켰다. 인용된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예언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백성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묻는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창조 자체에 증거가 담겨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예언자는 하나님이 단지 태초에 생명을 주시는 것 뿐 아니라 현재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신다고 말한다(28-31). 27절의 이스라엘의 불평에 바로 이어서 예언자는 21절에 언급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감으로써 주제를 재차 언급한다. "알지 못하였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주제로 돌아가지만 이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지치지 않으시며, 백성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더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문을 가지고 의심하는 곳에서 예언자는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바벨론 포로기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의 이야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백성들 자신의 이야기를 망각하게 되는 위기를 초래했다. 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힘과 생명을 얻을 수 있게될 것이다.  가장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호와라고 알려진 창조자, 거룩한 분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소심하고 무력한 이들이 새 힘과 능력을 받을 것이다.  젊은이들조차 쓰러지고 지쳐갈 만큼 힘들고 큰 시련이 있는 시기, 희망을 계속 갖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이야기 속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신뢰한다면, 시련을 맞아 견디고 마침내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목회적 관점

 

애니 딜라드 Annie Dillard 는 말문이 막혔다.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믿음을 표현한 소설 Holy the Firm 과 Pilgrim at Tinker Creek 의 저자인 그녀는 일식 solar eclipse 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묘사했다. 딜라드는 그녀의 에세이 “개기 일식”1) 에서, “그 광경이 가진 의미는 그것이 가진 매력에 압도당했다. 그것은 의미 자체를 지워 버렸다”고 썼다. 이 장면을 “하늘에 떠 있는 라이프 세이버[구명구 모양의 작은 사탕]”라고 묘사한 동료와 그녀 자신을 비교하면서, 딜라드는 이렇게 썼다. “그때 나 자신은 그러한 단어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문장을 쓸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2) 우주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의 완전한 아름다움과 의미는 종종 형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사야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능력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의 풍경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가 전해들은 것이 아니냐?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분께서…하늘을, 마치 엷은 휘장처럼 펴셔서, 사람이 사는 장막처럼 쳐 놓으셨다.(21-22) 다름 아닌 바로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은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신다.(28) 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셔서,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31)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들보다도 더 위대하시니, 우리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도 틀림없이 돌보실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잘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 훌륭한 설교였다. 멋진 창조, 강한 신, 그러니 당신의 근심을 버려라. 하지만 우주나 전능하신 신에 대해 잘 이해하지 않는 현대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떨까(“무슨 말인지 모르겠니?”라는 말은 결국 주일학교 선생님이 야단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신이 실제로 얼마나 전능한지를 보여 주는 것인지, 또 신이 정말로 우리를 돌보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교인들은 어떨까?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호소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2 이사야에서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유수가 끝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본문을 읽는 현대의 청중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별이 총총한 밤, 산꼭대기에서 삶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몇 개의 산을 올라 봤는데, 그것들은 아름답고, 거기서 내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느끼지만, 삶과 믿음에 대한 어떤 질문들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애니 딜라드가, 일식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징표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늘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딜라드는 “마침내 영광 자체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신비의 깊이에서, 위엄의 높이에서 빠져나와, 우리는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3) 고 썼다. 그건 좀 많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게 요점일 것이다“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우리는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22).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압도하신다는 사실을이사야가 바랐던 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논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우리가 헤아릴 수도 없는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각각을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돌보신다(26)

인간 개발 전문가들은 뛰어난 성취에 대한 인정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 것이 건강한 정신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했다. 방치되고 무시당하면서 자란 어린이들은 어려서 그들의 인격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일에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위대하고 멋진 하나님이 심지어 가장 작고 잊혀진 아이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가!

이번 주일 예배를 위해 예배인도자는, 이름을 부르는 가장 작은 행동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겠지만, 창조주의 웅장함과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창조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전쟁이 여전히 세상을 괴롭히고, 가난이 여전히 수명을 단축시키고,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오늘날 세상의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고 자비로울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교인들은 어떨까? 설교자는 우리 안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는 의심에 대해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설교자는 악한 세상을 직면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해 수 세기동안 질문해 온 신정론을 탐구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질문은 이렇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능력이 있으시다면, 악은 왜 지속되는 것일까? 디지털 정보화 시대는 전 지구적 공동체를 더 긴밀하게 하고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높여 주기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과 관련이 있는 주제이다.

회의적인 사람들의 불평을 줄이거나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불평의 진실을 인식하는 것이 좋은 첫 걸음이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지혜 Gods understanding 는 “무궁하시다”고 한다(28):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왜 고통이 계속되고 수많은 장소에서 악이 지배하는지를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산꼭대기나 일식처럼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수년 간 탐구하고, 모색하고, 궁리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 오랜 시간동안 성경 공부와 예배 그리고 환대와 같은 믿음의 실천을 통해, 또 용서하고 책임지고, 봉사를 하면서, 비록 말로는 충분히 전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방식을 알 수 있게 된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영화 “불의 전차들” (Chariots of Fire)이란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올림픽 육상선수 에릭 리델 (Eric Liddell)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 영화에서 그는 파리의 한 교회 강단에서 이 본문을 은혜와 아름다움이 가득찬 부드럽고 중후한 스코틀랜트 사투리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며 읽는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대중가요 “독수리 날개 위에” (On Eagles Wings)에서 경쾌한 반주에 맞추어 마이클 존카스(Michael Joncas)가 반복적으로 노래하는 후렴구 “그리고 그가 너를 독수리의 날개 위로 올리시리라”이다.

-이 본문을 대할 때 세 가지가 떠오른다: (1) 우리는 신학적으로 건망증 환자이며; (2)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실 분이라는 것; 그리고 (3) 젊은이나 노인이나 연약하여 도움이 필요할 때서야 비로소 “우리를 독수리 날개 위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가 좌절해 있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에 관한 것이다.  

-먼저 우리는 건망증 환자이다. 우리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지를 보라. 우리는 원하는 것만 기억한다. 언제나 자기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생 한 일 가운데 잘못한 일만 기억한다.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한다면 오직 잘한 일들만 기억한다.  

-신학적 건망증은 위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문제거리이다. 그것은 당신이 무서운 암이라는 말을 들을 때 혹은 의사가 당신의 폐에서 구멍을 발견했다고 말할 때 일어난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흐느낀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걱정한다. 귀환하는 유배자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떠나셔서 우리를 모두 내버려두지 않았나하고 걱정한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잊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러한 류의 신학적 정체성의 위기가 있다. 그리스도인들로써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해 그리고 왜 그것을 믿는 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버림을 받아 홀로 있다는 느낌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세상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지에 대한 생각도 없다.  

-신학적 건망증은 특히 인생이 잘 풀릴 때 문제가 된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고 사는지!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고싶어하심을 잊고 산다. 매일 받는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문제였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고 누구인지를 늘 상기시켰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창조주이고 보존자이며 구속자이고 또 친구인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어려움을 대면하는 그 순간 우리는 불안함과 근심으로 주저앉아 버린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기 떄문에 근심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열왕기상 19장에서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동굴 속에 숨어있는 엘리야를 생각해보라. 주께서 그에게 “엘리야,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말로 하면 “왜 너는 걱정을 하고 있느냐?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거라! 내가 너의 일생을 통하여 행했던 일들을 잊었느냐? 네가 바알 예언자들을 대면하였을 때 내가 너와 함께 했던 일을 잊었단 말이냐? 왜 너는 늘 나를 잊는단 말이냐?”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오늘 이사야 본문은 우리들에게 이와같은 신학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역사를 다스리심을 알게 하고 또 “그는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시며, 땅의 지배자들을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 (23) 분임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킨다. 이사야는 세상이 갖고있는 건망증을 치유하려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너를[세상을] 잊지 않으셨다. 왜 너는 하나님을 잊고 사느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걱정하게 된다. 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면 너의 근심이 되는 문제를 치유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한 여성이 테네시주에 살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마가렛 스티븐슨(Margaret Stevenson)이고 이제 그녀의 나이 90대이다그녀는 스모키 지역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 남부 산악지역]의 전설이다마가렛과 하이킹을 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데 그 이유는 그녀가 모든 등산로와 우회로 그리고 모든 식물과 나무 이름을 학명까지 알고있기 때문이다그녀와의 첫 등반은 르콩트 산(Mt. LeConte)이었는데 그녀에게 있어서는 75번째 등반이었고나의 두 번째 등반은 그녀의 125번째 등반 때였다세 번째는 그녀의 500회 등반 때였다마가렛이 마침내 하이킹을 그만두었을 때는 르콩트 산을 700회도 더 오른 뒤였다그녀의 남편은 암이 발병되기 전까지도 거의 함께 가지 않았다일단 우리가 함께 하이킹을 하게되면 마가렛이 가장 숨가쁜 2마일 능선이라고 이름붙인 곳까지 쉬지않고 2마일을 걸어 올라갔다그리고 거기서 어려운 코스로 6마일을 더운 날에 걷곤 하였다어느 날 나는 더 힘차게 걷고 싶었다그래서 “마가렛나중에 봐요” 하면서 평소의 방식에서 벗어나 그녀를 앞질러갔다어느 지점에선가 나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누워있게 되었다희미하게 보니 마가렛이 일정한 속도로 내 앞을 지나갔다나는 여전히 그녀의 등산용 지팡이가 철컥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비라고는 전혀없이 그녀가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일마일만 더 가면 되요 빌 (Bill). 정상에서 만나요!”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쉬지않고 나 보다 앞서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남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마가렛이 하나님과 함께 매일 걷는 생활로 인해 둘 간의 마지막 시간들은 슬픔이나 후회가 아닌 기쁨과 찬양으로 채워졌다. 마가렛이 “정상에서 만나요!”라고 말할 때 그녀의 얼굴은 그리스도를 향해 고정되어 있고 그녀의 발걸음은 일정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그녀는 이사야의 말씀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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