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성서의 홍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에덴동산과 함께 창조된 세계를 폐하시고, 원래 창조에서 보존할 부분을 남겨두시고, 새로운 질서 가운데 우주를 재구축하신다. (창 6:5-9:17) 이 이야기는 성서에 등장하는 첫 언약으로 마무리된다.(9:8-17) 홍수 이전에 인류는 태초에 만들어진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침범했다. 끊임없는 폭력이 발생하여 (4:24; 6:11) 하나님이 "아주 좋게" (1:31) 창조하신 세상이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나락으로 무너져 내려갔다. (1:2) 천상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땅의 딸을 임신시킴으로 하늘과 땅의 적절한 관계를 훼손시켰다. (6:1-4) 동물들로 원래의 초식적 본성을 거슬러 피비린내 나는 먹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을 다스리는 인간을 해치는 반역을 범하게 되었다. (1:30, 6:2, 9:5) 폭력은 이 땅을 오염시켰다. (창 4:11; 8:21; 민 35:33) 원래의 창조가 파손된 것을 슬프게 여긴 하나님은 파괴자들(히브리어 shachath)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신다. (shachath가 6:12절에서는 "corrupted"[한국어 성경:부패, 썩음]"로, 13절에서는 "to destrory[한국어 성경:멸함, 쓸어버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은 정해진 남은 자를 제외하고 땅과 그 위에 숨쉬는 모든 것들을 혼돈의 물속에 다 잠겨 버리게 하기로 결심하셨다. (6:5-7:24) 하나님은 선택된 소수를 기억하시고 그들을 방주로 구원했으며(8:1-8:19), 그들에게 창조 플랜 B를 제시하시고 (8:20-9:17), 언약을 통해 그 계획을 보증해 주셨다. (9:8-17)
이 언약은 강력한 패라독스에 대한 신적 응답이었다. 그 패라독스는 <평화스러운 우주의 창조라는 목적>과 <파괴적이고 반항적인 인류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창조, 인간, 하나님, 구원에 관한 핵심적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게르하르트 폰 라드(Gerhard von Rad)에 따르면 언약은 새로운 법적 기초에 근거한 파트너 관계를 도입함으로 "불투명한 법적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바꾼다. 하나님은 노아, 그의 가족과 후손, 움직이는 모든 것, 그리고 지구 자체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므로 홍수 이후를 위한 새로운 관계의 법칙을 제시하신다. (9-10, 13) 이 새로운 계약은 피조물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계약은 <아직 타락한 상태에 있는 피조물에게 홍수의 재난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하나님에게만 어떤 제한을 설정한다. 노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홍수도, 언약도, 홍수 이후 피조물을 회복하지 못했다: 인류는 여전히 악을 행하려 하고 있고(8:21), 짐승은 서로 해치려 하고 있고 (9:5-6), 땅은 여전히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오염되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일방적인 제한을 부과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제 내가...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땅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9, 11, 15) 이 약속을 하나님이 잊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은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새로운 언약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13-16). 하나님은 거칠 것 없이 (unrestrained) 폭력적인 피조물에 대한 잔인한 보복을 자제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금지명령(restraining order)를 내리신다. 그 명령을 기억하기 위해 하늘에 표식을 세운다.
이 언약은 또한 모든 피조물이 <고약한 죄와 과분한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연민에의 전적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한다는 점을 밝힌다. 인류를 포함한 전체 피조물은 하나다. 한 부분에 주는 영향은 전체에 미친다. 자연의 심오한 목적은 하나님의 소유권 하에서 드러나는 일치 안의 다양성(diversity in unity)이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주어진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생명을 자신의 손에 장악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함으로 우주를 폭력과 공포로 오염시킨다. 모든 피조물이 그 결과에 고통당하지만 (9:2-6), 이것이 노아 종족의 최종적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최종적 운명은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는 것"(9:1, 7)이다. 반대되는 많은 근거에도 불구하고 인류와 피조물은 축복을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신실한 자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전략을 바꾸신다. 인류가 폭력의 악순환을 통해 추락하는 것을 스스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겠다고 언약하신다. 인류와 우주는 그 생존을 위해 창조를 넘어서는 궁극적인 생명의 힘에 의존한다. 이 생명의 힘은 모든 것을 시작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밝혀지는 하나님은 피조물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서, 희망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기를 거절치 않는, 변통성이 있는 존재이다. 종종 기독교의 구원은 변화무쌍한 인간이 불변의 하나님에게 귀의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언약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뿐이다. 인류가 무한히 반복되는 범죄로 희망의 가능성을 끊어버리려 위협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스스로를 제한함으로 미래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고난에 마음이 너무 아프셨기 때문에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셨다. 이 언약을 선포하는 하느님은 객관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바른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의 폭력에 마음이 찢어지지만, 여전히 화해를 추구하는 연인과 같다. (6:6, 8:21) 독자들은 이 언약에서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은 만날 수 있지만 분노하는 하나님은 만날 수 없다.
창세기 9:8-17의 언약은 임시방편의 조치다. 피조물이 당장은 벌을 유예받지만, 조화롭고 하나 된 우주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은 인류의 타락한 성향과 충돌한다. 사순절은 이러한 불균형을 인식하여, 우리의 죄와 유한성을 인정함으로 우리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중지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폭력을 휘두를 것인가? 이 팽팽한 우주적 드라마는 마가복음 1:9-15에 나오는 장면에서 계속된다. 마가복음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곧 사탄과 들짐승과 천사가 거하는 광야의 세계로 들어가신다. "예수께서 들짐등들과 함께 지내셨는데"(막 1:13b)라는 구절에는 위험과 약속이 뒤섞여 있다. 예수는 약육강식의 오래된 자연법칙의 피해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원형을 복원하며, 천사와 온 땅과 들짐승을 이끌고 원래의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할 것인가?
그 대답은 오늘날 예수를 따라 유혹이 가득한 광야로 걸어나가 자신 안에 있는 야생적 본성을 직면하게 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오직 성금요일의 혼돈과 무덤의 암흑을 통해 사순절의 험한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부활이 동터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부활의 빛은 어두운 서쪽 하늘에 무지개를 투영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읽는 본문은 홍수 이후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만나는 계약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 방주 안에 있었던 생물들과 지구 자체와 맺으신 것이다. 계약 내용 자체는 하나님이 사나운 물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다시는 파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보증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사납게 몰아치는 물은 가장 오래되고 심지어 신화적이기까지한 상징으로 혼돈을 의미한다. 거대한 무서운 홍수는 세상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시작되었던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준다(창1:2를 보라.). 이런 이유로 이 전승 속에서 언약은 단지 날씨에 관한 의미 이상이 있다. 이 계약은 태초의 혼돈을 다스리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많은 고대 근동 문명은 전세계를 뒤덮은 대홍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성서적 전승은 많은 문명들이 태초의 홍수로 간주하는 실제 대홍수의 기억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런 신화적 맥락에서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류문명을 다시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로 여겨졌다.
창조에 관한 고대 이야기들에는 흔히 혼돈의 세력과 젋은 전사 신 사이의 우주적 전투, 즉 천상계의 모든 존재들이 참여 하는 전투이야기가 더해진다. 이야기 속에 언급된 활1) 은 태초의 혼돈의 세력을 물리친 거룩한 군사의 활로 언급되어왔을 것이다. 활에 대한 이런 해석은 화살을 화살통에 채운 강인하고 젊은 전사로 신을 표현한 여러가지 메소포타미아 유물을 통해 보여진다. 하늘로 활을 들어올리는 것은 태초의 전쟁이 끝났고 모든 피조물들이 안전하게 쉬게 되었다는 사인일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첫번째 창조이야기에서 쉬신 것처럼(2:2-3을 보라.) 활을 들어올리는 행위는 우주에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런 우주적 계약의 표식으로 활은 모든 피조물과 맺은 약속을 생각나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늘의 활은 혼돈의 세력과 싸우고 결박시킨 두려운 전사인 하나님이, 다시금 힘을 휘두르지 않도록 힘을 자제하시는 표시로 기능했다. 이런 표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혼돈이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기능을 가졌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서술의 문학적 양식을 학자들은 포로기 이후의 제사장 전승으로 본다. 이런 유형의 가장 명확한 예는 제사장전승의 문체적 특징이 반복해서 본문 안에 발견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너와, 너의 후손과, 너와 함께한 살아있는 피조물 모두와 계약을 세운다."(9, 11, 12, 13, 15, 16, 17절)
계약에 유형의 표식을 내세우는 것도 제사장문서의 특징이다(창9:12의 활, 17:11의 할례, 출31:13의 안식일의 준수행위). 이런 표식들은 계약의 성격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하늘에 걸린 기상현상으로서의 '활'은 모든 피조물과 맺는 언약을 말해주고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몸의 표식이며, 안식일의 준수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따른다는 제의적 표식이다. 마지막으로 제사장 전승에서 모든 계약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다(창9:16, 17:7, 출31:16).
포로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원한 언약에 관련된 이런 유형의 표식들은 위로가 되어왔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정부가 무너지는 것과 종교적 구조와 생활관습들이 혼돈에 빠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의 세계는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에 여전히 매여있음을 확신하게 하셨다.
이 계약의 다른 특징도 언급되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그리고 출애굽 시대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과는 달리 이것은 일방적인 계약이다. 다른 말로 계약의 의무가 한 쪽에게만 있다. 이런 것은 고대 사회에서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드문 계약을 맺는 하나님은 계약에 매이고 계약 상대자인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미래에 있을 파괴적 행위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다른 계약 상대자는 어떤 특정한 규칙도 요구받지 않았다. 이런 계약의 성격은 하나님의 연민과 아량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서 재앙이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인간의 죄악상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이런 성품은 기이한 것이다. (창세기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사람에게 피채 먹는 것을 금지했다[9:3-6]. 그러나 이런 음식에 관한 규정은 계약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과 함께 살며 번성하기 위한 위임내용에 있다.)
이 계약의 몇 가지 중요한 면들이 다뤄져야 한다. 첫째로 모든 피조물과 함께 맺었다(10, 13, 15, 16, 17절). 둘째로 노아와 현재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여러 세대에 걸쳐 맺은 언약이다(9, 12절). 이것은 미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제사장 문서의 또 다른 예이다.
성서 속의 홍수 이야기는 단지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해방의 이야기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유일한 사람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지시하셨고, 그와 그의 가족과 동물들이 홍수의 징벌에서 탈출하게 하셨다. 이런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 가족을 '빚으시고' 그 가족과 세상 전체와 계약을 맺으셨다. 이것은 해방과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목회적 관점
어느 날 어느 젊은 어머니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산책하며 무지개를 보았다. 4살짜리 아이는 감탄하면서 올려다보며, “엄마, 저걸 집으로 가져가서 우리 집에 둘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외경심으로 하는 아들의 질문은 어머니가 “집 안의 무지개”라는 시를 쓰게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질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들의 집 벽에, 창문과 문에서, 굴뚝에서 무지개가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집은 변형되었지만, 무지개의 장엄함과 그 색깔을 포함할 수는 없었다.2)
무지개의 빛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보일까? 기독교 공동체가 “집 안에” 하나님의 “무지개”를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활은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의 표시다. 그것은 하나님이 변화된 (그리고 변화하는) 하나님이라는 표시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를 저항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은 처음에는 전 세계적인 홍수라는 파괴적인 분노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쓸어버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에 있는 동물들 같은 의로운 남은 자들과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홍수가 빠지자 하나님은 징벌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해 여전히 비통에 잠겨 있다. 형벌은 인류가 그 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변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후회하시면서, 인간의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옹호하기를 그만 두고 용서하고 인내하면서, 피조물과 인간을 확고부동하게 사랑하기로 하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은 언제라도 하나님께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인간을 겨냥하는 무기를 내려놓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홍수로 피조물을 파괴하지 않으신다는 개인적인 비망록을, 그리지 않은 활로 구름 속에 담아 놓으셨다. 그 활, 무지개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인류는 혼돈의 한복판에서도, 창조세계와 피조물의 반역 한복판에서도 “기억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서, 혼돈의 한복판에 있을 때 기록되었다. 혼돈은 물론 고대의 현상이 아니다. 21 세기 세계에도 테러와 전쟁, 생태적인 자연 재해, 그리고 세계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자원과 부의 분배의 심각한 불평등으로 인한 혼란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과 소외와 이혼으로 파괴된 관계를 통해, 몸과 마음의 병을 통해, 모든 종류의 중독을 통해 혼돈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 혼란의 상당 부분을 신의 섭리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 스스로 자초한다. 공동체로 혹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혼돈의 한복판에서, 혼돈이 가져온 고통과 고난과 함께,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우리를 “기억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그렇게 아는 것이 구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과 함께 걷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를 보내시고 그가 섬기시는 하나님을 더 깊고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노아의 방주 위에 무지개가 걸리면서 문이 활짝 열리고 동물들이 짝을 지어 새 세계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교회 유아실의 벽에 많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유아기를 시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로 전해 준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최악의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도록 이 이야기를 해준다. 그런데 왜 이 메시지를 교회 지하실에 있는 유아실에 가둬놓을까? 왜 무지개 색들이 유아실에서 계단 위로 올라와 예배와 위원회 모임, 중고등부, 성인 교육 및 선교 사업, 성가대 연습과 교회 예식에까지 펼치지 않는가?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특별한 약속 아닌가! 이것을 진지하고 의도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신앙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신앙공동체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의 형상으로 다시 만드는 곳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곳은 자신의 완악함과 세상과 그 혼란의 완악함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놓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참고, 용서하며, 사랑하고, 예언적인 행동을 통해 그들의 창조주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무지개의 약속의 빛 속에서, 교회는 갈등을 “양탄자 아래로 쓸어 넣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정중하게 취급하게 될 수 있다. 교회의 건강을 위해 비폭력 분쟁 해결과 회복적 정의의 방법이 탐구될 수 있고, 이것을 갈등과 폭력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교회는 집단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의 투명성과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의사소통의 명확성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인종, 나이, 성별 그리고 성적 지향 같은 “무지개의 모든 색”이 환영받고 평등한 곳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교회는 다른 신앙을 가진 공동체나, 교파나 교리로 갈라진 다른 공동체들과 건설적인 대화를 추구 할 수 있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협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으며 화해가 꽃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린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내와 용서가 교회의 벽을 칠하고, 사람들을 물들이며 문과 창문을 통해 세상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아이와 같은 경이로움으로 질문하기만 하면 된다. “그 무지개를 집으로 가져가서 우리 집에 둘 수 있을까요?”
설교적 관점
-노아와 홍수 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절망하여 우리를 땅에서 파멸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아니다. 창조 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로 혼돈과 무로부터 부름을 받았지만, 매순간 혼돈과 무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주요 일간지를 보거나 저녁뉴스를 켜면 우리는 부패, 폭력, 탐욕 그리고 환경오염등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홍수 심판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 충분한 증거들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셨다” (창 6:5).
-또 하나님께서 모두를 파멸하기보다 측은히 여겨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대표하여 암수한 쌍을 구원하셨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이 공의로우시고 또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하듯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변치않는 사랑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본성(nature)이시다. 나아가 창조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대신 잘못된 것은 깨끗이 쓸어버리고 방주의 생존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신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일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상세한 설명이다. 첫 번째 홍수심판 후에 그리고 인간과 모든 생물을 구한 이후에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다시는 이러한 방식으로 땅과 거기 거하는 생물들을 파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 주변에 어린이들이 있는 그림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것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온화한 혹은 응당 그러한 본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이렇게 표현된 하나님은] 이 성경을 썼던 고대인들이 가졌던 신적 존재에 대한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의 이해는 전혀 달랐는데 고대세계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공의 (omnipotence and justice)에 대해 예민하게 생각하였다. 만물을 창조했던 존재(The One)는 또한 만물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고 실망시키는 일이 드러났을 때 모든 것을 파멸하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한 번 혹은 몇 번 반복된 자비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본성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지만, 파멸할 권리를 단념하는 신적권한의 포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오늘 본문에 묘사된 장면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간 그리고 세상 만물의 자리로 옮겨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단지 창조자 하나님이 아니고, 이제 인간을 벌주고 세상을 파멸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보호자 역할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무지개”(bow)를 걸어놓은 것은 이 약속의 표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 성경을 전해 준 이스라엘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대인들은 빛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활에서 나오는 불화살로 이해했다 (시편 7:12-3). 그러므로 무지개는 단순히 폭풍우 이후 땅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나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시는 활을 당기지 않겠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간과 함께하시면서 심지어는 인간처럼 연약한 채로 드러나 보이신다. 하나님은 단지 그리스나 로마의 신들처럼 뒤로 물러나 앉아 있으면서 인간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에게]위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이후의 운명에 깊이 개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명은 인간의 그것과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제한과 공여(self-limitation and investment)의 행위는 성경에 그려진 하나님의 특성에 새롭고 독특한 면을 보여준다. 권능, 정의, 인내 그리고 사랑과 더불어 고대 히브리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본성을 스스로를 주는 것(self-giving)으로 즉 하나님의 특권을 제한하면서 인간의 관계로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물론 [인간과]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자녀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있는 부모는 아이들을 갖기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온갖 종류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개념을 신적 관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의 계약들을 (여기서는 노아와 그리고 후에는 아브라함, 다윗, 또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모든 사람들과) 신중하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진실로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에 들어오셨다는 것과 그렇게 해서 이제 모든 [인간]관계에 있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에 함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에 바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이 지니는 중요한 점이 있다. 이 본문이 서술하고 있는 자기제한과 신적 자유함을 희생하는 일은 사순절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하나님의 다른 면으로의 여행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전능이나 전지((omnipotence and omniscience)가 아닌 십자가의 약함과 연약함 (weakness and vulnerability)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든 우리의 경험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포용하며 인간의 관계로 들어오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창세기의 이 본문은 이러한 진전을 미리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상호간의 관계와 창조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만일 [인간을] 포기하고 심판하거나 파멸에 이르게 할 권한을 홀로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계약행위에서 이 신적특권을 포기한다면, 이러한 자비를 경험한 우리들 또한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사람들과 만물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던 방식으로부터 그들을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겼기 떄문에 존중과 지원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인식을 달리하기 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오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그 여정은 사순절에 시작하여 고난과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다른 끝에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늘은 그 여정을 시작하는 걸음을 떼기에 좋은 날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출애굽기 20장 1 ~17절 (0) | 2023.03.13 |
|---|---|
| 창세기 17장 1 ~ 7절, 15 ~ 16절 (0) | 2023.03.13 |
| 열왕기하 2장 1 ~ 12절 (0) | 2023.03.01 |
| 고린도전서 9장 16 ~ 23절 (0) | 2023.03.01 |
| 이사야 40장 21 ~ 31절 (0) | 2023.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