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요나 3장 1 ~ 5절, 1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3. 1.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아기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여행을 한 동방박사처럼 요나도 이국땅 도시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박사와는 다르게, 요나는 아시리아 도시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반발하고 거역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폭풍 중에서 목숨을 건진 요나는 (1:17) 마지 못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고 형식적으로 선포했다.(4)

  예언자 요나. 요나서는 호세아나 이사야처럼 예언의 말씀이 주된 내용이 아니라 예언자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다른 예언서와는 구별된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름의 원인보다는 그 부름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춘다. 예레미야와 모세처럼 요나도 처음에는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동의하였으며, 그 말씀의 요지는 오늘 본문 중간에 소개되어 있다.(4)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의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한 대부분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요나는 이방 민족 니느웨 주민들에게, 그들에게 임할 피할 수 없는 파멸에 관해 선포한다.

  요나서 이야기에는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대조와 예상 밖의 반전이 많이 등장한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다시스로 도망치던 요나가 이방인 선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폭풍 치는 바닷물 속으로 던지라고 스스로 요청한다. 요나는 배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 대신 자신의 확실한 죽음을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지 않는 것을- 더 원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또 다른 대조는 요나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긴 후에 요나의 반항을 압도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뜻이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심판을 철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측은 이제 뒤집혀서, 이야기는 예언자의 보복적 태도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소개한다.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시기하여 죽기를 간청한다.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조는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하다가 벌레에 의해 시들어버린 박넝쿨에 관한 비유이다. 요나는 박넝쿨의 죽음에 대해서는 깊은 유감을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연민도 느끼지 않는다.(4:10-11) 이런 예상을 뒤엎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 사이의 대조가 강조된다.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특히 오늘의 핵심 구절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 보편적이신 하나님. (Gods persistence, responsiveness, universality)

  불변하시는 하나님. 요나서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집요한 분으로 묘사한다. 요나가 부름을 거부하고 지시한 방향 반대쪽 목적지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신다. 요나가 회개하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예언하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나님은 여러 번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하신다.(3) 하나님의 뜻은 비껴가거나 좌절되지 않음이 밝혀진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불변하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방식은 예언자의 예상을 (예를 들어 심판이 약속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뛰어넘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형벌을 철회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진 그들에게 용서를 베푸신다. 이것이 요나에게는 아주 못마땅한 일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의를 요구했고 의에 대해 보상을 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관한 요나의 선포는 변하지 않는다. 그 선포는 유예 조건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자 왕도 그들에 합류했다. 왕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인지했기 때문에 동물까지 포함한 모든 백성이 회개의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5-6 ). 니느웨 백성들이 즉각 회개한 것과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를 거부한 것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회개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것처럼 "사회적 죄악에 대한 반응"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주민의 회개뿐 아니라 통치 기관의 회개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적인 참회에 감동하여 하나님은 니느웨를 곧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을 철회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앞에서 이방인 선원들의 행위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바다를 잔잔케 하고 그들을 공포와 멸망으로부터 구해낸 이야기에서 일찍 예견되었다.(1:15-16)

  보편적인 하나님. 세 번째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는 보편적이다. 하느님의 통치와 은혜는 요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요나의 여정 초기에 하나님은 자연 현상을 제어하심으로 배를 다시스로 몰고 가던 이방인 선원들을 구원하신다. 그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한 후, 폭풍은 더욱 거세졌다.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 그들은 마지막 행동으로 마지 못해 요나를 요동치는 바다로 던졌다. 그 순간 폭풍이 멈춘 것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했다.(1:16) 요나서의 이야기는 어려움에 부닥쳐 회개하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구해주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힌다.

  결론. 요나서 이야기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인간의 요구에 반응하시며, 회개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성품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시리아 도시 니느웨가 예언의 주된 관심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요나의 태도와 반응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협하고 냉소적인 반응도 예언의 중요 관심이다.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할 선민으로 그들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 때문에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수행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요나서를 어떤 종류로 보아야 할지는 쉽지 않다. 우화인가 아니면 희곡인가? 진중한 역사 이야기인가 아니면 난해한 풍자극인가? 또는 목숨을 살려준 물고기, 잘못 인용된 시편들, 회개하는 가축들이 등장하는 것을   모든 것이 조금씩 뒤섞여 있는 것인가?  말씀이 주현절의 마지막에 주어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가장 밝게 비추는 곳은 이방인들, 유대인들,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신가?

 본문의 중심은 9절의 "누가 알겠는가?"이다. 누가 파도와  파도 아래의 생물들을 다스리시는  특이한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알겠는가;  누가 그의 앞에서 도망한 이의 입으로 거룩한 노래를 부르게 하겠는가; 누가 사막의 덤불과 위대한 도시 그리고 청지기와 증인이 되라고 보내졌던 이들 모두를 살피시겠는가?  본문을 주석하기 위한  가지 방법은 니느웨의 주민들, 요나,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주요한 등장인물 각자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니느웨의 주민들- 본문의 특별히 재미있는 점은 외부자 혹은 원수로 여겨지는 이들의 예상치 못한 신앙심이다. 발람,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니느웨의 주민들이 전형적인 인물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복해서 따르기를 거부하는 요나와 반대로, 니느웨의 주민들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없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질 것이다!"라는  문장의 설교를 듣고 왕과 주민 그리고 가축까지 회개한다. 확실히, 아브람과 사래가 부르심을 듣고 출발하고, 어부들이 초대를 받고 따라가는 , 말씀 전체를 걸쳐 신앙심의 열쇠는 응답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내부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시편을 암송할  있는(2:1-9)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들, 원수들이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믿고 그에 더해 행동으로 옮긴 니느웨 주민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름인  "여호와" 말씀을 받는 반면, 니느웨 주민들은 "하나님"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계약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그들은 신앙을 실천하며 예배하고 섬기는 대상이 어떤 신인가 알고자 한다.  

요나- 요나는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들 이래 "불신하는 내부자" 최고봉이다. 요나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34:6-7)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저는 알았습니다."(4:2)라는 다음  부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벗어날  없는 하나님(139)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 아모스 같은 가장 준엄한 예언자와 비교해서도 하나님의 정의나 자비와 거리가  파괴에 관해 설교한다. 그는 일례로 하나님의 소유로써 구원을 찬송하지만(2:9) 니느웨의 경우엔 그것을 원망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같이 행동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이것은 우화인가 희극인가? 진지한 역사이야기인가 난해한 풍자인가? 아니면 아마도 심오한 계시일  있는가?

여호와(YHWH), 또는 주님(하나님)-성경 속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은 위협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 하나님은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을 선택하신다. 하나님은 금송아지 사건(32)이후 모세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겠다고 위협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리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돌들로도 소리치게   있다고 말한다(19:40). 첫 번째 손님들이 주인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할 변명을 하자, 두 번째 그룹의 손님들이 즉시 초대되었다(14:15-24). 그러나 아직 여기 니느웨의 왕이 했던 "누가 알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진행형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어디까지 미칠  있을까? 하나님은 처음 1, 2장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를 놓아주셨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3장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셨다. 말씀하시길..."이라는 구절로 요나에게  번째로 자비를 보이신다. 성서 속의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한번 말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번째로 말씀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사막의 덤불과 니느웨 사람들  아니라 별로 내켜하지 않는 요나 자신과 같은 증인들도 연민하시고 살피고 계심을 보이실 것이다.

 요나라는 이상한 책에 나오는 복음의 재미있는 점 하나님일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특정의 사람들과 함께할   자비와 연민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요나가 사막의 덤불을 신경쓰는 모습과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며 키우시는 식물(5)이다. 누구도 하나님 정원을 파괴하거나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버려두거나, 다른 예언자를 대신 지명하거나, 혹은 분노로 그를 살라버리기로 결정하신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 상황이 있다. 성서 속의 하나님은 요나와 이스라엘, 예수의 비유의 첫째 아들과 초대 교회와 같이 하나님과 붙어있는 이들과 함께하신다. ?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며 너희를 위협하러  것이 아니다(11:9)."

그렇다. 요나는 분류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복음이다. 우화 또는 희곡? 진지한 역사 또는 난해한 풍자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주현절에 읽기에 나쁜 책은 아니다.

 

 목회적 관점

 

요나는 시간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조직운동가의 조언을 이해했다. 생각이 행동을 만드는 게 아니라, 행동이 생각을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불안은 가까이 있고 희망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희망은 나중의 일이고, 불안은 지금 일이다.

멸망까지 40일이 남았다고 요나가 말할 때, 어떤 때는 요나의 말을 믿고, 다른 때는 요나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내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나는 예언자가 내가 잘못 가고 있다고 한 말이 옳은지 어떤지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될 것이다.

가난하게 되거나 추방당하는 것과 유복하고 편하게 되는 것은 아주 다르다. 유복하고 편안한 사람은 다급하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누군가가 추방당하고 누군가가 해고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요나 같은 예언자가 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한 집착을 관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세련된 예언적인 트릭을 사용할 수 있다. 억압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또는 곤경에 처한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한번은, 친구에게 내가 조금 덴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내 친구는 “불도 안 붙였잖아” 라는 짧은 대답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 말이 나를 니느웨로 데려왔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는 이 삶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일 사십일의 시간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왔다.

예언자들은 우리가 불을 붙이는 데 집중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우리를 오늘날로 즉시 데려 온다: 거기에서 예언적인 에너지가 나온다.

뜻밖의 발견 serendipity 은 훌륭한 경험이다. 때로는 멋진 것들이 내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발견은 목표를 방해할 수 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진행하는 동안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은 때때로 예언의 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써야 하는 연극, 우리가 불러야 하는 노래,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변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교회 같은 것들을 방해한다. 전략은 훌륭하다. 전략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조와 같은 것에게 우리를 맡길 필요가 있다. 신조는 종교적 맥락 안에서나 밖에서나 믿음의 진술이다. 우리는 니케아신조나 혹은 개인적인 사명 선언이나 개인적인 지도 map 가 필요하다. 우리는 목적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의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개 거실 가구 밑에 양탄자가 있다. 잘 보지 않지만, 거기 있다. 우리들 대부분도 보이지 않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이지리아 동부의 마사이 족이 1960년 성령집회 Congregation of the Holy Ghost 라고 부르는 그들의 의회에서 다시 작성한 Gem Na 신조의 방식을 좋아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한분 높으신 하나님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약속을 지키셨다고 믿는다. 그는 육신을 입었고, 유대인이고,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게 태어났고, 고향을 떠나 항상 멀리 다니면서 on safari 선한 일을 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고치셨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가르치셨고, 종교의 의미가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거부당했고, 고문을 당했고,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혀 죽었다. 그는 무덤에 묻혔지만, 하이에나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셋째 날에 그는 무덤에서 일어났다.

 

우리 삶의 중심에 어떤 종류의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만든 세상에서 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만든 세상에서 살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넓고 전략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교조적인 사고를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몇몇 사람들-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단체들과 대부분의 학교 시험들-은 측정의 개념이 지나치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성공적인 교회였는지를 어떻게 측정할까?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선택을 했다는 것으로? 아니면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교회가 움직이게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신조가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는 그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이 아무리 길거나 짧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정한 목표에 부합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의 목표는 뜻밖의 발견을 극대화하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아름다움이나 탁월함, 또는 좋은 농담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좋은 부모가 되거나 좋은 학교의 이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를 아는 것이 신조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그늘의 문제다: 어떤 나무 밑에서 서서 생각하고, 걸러내고, 전략을 짜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든, 우리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간에, 이 이야기는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일깨워준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다가 결국 니느웨로 갔다. 한때 거만하고 강력했던 왕은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었다. 심지어 하나님도 그 도시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하나님을 포함해서, 이 이야기 속의 모든 사람들은 후회한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방향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 구절은 “누군가가 ‘나에게 계획이 있다’고 말할 때마다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유대의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설교적 관점

-2005년 뉴욕타임즈 신문은 조크의 죽음을 (the death of the joke)을 보도했다. 헤드라인에 “진실로 조크는 죽었다”(Seriously, the Joke Is Dead)라고 쓰면서 이 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부고장을 못 본 사람들이 있을 듯 해서 다시 보도하는데 조크는 최근에 30년간의 오랜 투병 끝에 죽었다...조크는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1)

미국의 가장 위대한 유머작가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사망보도는 매우 과장된 것이다. 조크는 요나의 시대나 지금이나 언제나 있는 것이다.

-요나서는 독자들이 문자주의자인가 혹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문자주의자들은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그들은 이 재미있고 비현실적이고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역사적인 것으로 읽어낸다: 그래서 그 요점은 놓치지 않을지 모르나 그 재미는 맛보지 못할 수 있다.

-요나서는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처럼(a joke) 구성되어 있어서 황당한 서두와 (요나가 받은 불가능해보이는 사명) 도피라는 응답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듯 반대방향으로 도망간다)으로 시작한다. 바다에서의 재앙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요나는 의도하지 않게 [배에 탔던 사람들로 하여금]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만들었고 마음이 완악했던 선원들도 그로 인하여 회개를 한다. 하지만 요나 자신은 구원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선원들은 배를 구하기 위해 화물칸을 가볍게 하고 그러다 마침내 요나를 배 밖으로 던진다.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게 되었을 때 요나 자신은 큰 물고기 배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요나는 기도한다. 그가 피해서 도망쳤던 바로 그 하나님께 이 깊은 바다에서 부르짖는 자신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기도한다. 기도가 계속 진행되면서 상황은 아주 진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런 상황을 만든 하나님께 대해 탄원과 원망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그 물고기는 사정없이 요나를 마른 땅으로 토해놓는다. 이제 스스로 니느웨 사람들에 비해 너무 선하다고 생각했던 이 유대인은 더럽혀졌다.

-이 모든 구성은 성서정과를 읽는 우리들을 웃게 만든다. “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셨다”. 우리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첫 번째 말씀했던 것과 비교하여 거의 단어하나 안틀리고 같은 명령을 하는 것을 보며 웃는 히브리 독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프로 코미디언들은 이[렇게 웃기는] 방식을 “반복어법” (callback)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요나는 니느웨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요나에게] 이 도시는 무척 혐오스럽고, 이 이야기에 의하면 터무니없이 커서 [둘러보려면] 3일을 걸어야 하고 가로지르는데만 약 60마일 (96킬로미터)이다. 분명히 이 과제는 마지못해 하는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한 말이라고는 고작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이다. 그의 선포에는 희망의 말이 없다. 그는 어떤 약속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는 반복음(antigospel)을 선포하고 있다. 요나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노아의 철자를 바꾼 것이다)는 홍수같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40일이 지나 쓸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니느웨는 회개한다 (does repent). 온 도시가 회개한다. 심지어 이방인 왕도 베옷을 입고 금식할 것을 요청한다. 홍수로 인해 고통을 받은 유일한 사람은 요나인데 그는 그 물고기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들은 확실히 최소한의 신실함으로 인해 성취될 수 있다: 그러한 신실함(faithfulness)은 단순하게 누가 감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하느냐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이런 놀라운 성공을 보면서 요나는 못마땅하여 화가난다. 그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임을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히브리인의 옛 하나님 찬가를 불평으로 바꾸어 놓는다. 멜로드라마처럼 그는 하나님께 자기자신을 고통의 자리에 두라고 요청한다. (데이빗 플로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분명히 유대인의 불평표현 방식이다. 지금 나를 죽여달라는 조크는 오늘날 유대인 유머의 가장 근간이 된 것들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자기 아들이 의대를 그만두거나 기독교 여성과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머리를 오븐에 부딪히는 어머니 또는 우디 앨런의[미국 유대인 영화제작자이자 배우, 코미디언] 전 작품에 있어서 그러하다.)2)

-[요나서에서]우리가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한 때는 “모든 민족들에 대해 빛”이라고 스스로 여겼던 이스라엘이 군사적 약화와 주변 이방인 국가들에 대한 외교적 양보등으로 인해 보다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앗시리아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가장 강하고 사악한 적국 진영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유대인도 니느웨 사람들을 돕고자 원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앗시리아 왕과 그의 백성들이 히브리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다는 어떤 역사적 기록도 없다. 이 이야기는 공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메시지는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 구원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그 때에 우리는 전심을 다하여 우리의 적에게도 최소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메시지라는 사실은 오늘날의 [뉴스] 헤드라인에서도 알 수가 있다. 이 말씀이 쓰여진 것과 같은 때의 일이 지금도 일어난다. 격렬한 전투가 오늘날의 니느웨인 모술(Mosul)에서 일어나고 있다[니느웨는 오늘날 모술이다]. 그곳에 있고싶지 않은 미군병사들은 역시 거기에 있고 싶지 않은 이라크인들과 싸우고 있다. 이 전투는 어떤 바보의 심부름처럼 보인다. 어떤 병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 싸우지 않고 또 예언을 따라 군대가 거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힘의 현 상황은 요나 이야기와 반대로 되어있다[니느웨, 곧 모술이 현재는 약하다라는 의미]. 하지만 오늘날 [현지에 있는 서로간의] 의심과 적대감은 옛 이야기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러한 죽음의 혼돈상황에서 총체적 난국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헤드라인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요나만큼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옛 적대적 관계에 있는 두 진영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그것이 조크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728x90
반응형
LIST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40장 21 ~ 31절  (0) 2023.03.01
신명기 18장 15 ~ 20절  (1) 2023.03.01
사무엘상 3장 1 ~ 10절  (0) 2023.03.01
사도행전 10장 44 ~48절  (1) 2023.03.01
사도행전 8장 26 ~ 40절  (0) 202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