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의 사건은 이방인의 오순절 성령강림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 같다.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44)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첫 번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 사도행전 10장의 성령강림은 이방인의 세계에서 일어났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이 외국인들과 관련을 맺게 되었고, 유대인 범위 밖에 있는 남자와 여자와 아들과 딸들에게 복된 소식이 선포될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방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방언을 하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오늘 본문 이전의 구절들은 <베드로가 이스라엘인들이 금기하는 부정한 음식에 관한 환상을 본 것>과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것>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베드로는 종교적으로 부정한 동물로 여겨지는 파충류(레 11:29-38)나 조류(레 11:13-19)를 먹는 것을 금지하는 유대교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는 음성이 들렸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14)라고 강력하게 그 명령에 저항했다. 베드로의 이러한 응답은 신비한 환상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익숙한 유대교적 관습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 후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라는 음성이 세 번 들렸다.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 때문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워 문 밖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고 있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셨다. 성령은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이 계획이 무엇인지 그가 깨닫게 하기 위해 개입하셔서 베드로의 계획된 일정을 깨버리신다.
베드로의 기도 중에 성령이 개입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소외되고 배척받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움직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은 베드로의 기도를 중단시키고 문 밖의 낯선 사람을 만나라고 명령한다. 베드로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관심 대해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렇게 헌신적인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베드로가 그 환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일어나서 내려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거라.’”(19,20)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이미 지시를 받았는데, 이제 문 밖에 있는 낯선 사람들을 통해 그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해야만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묵을 곳을 제공함으로 포용의 복음을 실천하였다. 베드로는 교회의 선교가 낯선 사람들, 국외자들, 이방인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면 안 된다.”(15)
베드로는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나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을 향해 떠났다. 그러는 사이에 고넬료는 그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렀다. 고넬료가 왜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냈는지에 관해 설명하고, 베드로의 발에 엎드려 절을 하자, 베드로는 자신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알려주신 것이 무엇인지와 예수와 성령에 관한 일들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28) 베드로에 의하면 그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것이다. 이 계시는 구원의 새로운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이 계시 이전에 베드로는 구원은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도 구원에 포함된다. 그들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에 포함된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 계시를 통해 국외자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에 포함된다고 믿게 된 다른 이유로 베드로는 요엘서 2장을 말한다. 오순절의 유명한 설교에서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언급했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34,35)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을 고넬료와 나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베드로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신적인 계시가 밝히는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정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베드로는 하나님에 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복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성령이 다시 개입하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치 성령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의 새로운 이해에 관한 베드로의 웅변적인 설교>가 아니라 <베드로가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라고 독자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하나님이 구원의 중심이다. 베드로는 하나의 도구였지 구원의 원천은 아니었다. 성령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계시는 명확하다: 이방인 신자는 유대계 신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방인이 우선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 그대로 받는다.
주석적 관점
사도행전의 성령은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분명한 표징을 주기 위하여 베드로의 훌륭한 설교에 끼어들었던 것이 아닐까? 누가는 이미 청중들이 설교의 중요한 순간에 끼어드는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고(2:37), 사도행전의 후반부(17:32; 22:22; 23:7; 26:24)에도 여러 번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성령의 직접 이끄시는 것은 사도행전 전반(13:2, 4; 15:28; 16:6-7)에 (역자 주: 사도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이 두 흐름(역자 주: 사도들의 역사와 성령의 인도)이 함께 등장하는데 성령은 베드로의 설교에 즉각 개입함으로, 교회의 사명에 대해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누가는 성령이 극적으로 설교에 개입하기 전 베드로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말하게 했으며, 마치 이 일이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베드로와 함께 있던 "할례 받은 이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들"(45절, 저술자 번역), 말하자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이와 구별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왔던 그룹들의 눈 앞에서 그 구별과 차이들을 성령께서 무너뜨리시는 놀라움을 우리가 함께 느끼도록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는 이방인의 포용에 대한 하나님의 전례없는 사건과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함께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응답에 대해 주의깊게 가르쳐준다.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부르라고 하는 환상을 주시고(10:1-8);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완고하게 구별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요청하는 환상(9-16절); 베드로가 부정하다 여겨왔던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의 출현(17-18절); 그리고 이 세 사람들과 함께 고넬료에게 가라고 지시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19-20절); 그들을 집으로 들이고, 다음날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만나러 가는 베드로의 신실한 응답(21-24절)이라는 단계 속에, 우리는 베드로와 고넬료를 함께 하게 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보게 된다.
이제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한 이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선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그들을 서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와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이 전하라 하신 모든 것을 듣고 싶은"(10:33) 열망을 전한다.
본문 시작부분에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에게 어떻게 하나님은 성령과 권능으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는가"(38절)에 관하여 증거하였다. 예수의 치유사역,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간단하게 설명한 후, 베드로는 "이것이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며, 그를 믿는 모든 이는 그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43절)."는 말로 그의 설교를 요약한다.“모든 이"라는 단어는 성령이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임함으로, 베드로가 방금 말한 예언이 성취 되었고, 이 이방인 신자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한 네 번째 사건(2:1-4; 4:31; 8:17)이지만 세례 이전에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사건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베드로와 함께 했던 이들 가운데 욥바에서 지붕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삼중 환상에 함께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놀랐다. 매우 거리끼는 마음으로 할례받지 않은 가족을 향해 가는 베드로와 동행해야 했던 이들은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이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의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마치 기적처럼 "성령의 은사가 이방인에게도 부어졌다"(10:45)고 분명히 말한다. 놀란 기색 없이 이 집에서 며칠 머무르는 동안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명령한다.
"우리가 가진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고 교회의 뒤이은 응답을 강조한다. 욥바에서 베드로의 환상 속에 들려진 말씀을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교회는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10:15). 고넬료와 그의 사람들에게 부어진 성령은 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령의 은사를 "우리처럼 받아" 오순절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과 분명한 연관성을 보여줬다.
베드로의 질문은 마치 그가 이 사도행전의 몇 장 뒤에 예루살렘의 교회에서도 이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는 것을 미리 변호하는 듯한 수사학적 표현이다. (이 질문은) 몇 장 뒤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하여 교회에서 일어났던 논쟁에 대해서 상기시킴과 동시에 독자들에게는 수사적인 기능까지도 갖는다. 누가가 고넬료와 다른 이방인 신자들에 대하여 세례를 베푼 사건 전반에 대하여 베드로가 다시 한번 언급하도록 함으로써(11:1-18), 독자들은 일어난 일과 교회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보다 넓게 적용되는 의미, 즉 하나님이 분명히 기쁘게 받아주신 이방인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영이 이끄는 공동체에서도 충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환영받아야 한다는 뜻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교회의 세례예식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선재적인 성령의 은사에 대한 승인이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사실은 (역자 주: 성경에) 가능한 가장 명확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이 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 점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도록 청하였다"(10:48).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일도, 새로운 그룹에 대해 형식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집에서 베푸는 환대를 받으며 같은 테이블을 나누는 것 또한 의미한다.
목회적 관점
우리의 세상은 경계들로 가득하다. 무단침입금지 표지판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에게 나가라고 경고한다. 수영장 물 위에 떠있는 밧줄은 얕은 부분과 깊은 부분을 분리시킨다. 체육관 바닥에 그려진 선은 경기장을 “범위를 벗어난” 부분과 구분한다. 철로는 마을의 한 부분을 “선로의 다른 쪽” 부분과 나누어 놓는다. 큰 강, 산맥 또는 신중하게 협상된 보이지 않는 경계가 땅을 여러 나라로 분할한다. 울타리가 있는 마당에서 울타리가 있는 경계선까지, 우리의 경계는 내부자를 보호하고 외부인을 내쫓으려고 한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경계는 분리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우리 민족’과 동일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차별화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배우고 알게 된다. 가족, 친구 그룹, 학연, 직장 부서, 교파와 종교, 국가와 동맹, 그리고 수많은 다른 그룹 및 단체들은 다양한 경계에 따라 자신을 만들고 유지한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초기 교회의 삶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두 사람과 또 그들의 문화 사이에는 명확하게 정의된 경계가 있다. 베드로는 유대인 기독교인으로, 그의 정체성은 정결한 식단을 언급하는 본문에서 확인되었다(10:14).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이지만, 가장 이방인스러운 로마 백부장이다(1-2절). 이 본문은 이방인 고넬료와 만나기 위해 베드로와 함께 온 다른 유대인들(45절)을 ‘할례를 받은 신자들’로 확인함으로써 이러한 경계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분리 말고 다른 것을 염두에 두셨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요청으로 가이사랴에 온다. 백부장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하는 비전을 보았다. 같은 시간에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비전을 보았다(10-15절).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민족”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않으신다”(34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44절)에게 성령이 내리셨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셨다”(45절). 이방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베드로의 유대인 동료들은 놀랐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 사람들도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47절)라고 말한다. 고넬료와 그의 백성들은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이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것이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이며 인간이 만든 경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윌리엄 윌리먼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영웅’, 이 드라마의 ‘스타’는 베드로도 아니고 고넬료도 아니다. 대담한 약속을 해주시고 그것들을 지키시며 인간의 차별들 가운데서, 사람들의 편파성 가운데서 길을 찾아내시는 은혜롭고 자극을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누가 “내부자”이고 누가 “외부자”인지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개입에 의해 바뀌고 있었다. “핵심 세력”의 경계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경계를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을 만큼 계속 확대되었다. 하나님이 편파적이지 않으시다는 베드로의 발언은 정결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이 짧은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의 너그러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의 넓으심에 대한 실례를 본다. 이 이야기는 성령은 신실한 신자들이 가진 경계에조차도 구속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부어지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비전을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 교회를 위해 중요한 말씀이다. 배제로 인한 상처가 우리 문화와 교회에 깊숙이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회도 교회도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주의, 연령주의, 민족주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 그 밖의 편견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경계를 확고히 유지하면서 여러 형태로 분리를 계속 전파한다.
성령을 이방인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묵상하며, 우리는 성령이 여러 인종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하시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과 남성, 젊은이와 늙은 이,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등등의 완전한 참여와 리더십을 수용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성령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경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본문의 증언은 베드로도 고넬료도 그들 스스로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부어지면서 그들은 각자 분리된 장소에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깨뜨렸다. 성령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경계를 넘어 부활의 증언이 전해지게 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비전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의 은혜가 확장되는 광경을 보고 있을까? 성령께서 편견과 배제의 경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주변부에서 나온 목소리가 있는가? 교회는 성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놀란 “할례 받은” 사람들이 될 것인가?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설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환상을 보는 젊은이와 꿈을 꾸는 노인(사도행전 2:17, 요엘 2:28)은 진실을 말하고, 비전을 공유하고, 자기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설교한다면, 우리 자신이 경계를 넘어가는 문턱으로 인도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설교적 관점
“베드로가 여전히 말을 하고 있는 중에 성령이 그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왔다.” 분명히 이 이야기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영화로 치자면 교인들은 관객이고 이야기는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와있으며 오직 전에 이 영화를 본 교인만이 앞으로 진행될 일을 알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을 먼저 가이사랴에서 고넬료를 만나게 하고 그 다음에 욥바로 가서 기도하러 지붕 위로 올라가는 베드로를 보도록 하면서 이 이야기의 주제를 파악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만일 이 본문으로 어린이 설교를 한다면, 설교자는 어린이 네 명을 불러내어 온갖 종류의 네 발달린 짐승들, 파충류, 새들이 들어있는 큰 보자기 네 귀퉁이를 잡게하고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이들을 잡아먹어라!” 이 때 나레이터는 베드로가 배가 고파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베드로는 결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 때 베드로의 불복종에 대해 한 소리가 들려온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세 번 같은 일이 일어났고 베드로는 영문도 모른 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이야기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데리러 오는 장면으로 전환함으로써 좀 더 빨리 진행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면서도 여전히 이상한 환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고 한다. 이들이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이 퍼즐 조각들을 맞추기 시작한다: 커다란 보자기, 부정한 짐승들, 그리고 이 이방인의 집. 그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있거나 방문하는 일은 불법이지만, 하나님은 내가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정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간결한 설교를 하는데 그의 설교에서 예수는 성령과 능력을 부음받은 자였다.(10:38)
베드로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그 전에 그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 줄 기회가 있었고, 또 그 전에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었으며, 그 전에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하였다. 물론 베드로에게 온 “할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게 된 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베드로는 놀란 이들에게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7)라고 물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앞서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보십시오, 여기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놀라 이렇게 소리칠 수도 있다. “모든 면에서 당신은 자격미달이다. 당신은 다른 인종이고 성적으로 부적격자이며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두 경우 모두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중단할 적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빌립을 사막에서, 그리고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서 놀라게 하였다.
성령은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교회사학자인 로즈마리 류터 (Rosemary Radford Ruether)는 다음 두 가지 일을 위해 조직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1)전통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2) 각 세대에서 이 전통을 살아있게 만드는 성령의 흐름에 열려있기 위해.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제자들에게 이 두 가지 과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성경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제자들에게 또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그 성에 머물러 있으라 (눅 24:44-49)라고 말하였다. 이 두 가지 과제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즉 예수의 이야기는 증인들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성령은 빌립과 베드로같은 설교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때때로 성령은 교회를 놀라게 하고 기존제도를 혼란스럽게도 한다. 한 친구목사는 로마 카톨릭 사제와 함께 이끌었던 에큐메니칼 예배에 관해 말했다. 그들은 사제가 왼편에 서서 빵을 분배하고 그 개혁교회 목사가 오른 편에서 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성만찬이 시작되었을 때, 참석자들은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너무 기뻐서 사전에 정한 규칙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였다. 몇몇 개신교 신자들은 왼편으로 갔고 또 몇몇 카톨릭 신자들은 오른 편으로 갔다. 그 사제와 목사는 미리정한 규칙의 혼란을 목격하였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는지만 확인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빵을 주는 일을 누가 막겠습니까?”
때로는 전통이 너무 엄격해서 성령이 새로운 말씀을 전달한 틈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맨해턴 지역 워싱턴 하이츠에(Washington Heights) 있는 루터교 교회 목사로 사역했다. 그 교회는 두 교회가 합쳐진 것이었다. 그 중 한 교회는 1896년에 설립된 것으로 할렘의 145가와 Edgecombe거리 사이에 있었다. 1920년대 중반에 그 교회는 그 곳을 떠나 북쪽방향으로 이전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이후 남부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해서였다. ‘이방인들’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교인들의 결정은 인종차별주의와 기존의 조건을 유지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예배드리는 방식을 바꾸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법을 모르며, 루터교 교인으로 남아있어야 하며 침례교나 오순절 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 등이다.
때로 성령은 우리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하는 강한 욕구를 뚫고 들어오느라 힘들 때가 있다. 화석화 된 전통을 깨고 성령이 뚫고 들어오려는 그 곳은 과연 어디인가? 어떻게 우리는 전통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성령을 받아들이면서 그 전통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해서 전달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설교를 통하여 예배 후 계속되는 대화에서 제기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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