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빌립의 가는 길을 일일이 인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나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26절)라고 말한다. 빌립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인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를 보고 그는 마차로 달려간다. 그는 즉각 내시가 소리를 내 읽고 있었던 이사야서의 말씀(53:7-8)을 이해했는지 묻는다. 당시에는 글을 소리를 내 읽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속으로 읽는 것을 선호하는 풍토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아마 수도원 생활 방식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내시가 에티오피아인이었다는 것이 꼭 그가 비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인종적 특징이 빌립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다양하고 혼합된 인종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은 솔로몬과 시바 여왕 시대에 에티오피아에 소개되었었다. 간다게 (에티오피아 말로 여왕이라는 뜻)는 유대계 에티오피아인일 가능성도 있다. 인종차별이 큰 문제가 된 것은 근대와 후기근대사회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나 Dwight Hopkins와 Robert Hood의 지적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미학과 철학 분야에서도 인종적 차별이 발견된다. 그 한 예로 기원전 7세기 경의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satyr)라는 반인반수의 인물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두꺼운 입술, 넓은 코, 곱슬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0-406)는 그리스인의 고상한 덕목에 견주어 볼 때 모든 외국인은 본성적으로 노예이고, 굴종적이라고 단언했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사람들을 자율적인 사람들과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분법을 그의 “정치학”에서 더 강화하여 스키타이 사람들은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비교하면 지능이 월등하게 좋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시의 인종적, 민족적 배경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고대 사회에서 내시는 궁정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거세된 남자 노예였다. 대개 그들은 사춘기 이전에 거세되었고, 왕실의 여성들을 시중드는 데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렇지만 내시는 성적 타락의 전형으로 여겨졌었다. 본문의 내시가 읽고 있었던 이사야 53:7-8은 사람들에게 기피당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사야서는 내시, 포로, 가난한 자, 병자, 장애자, 추방당한 자 등에게 희망과 약속을 주는 책이다. 이사야 56:4-5는 메시아가 오셔서 내시 등 소외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성회에 아무 제한 없이 참여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예수의 추종자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새끼 양”과 같은 메시아를 묘사하는 글을 읽는 것>과 <예수가 종종 이사야서를 갖고 가르쳤다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쉽게 감지했을 것이다. 이사야서는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고 있고, 그것은 오래된 신명기·레위기적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했다. 모세 시대에 신명기와 레위기의 율법은 내시에게 사회·종교적으로 매우 낮은 지위를 부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는, 흠이 있고, 불구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내시에게는 매우 제한적인 참여만을 허용했다.
빌립은 내시의 사회적 지위, 민족, 인종, 성, 성 정체성 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Amy-Jill Levine과 Susannah Heschel과 같은 학자들은 빌립이 예외적인 유대인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내시를 위한 목회적 돌봄은 기독교에서나 유대교에서나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멸시당한 경험을 이해하는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기피 인물로 여겨지는 내시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시의 성적 지위가 그의 종교·사회적 활동을 다양하게 제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랍비와 제사장을 포함해서) 이사야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Amy-Jill Levine과 같은 유대인 신약학자는 1-2세기나 그 이전에 유대인들의 변화된 관행에 관한 연구를 했다. 행 8:26-40에 나오는 빌립의 예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확신을 갖고 가르치고 계시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복음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긍정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빌립은 내시에게 만일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물세례를 받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성기능이 회복되고, 여성에게 관심을 두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빌립은 단지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고 성취되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사야 53:7-8, 이사야 56:4-5 및 사도행전 8:5-12은 동성애자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성정체성에 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는다. 오늘 본문은 주류 집단과 생물학적으로, 성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이사야, 예수, 빌립, 그리고 내시처럼 <예수 안에서 계시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아무 차별이나 편견 없이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주석적 관점
밖을 향하여. 사도행전의 시작 장에서, 예수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라는 말씀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지리적 경계를 사도들에게 알려주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끄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설교와 기적을 행함으로써 그들의 사역을 시작한다. 복음에 대한 반대가 점점 강해지고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를 반대하는 첫 번째 큰 박해가 있은 후에 제자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에 가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8:1). 독자들은 예수 자신이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요4)로 그 본을 보이셨다는 것을 기억하겠지만, 빌립이 이끄는 사마리아 전도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서 말씀을 전파한 첫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특유의 문체로,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유대를 통하여 사마리아로,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프리카로 우리 이야기의 영웅인 빌립이 이디오피아 인에게 복음을 전달한 이 복음의 행진을 담대하고 힘차게 기술한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마리아 전도를 맡기면서 빌립은 하나님의 천사에게 이끌려 경로를 변경하여 지중해 해안의 가자를 향하여 남서쪽으로 걸어간다. 가는 도중에 그는 병거에 타고 있는 한 이디오피아 사람을 만난다. 빌립은 이디오피아 인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크게 읽고 있는 것을 듣고는 그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 아프리카인은 정중하게 빌립을 병거에 오르도록 하여 그 글에 대하여 대화한다. 빌립에게 이것은 교회 교육자들이 "가르칠 수 있는 순간(a teachable moment)"이라고 불리는 기회가 되었다.
빌립과 이디오피아인(26-29절). 사마리아에서의 빌립의 선교사역은 환영받았고 그는 예루살렘/유대라는 익숙한 환경에서 더 먼 곳으로 기독교의 경계선을 넓히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지중해 해안의 가자를 향한 서쪽 해안의 특정된 어떤 외진 길로 가도록 인도하심을 받는다. 빌립이 에디오피아인을 만난 것은 이 외딴 길에서였다.
누가는 이 두 사람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빌립은 기독교 공동체의 헬라어를 쓰는 그룹, 특히 과부들을 돌보기 위하여 열두 사도에 의하여 지명받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기독교인 일곱 명 중의 하나이다(6:1-6). 그는 전도자 빌립으로 알려져있으며 말년엔 가이사랴(1세기 팔레스틴의 로마관청소재지)에 정착했고 이 곳의 기독교 공동체에 의하여 예언자로 인정받는 네 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행21:8-9).
이디오피아인은 정부 수반인 왕대비에 대한 공식적인 명칭인 간다게의 국고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가 병거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지위를 보여준다. 그가 선지자 이사야의 두루마리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부자였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는 "내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평생을 여왕의 궁궐에서 일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디오피아인의 성적인 상태(역자 주: 내시)를 누가가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 언급하는 동안 일일이 그는 에디오피아인이 "내시"였다고 언급한다. 그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유대교에 매우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전에서 예배하려는 유대인이거나 유대교에 끌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각각의 경우 유대교와 관련해서는 문제가 생긴다. 거세한 남성으로써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신23:1은 "하나님의 성회"에 내시들을 들이지 말라고 한다, cf. 레21:17-21). 게다가 만약 이방인이라면 그는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환경에서는 중요한 "내부자"인 사람이 그가 받아들이려고 하는 신앙에서는 "외부자(아웃사이더)"로 보여지게 된다.
이사야에서 읽은 것(29-35절). 다시 한번 빌립은 "병거로 가서 함께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병거를 따라 달리면서 빌립은 고대의 관습에 따라 큰 소리로 읽는 것을 듣는다. 이사야서 말씀을 듣자 빌립은 "당신이 읽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 말씀은 그 때나 지금이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 말씀이다. 그는 종의 노래 중 넷째 글로서 아마도 가장 슬픈 부분(사52:13-53:12)을 읽고 있었다. 비록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 말씀은 성서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긴 하지만, 이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의 존재는 이 이디오피아인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빌립의 대답에서 우리는 최초 기독교 공동체의 성서해석에 대해 엿볼 수 있다. 성서를 그리스도 중심주의적으로 읽어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는 종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식했다. 예수는 이 예언의 분명한 성취였다. 그래서 빌립은 이디오피아인을 깨우친다.
여기 물이 있다(36-40절). 하나님의 종, 예수에 관한 복음을 듣고 이디오피아인은 세례 받기를 청한다. 여기서 그는 약간의 감정을 담아 묻는다. 열정적으로 그는 "내가 세례 받는데 걸릴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기 원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성적인 상태는 그에게 걸림돌이 된다. 내가 유대교의 일파인 기독교인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구성원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본문은 단순하게 두 사람이 강으로 내려갔고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말한다.
한번 더 성령은 빌립을 그가 가이사랴에 있는 집에 당도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이끄신다. 내시는 게다가 "기뻐하면서" 계속해서 집을 향하여 떠났다. 즐거운 귀환은-잃어버린 양과 동전을 회복하는 기쁨 그리고 불법을 행한 아들을 맞아들인 아버지의 기쁨(눅15),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의 기쁨(행8), 이방인들을 영입한 공동체의 기쁨(행15)처럼-누가의 두 책에 흐르는 주제이다. 이디오피아 내시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남성 또는 여성 누구든지 복음에 응답하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전한 일원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는가라는 의미이다. 누가의 교회에서 진지한 질문이었고 우리에게도 역시 그렇다.
목회적 관점
에티오피아 내시의 세례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보편적인 포용성이라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다. 사도행전이 기록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회의 설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오순절을 시작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1:8) 전하는 것이다. 이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민족이 부흥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1:6; 3:21). 그러므로 복음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길을 잃고, 밀려나고, 잊혀진 사람들을 점점 더 많이 하나님의 자비의 날개 아래 모으고 있다. 에티오피아 내시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소외된 사람들의 회복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목회적 차원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한 세 가지 질문을 통하는 것이다.
1.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31절)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에티오피아궁전의 고관인 내시는 자기 마차에 타고,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여행하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성경은 종종 세상의 눈에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왕 같이 귀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쉽게 정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사람은 세상의 궁전에서는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왕궁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70인역 신명기 23:1에는 “성 불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주의 총회에 입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내시는 신명기를 읽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사야를 읽고 있고, 예언자는 더 희망적인 말을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에티오피아로부터 되찾아 올 것”(사 11:11)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또한 “나의 안식일을 지키는 내시들”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환영 받게 하고, “아들딸들보다 나은 이름”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56:4–5).
신명기인가 이사야인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환영을 받는가, 그렇지 않은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 놓고 보면, 어느 쪽으로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를 안내하지 않는 한 어떻게 그가 진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그를 가르칠 사람, 하나님의 영의 따뜻한 빛으로 종이에 적힌 차가운 잉크를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포옹을 느끼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그를 안내해 줄 빌립이 필요했다.
2. “여기서 예언자가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34절) 내시는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와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한” 사람을 묘사하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사 53:7~8). 내시가 빌립에게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자기를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으로 내시는 “이것이 이사야와 그의 상황에만 관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관한 것이기도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아니면 오늘,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라고 물었음에 틀림없다. 내시로서 그는 “굴욕”과 “거부당한 정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계신 것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결코 “그때”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오늘”, 예수께서 그의 고향 회당에서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눅 4:21) 하지만 빌립이 내시에게 이 이사야의 구절이 “그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님은 내시가 굴욕과 배척을 당하는 경험을 알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비천하고 소외된 상태가 되었다. 빌립이 내시에게 말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당신뿐만 아니라, 예수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았고,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이 고난의 자갈길을, 찬양의 고속도로로 바꾸어 놓았다.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볼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사 53:11). 내시가 수치를 당한 이야기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 펼쳐지면, 그것은 구원, 회복, 희망의 이야기가 된다.
3. “내가 세례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36절) 생각해 보면, 실제로 에티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그는 에티오피아에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과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정결법에 어긋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각이었기 때문에 잘못된 주권에 충성했다. 그는 잘못된 나라에 속해 있었고, 잘못된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잘못된 성(性)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께서 내시의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내시가 물었다. “전혀”라고 성령께서 속삭이셨다. 내시는 마차를 세우라고 명령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된 편견과 금기의 벽이 무너져서 하나님의 성령의 입김에 흩어지고, 길을 잃고 굴욕을 느끼는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넓은 은혜 안에서 발견되고 회복되었다.
설교적 관점
2주 전에 베드로는 회개에 관해 선포했다. 지난 주일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의 유대교 방식과는 다르게 한 사람을 치유하였다. 오늘 빌립은 초대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 곧 모든 사람이 공동체 구성원으로 되는 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사도행전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적 기독교인들 수보다 많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두 그룹 모두 회당 밖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했을 때 이방인에 의해 쓰여졌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의 이 이야기 역시 사도행전의 많은 이야기들처럼 반유대적 편견을 가지고 읽혀질 수 있고 그것은 첫 제자들의 인식과도 다른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선포는 다른 신앙을 비방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부활절 기간[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절까지의 기쁨의 50일간]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1세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메시아로 믿었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에 주목한다. 훗날 기독교라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까지는 아직 수백년이 남아있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교 안에 있다. 따라서 이 첫 복음에 응답했던 많은 이방인들은 개종자이거나 (완전히 유대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에디오피아 사람도 이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큰 소리로 읽고있는 중이다. 그는 내시이기 때문에 새롭게 얻은 신앙으로 완전히 개종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는 분명히 에디오피아 사람인데 누가의 서술에는 이집트 아래 지역 잘 알려지지 않은 큰 나라 출신으로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주석가들은 종종 이 에디오피아 사람을 그의 피부와 성으로[내시] 인해 이중으로 차별당하는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것을 통해 유대교의 배타성과 기독교의 포용성을 대비시키기도 하면서), 본문 어디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다.
-이 이야기에는 성령의 함께하심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령이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빌립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갔을 때, 그는 주님께서 엘리야를 사렙다 과부에게 보냈던(왕상 17:9) 그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빌립이 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못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사야 56:4-5의[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 종말적 예언의 행위를 시행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 있어서 빌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례를 준 것은 그의 전통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설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생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여행 중에 있는데 한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성령은 우리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 우리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인가?
-설교자가 처해있는 상황에 맞추어 이 본문을 다르게 접근해도 좋을 것이다. 성적 취향의 문제로 공동체가 갈등을 겪는 교회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적인 문제와 별개로 세례를 받은 점에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자기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정의한 남성의 범주에서 탈락한 남자의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내시가 이사야 53:7-8에 주목한 것은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고, 그가 예수를 만나게 되고 빌립에게 세례를 요청한 것도 바로 이 예언이 보여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종 문제로 교회가 갈등을 겪고있는 교회라면 내시의 피부색깔에 주목하는 것으로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다. 21세기 미국에서는 그가 외국인이라고 하는 점이 피부색깔보다 더 문제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선교팀이 마차를 타고 마을을 지나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기 보다는 라틴 아메리카를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지 않은가? [인종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외국인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돌보라는 설교]
-로버트 월 (Robert Wall)은 사도행전 주석에서 재미있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누가는 성경의 권위보다는 성경해석자의 권위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1)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 이야기에 등장할 때 그는 이미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갖고있지 못한 것은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될 누군가이다. 즉 그와 함께 있으면서 영적 확신을 가지고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그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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