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5절 208, 395, 370, 378
2004.12.08 은혜교회수요기도회 설교문
바울이 종말을 강조한 이유는 책망 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 후서도 마찬가지이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다림이 없다면 오늘 우리의 수고와 헌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살았던 이유,
교회에 모여서 세상의 즐거움을 뒤로 한 채 예배를 드렸던 이유는 바로 종말론적 신앙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에 지나도록 충성을 다하고, 남이 보기에 안타까울 만큼 주님 붙들고 살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눈물로 기도하면서 종말이 가까우니 더욱 충성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노라하면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던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이고 능력 있는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특성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도의 성장은 주님 오실 때까지, 그리고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결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서로 형제입니다.
형제의 특징은 혈연관계로 무언가 끈끈한 소속 의식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의 피를 나눈 형제라서 서로를 위험에서 보호하고 웬만한 것은 이해하고 넘어가며, 그리고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울이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는 남이 아니라 형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형제들답게 살 자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라고 합니다. 이는 요청하는 말로
지도자로써 무엇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써 간청과 애원하고 있는 간절함과 겸손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너희가 알고 최고의 가치를 두고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낯이 부끄럽긴 합니다만 성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이 세상에 최고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얼굴을 보면 못생겼고 하는 짓을 보면 영 시원치 않아도,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 하나만으로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을 보면 너희는 사는 날 동안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 뭇 심령들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하나님 말씀 안에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뭇 영혼들을 위해 말입니다.
또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화목한 것을 보면 그보다 기쁜 것은 없지요.
자녀가 서로 불화할 때 누구 편을 들 수도 없고 속만 상하게 됩니다.
그냥 어떨 때는 둘 다 혼내기도 합니다. 잘 잘못보다 서로 불화하는 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서로 깨닫게 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불화는 서로의 이해 부족일 때가 많습니다.
상대를 모를 때, 상대의 의도를 곡해할 때, 상대의 표정을 잘못 읽거나 내 중심적으로 생각할 때 예민해 집니다.
우리가 화목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임금이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는데 그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갚으라고 걍팍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더니 임금이 다시 그를 옥졸에 붙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무슨 비유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너희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화목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고 하나님의 원수 마귀와 짝짜꿍해서 살았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우릴 깨끗이 용서해 주셨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은혜를 받았으니 서로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용서의 조건이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미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대할 때 화목은 이루어집니다.
14절에 보면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라고 말씀하시는데 규모 없는 자는 본이 못 되는 자를 의미합니다.
'권계하라' 라는 것은 악에 동조하지 말고 선으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 악은 아니더라도 좀 본이 못 되는 자들을 보면 제쳐 놓습니다.
상대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지 말고 그 영혼을 사랑하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주를 믿는 성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제자의 발을 씻기며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위하고'라는 것은 편안하게 안정되이 위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품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그 사람 수준으로 내려가서 감싸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9~20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신앙은 항상 자라가야 하고 성숙한 신앙인은 상대방의 죄를 덮어 주는 자입니다.
그 영혼이 자랄 때까지 허다한 허물을 품어주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15절에 보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게 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선을 좇으라"하셨는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게 하라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권하라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행위로나 말로써 무례하고 나쁘게 해를 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는 다는 것은 우리도 같이 악한 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월권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 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별해 놓는 삶이 중요합니다.
“선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쫓으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을 참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선을 행하면 우리 안에는 놀라운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 보다 더욱 종말론적 삶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은혜 베푸시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서 평가받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연로하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오래 사신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부자로 사신다고 다 된 것도 아닙니다. 넓은 집에 사신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된 것, 쓸데없는 것에 우리의 인생을 소진하지 말고 정말 중요하게 붙들어야 될 것들만 딱 붙들고 열심히 살다가 주님 앞에 오라는 날 가야 합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았나를 돌아 보셔야 합니다.
바쁘게 산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바르게 사셔야 합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썩지 않는 것을 위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서, 주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위해서 목숨 바쳐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손해가 되든지 이익이 되든지 관계없이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 온전히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종말을 사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오늘이 마지막 날 인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종말론적 인식이 없는 자는 말씀을 들으며 은혜 받고 집에 갈 때 은혜 받은 말씀은 교회에 두고 나가서 살 때는 말씀의 은혜를 받은 것과 완전히 다르게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은 대로, 말씀이 여러분을 지도하는 대로, 말씀이 내 심령을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의 말씀을 통해 성도로써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주님! 성도로 세상을 살아 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는 이질감을 극복하게 해주시고 안과 밖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유혹과 갈등이 오더라도 능히 이기게 하옵소서
주님의 나라를 앙망하는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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