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16
2004.9. 22. 은혜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문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그 속에서 역사하는 그 자체가 바울에게는 기쁨이었고 감사였습니다.
이 믿음의 역사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을 많게 되었는데, 핍박을 한 무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핍박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행 17:5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고 찾았다”
이것이 유대인 교회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은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초기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를 믿음으로 예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살전1:6 “너희가...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되었다”를 보면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고 그들의 믿음은 진실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들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으로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키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족에게 핍박을 받아 온갖 수난과 고통을 받았지만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요 15:20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딤후 3:12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복음 전파에는 감사와 고난이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체가 감사요,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1:24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 가족들, 친구, 이웃들로부터 반대 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위협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고히 섰습니다.
롬 8:26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해 핍박받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시고 보호하시고 견고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은혜교회 성도 여러분!
데살로니가성도들처럼 반대와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견고히 서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순수성을 지속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함이고,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케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사역 당시도 계속적으로 진리에 대적자로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에게 예언된 메시아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처럼 여러모로 보나 복음적이어야 할 유대인들이 오히려 복음을 대적한 이유는 복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데 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한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엄중하신 율법만 보았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이 구원에 이르는 줄로 확신한 그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엉뚱한 복음이 등장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 같은 복음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고, 육체적 의식을 하나님의 약속의 표적으로 잘못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절대시하였고 안식일 지키는 일을 절대적인 의의 표준으로 여겼습니다.
이 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은 바울이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핍박의 동기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리키는 모든 의식은 할례건, 절기건, 안식일이건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의 예표로 그림자일 뿐입니다.
바울은 롬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꺾으신 것은 이방인으로 그 뿌리에 접붙임을 얻게 하려는데 있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역은 오히려 복음을 유대인 아닌 이방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의미는 개별적인 교회들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생명이 하나가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15~16절을 보면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노하심이 임하는 죄와 유죄판결이 무엇이든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었지만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무서운 죄로 인해 유죄판결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죄가 무엇인지 열거합니다.
유대인의 죄는?
먼저 메시야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할 사람들이 교권 투쟁에서 흘러나오는 질투심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였습니다.
영적인 지도자인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복음 전도자를 추방했고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 했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죄를 충만하게 계속 채웠고 가득 차고 넘쳐서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유대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원래가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의 거부로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복음을 등한시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유대인처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나오는 길에 걸림돌로 막고 있지는 않는가요?
내게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는 무엇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복음 전도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쁘다는 것은 핑계가 아닌가요? 혹 복음을 모르기 때문은 아닌지요?
나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메아리는 아닙니까?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것을 보며 감사하며 기뻐합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그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과 우리 안의 잡음이 그분의 음성을 못 듣게 할 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조건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유대인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은 착각입니다.
나 만하면서 교회에서 유대인 행사를 하는 나에게도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3서 4절에서 나의 아이들이 진리로 행하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을 보는 것, 주님의 일을 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열매였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나에게는 과연 바울처럼 ‘자랑’이며, ‘소망’이요, ‘기쁨’인 복음의 열매가 있습니까?
만약에 없다면 나는 분명히 복음 사역에 게으른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복음 사역에 무관심한 사람일 것입니다.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기도: 아버지, 복음을 나눌 권세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권능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불러주시고 당신의 자녀로서 합당한 길을 걷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정말로 당신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의로워질 수 있게, 당신이 순결한 것처럼 순결할 수 있도록,
당신이 사랑이 많은 것처럼 사랑이 많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이 용서하신 것처럼 저희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 우리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빚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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