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마태가 매우 주의 깊게 배열한 예수의 또 다른 산상설교-이번에는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설교임 (24:3)-에서, 예수는 서두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명령>이 아니고 <종말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전쟁과 박해, 신성 모독과 거짓 메시아, 천지의 요동과 함께, 인자가 영광중에 올 것이며(24:4-31), 그때가 속히 오겠지만, 아무도 그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고 밝힌다(24:32-44). 40절에 걸쳐 설교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의 지시사항이 나온다. 앞의 산상설교가 매우 빠른 속도로 경구와 같은 명령문을 연속적으로 전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설교의 교훈적 힘은 종말이 올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네 개의 연속적인 극적 이야기를 통해 구현된다.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에 관한 비유는 그중 두 번째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인자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우리가 현명한 처녀처럼 행동하고, 어리석은 처녀처럼 행동하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 13절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신랑의 도착이 지연되면서 열 처녀 모두 졸며 잤다(5). 이 본문의 신학적 핵심을 우리가 늘 깨어있으면서 초인간적인 경계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조금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데서 찾으려고 한다면 잘못이다.
- 또한, 본문이 우리가 잔치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완벽하게 갖추기를 요구한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다.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 자를 포함하여, 열 처녀 모두는 등에 들어있는 기름만을 갖고 있었다. 신랑이 베푸는 잔치에 참여할 준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고 해서 은총에 근거한 기쁨-잔치 주인이 우리가 실제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나눠준다는 점에서-의 의미가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 본문이 우리가 신랑의 도착을 참을성 있는 태도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열 처녀 중 아무도 기다리면서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 간에 차별은 없다. 적어도 오늘의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우리가 어떤 태도나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한 신학적 지침은 없다.
- 본문이 우리가 신랑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처녀들이 예외 없이 깨어나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기대하며 불을 더 밝혔다. 신랑의 임박한 귀환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강조하느라, 일상적 상황에서 기독교적 소망이 인간의 책임 있는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곧 있을 잔치를 기대하는 것이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와 같은 것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 본문이 신랑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구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심지어 어리석은 처녀들도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11) 하고 애원했다. 이 본문의 신학적 초점이 신랑이 누군지 아는 것의 중요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은 주인에 관한 각자의 지식에 근거하여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분하는 고질적인 악습을 지지하지 않는다.
지혜롭고 어리석은 처녀들을 분리하는 유일한 요소는 이것이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다려야 할 것에 대비하여 여분의 기름을 갖고 왔다. 그래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기 위해 24시간 여는 편의점을 찾고 있는 동안, 신랑과 지혜로운 처녀들은 혼인 잔치로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할 것을 대비하여 준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앞(24:32-36)에서는 예수가 임박한 재림에 관해 말씀했는데, 왜 여기서는 신랑이 더디 옴을 강조하는가? 종말의 지연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무기를 비축하고, 통조림을 많이 사는 것은 아닐 것이고, 통조림처럼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예수의 재림에 관한 답변을 숙지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새천년으로 접어든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은 권위 있게 다가오는가 그 반대인가?
그러한 질문에 신학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이야기가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점을 강조함으로 <너무 자세한 계시를 담은 묵시주의>나 <너무 실현된 측면을 강조하는 종말론>을 경계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주장은 기독교적 소망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실존적 고뇌를 너무 쉽게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의 내용과 특징에 대한 비밀스러운 특권적 지식>(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 못 받는지; 역사적 사건이 성경의 예언과 어떻게 대응되는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실지 등에 관한)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이 <우리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선취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대신, 본문은 우리에게 기다릴 준비를 하라고, 그리고 지금 우리의 등에 충분한 기름(지식, 믿음, 사랑 등)이 있다고 가정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는 주장과 우리가 종말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부터는 이미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세한 부분에까지 주의를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순탄치 않다고 경계한다. 신랑의 도착이 지연되었다고 그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잔치는 그가 오기 전까지는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약속된 것, 앞으로 이루어질 것,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요구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지식과 믿음과 사랑은 영원한 나라 이전의 시간을 살기 위한 도구이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다릴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속한 신앙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지겠지만, 본문은 적어도 다음의 내용을 암시한다: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라. 그들과 붙어 있으라. 하나님의 때를 예지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를 피해야 한다. 우리의 등을 좋은 것으로 채우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소용 있는 것이다. 혼인 잔칫집 안에는 이미 환한 빛이 넘칠 정도로 충만하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의 “열 처녀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있는데, 예수가 마지막 때에 대한 강론(24:1-25:46)의 중간지점에 나온다. 비유는 이전의 맥락에서 핵심적 주제를 취하고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 인자(24:30), 갑자기 예상치 않은 오심(24:44,50), 그리고 준비의 권고(24:42,44)이다. 마태복음의 다른 많은 비유들과 같이, 이것도 알레고리의 색조를 띄운다. 신랑은 재림에 오시는 예수를 말하고, 처녀들은 교인들을 대표하며,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짐을 나타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이 비유는 (마태가 선호하는) “천국”이 온전히 그려지는 비교거리를 제공한다. 열 처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예수가 말한 전반적인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묘사하는 것이다.
비유에서 상정하는 혼인잔치의 구체적인 맥락은 전체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헬라어 본문은 ‘처녀’라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NRSV는 이 여인들을 ‘신부’로 해석한다. 십중팔구 이 여인들은 그의 장인과 더불어 지참금 문제를 정리하고, 신부를 신랑의 집(또는 그의 아버지 집)에 데려와 결혼식을 전체적으로 준비하는 신랑 집에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처녀들은 신랑이 신부와 함께 돌아오기를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과 신부를 집으로 데려올 것이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처녀들은 등불을 들고 나갔다.
마태는 처음부터 열 처녀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제시한다.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어리석었다. 열 처녀 모두 등불을 들고 갔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마련하였고, 미련한 처녀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교회의 복합적 본질을 나타낸다. 교회에는 충실한 진정한 제자들도 있지만 가짜 제자들도 있는데, 이 구별은 최후심판에서 밝혀진다(13:36-43,47-50).
비유가 처녀들과 그들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 바로 신랑에게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신랑은 비유 끝에 분명히 말하듯 영광중에 오실 인자이며, “주님”이라 불리우며(11),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 하신다(12). 사실 마태는 이미 예수를 9:15과 22:1-10에서 신랑이라고 했다. 신랑의 돌아옴이 늦어지는 것이(5)아주 중요하다. 마태의 공동체에서는 이미 재림이 지연되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열 처녀 모두 졸립고, 잠이 들었기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신랑의 갑작스러운 도착이 한 밤중에 외치는 소리로 알려졌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6). 예수가 한 밤중에 오셨다는 고지는 그의 앞선 가르침에서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올 것이라 말한 바와 같다(24:44). 왔다는 선언에 쳐녀들을 깨어서 나와서 맞이하였다. 이것은 시험이고 진리의 순간이다. 모든 처녀들이 일어나서 자신의 등불을 손질하였다. 이 본문에 함축된 것은 그들이 잠들었기에 등불도 껴져있었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들은 기름을 미리 채웠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실 주님을 위해 준비해왔다는 것인데, 유진 보링은 이를 사랑과 자비의 일을 포함한 “제자의 책임적 행위”라고 칭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대로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이었다(마7:24). 이 처녀들은 그렇게 신랑을 위해 준비하였다(10). 그들은 등불을 켜고 만났다. 그들의 등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선한 사역으로 빛났다(마5:16). 그러기에 그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갔다(10). 슬기로운 처녀들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적절한 행동을 했던 긍정적인 모델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당황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은 기름장수에게 가서 사고자 했지만 늦은 밤이어서 거의 가망성이 없었다. 그들이 혼인잔치에 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그들은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라고 외쳤지만, 차갑게 외면당했다(8-12). 그들은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의 경고를 마음깊이 깨닫지 못했다. 혼인잔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또한 사랑과 자비의 사역의 기름을 가진 사람에게 예약되어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은 부정적인 예는 명목상으로서의 기독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비유는 적절하게 냉담한 거부의 언급으로 끝난다.
마태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러기에 인자이신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시작되도록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선언한다. 비유는 또한 기독교인들이 현재에 가져야 할 적절한 태도를 권고한다. 두 가지 극단은 피해야 한다. 하나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긴박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없이 늘어져 산다는 것이다. “제자도의 사역”의 기름을 얻는 것을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에 대한 전망이 공포와 불안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슬기로운 처녀들조차 평온하게 잠을 잤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걸쳐서 나타난 대로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충실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충실함은 마지막 권고가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깨어 있어라”(13).
목회적 관점
사람이 겪게 되는 일들 중에 결혼식보다 정서적으로 더 비중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부모는 사랑하는 딸이나 아들을 위한 결혼식에 시간, 에너지, 창의력, 자원, 사랑, 그리고 희망을 크게 투자한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결혼식은 사실상 불운, 심지어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는 취약한 사건이다. 한 편으로는, 주인공인 신부, 신랑, 그리고 부모는 감정이 예민해져서 쉽게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결혼식에는 눈물과 깊은 희망이 있지만 때로는 화와 분노와 좌절감도 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일이 잘못될 수 있고 종종 그렇게 되기도 한다. 어떤 목사와 사적인 대화중에 재앙에 가까운 결혼식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신랑 들러리가 길을 잃어서 리허설에 오지 못했고, 신부 드레스는 크기가 잘못되었고, 꽃은 배달되지 않았고, 신랑은 면허를 잃어버렸다.
예수의 생애가 끝날 즈음에, 그의 삶을 정리해야 할 때, 예수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로 가장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부담스러운 이 일을 택한 것은 중요하다: "하늘나라는 이와 같을 것을 것이다."
그 시대의 결혼식 관습에 대해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수 시대의 결혼식은 오늘 우리와 같이,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이었다. 하객들은 신부의 집에서 모여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신부의 부모에게 접대를 받았다. 신랑이 가까이 오면, 하객들은 신부 들러리들과 함께 횃불을 밝히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다.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한 사람은 모두 신랑의 집으로 걸어갔다. 신랑의 부모는 결혼식과 며칠 동안 계속되는 연회를 기다리고 있다. 예수와 그의 어머니와 예수의 제자들이 가나에서 그런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했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이유로 든 신랑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여럿이 잠들었다. 마침내 한밤중에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큰 소리에 깨어났다. 신부 들러리는 벌떡 일어나 등불을 손질하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다. 신부 들러리 10명 가운데 5명은 기름을 다 써 버렸고 보관해 둔 것도 없었다. 더 지혜롭고 신중한 들러리들에게서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들은 한밤중에 미친 듯이 쉬지 않고 기름을 찾아다녔고, 그러던 중에 행렬을 놓쳤다. 그들이 신랑의 집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문은 잠기고 그들은 해고되었다. 예수께서는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한다”고 결론을 짓는다. 깨어 있으면서, 준비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이 이 비유의 메시지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돌아오지 않으신다는 현실에 적응해야했고, 그들의 사명은 기대하며 기다리면서 충실하고, 용감하게,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인류 역사가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최종적인 성취와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며, (사실) 때때로 우리는 유명한 종말론자들 때문에 이 주제를 회피한다. 그들은 역사의 종말을 그림과 (대부분) 폭력적인 용어로 묘사하는 책들을 많이 판매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시대, 이 세상을 무시하고 마지막 때에 집중한다.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요점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온유한 섭리로 세상을 계속 사랑하실 것이며, 그 계획이 완료 될 때까지 창조의 과정을 계속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인간 역사 전체만큼 크지만, 그러나 또한 각 개인만큼 작다. 궁극적인 문제는 인류를 위해 해결되었지만 우리 각자에게도 개별적으로 해결되었다. 모든 성도들은 인간의 역사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신실한 사람들이다. 자유와 정의와 연민은 억압과 불의와 폭력과 고문의 세력 앞에서 연약해 보인다. 희망 속에 산다고 해서 역사의 가혹한 현실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주님께서 연민과 구속과 소망으로 계속해서 우리 삶에 들어오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자신 있게 그리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 불을 밝히기 위해 충분한 기름을 간직하고, 언제나 역사 속으로 도래하고 침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매를 걷고 일하라는 것이다.
교인들 중에는 심각한 질병, 수술 또는 실업과 같은 개인적인 미래를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우리 각자는 신랑이 올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고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 삶에 계속 나타날 것이라는 복음을 들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이 희망 속에 살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을 때 오신다.
-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한 제자가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고 정의를 위해 일할 때 오신다.
- 예수 그리스도는 위독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 때 오신다.
- 신실한 여성과 남성이 희망 속에 살며 하나님 나라의 일에 자신을 바칠 때 하늘은 땅에 침투한다.
Rainer Maria Rilke는 시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 장교에게 일련의 편지를 썼다. 그 중 하나에서 릴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청년의 탄식에 대해 응답한다.
왜 당신은 그 신이 영원 앞에 서 있어서 다가올 미래에 나타날 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당신의 삶을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날처럼 위대한 신이 탄생되어 가는 생명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적 관점
-지연(delay)은 견디기 어렵다. 우리가 소비자보호센터 담담자와 전화연결을 기다릴 때, 학교 앞 서행지역에서 시속 25마일로 운전할 때, 느린 인터넷 연결을 참고 기다릴 때등 지연은 빠른 세상풍조에 익숙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빠른 통신, 여행, 음식, 기도응답, 돈, 체중감소등을 높이 평가한다. “아직 여기야?”는 카시트에 앉아 여행하는 아이의 지루한 외침일 수 있다.
-우리는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는데 특히 하나님을 기다릴 때 그렇다. 결론적으로 열 처녀비유 (정확하게는 열 명의 신부 들러리비유)는 빠른 생활 패턴에 익숙한 21세기 사람들에게 심원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연됨을(delay) 특히 지연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는 신선한 소리이다.
-마태복음 24:1-25:46은 마태의 5개 주요가르침 중에 마지막이고, 민족들에 대한 심판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에 앞서 지연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비유 (마 24:45-51)에서 주인은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와서 그 종들이 힘을 남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 비유에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서 모든 처녀들 (신부들러리들)이 그 지연된 것에 준비를 다한 것은 아니다. 몇 몇은 그들이 예상한 시간만큼만 필요한 기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의 등불은 빛을 내지 못하고 그들은 미련한 자로 간주된다.
-이 비유에서 먼저 모든 처녀들은 차이점이 없다: 그들 모두 결혼에 맞는 옷을 입었고 모두 등불을 가지고 있다. 그들 모두 “주님, 주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잠을 자고 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를 구분하는 것은 지연되는 그 시간에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느냐이다. 슬기로운 사람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랑이 돌아와 그들의 믿음이 테스트를 받을 때, 그들은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삶이 기쁘거나 고통스러울 때, 순조로울 때와 역경이 있을 때, 재미있을 때나 지루할 때나, 슬기로운 자들의 신앙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그들은 공동체를 지탱하면서 성경공부와 기도, 자비와 용서를 베풀고 또 정의와 평화를 넘치도록 하는 일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을 비추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들은 세상과 우리 모두가 언젠가 변화되어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시민들처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삶에 힘을 주는 삶을 향하여 자신들의 생을 훈련시킨다.
-산상설교의 서두에 예수께서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6)라고 가르치신다. 또 그 설교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라고 상기시킨다. 비슷하게 오늘 비유에서 기름은 신앙, 선행, 실천 혹은 좋은 시절이나 하나님을 기다리는 때나 변함없이 빛나게 남아있는 영적 자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왜 처녀들이 그들의 기름을 나눌 수 없는 지를 설명해준다. 우리가 영적 자산, 스스로를 계발하는 일, 혹은 준비하는 일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듯이, 처녀들은 필요한 자원을 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혹은 더 늦게 오든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개별적인 영역이다.
-주목할 점은 닫힌 문과 끝없는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환상이다. 종종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 세상에서 시간이 아주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 어떤 기술을 배우는 일, 감사나 용서의 말같이 필요한 말을 하는 일, 나쁜 습관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일, 하나님과 관계를 깊게 하는 일, 사회에 기여하는 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등. 우리는 내일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이런 일을 오늘 미루곤 한다. 미련하다고 여겨진 처녀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들이 혼인잔치에 돌아왔을 때 신랑은 문을 열지 않는다. 너무 늦었다. 인생에 있어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핵심적인 것은 타이밍이다. 믿음과 사랑도 시기가 적절해야한다. 때를 맞춘 관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머뭇거리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따라 살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선행을 하는 그들은 지금은 알 수 없으나 분명히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한다. 미련한 사람들은 분명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위해 준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제 적극적인 제자도를 논할 시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새로운 삶, 보다 큰 헌신, 잘못된 우상을 버리는 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믿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는 열정을 요청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마 13:11) 가르치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했다. 마태복음 25:1-13이 가르쳐주는 비밀 중 하나는 지금 신앙으로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시간을 준비하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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