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텍스트에 충실함과 신학적 예리함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처럼 텍스트의 해석이 신학적 의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32절의 "모든 민족"(panta ta ethneμ)이라는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의 신학적 의미는 매우 달라진다.
우리가 이 헬라어 구절을 보편적인 의미로, 즉, 모든 지역과 시대에 속한 민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본문을 읽는다면 구원을 위한 조건(먹을 것을 주고 영접하고 방문하는 것 등)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런 해석에는 매우 심오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은혜로 혹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구원받는다. 우리는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데 이 행위는 일반적인 정의추구의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보는 행위를 말한다.(40, 45) 그러한 신학적 관점이 기독교 신앙 전통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그것이 주류적 관점은 아니다. 또한, 그런 관점은 복음서 전체의 주제와 모순된다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접근은 종교 간의 대화,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 간의 대화를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구원과 정의에 관한 입장은 구원과 행위를 분리하는 다른 종교보다는 이 두 종교의 핵심과 더 잘 연결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panta ta ethneμ”라는 문구를 비기독교도 이방인들이 기독교 선교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렇게 해석한다면 본문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교훈이 아니라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위협으로 읽힌다. 이 경우 본문은 기독교인에게 주는 경고라기보다는 위안이다.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돌려대라거나(5:39),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6:19) 명령을 받은 기독교인들,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과 같은 삶을 살았고, 기아와 가난과 투옥이 기다리는 길을 갔던 사람들은, 박해자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장면을 볼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때, 본문은 신자가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의 잣대가 공정한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유대인과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가 예수 이후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드러나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도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아니고 "이방인 비기독교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관점은 모두 본문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본문과 조화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만일 이 문구의 내용이 보편적이라면 예수는 왜 그 내용을 제자들과만 나누었을까?(24:3) 이 문구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면, 왜 불성실한 내부인에게 주는 세 가지 경고 이후에 이 문구를 배치했을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후자의 해석에 동의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이 최종적인 정확한 해석이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신학적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온 민족을 자신의 앞에 소환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순간 직전까지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만 알려지는 이 "인자"는 누구인가? 우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길 때, 인자를 영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인자를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영원한 형벌이 누구에겐가 내릴 상황인데, 우리는 그들의 미래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우리의 미래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행동만을 판단한다면 의도, 동기, 상황 등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일부 주석가들은 어느 한쪽 관점에 만족하지 못하여 이 두 관점을 조합하는 견해를 (특별히 바울의 "은혜를 통한 구원" 개념을 도입함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그들은 재판관이 예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들은 선교에로의 부름에 따르면 - 이것은 선교에로 부름받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것까지 포함하는데 (참고:마 28:19-20) -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은 실제로 은혜로 심판하시지만, 모든 인간은 타인에 대한 헌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심판의 위협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접근법 중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아마도 이 본문은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도 따로 떼어 해석하거나 한 가지 특정한 신학적 관점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러주는지도 모르겠다. 이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전체의, 아니 성서 전체의 다른 텍스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풀 수 있고, 적어도 너 넓은 배경 속에서 본문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본문들과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동시에 복음의 수령자이면서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 모두는 불신자이면서 동시에 신자이고, 다른 사람을 돌보라고 명함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도움이 필요하며, 인자에게 심판을 받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연약할 때 인자와 동일시 되기도 하며,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며 동시에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고, 염소이면서 동시에 양이다.
본문 자체는 그런 성찰의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본문에서 인자의 정체성이 밝혀지는 과정의 유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 영광의 보좌에"(31) 앉아 염소와 양을 분리할 권한을 가진 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양도했다. 인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 자신을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는 존재>(우리가 인정하고 싶든 않든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와 동일시했다. 이런 복잡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유동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고정적이고 명확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와 영원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정체성은 매우 유동적이고 복합적이다.
주석적 관점
최후의 심판 장면은 종말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24:1-25:46) 중에서 최종적이고 극적인 본문이다. 여기에서 마태는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최후의 심판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영광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몇 가지 교훈과 비유 뒤에 극적인 장면이 뒤따른다(24:32-25:30). 마태는 다니엘 7:13-14의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옛날부터 계신 하나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인자와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본문은 인자가 천사와 더불어 영광중에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있는 생생한 묘사로 시작된다. 그때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는데,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31-33). 예수는 영광의 재림에서 목자로 묘사되는데, 그 이미지는 마태가 여러 곳에서 하고 있다(2:6;9:36;18:12;26:31).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의 목자는 일상적으로 섞인 동물 떼를 몰고 다녔다. 밤중에 그들은 염소와 양을 분리했다. 양은 풀밭에서 시원한 공기를 즐기고, 염소는 추위를 보호해야 했다. 양들이 상업적 가치가 높았기에 염소보다는 양을 선호했다. 영광의 인자는 목자로서 예수는 자신의 오른 편에 양을, 왼편에 염소를두는 것으로 분리했다.
목자로 묘사된 인자는 왕의 이미지로 변경된다(34,40). 예수가 왕과 메시야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마태의 중요 주제이다(1:1;2:2;21:5;27:37).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왕으로서 심판을 행하는데, 인자는 그의 판결을 선언한다. 그는 양들에게 하나님께 복을 받고 그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라고 초청한다. 그들은 왕을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34-26). 앞의 다섯 가지 행동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자비의 행위이다(유대인들은 벌로서 감옥에 가두지 않았다). 그런데 양들은 왕이 필요한 때에 그를 돌보아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하였다(37-39). 임금은 그들이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다음 임금은 염소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임금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에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41-43). 양들과 같이 염소들도 임금을 돌보지 않았다고 하니 어리둥절했다. 임금은 그들에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한다(45). 염소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양들은 의인이라고 불리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46).
마태의 최후의 심판 장면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주석적 주제는 ‘민족’(ethne,32)과 ‘가장 작은 자’(elachistoi, 40,45)에 대한 해석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 다른 곳에서 민족을 이방인으로 특정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작은 자(mikroi)는 예수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이 용법에 주의하면서 헤링톤은 마태가 25:31-46에서 작은 자를 계속 끌어들이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본문에 이방인에 대한(유대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닌) 심판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들이 의인이냐 아니냐를 선언하는 기준은 그들이 선교사이든 일반 기독교인 이든 인자가 그들을 “가장 작은자”라고 말한 예수의 제자들을 자비롭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10:40-42을 보라).
이 제한적 해석은 학자들 간에 견인력을 가지긴 했지만, 오늘 본문을 다양한 영적 전통을 반영하여 좀 더 보편적으로 읽는 가장 오래된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아 보인다. 그것은 민족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작은 자는 누구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단순히 인간적인 관심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마태는 도리어 그의 가르침에 풍성한 기독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우선, 그는 예수를 율법의 결정적 해석자로서 역할에서(마5:17-20),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마22:34-40), 그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마5:43-48). 나아가 마태는 예수를 “율법의 화신(personification)”라고 묘사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는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몸으로 체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11:28-30). 그의 사역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데(9:36), 이 불쌍히 여김은 그로 하여금 오늘 본문에 열거된 그러한 자비의 행동을 실행하게 한다(마14:14-21).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0:28)고 선언한 예수가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도록 요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마태는 예수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제시한다(마1:23;18:20;28:20). 자비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연대의 표현은(40,45) 그가 계속 함께 있겠다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영광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의 제자들이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식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는 의인들이 ‘영원한 생명’(46)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복을 받은 자비한 사람들인데(마5:7),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마5:6)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갈증에 사랑으로 응답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기다리는 완전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서 권세가 있는 사역이나 기적으로서가 아니라, 특별히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 자비. 연민의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예수의 왕의 사역은 그의 제자들이 목자의 돌봄의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목회적 관점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정으로, 과격한 언어로. 매일 나는 돈을 요구하는 여러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최근에 어머니와 세 자녀 한 가족이 그랬다. 또 다른 한 남자는 “나는 방금 수술을 받았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서 T셔츠를 들어 올려 흉한 수술 자국을 드러냈다. “들어오세요.” 나는 말했다. “우리 사회봉사 센터가 도와줄 겁니다.” 그는 맹세했다. “나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 없소. 난 돈이 필요해요.” 그런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마태복음 25장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 없다. 나는 돈도, 시간도 없다. 게다가, 누가 정말로 가난한 사람이고, 누구는 단지 싸구려 와인 한 병을 원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도록 부름 받은 일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배고프고 정말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예수가 세운 유일한 기준은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들, 즉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특히 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당신과 내가 할 수 있고 하도록 부름 받은 일은 사람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읽는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너는 나를 찾아 주었다.” 지난 밤 부랑자들과 취객들이 술을 깬 동네 유치장뿐만 아니라, 악한 독재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뿐만 아니라, “감옥”이었다. 최근 미국 공무원과 민간 계약자들이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및 다른 비밀 군사 구금 시설에 감금된 이라크 수감자에게 한 일은 잘못되고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신뢰와 중동 지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모든 노력에 손상을 입혔다. 그것은 소중한 미국의 젊은 남녀에게 우리를 위해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한없이 어렵고 위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죄수들의 얼굴에서 자기를 찾으라고 말한 분[예수]을 불쾌하게 한다.
일레인 파겔스(Elaine Pagels)는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존엄과 가치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 구조의 기초라고 말한다. 인간은 학대와 고문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내 생각에 감옥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다. 사람은 학대받고 모욕당하거나 고문당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죄수에게 하는 일이,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군대 지휘관들과 경찰, 정치인들에게 책임감과 의무, 주의 깊은 감독과 높은 행동 기준을 좀 더 기대하고 요구해야만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는 우리를 그것보다 더 높고 더 나으라고 부르신다.
“병든 사람, 굶주린 사람, 노숙인, 억눌린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이런 작은 사람들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예수의 익숙한 말씀에는 세 가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다. 성경에서 예수의 하나님은 구름 위나 신비한 우주 어딘가에 있는 왕좌에 앉은, 멀리 계시는 초월자가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이곳, 지저분하고 모호한 사람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여기, 특히 당신을 필요로 하는 당신의 이웃 안에 계신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가? 가장 작은 사람, 취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 어린이를 보라.
두 번째 근본적인 진술은 종교의 실천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신문을 읽을 수 없고 종교가 세상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끔찍한 잔학행위가 저질러진다. 종교 당국은 성직자의 직권남용을 감추고, 그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례전을 거부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를 파문하고,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척할 것인가, 누구의 교리가 진리이고 누구의 교리가 거짓인지, 예수가 절대로 말한 적이 없는 쟁점들의 전체 목록을 두고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투자하며 싸운다.
그렇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신약 연구자들은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에 대한 유일한 묘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교회론적인 연관이나 종교적 실천에 관한 것은 전혀 없다. 이 구절에는 신학, 신조, 정통 신앙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여기에 오직 하나의 기준만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지 여부와 당신이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을 주었는지 여부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인데,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또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가치를 본받는 새로운 세상을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회 공학자가 아니라, 옛 부흥집회의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며 우리에게 진실하고 깊고 진정한 인생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만져서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라고 설득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에 관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도록 설득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필요에 집착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신다.
사랑하는 것이 삶이라는 비밀, 진리, 그 근본적인 교훈을 당신과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프로젝트다.
설교적 관점
-해마다 나는 특별한 이유없이 의사를 방문한다. 나는 예약을 하고 주차비를 내고 대기실에 앉아있다가 이후 전문의료팀이 나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종합검진을 받는다. 이 일은 정말 편안한 경험은 아니고 종종 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심장질환이 우리 가족력이기도 하고, 또 검진 후 전반적인 결과뿐만 아니라 관상동맥질환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만일 나의 LDL콜레스테롤 [나쁜 콜레스테톨]이 올라가면 갓 구워낸 과자도 끊어야하고 일상적 운동에 몇 마일 더 걸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어떤 종양이 발견된다면, 나는 더 많은 검사를 받고 악성종양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단계를 거쳐야 건강을 회복하여 좀 더 오래 살 수있다. 어쨌든 건강검진은 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여러 면으로 마태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묘사는 건강검진과 유사하다. 그 목적은 우리를 비난하거나 겁을 주려는 게 아니고 우리의 전반적인 건강상태, 나아진 것등에 관한 정보를 주려는 것이다. 결국 의사들이 우리가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 구원자, 재판관, 그리고 왕도 그러하다.
-이번 주 성서정과는 비록 비유가 아니고 마지막 심판에 대한 이야기 형식이지만, 그 주 목적은 이전의 세 가지 비유와 동일하다.마 24:10–14에 의하면 커지는 반목과 식어버린 사랑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가장 위험한 암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우리 속에 무관심을 종양처럼 자라게 두고 우리의 행동이 아무런 가시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 이전에 주었던 사랑과 관심만 생각하고 머물러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훗날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인자의 이미지는 자기중심적 삶을 제거해내고 신실하게 사는지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있는지를 성찰하는 건강검진 도구이다.
-사실 이 건강검진은 너무 중요해서 그것을 다루는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24:1–25:46) 부정적인 경고들 (24:48–51;25:8–12, 24–30, 41–46)이 긍정적인 것보다 보다 많이 제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기때문에(25:37) 훗날 잘못알고 한 행동과 선택이라는 변명은 불가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선택하느냐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행동에 대한 결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한다. 너무 거대해서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선택만이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혹은 첫 번째의?) 도구는 아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중대하다. 마태는 18:14에서 눅23:34; 요 12:32; 고전 15:22, 26-26; 그리고 빌2:10-11등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 강해서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구원받게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부각시킨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소비하고 또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느냐가 우리의 전반적 건강상태를 검진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풍성한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뿜어나오는 분수처럼, 하나님은 사랑이고 사랑으로 흘러넘친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그 무엇을 주셨고, 예수와 성령을 보내심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리고 자애스럽게 사랑을 모든 이들에게 부어주셔서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사랑을]그냥 주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된 우리도 [받은 사랑을]그냥 나누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사랑의 빚을]갚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그 일을 하나님의 사랑이나 다른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혹은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넘쳐나와 흐르는 사랑이 표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본문을 읽고 복음을 놓치기가 쉽다. 영원히 분리되는 양과 염소를 보면서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류애적사역으로의 부름을 조금 더 발견하고 설교할 수 있다. 그 결과 구원을 우리가 얻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대신 오늘의 성서는 구원은 우리가 종종 기대하지 않았을 때 발견하는 그 무엇임을 보여준다. 마25:37–39에서 의인들은 그들이 창조주를 돌봤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분명히 그들은 무엇을 계산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그냥 단순하게 나누었다. 44절에서 불의한 자들은 창조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줄 기회를 놓쳤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옳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왕은 계산된 노력이 아닌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사랑을 찾고있었다. 예수께서 보여주고 나누어 주신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그래서 이 본문은 건강하지 못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고를 보여주는 건강검진과 같다. 체중이나 혈압을 재는 것처럼 마 25:31–46에서 나그네, 옥에 갇힌자, 그리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또는 병든 자와 [우리가 받은 사랑을]그냥 나누는 일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과 건강을 평가하는 것을 돕는 검진도구이다. 만일 우리가 그냥 그리고 온전히 나눌 수 없다면,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며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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