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전통적으로 마태복음 25:14-30에 나오는 비유는 청지기직에 관한 교훈으로 해석되어 왔다: 달란트-재능, 기술, 자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것이지만, 이를 경제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각 기독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달란트를 받았고, 그들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기 보다는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는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혹은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나중에 결산을 해야 할 것이며, 그 결과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해석은 자유시장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정의라는 신념, 그리고 자기 계발의 중요성 등의 가치가 강조되는 미국 사회에 딱 맞는 해석이다. 틀림없이 그런 사회가 이런 해석이 나오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런 해석은 마태가 이 비유를 마태복음 전체에서 특별히 현재의 위치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신학적 이유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오늘의 비유는 예수께서 <임박하지만,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의미에 관해 말씀하신 이야기 중 세 번째 것이다. 네 개의 모든 이야기는 주인, 신랑, 왕의 귀환, 그에 수반되는 심판, 그리고 그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문을 청지기직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하다 보면 - 이는 그리스어 talanta를 너무나 구체적이고 한정된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talent로 번역함으로 생기는 불행한 오해에 기인함 - 마태가 강조하고자 하는 종말론적 메시지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이 비유가 누가복음에서는 삭게오가 놀랍게도 예수님을 영접한 이야기와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사이에, 즉 누가복음 19:11-27에 등장한다. 그렇게 위치함으로, 누가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경제적 문제와 구체적으로 연결이 되며 (삭게오가 그의 재산을 나눠 준다) 한 부자의 회심과 예수의 왕적인 예루살렘 입성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 강조된다. 이런 배치가 누가복음 신학의 틀에 조화되는 것처럼, 마태가 이 비유를 미래의 종말에 관한 설교 가운데 배치했다는 것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마태는 종말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청지기직에 너무 초점을 맞출 때 종말의 주제는 왜곡되거나 와전될 수 있다. 청지기직에 관한 교훈은 하나님이 새롭게 우리를 위해 하실 일보다는 이미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더 비중을 둔다.
또한, 우리는 이야기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가 없는 부분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종은 모두 칭찬을 받았다. 그들이 받은 달란트의 크기가 달랐고, 주인 앞에 서는 순서도 달랐지만, 두 종 사이의 구별은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법으로 주인의 재산을 두 배로 늘린다. 그들은 주인 앞에서 결산할 때 거의 동일한 발언을 한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동일한 칭찬을 듣는다. 그들은 동일한 상을 받는다. 그 두 종은 셋째 종에 비하면 그렇게 독특한 특성을 갖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셋째 종의 행동과 말과, 그에 대한 주인의 판단은 매우 독특하다. 이 비유가 종종 달란트(재능)의 비유로 언급되지만, 사실 이 비유는 달란트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셋째 종, 주인,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현재와 종말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마태의 신학적 메시지를 명확하게 드러나게 한다.
셋째 종이 한 달란트만 받았었다는 것이 중요한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많은 은사/한 몸"의 관점에서 (고전 10:13, 12:20) 주인이 각 종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그들이 감당할 만큼의 은사를 주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말하지만, 본문에서는 가장 적게 받은 자가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졌다. (고전 12:22-26 참고)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감당할 능력을 넘어서는 짐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셋째 종이 한 달란트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주인이 그 종의 실제 능력에 대해 정확한 예지력이 있음이 드러난다. 주인은 그 종이 다른 종처럼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한 달란트만 주었다.
우리가 주인을 종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주인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까지 취하려고 하는 굳은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고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24-25)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인의 관점에서만 종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종은 "악하고 게으른"(26), 그리고 "쓸모없는"(30) 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동정심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변명과 책망보다는 종과 주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춤으로 비유의 뜻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주인은 단순히 굳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셋째 종까지도 믿어주어 15년의 임금보다 더 많은 재산을 맡길 정도로 매우 관대하게 행동했다. 그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기는커녕, 처음 두 종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을 관리하게 맡겼고,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했다. 이로써 그들의 관계는 주인-종의 관계에서 동등한 관계로 변화되었다. (21, 23) 주인은 셋째 종의 변명에 근거해서 그를 책망한다. 만일 주인이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는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24), 종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기보다는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챙겨야 했었다.
셋째 종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주인의 달란트를 낭비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분명 공포의 영향을 받았다. 이 점에서 오늘의 비유는 매우 전복적이고 역설적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셋째 종의 생각을 몰고 가던 정서가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가 두려워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공포가 주인 되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속에 상상하는 하나님이다.
본문을 처음 읽을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두려움의 정서는 - 우리도 곧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30) - 우리가 극복하여 버려야 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오늘의 종말론적인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청지기직에 관한 교훈이 아니다. 본문은 도리어 두 종처럼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에 관한 신뢰와 도전정신을 갖고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주인이 돌아올 때 기쁨에 같이 참여할 수 있다.
주석적 관점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는 예수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24:1-25:46)의 결론 부분에 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9:11-17의 므나비유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마태의 비유는 인자의 영광 중 재림(24:45-51;25:1-13)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적절한 행동을 가르치는 비유 시리즈의 두 번째 것이다. 종말론의 맥락은 여러 가지 알레고리적 특징을 지닌다. 비유의 주인은 예수를 가리킨다. 달란트를 맡긴 종들은 교인들을 상징한다. 주인의 떠남은 예수가 하늘 아버지께로 간 것이고, 다시 돌아 온 것은 재림을 말한다. 보상과 벌은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 함유된 것은 주인의 돌아옴이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을 가져 온다.
달란트 비유는 정확한 사회적 배경은 모호하다. 한편으로, 주인이 종들에게 얼마의 달란트를 맡기는 것은(14-15) 부자사업가가 어디로 가면서 어떤 종에게 돈을 맡기는 데 아마도 영리기업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거두고 모으는(24,26) 것을 보면 다른 비유에서 볼 수 있는(21:33-43) 부재지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두 시나리오 모두 1세기 팔레스틴에서 가능하다.
예수의 비유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14-15)은, 여행을 떠나는 주인이 세명의 종을 불러서 달란트를 맡긴다. 달란트란 말은 여기에서 엄청난 돈을 가리킨다. 주인은 종의 능력에 따라 각기 달리 준다. 주인의 재량과 염려는 고려해 봄직 하다. 그는 종들의 능력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부당한 짐을 지우지 않았다. 주인은 특정한 방향을 지정하지도 않았고, 종들에게 재량권을 주었다(비교 눅19:13).
두 번째 부분에서(16-18), 종들의 이어진 활동이 간략히 묘사된다. 앞의 두 사람은 엄청나게 생산적이었다. 그들은 100퍼센트의 이익을 냈다. 이 종들은 잘 분별하여 적절한 산업에 투자하여 주인의 돈을 책임있게 운영했다. 세 번째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다르게 행동했다. 안전하게 하려고 땅을 파고 묻어 두었다(1세기에 안전하게 돈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세 번째 부분은(19-30)이 길고 세부적인데, 주인이 돌아와 결산하는 장면이다. 19절 시작하는 “오랜 뒤에”라는 것은 인자의 재림이 늦어짐을 말한다. 마태복음 종말론의 핵심 주제는 재림의 지연이다(24:48;25:5). 부지런한 종들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현재에서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적극적인 예다.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있게 임했다(20,22). 그들은 충성심과 책임감으로 행동하여 사랑과 자비의 사역(달란트가 상징하는)을 생산적으로 했다. 주인도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고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다른 많은 것과 함께 그들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았다(21,23).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은 앞의 열처녀 비유에서 혼인 잔치로 묘사된(25:10) 메시야 잔치를 말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이 주인에게 다른 양의 돈을 주었음에도 그들의 보상이 같은 것이 중요하다. 마이어는 “주님은 양의 개념으로 한 사람의 성취를 계산하지 않고 온 마음으로 하는 행동에서 보이듯이 그 사람의 충성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달란트 비유는 기독교인들에게 격려도 주지만 경고하는 기능도 한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무섭다고 여겼다(24). 그는 주인이 그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 한다고 평가했다. 이 종은 달란트를 숨겨놓았다가 돌아와 무서워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고백했다. 주인은 주님의 주권적 힘을 가리키는 묘사인, 심지 않는데서 거두려 한다는 것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은 그가 무섭다는 규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과 행동은 이제까지 전혀 달랐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는 세 번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부르며 꾸짖었는데, 돈을 맡겼으면 최소한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26-27). 달란트를 묻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등잔을 말 아래 내려 놓는 것과 같다(5:15). 그래서 달란트를 그에게서 빼앗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쫓았는데(19-30), 이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운명을 떠올리게 했다(25:10-12).
마태의 달란트 비유는 그것의 종말론적 지평에 의거하여 이해해야 한다.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긍정적 부정적 예를 보여 준다.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주인에 대한 묘사이다: 은사를 풍성히 주고, 능력에 따라 은사를 구별해서 주며, 종들에게 사랑의 책임감으로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하며, 그들의 충성에 기뻐하는 것이다. 비유는 처음에는 달란트가 외부적으로 수령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공표하지만, 구체적으로 29절에서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 넘치게 하고”라는 것은 달란트가 사실은 수령자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비유의 결론은 하나님의 너그러움에 대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비극에 대한 경고이다.
목회적 관점
이 이야기는 세 명의 종에게 펀드매니저 또는 "자산 관리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위탁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로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다. 펀드매니저에게 돈을 두 배가 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물어보라. 그러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펀드매니저는 아마도 틀림없이 우리 중 대부분이 들어 본 적이 없는 72의 법칙에 대해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투자 금리를 5%로 보장했을 때, 금리를 72로 나누면 그 돈을 두 배로 늘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된다. 5퍼센트를 72로 나누면 14년 반이 걸린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물으면, 돈을 더 빨리 두 배로 늘리려고 하면 위험이 극적으로 높아진다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대부분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모험 한 가운데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의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이었다. 그 전에 그는 안전한 갈릴리 농촌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하셨다. 수도 예루살렘에서 종교 당국은 그를 기존 질서와 자기들의 권력과 특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것이고, 로마인은 틀림없이 그를 평화를 혼란시키는 자로 여길 것이다.
비유는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부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3명의 종들에게 나누어준다. 엄청난 돈이다. 첫 번째 종은 돈을 시장의 자산 관리 회사와 고위험 벤처에 투자한다. 두 번째 종도 똑같이 하여 고위험으로 운영한다. 둘 다 아주 잘했다. 72의 규칙의 보상을 거둔다. 주인이 돌아와서 매우 기뻐한다. “잘 했어.” 그러고 나서 그는 미래에 그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길 것이라고 약속한다.
세 번째 종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의 돈과 재능을 사용한다. 그는 땅에 구멍을 파고 거기 모든 돈을 넣어서 보관한다. 주식 시장이 하락하는 시기에, 이 종은 매우 현명해 보인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주의 깊은 투자자다. 그는 돈으로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가 받은 돈 전부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여기 전부 안전하게 그대로 있습니다.” 그의 수고 때문에 그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사람 누구보다 가혹하게 취급된다.
처음 두 종이 위험 부담이 큰 벤처 기업에 돈을 투자했다가 그것을 모두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주인이 그들에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을 두 배로 늘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투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데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 자신과 그가 행한 일에 관한 것이고 그에게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다. 중심은, 그가 떠난 후 그들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과 그에게 신실하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에 관한 것이고, 결국 당신과 나에 관한 것이다.
가장 큰 위험은 어떤 모험도 하지 않는 것, 어떤 것에도 깊이 투자하여 충분히 깊고 절실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어떤 위험에도 마음을 쏟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험은 안전하게만 투자하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는 것이다. 정통주의의 전통적인 신학은 죄를 교만과 자기중심주의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를 보는 전혀 다른 렌즈가 있다. 고대 교회가 말하는 7가지 치명적인 죄 가운데 하나인 나태(sloth)라는 것이다. 나태는 배려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고,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고, 안전하게 행동하고,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구멍을 파서 돈을 땅 속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는 존경받는 사람들의 죄는 책임감에서 달아나는 것이라고 했다. 평화주의자였던 본회퍼는 그 자신의 책임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 암살 계획을 도왔다. 그의 책임감은 그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게 하였다.
어떻게 사느냐의 관점에서 이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예수는 걱정 없이,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투자하지 않고,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만 살려고 하는 결과는, 바깥 어둠으로 쫓겨나는 것 같은, 마치 죽음 같은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 우리 대부분에게 개인적인 신앙인 종교는 위험이 큰 모험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신앙은 개인적인 위로의 자리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신앙은 이 세상과 그리고 내세의 개인적인 안전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은 우리 머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 우리가 지성적으로 허락하는 믿음에 관한 목록들을 믿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온 신앙은 개인적인 신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나쁜 일을 피함으로써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종교가 소심하고 위험하지 않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우리를 제자로 부르셔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투자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의 책임의 지평을 넓혀서, 가능한 한 충만하게 살도록 하신다.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이상 그에 관한 생각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삶을 사용하고 투자하는 데 대한 새로운 책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 이르고 깊이 돌보려면 대담하고 용감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대단히 위험한 신앙의 모험으로의 초대이다.
설교적 관점
-반짝이는 금, 수정, 루비, 에머랄드등으로 가득 차있는 보믈상자처럼 이 비유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을 사용하기(Using Our Gifts)
-전통적으로 이 비유에 관한 설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재능과 능력을 발견하고 슬기롭고 지혜롭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권면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에는 무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셔야한다. 그러나 보다 이 보물상자를 좀 더 깊이 열어보면 보다 풍성한 것들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관대함과 자기제한 (God’s Generosity and Self-limitation)
-14절이 갑자기 시작되지만, 이 비유는 천국의 현재와 미래 (13:11, 25:1)의 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천국은 (kingdom of heaven) 한 사람이 엄청난 부, 권력, 자유, 그리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관대함에서 시작한다. 창조처럼 그것은 자유로게 그리고 관대하게 주어진 선물이다. “달란트” (talent)는 본래 금융용어로 특정단위의 금이나 은을 뜻한다. 언어역사학자들은 오늘날 재능이나 능력이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 탤런트(talent)가 이 비유에서 직접 유래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예수시대에 한 달란트 (a talent)는 일용노동자가 대략 15년간 일해서 버는 돈의 단위였다. 따라서 각자가 받은 선물은 엄청난 것이다: 다섯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평균임금으로 해서 평생을 번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맡겼다는 뜻이다. 그것은 일용노동자가 75년간 일해서 받을 수 있는 양이다.
-그리고 주인은 스스로를 제한해서(limiting himself)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운 공간을 갖도록 하고 멀리 떠난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서고 성장하여 기회를 얻고 잘될 수 있는 데 필요한 거리와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달란트를 맡기는 관대함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꺼이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적으로 살 수 있게 하신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과 자유공간을 주셔서 우리의 재능, 삶, 공동체, 미래 심지어는 우리의 운명까지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어린아이 엄마처럼 지나친 관심을 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공간을 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데 언제나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스스로를 제한하시고 우리가 스스로 배우게함으로 그렇게 하신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처음 부분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전체 비유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비유 서두는 놀라운 통찰력과 교훈을 보여준다.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기(Not Being Ruled by Fear)
-비유는 계속되고 비록 주어진 지침은 없지만 종들은 주인이 떠날 때 자신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해 앞의 두 종들은 재물을 두 배로 만들어서 주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쁨과 축복이 되었다. 대신 세 번째 종은 그 기회를 소홀히하여 땅에 달란트를 묻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하지않음으로 해서 심한 처벌을 받는다.
-신앙적 삶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 번째 종처럼 잘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부여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지니고 있는데 익숙하다. 우리는 신앙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알고있지만 그대로 사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장점, 시간, 사랑, 보물 그리고 재능을 땅 속에 묻어두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 우리 중 몇몇은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무엇을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작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분노나 질투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두려움과 불신이다. 그가 지닌 주인에 대한 생각이(관대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노동자 평균임금의 15년분에 해당하는 가치를 맡긴 그 주인)그를 두렵게 만들고 위축되게 하여 그는 주인이 베푼 기회를 게을리하고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또 주인의 자비로운 신뢰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하찮은 일이거나 부수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닌 자유를 가지고 진정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가 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가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바꾼다. 그러므로 두려움, 아무것도 하지않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이 보물들을 불안한 사회에 내어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위대한 보물 (Our Greatest Treasure)
네 번째 옵션이 있는데 그것은 순금으로 된 금화를 모여있는 회중석에 던져주는 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옵션은 우리 청지기가 받은 가장 위대한 달란트/보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설교를 보다 정교하게 하는 것이다.
-본래 달란트는 화폐단위였다. 점차 그것이 재능이나 능력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 또한 우리에게는 성경, 율법, 복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기쁜 소식이 주어졌다. 마태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시편 19편에서도 율법을 “...금보다...더 탐스럽고” (시 19:10)라고 부르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마 5:19)라고 선언하고 있다. 마태복음을 끝맺는 말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는 “너희는 가서...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 28:19-20)라고 가르치신다. 계명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들이 진실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예수의 분명한 우선순위이고 그 무엇보다 삶을 변화시키는 보물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땅 속 깊이 감추어진 보물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려움을 무릅쓰고 파내어 그 풍성함을 모두와 함께 나누는 기쁨을 택하기 보다는 무관심과 아무것도 하지않음으로 보물을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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