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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2장 15 ~2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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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어려운 구절이 다루는 신학적 질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와 하나님에 대한 복종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특히 세속 종교(civil religion, 시민 종교, 혹은 공민 종교로 번역하기도 하나, 본문에서는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종교적 성격을 띠는 경우를 의미함으로 세속 종교로 해석함)의 관점에서 보거나, 특정한 국가의 정서와 정책이 신의 인가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마태는 예수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분쟁에 대해 계속 말하면서, 그들이 예수가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을 꾸민 음모를 소개한다. 대리인들 집단이 예수에게 보내져서 진리의 이름으로 의의 본질에 대해 알려달라고 허위 간청을 한다. 예수는 이들이 선의를 갖고 왔는지 악의를 갖고 왔는지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길에 대해 가르친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출 30:13 참조).

예수가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지, 예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질문이다. 예수가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대답하면 그는 선동죄로 고발당할 것이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수의 대답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였는데 이 답은 매우 도전적이며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로마서 13장 1-7절에 따르면, 우리는 세속적 권위에 대한 의무가 있다. 그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고, 따라서 세속적 권위의 범위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있다. 우리가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세속 권위에 복종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와 같은 권위에 관한 단순한 이분법은 복잡한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이해하는 데 충분치 않다. 여기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제시하는 분석이 도움이 된다. 몰트만은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개인적(personal), 공동체적(communal), 제도적(institutional). 첫 번째 것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에 속한 한 사람의 종교로서의 신앙이다. 종교와 교회 생활은 한 사람의 내면과 감정에 관계되는 사적인 문제로 취급된다.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신앙은 인간의 고유성과 주체성의 수호자가 된다. 신앙은 <사회적 행동, 정치적 책임 및 경제적 행동의 영역>이 아닌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의 영역>에 속해있다. 신앙은 주로 내적 치유와 영적 재조정을 위해 활용된다. 그런 맥락에서, 신학적 질문은 사회적 현실을 다룰 수 없다.

두 번째 것은 사귐(fellowship)의 중재자로서의 신앙이다. 기독교는 인류 공동체로서의 인류(humanity as cohumanity)라는 초월적 차원의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 속의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조직과는 달리, 인류 공동체는 인격적(personal)이다. 그 안에서 고독과 고립이 사그라진다. 사람들은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찾고 있고, 교회는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제공함으로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사회와 대조되는 인류 공동체로서의 공동체 안에서, 교회는 세상과 단절하게 된다. 교회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가 이룰 새로운 사회에 관한 기대에 관심을 두지 않고, 현 사회에 대립하는 공동체를 만듦으로 사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세 번째 것은 제도로서의 신앙이다. 제도화를 통해 교회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균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은 제도적 교회의 권위를 신뢰함으로 삶의 의미에 관한 불안감 극복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본질을 일일이 이해하는 것보다, 단지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해진다.

몰트만은 교회가 이 세 가지 역할을 통해 사회적 현실에 적응해 왔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사회가 관심 두지 못하는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복잡한 역할을 수행하느라 사회에 대해 (사회가 듣고 싶은 말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몰트만은 교회가 새로운 바빌론 유수를 체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효과적인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는 부활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주어진 정체성을 포기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안적으로, 몰트만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의 지평 안에서 사는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며, 기독교 공동체는 부활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통치의 관점에서 살아 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세상에서 도피하고, 세상에 대해 영적으로 체념하는 것과 무관하다. 도리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과 세상 안에서의 소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혁명적인 세력으로 존재한다.

만일 기독교가 사적, 공동체적 또는 제도적 종교로 머문다면, 기독교는 세속 종교를 승인하고 현재 사회를 종교적으로 신성화하는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종말론은 기독교가 현재의 사회 구조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게 하며, 세속 종교를 비신화화 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가 공공의 자유를 위한 구체적인 투쟁에 참여하기를 강권한다.

예수의 응답에 담긴 <믿음과 세속적 권위의 복합적인 관계>는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예수의 부활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죽음,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실을 구원의 관점에서 조망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고 비인간화하는 죽음과 죽음의 시스템은 비판받고 저지당한다. 종말론은 우리가 사회에서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지적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사회 정치적 환경 속에서 고통당하며 살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연합은 현재 속에서 앞을 내다보는 삶의 방식(forward-looking way of life)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런 삶 속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속에서 이 세상 어느 영역도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없다는 관점에서 행동하게 된다.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과거에 오셨고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컨텍스트에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것이 오늘 본문을 접하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목회적 질문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의 짧은 예수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들을 탄복케 하고 우리도 탄복케 하는 완벽한 교사와 토론자인 예수를 보게 된다. 이것은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들 간의 세 번째 논쟁 중 첫 번째인데, 바리새인(마22:15-22,41-46)과 사두개인(22:23-33)들과 바꾸어가며 논쟁을 했는데 매번 그들을 놀라게 하고 침묵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역설, 절묘함과 뛰어남이 논쟁들마다 역할을 했다.

장면은 바리새파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헤롯당원들이란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의 지지자들로 보이는데, 하지만 다른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위선적 칭찬으로 시작한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16) 하지만 그들의 진지하지 않은 예수에 대한 칭찬은 하나하나 사실이다.

이 모두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으신 것처럼(행10:34;롬2:11), 편파적이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다. 칭찬의 마지막 구절대로 예수는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신다. 여기에서 편파성의 일반적 은유로 로마 데나리온 동전의 황제의 초상을 예수가 보여준 것은 역설적이다(20). 그리고 혼란스런 질문이 이어진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17) 여기에서 말한 세금이란 매년 수확과 재산에 부과되는 것으로 인구조사에 등록된 대로 결정된다. 세금의 실행은 유대정부가 했는데, 1세기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큰 경제적 짐이 되었다. 이 인구조사가 한 번은 갈릴리 유다가 이끈 주후6-7년의 로마에 대한 반란을 촉발했다. 만약 예수가 질문에 예라고 한다면 억압당하는 유대인들을 외면하는 것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폭동을 교사하는 것이 된다. 지혜롭게 예수는 어느 것도 하지 않고 단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엄포에 대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규정하며(18), 세금으로 내는 로마의 동전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이 질문자들은 그러한 동전을 성전에 가지고 있었다. 동전을 가져다 초상에 대해 언급함으로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동전은 데나리온 은화로, 한쪽 면에 황제의 초상이 있었다. 신격의 존칭이 새겨진 티베리우스의 초상이다. 예수의 질문은 초상과 적힌 글자를 세금과 연관시킴으로 황제에게 주어진 것으로 규정하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라”(21)라고 한정시켰다. 예수는 폭동선동으로 엮이지 않았다.

한데 예수는 상대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대답을 덧붙인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여기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상대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포도원과 소출물의 주인이신(21:41)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상기시켰다는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유에서의 심판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의 이곳 대화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몰두하다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데에 실패하게 된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황제에 대한 의무를 구별하고 있다. 신실한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구별은 분명하지만, 로마권력의 지지자들에게 그렇지 않다. 동전의 적힌 글자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임명한 황제에 대한 충성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황제에 대한 충성을 허용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에 종속된다. 한편으로는 예수는 반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엄청난 고통과 파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와 파괴가 동반된 주후66-70년의 로마에 대한 유대전쟁에 비추어, 예수의 말은 마태공동체에 실제적인 힘을 가졌을 것이다. 반란을 말하기는 쉽지만, 폭력적 전쟁의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은 엄청나다. 예수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은 신적 위임에 동의하는 국가신학에 기초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황제에 속한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지만, 단지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과 어긋나지 않을 때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이 속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21:41의 모든 소출물이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과 조응하여 그러한 소출물에 대한 세금의 지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세금을 내는 것을 허용했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위대함 아래에서이다.

그러기에, 세 번째로, 우리는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어떤 초기의 해석자들은 동전에 새겨진 초상을 보면서,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 황제의 것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기에 터툴리안은 3세기 초에 이렇게 말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황제의 것으로 돌려라.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은 하나님께 돌려라.”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은(17) 예수가 유대인 종교지도들과의 논쟁에서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위대한 계명의 가르침을 보면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22:34-40).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포함하여 율법의 완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표현되는 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은, 공모를 위해 억지로 서로에게 친절해져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을 드러내서 그를 고발하려고 한다. 그들은 점잖은 척 하면서, 동전을 이용해서 예수를 정치적 당파심으로 끌고 들어오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를 부역자이거나 폭동선동가로 몰아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그들의 도전을 신학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것을 이용해서 그들에 관해, 그리고 우리에 관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동전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에서는 우리 주머니에 있는 동전들이 예수에게 건네진 동전보다 더 적절한 신학적 진술을 한다. 동전들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 In God we trust” 라고 말하고, 또 “자유 Liberty”라고 말한다. 아마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단어들을 해석할 수 있다는 우리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가장 높은 열망의 선언으로; 우리의 선한 천사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또는 종교의 자유에 관한 우리 자신의 시민으로서의 신조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애매함의 표현으로서. 아마도 우리 동전에 새겨진 단어들은 우리의 통화 뒤에서 "완전한 믿음과 신용"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기관들의 그릇됨에 대한 냉철하고 시의 적절한 조언들을 상기시킬 것이다. 분명히 그것들은 자신의 부가 신의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예수의 적대자가 예수에게 건네 준 데나리온에 새겨진 글씨는 모호하다기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공격적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대사제 아우구스투스의 신성한 아들이며 황제. 그 시대 예수가 살던 사회에서 그 말은 억압과 신성 모독을 말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적들은 그 동전으로 예수를 극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질문을 정치적인 난제로 만들었고 정치적 대응을 기다렸다.

예수가 세금을 내는 것이 합법이라고 말했다면, 로마 총독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예수가 체포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는 종교 세력들을 분개시켰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그런 문구와 그림(그리스어로 eikoun이라고 하는데, 영어 icon이 여기서 유래했다)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규정하면, 그의 대중적인 지지는 강화되겠지만, 스스로를 악명 높은 폭동 선동가로 비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질문을 능란하게 확장시켜서 정치와 관련이 거의 없으며 체포의 위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결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도전을 자기에게 익숙하지만 한번도 말로 표현한 적이 없는 질문으로 재구성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는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마 6:24). 우리 중 누구도 분별과 선택에서 면제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속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21절)고 말할 때, 우리는 그에게 동시에 이행할 수 있는 두 가지 병행하는 의무에 대한 설명을 듣기 원하고, 그래서 시민적이면서 동시에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에 속한 시민으로서 우리의 좋은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모든 것을 위한 자리가 있으며, 모든 것은 자기 자리를 가진다.

그러나 예수는 시험하시는 것이지, 정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사한 책임들을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사진과 족보를 멀리 그리고 널리 새겨놓을 수는 있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진정한 거래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래서 황제는 동전의 대부분 또는 대부분을 얻을 것이며, 그의 닮은 모습이 차갑고 딱딱한 돈 한 가운데 얼마나 잘 표현되었는지에 대해 치켜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살과 피라는 동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모든 생명에는 그것의 근원과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에 새겨진 문장은 카이사르에 관한 신학 적 주장을 한다. 그것은 예수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가혹한 탄압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동전에 새겨진 말은, 사실 정치적인 협박이다: 황제의 신민에 대한 황제의 관심은 그들의 생계에 대한 황제의 권력이 위협받는 순간 갑자기 멈춘다. 하나님의 관심에 관한 예수의 신학적 주장은 권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우리의 날들을 바치는 하나님은 앞선 제국의 어렴풋한 그림자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완전한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민족을 위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묘사했던 그 하나님이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5-16)

하나님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부드러운 연민은 우리의 거래, 우리가 하는 모든 표현을 위한 영감, 우리 정치의 뿌리다. 세례는 우리의 진정한 화폐의 워터 마크다.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를 채우는 다양한 종류의 거래의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훌륭한 통로를 가지고 있다. 우리 중 대부분은 때로는 협력자이고, 때로는 전복적인 사람들이다. 아마도 예수가 매일 바쳐지는 난제를 쉬운 질문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 위로가 될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황제를 하나님으로 여기는가 아니면 악마로 여기는가. 그 사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 하나님의 손바닥이 우리의 형상을 지니듯이.

사실 이 이미지를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거나 거울을 볼 때, 세상과 더불어 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긴 비문을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당신이 보여주는 모습, 당신이 가진 것, 당신이 입은 옷, 당신이 하는 일, 당신이 계속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비문 밑에는 훨씬 깊은 표지가 있다. 눈빛으로 하는 입맞춤, 이마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작은 포옹. 그 모든 얼굴은 당신의 얼굴의 일부다. 하나님이 보시는 이미지를 우리가 보기 시작할 때, 예수 안에서 완전한 믿음과 신용으로 우리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우리의 형상이 새겨진다.

설교적 관점

-미국은 세금을 내는 문제에 관한 논쟁에 매우 익숙하다. 13개 영국식민지가 독립을 요청했던 길로 나아가게 한 것도 세금에 관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1765년의 인지세법[the Stamp Act,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서 발행하는 각종 공문서에 인지를 부쳐 세금을 납부하도록 한 법을 말한다. 이 법은 식민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미국 혁명으로 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이나 1773년의 보스턴 차 사건 [the Boston Tea Party, 보스턴에서 영국이 특혜를 주고있던 동인도회사의 차를 싣고있던 배에 식민지인들이 올라가 바다에 버린 사건. 이로 인해 영국과 식민지 갈등 고조]을 보면서 “대표자 없는 과세는 독재‘라는 선언은 보스턴에서 볼티모어 그리고 찰스턴에 이르기까지[식민지 전역에] 널리퍼졌다.

-비슷한 논쟁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가운데 비슷한 많은 이유로 전개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점유하고 있던 그 군대와 행정기관을 유지하는 세금을 내고 있었다. 유대인은 세금을 내는 문제에 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두 식민지에서 (미국과 팔레스타인에서) 세금문제에 관해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그룹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영국 정부를 지지했던 충성파와 그것을 반대했던 애국파가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정부를 지지했던 헤롯당이 있었고 반대했던 바리새파가 있었다.

-그 이름이 보여주듯이 헤롯당원들 (the Herodians)은 헤롯 안티파스 (Herod Antipas)와 결탁한 그룹인데 그 이름은 로마가 임명했던 유대인 왕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헤롯 대왕을 뜻함, Herod the Great, 헤롯대왕은 사후 유대 땅은 세 아들에게 분배되어 다스리게 되는데, 예수가 살던 지역을 다스리던 아들이 헤롯 안티파스였다-역자 주] 그들이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래새인들, 곧 유대율법의 세세한 것 까지도 지켰던 이들은 종교적 이유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이유는 점령 그 자체 보다는 세금을 내는 데 사용되었던 특별한 동전에 관한 게 더 컸다. 유대인들은 “신적인 황제” (the divine Caesar)형상을 새긴 특별한 동전을 사용해야 했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동전의 사용이 제 1계명과 2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은 로마에 대한 입장이 달라 협력할 수 있기는 어려웠지만 예수를 제거하려는 데는 이해관계가 들어맞았다. 그들은 예수에게 한 질문을 던졌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찬성을 해서 유대인들이 그를 친로마적으로 보게 되기를 희망했다. 헤롯당원들은 예수가 반대를 해서 그들이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자나 선동자로 고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어떤 식으로 예수께서 대답을 해도 그들은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 것 같아보였다.

-예수가 한 대답은 오늘날에 들어도 1세기 때처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드리라” (21절, RSV).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두 군데 곧 하나님의 가르침과 계명, 그리고 그들이 살고있는 정부를 대표하는 국기와 법에 충성을 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영역에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한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7절, RSV). 이 질문은 단지 경제학이나 정치학 혹은 이중시민권의 문제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양심의(conscience) 문제이다. 그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충성과 갈등이 생길 때 무엇을 해야하는 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정부가 서로 다른 충성을 요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이다.

-오늘 본문의 언어는 두 영역 모두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을 적법하게 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리라” (render)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포도테(apodote)인데 그것은 “의무적으로 정해진 것을 주라”는 뜻이다. 예수는 양쪽 모두 세금이나 다른 형태의 의무사항에 대해 불법적이거나 근거없는 요청을 하고있지 않음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 영역이 서로 충돌하기 전까지는 각각의 영역에 (하나님과 세속정부)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한다. 예수는 주어진 질문에 대해 어느 한 편을 선택하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신앙인은 세상의 영역과 영적인 영역 모두에 속해있는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책임을 균형있게 해야 함을 설명하는 식으로 답했다.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은 정부가 하는 일에 관심이 별로 없듯 세금을 내는 문제에 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불만이 있긴 하지만 언제나 세금을 낸다. 그들은 연방세 [federal tax, 미국은 연방제이므로-역자 주], 국세, 지방세등을 낸다,그들은 상품판매세와 유류세 그리고 호텔사용, 고속도로 사용, 사냥과 낚시 심지어 담배와 주류등에도 세금을 낸다. 그들은 이러한 세금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낸다.

-황제에게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칠 것에 관해 말하는 오늘의 본문이 실제로 의미있게 되는 것은 그들의 양심이 정부의 선택으로 인해 흔들리게 될 때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고문을 자행하는 정부에 대해 그 고문이 테러에 대한 전쟁을 유리하게 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고문을 반대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법률적 기관들이 동성애 결혼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동을 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리화나, 코캐인, 혹은 헤로인 [마약의 종류들] 사용은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이들 문제들과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이 오늘 이 본문이 교회에 도전을 주는 곳에서 던져지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이 문제들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교회를 향한 도전은 우리가 세금을 내야 하는가 혹은 내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큰 문제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정부의 행동과 신앙의 가르침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양심은 무엇을 따라야하는가의 문제도 제기된다. 지금까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결코 도외시하지도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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