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이 구절은 마태복음의 결론부에 가까와 지면서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는 종교적 기득권자들을 가장 정통적인 관점에서 비판함으로 그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예수의 목적은 율법이나 예언자를 폐하는 것이 아니고 완성하는 것이다!(마태 5:17)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시고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다. (23:37-24: ) 이번 주일 성서정과에 포함된 두 단락- 가장 중요한 계명(34-40절)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인지에 관한 질문(41-45절)-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깊이 살펴볼 때 공통의 주제가 드러난다. 둘 다 예수가 정통 유대인인 것을 강조하고, 바리새인들과의 깊은 대립을 드러내며, 예수의 신분과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예루살렘 입성(21:1-11)과 성전 관리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공격(21:12-17)이 있은 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매우 절박했다. 그들은 예수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에 관한 질문(22:15-22)과 부활에 관한 질문(22:23-33) 뒤에 나온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논쟁에서도 예수는 뛰어난 성경 지식과 반박 할 수 없는 논리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압도했다. 어떤 계명이 가장 큰 지 질문을 받고, 예수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오래되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경 구절, 즉 쉐마(Shema)를 인용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신 6:5)그저 그렇게 간단하게 놔 두기를 원치 않으셔서 예수는 앞의 구절과 매우 유사한 다른 성경 구절을 인용하신다: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 19:18)
이 두 성경 구절은 예수의 사명과 사역을 요약해준다. 이 두 구절은 서로가 서로의 해석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유사하다. 이 점은 이어지는 본문을 살펴보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기관들 및 바리새인들과의 만남이 있은 직후, 예수는 그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다른 사람들의 어께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에게 주의를 끌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한다.(23:1-12). 쉐마를 인용하면서 예수는 율법의 목적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향하도록 방향조정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물-심지어 원수까지도 포함해서-을 억압하거나 배척할 수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이웃으로 대우받아야 할 사람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데 율법을 이용했으나 예수는 이 성경 구절들을 통하여 이웃에 부여된 온갖 제한과 장벽을 깨어 부순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셨듯이,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 똑 같이 햇빛을 비치시고 비를 내리신다.(마 5:45)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원수도 사랑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길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는 길이다.(5:48)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차별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 즉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고 또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므로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미덕은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에 대한 선의이다.
예수는 그를 비판하는 자들을 지식과 지혜로 침묵시킴으로 당신이 성경의 참되고 충실한 해석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대결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고, 논쟁을 넘어 폭력의 영역으로 거세게 흘러가게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 같이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인 분으로서의 메시아이다. (마1:23)
두번째 단락의 주제에 예수가 스스로 소개한다.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면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예수는 메시아의 신분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신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전통적으로 모든 시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 왕은 왜 메시아를"나의 주님"이라고 지칭하는가? 다윗 왕이 메시아를 존중한 데서 메시아가 그의 하급자나 단순히 그의 자손이 아니라 그의 상급자라는 것을 나타내다. 메시아는 동시에 다윗의 계보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정체성은 그가 자신이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한다고 선포하는 순간에도 모든 전통적 예견을 뛰어 넘는다! (마 5:17)
예수가 메시아에 관한 관습적 기대를 거부하지만 예수의 성경에 관한 지식과 그 활용은 누구에게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예수는 충실한 유대인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경건한 유대인에게만 제한하려는 온갖 종류의 관습의 사슬을 부셔벼린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특정한 민족의 범위보다 크다. 메시야의 사명은 특정 집단의 구원을 초월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득권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특정 관심사, 자아관, 목표를 구세주의 보편적 사명에 종속시켜야 한다. 예수는 엄격한 종교적 요구의 준수를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시 하지 않고, 당신에 대한 충성을 어떤 특별한 집단에 대한 충성으로 여기지 않는다. 십자가가 가까워지면서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메시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마태복음은 당시의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라는 배경 하에서 기록되었지만, 우리는 예수의 비판을 유대인에 대한 것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종교를 권력, 명예, 차별 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종교적 관습에 쉽게 빠져든다. 안타깝게도,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나 오늘의 우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타당한 말씀이다. 우리도 메시아를 필요로 하며, 메시아를 만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당황하게 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본문은 다른 두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것이고(34-40; 막12:28-34), 다른 하나는 다윗과 메시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41-46;막12:35-27). 마태복음에서 많이 나타나듯이, 두 단락 모두에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언쟁을 벌이고 있다.
첫 번째 장면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율법 교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34-45). 이 동사(peirazo 4:1;22:18)는 적대적인 접근을 의미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비록 적대감이 나타나진 않지만 마가복음보다는 훨씬 더 전투적이다. 36절의 율법교사의 질문을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특정한 계명에 대한 물음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헬라어에는 한정관사가 없으므로 어떤 종류의 계명들이 가장 중요성이 있는가라는 정도로 보는 것이 낫다. 랍비들이 주석에는 유대 전통에 따라 613개 조항(이중 248개는 적극적 명령, 365개는 금지조항)이 있는 토라에대해 중요성의 경중을 따지는 내용이 가득하다. 예수 자신도 5:19에서 덜 중요한 계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와 같이 성서를 인용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6:5). 이 계명은 쉐마의 두 번째 부분으로,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일 외우는 표준 기도이다. 이것에다 예수는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잘 알려진 두 번째 인용(롬13:8‘약2:8)을 첨부하는데, 하지만 이것에는 쉐마를 결합하지 않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19:18).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찬양하거나 명령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예수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이 없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담겨진 고대 유대인 저술에 기초해서 추론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과 비슷하긴 하지만 같지는 않다. 만약에 두 개가 같다면 따로 말할 이유가 없다. 그러기에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윤리적 고려로 환원한다고 보는 견해는 잘못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40). 결론적 기술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나무에 달린 가지나 문의 경첩과 같다. 예수의 간결한 어구로부터 사랑의 계명을 통해 여기에서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것들을 다른 모든 계명들이 연원하는 격언으로 여기면, 마치 누군가가 기하학적 증거를 산출해내듯이, 예수가 사랑은 한 사람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 계명은 더 나아가 그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비교7:12)고 말한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들에게 아이디어를 준다. 예수의 율법에 대한 간결한 요약은 랍비 할렐이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과 놀랍게 비슷하다. 어떤 사람이 랍비 힐렐에게 자신이 외발로 서 있는 동안 자신에게 토라 전체를 가르쳐달라고 문제제기 했을 때, 바빌론 탈무드는 랍비 힐렐의 대답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당신에게 야비한 짓을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 그것이 전체 토라의 핵심이요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
예수가 메시야의 정체성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질문을 제기했을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41-42). 바리새파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대답 즉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성경의 증언과 긴밀히 연결된다(사11:1;렘23:5;겔37:24). 또 다시 성경을 인용하는데, 이번에는 수사적 질문의 정황에서이다[“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43-44)]
예수의 대답에 대해 세 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첫째로, 비록 많은 학자들이 시편이 나중에 저작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는 다윗이 시편110편를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것이지만, 다윗의 언급은 다윗의 자손이 다윗보다 더 위대하다는 수수께끼를 낳고 있다. 둘째로, 시110:1은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예, 행2:34-35;고전15:25;엡1:20;히1:13;8:1). 그렇게 많은 전승의 줄기에서 넘쳐나는 주장은 시편이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강렬한 렌즈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 자신이 이 시편에 대한 의미를 깊이 묵상했다면, 초대 교회의 증언에서 널리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셋째로, 어떤 남아있는 고대의 유대인 저작에서도 시110편을 메시야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 마태와 다른 사람들이 성서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데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활용했다. 그들은 성서를 읽으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만 제한하거나 한계를 두지 않았다. 1세기에 메시야의 정체성과 특성에 대해 유대인들은 공통된 이해를 갖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중심에 놓는 것을 유대인들이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양한 사회적 환경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를 구성했다. 마태에게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이 메시야가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자 주님이시기도 하다.
예수의 대답으로, 그와 그의 다양한 대화자들 간의 논쟁은 끝이 났다. 예수께 질문하러 온 사람들은 잠잠해져 떠나갔다.
목회적 관점
목회 사역이 직면하고 있는 과제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려운 질문과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바리새파 사람인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질문하러 나왔을 때는,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신 후였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일 세기 예루살렘에서 명백히 경쟁자들이었다. 율법교사는 예수에게 질문하면서 세 가지 다른 일들 중 하나를 시도하려고 하는 것 같다.
첫째,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그는 예수를 반대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질문을 해서 예수의 의표를 찌르려고 한다.
둘째, 그는 사두개파 사람들과 이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두개파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 경우 그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실패한, 예수의 의표를 찌르는 일을 다시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두개파 사람들보다 더 나은 질문을 한다고 군중들에게 확인시켜주기를 희망할 것이다.
셋째, 율법교사는 법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분별하려고 한다. 그는 예수가 그가 가장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그가 지혜로운 대답을 기대했건 하지 않았건, 그 자신의 질문이 그에게 질문할 용기를 내게 했을 것이다.
이때는 성주간 월요일이다. 예수께서는 일요일의 환희와 금요일의 처형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면서 가르치신다. 예수는 사역으로 인하여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해 왔으며 그 반대는 이 장의 첫 번째 부분에서 더욱 강하게 성장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듣고 목회적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거기에 성실하게 답변한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34-40절).
월요일에 일어난 이 사건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만남이 여정을 더 어둡게 한다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선 행진 후에 우리는 예수의 비유들을 들었다. 그리고 예수의 적대자들은 이 젊은 랍비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예수 스스로 자신을 불신하게 될 곳이나 혹은 그 자신이 로마 당국과 갈등을 빚을 곳(세금에 관한 질문)으로 끌고 간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하는 질문에 신실할 수도 혹은 신실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가 묻는 것이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의 중심에 가깝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자 목사로서의 내 자신의 경험은 나의 삶에 대해 진심으로 질문을 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각각의 질문에 차례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대답하면, 조만간 질문 자체들이 더 낫고, 깊고,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우리가 진지하고 사려 깊다면, 냉소적인 질문자라도 대개는 진정하고 처음과는 다른 태도로 듣는다.
우리 주님은 율법의 두 가지 큰 본문으로 질문을 존중하며 대답한다. 하나는 신명기 6:5로, 회당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항상 하는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셰마)의 말씀이다. 예수는 율법을 확장하는 레위기를 인용한다(레 19:18). 끝으로 주 예수는 이 두 문장에 그 자신의 도장을 찍는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40절) 이 마지막 문장에서 예수는 이 두 계명을 율법 전체의 주제로 결합시키는 특권을 가진 분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한다. 그의 대답을 메시아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예수가 그들 앞에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이 된다.
이 잊을 수 없는 만남은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 질문을 하시는 분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이 강렬하고 민족주의적인 평신도가 가진 다윗에 대한 희망에 대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다윗 왕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의 종인지를 묻는다. 그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위대한 다윗 왕조차도 주님의 메시아를 만물의 주재자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44절).
그러고서 예수는 묻는다. 메시아는 다윗의 주님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 예수는 유대인의 희망에 대한 약속과 민족적인 왕국에 대한 갈망을 다윗의 시를 완성하는 오직 한 분, 메시아 아래에 놓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대답하지 않지만, 이 좋은 질문은 실제로 그들에게 좋은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복음이다.
우리가 목회자로 섬길 때 그리고 목회 설교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교인들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나? 때로는 율법교사의 경우처럼 그들의 질문은 복음을 선포하는 데 필요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때로는 다윗의 주님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인들의 질문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질문을 하도록 자극한다. 때때로 복음은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강력한 대답을 제공한다. 때때로 복음은 사람들에게 더 깊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대답은 성령의 은사이며 질문 역시 그럴 수 있다.
설교적 관점
-나는 설교자들이 어떤 성서정과본문을[4개중에-시편,구약, 서신서, 복음서] 선택할는지를 추측하는 게임이 있다고 상상해 본다. 나는 각각의 성서정과 본문을 커다란 지도에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하고 각 색깔을 대표하는 토론자들이 자기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마침내 공식적인 발표가 나온다: “31퍼센트로 성령강림절 후 세 번 째 주일은 서신서로 결정합니다...”
선택에 대하여 (The Choices)
-나의 상상게임은 이번 주에는 너무 쉽다. 모세의 죽음 (신명기 34장),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기쁨 (시편 1편), “모세의 기도” (the Prayer of Moses, 시편 90편),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여준 자상함 (살전 2:1-8) 이 모든 좋은 구절들은 오늘 우리가 택한 복음서 본문과 갈등을 보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떤 계명이 모든 것보다 크냐고 물을 때, 그의 대답은 믿는 자들에게 있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을 규정하고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목숨을...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37, 39절).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들 것을 말하고 있다.
-설교자가 복음서를 선택할 때, 그 주의 다른 본문은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오늘 본문에서 41-46절의 기독론적 언급은 대부분 설교하지 않을 때가 많다. 설교 결론에 가까이 갈 때 설교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혹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택하곤 한다. 이번 주일 선택은 중요하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 교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도전을 줄 것인가? 이것을 위해 본문 전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두 계명만 혹은 한 계명만 택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랑을 택할 것인가?
두 가지 사랑에 대하여 (The Loves)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두 가지 분리된 계명으로 답한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두 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비록 그가 두 번째를 “처음 것처럼” (like the first)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는 마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일하다는 식으로 그 둘을 혼동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랑에서 설교자들은 곧장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건너뛰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 이유는 그것은 요한일서 4:20절의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에 근거해서 그럴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가 신비롭고 설명하기 어려워 설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정의나 사랑을 행할 것을 설교하고 다른이 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등이 더 쉽고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예수의 두 번째 계명은 사랑 그 자체이고 그것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용납하는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신명기 6장을 가장 중요하게 언급했기 때문에“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직접하지 않고서 이 본문을 설교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 질문은 설교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신비롭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랑을 상상해야 하는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loving God)을 에로틱한 용어로 (erotic terms) 표현해왔다. 지난 주 나는 한 복음성가 가수가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해요” 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이 가수보다 더 분명하게 에로틱한 표현을 많이했던 중세 기독교나 유대교의 명상에 관해 알지못했다면 나는 “이런 류의 기독교” (that kind of Christianity)를 순간적으로 경멸하였을 것이다. 그 중 2가지를 인용하자면 십자가의 성요한 (John of the Cross, 가톨릭교회의 영성 신비수도사)은 그의 시 “어두운 밤에” (On a Dark Night)서 “열망으로 가득찬 사랑으로 타오르는 촛불처럼”이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신명기 6:5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연인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기쁨보다 더 강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름답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에로틱한 사랑이 우리 교인들 대다수에게는 잘 안맞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메타포어가 그 역할을 하겠는가? 이것은 기도에 관한 설교인가? 한 예수회 소속 저자가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be seized) 나의 마음과 모든 행동, 생각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나의 결정 모두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를” 바랬다. 어떻게 그 사랑에 사로잡히는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중 어느 요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상상하는가?
-이렇게 본문접근을 하는 것은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던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설교하는가?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우리 교인들이 이런 일을 생각하는데있어서 이번 주 주일이 아주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주님에 관하여 (The Lord(s))
“주님을 사랑하라”를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규정한 후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논쟁자들과 “주님” (Lord)이라는 용어를 다룬다. 그들이 모여있을 때에 예수는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말한다. 그들이 미끼를 문다. “물론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는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어떻게 다윗이 그의 자손인 “주님”을 부를 수 있었느냐며 놀란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처럼 (마 16:16) 그리고 예수의 재판정에 있던 대제사장처럼, 예수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주님” (Lord)이라는 타이틀을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에게 있어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된다. 그의 해석에 모든 질문자들이 두려워한다! (46절). 우리의 질문은 이것을 이번 주 주일예배 시간에 어떻게 설교하느냐이다. 신조들 (the creeds)은 이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22장과 23장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사이에서, 예수는 랍비적 유대교 너머에 있는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분[예수]은 단순히 랍비가 아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22:45) 모세의 대변자도 아니다 (23:2). 이 분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주님이시다. 우리의 마음은 5장 앞에서 들려왔던 하늘로부터의 소리에 끌리고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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