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예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여러 번 공격을 받은 이후, 예수는 마침내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23장은 저들의 종교적 지도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이번 주 성서정과 본문은 사격개시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이런 구절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경쟁 관계에 있는 공동체를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의 구절은, 부주의한 설교자가 본문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근거를 찾았다고 그릇되게 주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을 포함하여) 히브리 성경의 권위와 유대 전통의 풍성함에 대해 매우 깊은 존중심을 표현한다. 유대교가 없다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다. 마태는 또한 예수가 싫어했던 허영심, 위선, 오만함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구절의 요점은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를 정죄하는 것에 있지 않고, 진정한 제자도의 본질에 있다.
본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2절)에 앉아 있음에 근거하여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율법의 원래 수여자(授與者)였고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모세와 유사한 권위를 가진 율법의 교사요 해석자이다; 그들은 종교적 사안에 대해 존경과 존중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지 않았는가?(마 5:17) 마태복음 전체는 예수가 유대교에 대한 존중 및 유대교와의 연속성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애써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그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에 대한 지지를 밝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3)
문제는 그들이 권위를 오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지하고 가르치는 진리와 상반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할 때, 사실은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데 관심이 있다. 그들이 전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할 때,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말하지만,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손가락을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4) 이런 식의 행동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적용되는 특이하고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위선과 자만심을 유발한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다. 이방인 지도자들도 똑같이 이런 잘못에 빠지기 쉽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마 20:25).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 및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의 죄의 핵심은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 모방의 빗나간 형태이다.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 아래에서의 평등한 교제를 싫어하고, 동료 인간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고 자신의 지배를 받으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의 이익,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힘,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지위를 혼동하기가 매우 쉽다.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를 대체하는 잘못되고 죄악 된 계층구조를 만드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우리의 작은 영역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불쾌하게도 특히 종교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 욕망, 자화상을 거룩한 것처럼 포장하려는 위선에 쉽게 빠진다. 경건한 말과 정통적 신앙고백이 자동으로 믿음의 사람을 만들지는 않는다.
믿음의 진정한 척도는 말이나 교리가 아니고, 본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온 마음과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보다 작은 것을 향하고 있는가?(마 6:19-34)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자신의 전 생명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며 사는 사람은 매우 급진적인 평등주의자가 된다. 사람들이 지능, 체력, 사회적 지위, 빈부 등과 같은 여러 관점에서 평등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리차드 니버 (H. Richard Niebuhr)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이 창조적인 중심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적 구분과 특별한 지위는 본질적인 관점이 아니고 기능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특정 사람들의 재능과 능력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게 만드는 자질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위한 자원으로 여겨져야 한다.(고전 1:12)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1-12)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부주의한 해석자는 죄가 항상 자기주장의 형태를 취하고 의는 항상 자기부정의 형태를 취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는 일차적으로 교만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과 해방신학자들은 이런 죄는 기득권층이 저지르는 죄라고 지적한다. 약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반면에, 하나님 또는 이웃으로부터 분리되는 죄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스스로 남을 위해 기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위 열등감을 수용하고 자신들이 기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다. 카아(Anne E. Carr)는 여성의 경우에는 자아, 주체성, 책임성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도 수동적 죄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다. 죄는 하나님 및 동료 인간과의 관계 단절이다. 이런 죄는 소위 약자적 무책임성이나 고압적 교만의 형태로 인간의 마땅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사상은 교만한 사람들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뿐 아니고, 소외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능을 갖고 있거나, 공동체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같은 선생님의 제자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맡은 바 임무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이바지할 수 있게 재능이 주어져 있다.
주석적 관점
예수와 바리새파사람들 간의 오랜 갈등은 23장에 정점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예수는 율법학자들을 포함하여 가장 심한 말로 혹독하게 비판했다. 신약 성서에 그렇게 격렬한 비판은 별로 없다. 예수 시대의 굳건한 유대 파벌주의가 이 본문에서의 예수의 언급과 마태복음에서의 기능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주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 짧게 언급한 것을(막12:38-39), 긴 담화로 만들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의 네 종파가 있었다. 바리새파는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의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되는 있어서 대제사장들이 많았고 로마권력자들과 가까웠다. 에세네파는 쿰란광야에서 금욕적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다른 파들에 대해서는 진정한 유대 믿음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보았다. 젤롯파들은 군사적 수단으로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려고 했다. 이 네 그룹 중에서 오로지 바리새파들만이 주후70년 성전의 파괴로 끝난 유대반란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마태복음은 70년 후에 쓰여 진 것인데 토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면서 기독교공동체에 대해 반대하는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태복음에 자주 나타나고 예수와 만나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설명된다. 나중에 그들을 비판하는 것에 비추어보면, 무리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3)라고 말하는 장면은 놀랍다. 그 진술은 회당지도자들로서의 그들의 위치에 대한 인정이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전통적인 공식적 관리인 자리인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2).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율법선생들이 말한 연단 위의 대리적 의자가 있었다. 그러기에 이 묘사는 문자그대로이다.
예수는 3절 하반부를 강조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은 하고 행하지 않는다.” 3-4절에 볼 수 있는 위선에 대한 문제제기는 유대종파나 그리스 로마 철학파와 상관없이 종교적 철학적 논쟁에서는 표준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데 소홀하라고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마5:17-18). 예수의 관심은 행위가 말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이는 지도자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파사람들이 율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는 열정이 지기 힘든 “무거운 짐”(4)으로 특히 땅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경험되었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현재의 지도자들과 구분시켜 준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30). 또 다른 일상적 비판은 그들이 영광을 취한다는 것이다(5-7).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곽(신6:4-9과 같은 구약 성서의 성구를 적은 양피지를 담은 가죽 상자의 하나; 아침 기도 때 하나는 이마에 하나는 왼팔에 잡아맴)이나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그 길이는 현대 랍비의 양파인 힐렐과 샴마이파의 논쟁의 주제중의 하나였다). 이것이 성서의 지시(예 출13:16)와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는, 예수는 오직 그들의 추정되는 거룩함에 과도한 주의를 끄려는 바리새파사람들의 동기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다. 78절의 “랍비”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존경을 표시하는 “나의 주인”라는 말과 대략 비슷한데, 하지만 1세기 말에는 명목상의 의미만 가지고 유대인 선생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태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록 저자가 독자들에게 그러한 관습들을 따르는 것을 막으려 하면서도 현재의 유대인 관습에 대한 친밀성을 반영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두 번만 가롯유다에 의해서 랍비라고 불려지는 것이(26:25,49)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에서부터 나중에 미슈나(Mishnah까지 포함되는 유대 내부 논쟁에서 경건의 문제에 있어서 과시에 대한 비판을 한 사람은 예수만은 아니였다. 9절의 ‘아버지’는 노인, 선생님, 후원자, 또는 존경하는 인물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아버지는 하나님 뿐 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아람어 ‘아바’가 마태의 헬라어 표현에 있다면, 예수의 하나님 호칭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에 다른 곳에서 나타난 이 용어와 일치한다(막14:36;롬8:15;갈4:6). 되게 아는 체 하는 사람은 대답하기를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도록 하기는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마1:18-25에 따르면 예수는 지상의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의 심한 말은 청중들이 자만과 명성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주의해야 하는가를 명심하게 하기 위한 과장법의 예일 것이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는 가끔 과장법으로 말하고(5:29-30;18:9) 있는데, 신약은 아버지-아들 용어의 비유적 사용으로 가득하다(행7:2;고전4:14-15,17;빌2:22;몬10). 10절에서 금지된 “지도자”란 용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도자가 되라고 명령했다는 것(마28:19-20)을 고려하면, 그의 초점은 호칭과 계급에 따르는 특권의 주제넘음이다. 비록 그러한 계급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기관의 생존을 돕기도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자주 교회가 형제자매의 공동체(8)로서 이상을 약화시킨다. 마태에 따르면(11-12) 인정받는 지도력은 겸손함을 보여주고 자원해서 종이 되려고 한다. 앞에서 예수는 이 점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게 대답하면서 보여주었는데(마20:20-28), 그것은 바리새파사람들을 폄하하는 것이 마태의 아젠다의 유일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공동체 안에서 굳건한 지도력 구축이다(마16:17-19). 진짜 기독교 지도자들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를 닮아가야 할 것이다(마10:28).
목회적 관점
성주간 월요일에 선생님이신 예수는 우선 진지한 율법교사인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같은 문장에서 예수는 이들 이스라엘의 평신도 교사들의 온전성과 실제적인 성실성에 대해 도전한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의 해석자가 되려고 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주제를 실천하고 따르라고 권고한다. 예수는 토라의 내용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그들의 주제나 관심을 무시하지 않는다. 셀류코스의 탄압에 대항하여 일어난 마카비 전쟁에 기원을 둔 바리새파 운동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든 간에, 이것은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바리새파”라는 용어의 의미가 그렇듯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은 나중에 분리주의자들이 된다. 바리새파는 타협과 냉소의 시대에 특히 대제사장을 지배하는 사두개파 사람들로 대표되는 종교귀족정치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개혁하려는 열성적인 평신도 운동이었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의미에 깊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목회자가, 목회자든 평신도이든,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독교인을 만나면, 그들의 신앙 여정의 일부인 주제와 관심사를 제쳐두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주장을 듣고 그 주제들에 대하여 복음에 충실하고 교훈을 주는 조언을 정직하게 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에 대하여 내가 도전할 때는 사려 깊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예수는 이런 기본적인 존경심을 보여준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지지한다. 오늘 본문을 해석할 때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세기 바리새파 운동은 단일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랍비 Shammai의 강경 추종자가 있었지만 랍비 Hillel과 그의 학생인 Gamaliel을 그들의 멘토로 삼았던 좀 더 온건한 그룹이 있었다(행 5:34 참조).
바울은 그가 가말리엘에게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질 때까지(행 8장) 실제로 바리새인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당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행 26:5).
우리는 마태복음 23장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 많은 진실한 율법 교사들과 복음 교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운다.”(3-4절)
예수는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 가지 목회적 도전을 한다.
1. 이 교사들은 율법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자기들이 발표하는 주제를 자기들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다. 이 도전은 우리가 그들이 선포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진실성과 타당성에 대해 계속 시험하게 한다. 사람들이 우리의 공적인 생활과 행동을 볼 수 있다면 이 부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 이 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위험한 또 다른 문제를 제시한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교사로서,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잘못된 짐을 올려놓는다. 그것은 율법 본문으로부터 비롯된 부담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해석으로부터 제기된 특별한 요구였다. 이에 덧붙여 교사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라고 요구하는 짐을 자신들은 피해가도록 조작한다는 아이러니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안식일을 감시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오만함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짐은 해석하는 권리를 가진 교사에 의해 정직한 신자에게 억지로 지워졌다.
목회적으로 우리 주님은, 모든 목회자들이 부주의하지 않게, 성경의 텍스트의 의미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에서 더 큰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해로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초대함으로써 우리의 실수를 통해 우리의 길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는 짐을 지라는 목회적 도전을 받는다.
3. 세 번째 도전은 교사와 종교 지도자의 자기만족에 대한 주님의 도전이다. 그는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말한다. “그들은 영광을 받는 자리를 갖고 싶어 한다.”(6절) 이 문장은 우리 주님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았던 마태복음 20장에서 말씀하신 섬기라는 가르침과 같은 정신을 가진다. 거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를 위한 종이 되고, 그들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종(마 20:28)인 사람의 아들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하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주님이신 메시아만을 바라보라고 권고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듯이, 예수는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만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권유한다.
이 놀라운 만남 안에 있는 복음은 부모가 자녀를 아는 것처럼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 줄 인간 주인이 필요하지 않은 형제와 자매로 부르셨다. 예수에 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을 갖기를 원하는 욕망을 강요하는 종교적 함정으로부터 목회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이 말씀이 새롭게 우리의 중심이 되면 우리의 눈을 주님의 기도에서의 주님과,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초대된 하나님을 향해 돌리게 되어서, 자기–권력과 자기–선입견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설교적 관점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들은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마태복음 23장에서 비판한 것인데 거기서 그는 이 위선자들을 “눈 먼 인도자” “회칠한 무덤” “뱀들” 그리고 “독사의 새끼들” (16, 27, 33절)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손가락질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주일 강단은 정치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의 밖에서 이러한 위선적인 사람들을 목표로 한 예언자적 설교로 울려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예언자적 설교는 마태복음 23장에 근거할 수가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위선자들이 행하는 일-신실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4절)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 (13절)-로 인한 피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신앙에 있어 잘못된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 기독교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바울은 위선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롬 2:24)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적이고 영향력있는 위선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선포하는 일은 선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을 접근함에 있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아주 조용한 길이 있다. 마태복음 23장 위선자를 설교함에 있어, 위선자의 입장에서 위선자에게 하는 것은 어떨까? 설교학적 상상력은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위선자들을 탐구함에 있어 열매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마태복음에 나타난 위선 (Hypocrisy in Matthew)
-우리는 마태복음 3장에서 처음으로 위선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의 말씀을 듣기위해 요단강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독사의 자식들” (brood of vipers, 마 3:7)이란 말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했던 그들의 조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신실하게 행하지는 않는다. 요한은 그들의 자만심을 비난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3:8)고 설교한다. 말에 뒤따르지 않는 행동에 대한 비판은 23장에서 이어지게 된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실천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경건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위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위해” 보는 앞에서 자선을 행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큰 소리로 오랫동안 기도하고 금식한다 (6;1-7, 16-18). 그렇게 주목받기를 추구하는 경건은 단지 공허한 보상 곧 사람들의 칭찬만 얻을 뿐이다.
-제자들과 군중들 앞에서 행한 설교에서 예수는 서기관들/바리새인들/사두개인들이라는 명칭보다 “위선자들” (hypocrit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위선자들이 어느 그룹에 속한다라기 보다는 어떤 행태를 보여주고 있는가에 주목하게 한다. 이것은 산상수훈 후반부에 익명의 재판관을 부를 때 분명해진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7:5)
-마태복음 23장으로 가는 길에 “위선”은 두 부류의 형태를 보인다. 첫 번째 부류는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3:7-8). 두 번째 부류는 행동은 올바르게 하나 그릇된 동기[칭찬을 받으려고]로 (6:1-7, 16-18) 한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는 이 두 부류를 비난하는데 여기서 예수는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 (3절)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하는 사람들” (5절)을 꾸짖는다.
위선자들의 마음 (The Heart of the Hypocrite)
-예수는 위선자들을 한편으로는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칭찬을 받기 위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의 두 가지 비판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정직한 위선자라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 위선자들은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우리 위선자들이 선한 일을 행할 때는 카메라가 돌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이다. 선한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마치 그렇게 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2배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우리 위선자들은 행한 것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고 ...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번 주일에는 설교자가 1인칭 화법으로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찍 위선자라 고백하고 정직하게 예수의 비판을 받을 만한 자리에’ 우리를 두는 것이다. 솔직하게-우리 모두는 위선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말하는 이 방법은 다른 유익함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재판관의 자리에서 치유받을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의 자리로 옮겨놓는다.
-이러한 자리의 전환은 우리를 예수를 단순히 따라가던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위선자의 마음으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거기에 다다르면, 언제나 자신을 알리려는 장치가 있음을 알게된다. 자기를 알리려는 불빛이 언제나 위선자의 마음에 켜져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은 늘 사람들에 관해 알고싶어 하기 때문이다.
-위선자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힘이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이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에 하나의 힌트를 남겨둔다. 거기에서 위선자는 보다 분명한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위해 하나님의 보이지않는 인정을 버린다 (6:1, 4, 6,8). 하나님의 “예스”(yes)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있는 우리 위선자들은 인간의 “예스”를 얻기 위해 우리의 경건함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위선을 치료하는 해독제는 은혜(grace)이다. 마태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18:21-35). 그의 예수는 베드로의 부인(Peter’s denials)과 제자들의 소심함을 용서해주실 것이다. 이 예수는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신다. 이렇게 가면을 쓰고 지쳐버린 위선자들의 마음으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진실로 사랑하는 한 분이 들어오신다. 그는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11:28)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영혼이 우리를 품어주는 그 자유함 안에서 쉬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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