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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0장 1 ~ 16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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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초기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하루의 다른 시간에 고용된 사람들을 아담, 모세, 아브라함과 같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세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마지막 시간에 고용된 사람을 이방인으로 보았다. 다른 신학자들은 먼저 고용된 일꾼들을 그리스도의 원래 제자들로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19:27),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을 최근에 회심한 마태 공동체 회중으로 해석했다. 어느 경우에나, 논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공정하신지, 특히 이스라엘과 (이방인) 교회에 대해 공정하게 행하시는지의 여부이다. 또 다른 신학적 질문은 인간이 공로를 쌓는 것이- 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논의 속에서- 가능한가이다.

  마태는 오래된 유대인 기독교인(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는 사람들)과 최근에야 합류한 사람들(그중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 개종자)이 섞여 있는 교회를 위해 복음서를 썼다. 마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특성이 어떠했든, 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라는 오래된 질문과 함께,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기는 종교인들과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여기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라는 항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누가복음 15 11~32절에 있는 탕자의 비유도 비슷한 갈등을 다룬다) 열심히 일하는 "선한" 사람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떤 하나님이 보상에 상응하는 일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같게 취급하실까?

  전통적으로 답은 다음과 같았다: 의로우신 하나님(a just God).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일꾼이 포도원에서 일할 기회 (그것이 이스라엘, 개인의 덕목, 교회, 또는 세계 정의라는 이상과 관련되어 있든) 자체를 은총으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라는 부름에 응답하거나 우리 삶을 모두 낭비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것 사이의 선택이기 때문에 인간적 자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은 누구의 생명도 허비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아무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거듭 부르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2:11;  10:34); 하나님은 모두가 똑같이 일할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여기신다. 따라서 모든 일꾼에게 주는 상도 똑같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더 큰 보상을 받은 사람과 더 적은 보상을 받은 사람 간의 불평등(유대인/이방인, 오래된 일꾼/풋내기)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이 비유는 하나님 앞에서는 급진적인 평등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보상은 각 일꾼의 개인적인 공로나, 노동의 양 혹은 질이 아니라, 주인이 제공하는 자비로운 언약에 의존한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각자의 "일용할 양식"을 기본적으로 충족시키는,  6:11)으로 표현되는 동일한 보상을 약속하고 이를 시행하신다.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은 공로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 일이어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번 주 성서정과 다른 본문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백성의 습관이었으며 (출애굽기, 요나), 성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그들의 시각을 바꾸어 하나님의 자비를 선물(시편)로 받아들여,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도록(빌립보서) 끊임없이 호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한 칼뱅의 글 두 번째 부분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다. 처벌을 피하거나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을 어떤 강요도 없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부모를 사랑하고 기쁘게 하려고 부모의 일을 위해 전념하는 자녀와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이 좀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꾼은 일할 기회를 준 주인의 관대함을 기억해야 한다.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16)라는 오늘 비유의 결론은 다른 비유들(예를 들어 눅 18:9-14)을 생각나게 하며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거룩하다고 여기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곧 (마 23퍼부을 호통을 예상케 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지금 복음을 알아서... 온 세상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그래서 자신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고 성령 충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그들의 위대함이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세상의 눈으로 볼 때 첫째라고 하나님의 눈에도 첫째가 되는 것은 아니다스스로를 가장 낮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높이신다.(마 23;12) 더 나아가이것은 모든 좋은 것들이 -사람이 그것을 받을 능력이 있는지와 상관없이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은 부름을 받은 시간부터 보상을 받는 시간까지 정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일부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부름을 받은 축복을 누렸다. 그러나, 이 일을 짐으로 여기면 선물의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늦기 직전에 부름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그들에게는 짐이 가벼워 보이고, 지치기 전에 보상을 받게 되었다. 신구약 성서를 보면 정의와 가치에 관한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적 기준에서 볼 때는 늘 낯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운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낯선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오용될 가능성도 있다. 힘 있는 자가 첫째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억압받는 사람에게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며 불의한 현상태에 대해 더 인내를 갖고 견디라는 강요를 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이 비유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해석은 분명히 교회 안에서의 급진적 평등을 지향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상을 받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다.

  주석적 관점

   ‘포도원의 품꾼들’이란 이 유명한 비유는 예수의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19:30;20:16) 라는 같은 말씀 사이에 있다. 이 묶음이 독자들에게는 수수께끼인데 왜냐하면 비유 그 자체는 이 말씀의 연속과 체계를 꼭 같이 묘사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19:13-30에서의 토론은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어 지위나 순서에 대한 질문을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유는 분명히 그러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지만, 비유의 핵심적인 초점은 지위나 순서가 아니라 은혜와 정의의 문제이다.

 비유의 시작은 예수의 전형적인 비유로 고대의 농사와 일치한다. 포도원 주인은 일용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일찍 나간다. 그러한 일의 고용은 아침 일찍 이루어진다. 주인과 일꾼들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품삯에 합의한다. 이 합의는 비유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이다. 품삯은 가끔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한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하지만 이 장면에서 한 데나리온의 정확한 가치를 상정하기는 어렵다. 비유에서는 이 합의가 양쪽에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의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최대한 계산해 보아도 이 일꾼들이 아주 가난하게 살 정도이다. 한 데나리온으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 한 사람만 살 수 있지 가족이 살 수 있는 돈은 아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일용노동자들은 힘들게 살았고 때때로 일찍 죽었다.

 익숙하지만 무엇인가 엄숙한 첫 장면 이후에 비유는 점점 더 이상해진다매순간마다 비유는 점점 농사에 관한 것 같지 않고인물들은 진짜 포도원주인 같지 않고진짜 일꾼들 같지도 않다포도원 주인은 장터에 아침과 오후에 또 다시 나가서 일꾼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했다여하튼 이것은 특이한 것이다우리는 주인이 필요한 일꾼들을 아침 일찍 고용하리라 예상한다비유에서는 그가 이들 일꾼들을 나중에 일시키는 것이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한 것이다품삯도 한 데나리온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적당한 품삯이다.

 그 다음 장면은 이야기가 더 이상하다. 주인은 장터에 거의 오후 다섯 시쯤에 나가 아직도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주인은 단순히 그들에게 얼마 준다고 약속하지 않고 포도원에 일하러 가도록 권고한다. 주인의 이상한 행동, 임금에 대한 약속 없음, 그리고 사건의 시간들이 이 비유에서 “오후 5시” 일꾼들에게 초점을 두게 된다. 그들에 대해 알려진 바 없고, 그들이 왜 빈둥거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저 일과시간 끝나기 한 시간 전에 그들이 채용되었다는 것을 안다.

 비유는 무엇인가 어색하지만 품삯을 주는 장면이 되는데 정의와 은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주인은 마지막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일한 사람 순으로 품삯을 주었다. 뒤에 온 사람들 셋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맨 처음에 와서 일한 사람은 보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공정하리라 생각하고 자신에게는 더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도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자, 그들은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의 불평은 공정하고 분명하다.

 아마도 이 간청에 대한 주인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비유의 핵심적 메시지를 보게 된다. 주인은 두 가지 절대적 원리를 천명한다. 첫째로 그는 정의로운 임금으로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을 그에게 속한 사람에게 할 권리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기에 주인은 일꾼들이 동의한 정당한 품삯을 주었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처음부터 일한 사람에게 도발적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주인은 “내가 후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말한다(15b). 이 제기는 정의의 주장에 대한 은혜의 주장이다.

 교회 전통에서 이 비유에 대한 거의 모든 읽기는 이것을 알레고리로 이해한다. 주인은 하나님이고 한 데나리온은 구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개신교적 읽기도 정의와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정의를 주장하는 일꾼들은 율법의 정의를 주장하는 유대인이거나 사역의 힘에 집착하는 로마기독교인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정의에 주장에 대비되어, 비유는 구원이 은혜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독자들은 마지막으로 고용된 사람들이 아무런 품삯에 대한 약속 없이 갔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래서 그들 일꾼들은 믿음의 모델이다. 그들은 포도원의 주인인 은혜의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다.

 이러한 읽기의 신학적 풍부함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비유가 그러한 주장을 진짜로 지지한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정의의 옮음과 적절성에 대한 부정은 없다. 포도원 주인은 그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권리를 믿은 처음 일한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러한 사람에게 구원을 거부하는 읽기는 비유와 맞지 않는다. 비유는 그러한 읽기가 제시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정의의 주장을 은혜의 놀람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단지 그들 사이의 비교를 강조한다. 비유는 정의와 은혜를 지지할 뿐만 니라 둘이 언제나 긴장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의와 은혜는 서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둘 모두가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이다.

 다른 가능성이 하나있다본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알레고리적 읽기가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어떤 독자들은 구원의 다이내믹스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예수는 아마도 일용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 속에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포도원 노동자의 비유는 기업이든 비영리사업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업자들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이 비유는 공정한 임금이나 일한 만큼의 보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정당하고 공정한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반하는 것이며, 21세기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유를 듣고 뜻이 통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험하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애 쓰고 있다. 왜냐하면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그들을 판단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을 대표하는지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 비유를 설교하면서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는 청중들이 유추할 수 있는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도록 도우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와 다르지 않다. 그 이야기에서 장남은 상속받은 재산을 탕진한 동생이 뻔뻔스럽게 아버지의 풍성한 환영을 받는 것에 불쾌해 한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집에 머물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장남이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장남일 것이다. 하루 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은 포도원 주인은 얼마나 불공정한가? 일한 시간이 다른데도 각각의 노동자에게 똑같이 대우한 포도원 주인은 얼마나 불공정한가?

우리는 아침 일찍 포도원에 갔으니까 더 많은 보수를 받을 거라고 가정한 노동자들의 불평을 쉽게 우리와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한 위험한 가정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 우리의 작업 환경, 우리 교회, 우리의 애국적 사고 속에 있을 수 있다. “가정 assumption 은 계획된 분노”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망하도록 설정하거나, 더 나쁘게는 다른 사람, 장소 또는 일을 우리의 실망, 화 또는 분노의 목표로  설정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목회자)이 자기들의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그에 대해 목회자가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반응을 하지 않아서 상처 받고 분노하는 교인들과 투쟁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우리가 만든 유일한 가정이라면 멋질 것이다:

- 하나님은 나와 모든 피조물을 깊게 그리고 충분히 사랑하신다.

- 나와 모든 다른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 하나님의 관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상이상의 것이다.

- 하나님의 관대함을 얻거나 받을 자격을 가지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우리가 이런 가정들을 하면서 살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포도원 주인이 모든 사람들에게 직장을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노동자들은 모두 실업 상태이며 각각 임금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일을 맡았다그들은 모두 같은 상황에서 시작하지만 날이 끝날 때 그들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쉽게 잊어버린다그들의 에너지는 그들이 일을 하고 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불평등으로 향한다질투는 그들이 받은 임금보다 더 중요해진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포도원 주인이 묻는다(15).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 재능,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질투하는가? 질투는 우리 자신의 재능과 재능을 위축시키고, 남몰래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빼앗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신다.

이 비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관용에 관한 것이다. 공평이나 적절한 임금 지급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은혜롭고 과분한 선물에 관한 것이다. 경제적 교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언제 포도원에 들어왔는지에 상관없이, 혹은 그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는 일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은 종종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방해하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방해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것을 기뻐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행운을 기뻐할 수 없는 것인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해 고마운 줄 모를까? 나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얼마나 자주 거부하는가?

예수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겨 놓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보기를 배울 수 있을까?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 무엇이 정당한 것이고 무엇이 부당한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판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공평을 찾을 때, 관대함을 발견하고 놀란다.

당신과 나는 예수의 비유 어느 부분에 우리 자신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초대받고 도전받는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서투른 경리인 것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놀라운 관용에 감탄하고 경의를 표하여 우리의 자부심과 시기심과 완고함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라고 요청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거짓 없이 사랑스럽게 보라고 요청한다. 이 비유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던 대로 되지 않는다고 시기하던 것에서 돌이키고, 우리가 충만하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기쁘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던 우리 삶의 장애물들을 놓아주라고 우리를 부른다.

요즘 우리가 듣는 말 중 하나는 “극복하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말이다. 일을 하고 나서는 떠나보내라.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계속 상처를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감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설교적 관점

 -이번 주일 성서정과 본문 중 선택가능한 또 다른 구약본문은 광야에서 만나이야기 ( 16:2-15)인데 (종종 다루어지지 않고 있긴 하지만) 오늘 여러 면으로 접근가능한 포도원 일꾼 비유를 해석하고 설교하는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더불어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에서의 삶의 방식 곧 지배와 복종, 부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존재하는 방식에서 대안적인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백성을 형성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은 만나라는 선물이다. 이 만나는 멋지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매일매일의 양식”(daily bread)이다.

 -그러나 만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비축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사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몫보다 더 많이 모으려고 시도했을 때 여분의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출 16:20). 만나로 인해 누구나 풍족했지만 어느 누구도 더 많이 가지지 않는다지도자나 종이나 같은 양을 받는다하루 종일 일한 백성도 그렇게 일하지 않은 백성도 같은 양을 받는다일할 수 있는 사람도 장애인도 같은 양을 받는다풍성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많지 않게 그것이 모두에게 준 선물이다이 이야기는 주기도문에 포함되어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마 6:11). 이 이야기는 광야에서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수 천명을 먹일 때 재현되는데 그 때 누구나 풍족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많지않게 받는다.

 -이 광야에서의 만나이야기는 포도원 일꾼비유를 접근하는 시각을 제공한다. 예수께서도 역시 새로운 백성,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려고 추구한다. 그는 세상이라는 옛 질서 속에서 (세상=이집트처럼 부자와 가난한 자,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영역,  19:13-30을 보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하고 있다. 비유를 통하여 예수는 옛 체제를 뚫고 들어와 무언가 새로운 것의 창조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 난해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고 옛 질서가 지닌 죽음의 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새로운 현실적 대안체로서 교회를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대안적 가정” (alternative household of Gods empire)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정에서는 광야에서처럼 누구나 필요한 “일용할 양식” (daily bread)을 받는데 거기에서는 제자들과 또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던 이전의 차별과 경쟁을 약화시킨다. 워렌 카터 (Warren Carter)는 일꾼들에게 준 이상하고도 놀라운 품삯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행한 일에 근거하여 일꾼들 간에 차별을 두는 대신에,  뛰어난 사람을 높이어 나머지를 희생시키는 대신에

 [이 주인은] 차이를 균등하게 하고 이들을 동일하게 대했다. 차이를 강화하는 품삯체계 대신에 그는 그 체계를

동등함과 함께함(equality and solidairty)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다. 비슷하게 도로시 데이는 (Dorothy Day)이 현실과는 다른 특이한 방식으로 임금을 지불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이 비유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아닌 사는데 필요한 임금을 말했다. 누구에게나 사는데 필요한 임금은 필요한 만큼 그러나 지나치게 많지않게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비슷한 대안체계를 보여주고 시작했던 것처럼 대안적 사회체계를 보여준다. 이 비유로 하는 설교는 이 특이하고도 놀라운 비전을 선포해야 하는데 그것은 성서를 통하여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대안적 체계를] 단지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을 구체화하여야 한다. 이 비유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대안체계를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옛 체계들을 드러낸다. 이 비유는 익숙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상징들 곧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내부자와 외부자, 명예로운 자와 부끄러운 자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라기 보다는 “나에게 오늘 내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Give me this day my daily bread) 라고 기도하도록 종종 우리를 인도하던 그 체계를 들추어내고 있다.  

 -그것을 들추어 내는 것은 주인의 이상한 임금지급방식에서 보여지는데 거기서 가장 오래일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과 동일하게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하루종일 일했던 사람들은 불평하는데 그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평하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출 17:3, 민 11:1, 14:27, 29).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단지 돈에 관련한 것만은 아니다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돈이 의미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카터 (Carter)가 지적하듯이 진짜 이슈는 자신들의 우월함 (superiority)에 있다“당신은 이들을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12). 노동은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얻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구별과 경쟁의 근거이고 승자와 패자강자와 약자라는 구분을 강화시키는 수단이다. 

-노동은 종종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일이 없을 때 종종 열등하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이 비유에서 하루종일 장터에서 기다렸던 일꾼들처럼 쓸모없다고 여긴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습니다”(7)라고 그들은 사무쳐서 그 주인에게 말한다. 물론 노동을 통해 얻는 돈은 그 자체가 신분과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감을 얻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하루종일 일한 일꾼들의 불만 곧  “당신은 이들을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는 오늘의 설교자들을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라는 상징으로 형성되는 관념 곧 경제적 우열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우리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체계를 보여주고 옛 질서의 본 모습을 드러내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러한 드러냄과 비전제시를 통하여 설교자는 사람들을 포로로 만들고 있는 옛 체계를 뚫고 들어와서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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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 ~11절  (0) 2022.07.22
마태복음 18장 21 ~ 35절  (0) 2022.07.21
마태복음 18장 15 ~20절  (0) 2022.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