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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1장 23 ~32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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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아마도 이 구절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배경적 요소는 이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전날, 예수는 나귀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21:1-11) 즉시 유대인 종교 생활의 중심지인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엎었고, 앞 못 보는 자, 저는 자와 어린이들을 기쁘게 했다(21:12-16). 성 밖에서 밤을 보낸 후, 다시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렸고, 그 나무는 즉시 말라 죽었다(21:17-22). 전날의 놀라운 사건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전 관리인들은 시골 출신의 랍비를 상대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그의 추종자들 때문에 성전 관리인들은 예수를 신중히 다뤄야 하겠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논쟁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아무 권위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그들과 똑같이 논쟁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23)라는 대제사장의 첫 번째 질문은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다. 어쨌든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의 권한은 모세 시대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고 대대로 물려 내려왔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권한으로"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성서와 전통을 들이대며 예수가 틀렸다고 쉽게 논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더 정곡을 찌르는 대답은 "나 자신의 권한으로"였을 것이다. 예수는 다른 어떤 외부적인 도움이 필요 없이 스스로 권위를 갖고 있다. Hauerwas가 말했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근거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려는 시도는 우상숭배를 일으킨다. 어떤 사람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증할 진리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그 진리의 기준을 숭배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의 신적인 지위를 공개적으로 주장한다면 청중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좋은 랍비처럼 질문에 대해 질문으로 답한다.

  예수가 질문에 대한 대응으로 선택한 질문의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아마도 예수가 자신을 세례 요한과 동일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예수는 십여 명의 권위 있는 예언자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권위를 그들의 권위에 비교하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터인데, 요한-이스라엘 예언자의 역사에서 찢겨나간 주변적 인물, 이스라엘의 실제적 권위를 행사하는 헤롯에게 도전함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을 택했다. 그러한 선택은 청중(이 이야기 속의 청중과 이 텍스트를 읽는 청중 모두)에게 예수의 권위도 역시 주변적이라는 암시를 준다. 예수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전통적인 형태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과는 달리, 이 선지자는 저 밖 광야에 머물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메시지는 거룩한 도시 안에서, 심지어 성전 안에서 선포돼야 한다.

  그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표식으로 회개를 촉구했다. 마태복음의 세례 요한은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3:9)라고 했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특별한 가문에서 태어나거나 특정한 모임에 가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랍비식의 토론 스타일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녀는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을 실제로 행한 자들인가? 대제사장들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비록 두 아들 모두 한 가지만을 (말이나 행동) 잘하지만, 둘째의 회개가 첫째의 위선보다는 낫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명백하다. 진실한 의는 고백보다는 행동에 있다.

  청중들이 비유의 의미를 아직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여 예수는 아주 쉬운 설명을 추가한다세리와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그들은 요한에게 (후에 예수에게나와 회개했기 때문이다요한은 의의 길에 관해 설교했고죄인들은 그를 믿었지만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실제적 충성은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위선은 그들이 요한을 알아보지 못한 후 예수의 사역을 통해 주어진 "두 번 째 기회"도 계속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 사례가 주는 의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지도자들은 불의를 통해 권위를 상실했고, 종교적으로 소외된 이스라엘인들은 진정한 권세를 현명하게 알아보았다. 요한과 예수의 권위는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한편, 이 같은 사람들은 의의 길로 인도하기를 포기한 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시켰다.

  이 비유에 대한 대체주의적(supersessionist) 해석(예수가 이스라엘을 이방인으로 대체했다고 보는 견해)은 이 사건의 배경이 성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가능은 하지만 정당한 해석은 아니다. 그러한 해석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불필요한 대립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비유의 본래 목적(즉 청자로 하여금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에 질문을 던지게 하는)을 모호하게 만든다. Hauerwas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이 비유에서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를 판단할 근거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비유가 어떻게 ''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낫다." 그 비유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어느 아들을 닮았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중요한 대체적 요소로 등장하는 것은 행동적 회개를 통한 믿음의 고백이다.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은 예수와 성전 지도자들간의 격렬하고 점증되는 그리고 폭력적인 논쟁의 한 부분이다. 그저께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여”(21:9)라는 외침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리고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21:13)로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성전으로 돌아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라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23).

 그것은 정당한 질문이다. 예수가 왜 성전을 둘러엎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주의를 끈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자신과 세례요한의 권위를 연결시킨다. 둘째는 비유를 말하고 이를 성전 지도자들을 견책하는데 활용했다.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도전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돌렸다. 예수는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라고 물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세례요한을 믿지 않기에 하늘에서 왔다라고 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서웠다. 그들이 예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예수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고대의 명예논쟁에서 예수가 이긴 것을 보여주는데, 하지만 그 보다 무엇인가 더 있다. 분명히 예수의 질문은 하나님의 메시지와 보내신 사람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거부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이 세례요한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의 전조이고 나아가 그것을 필연적이게 한다. 예수도 간접적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복음서 독자들은 세례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직책의 증인임을 알게 된다. 세례요한을 가리킴으로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메시야되심을 선언하고 그렇게 함으로 은연중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예수 대답의 두 번째 부분은 두 아들에 관한 간단한 비유로 시작한다그들의 아버지는 둘 모두에게 포도원에 일하러 가도록 부탁한다맏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곧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둘째 아들은 ‘예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가지 않았다그것이 비유의 전부이다이 비유의 유일한 놀라운 점은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라고 물었다그들은 “맏아들”이라고 대답했다이것은 아무리해도 헷갈릴 것이 없다이 이야기의 다른 본문전승은 더 복잡한데어떤 본문은 순서도 다르고 대답도 다르다그 본문에서는대제사장들은 의도적으로 다르게 대답했다하지만 모든 영어 번역은 여기의 순서를 따르고 있고그러기에 비우의 의미에 대해 불명확한 것은 없다문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이점에서 예수는 유대 전통이 가르치는 것을 단순히 따랐다이것은 표준적인 유대신학이다그런데 대답의 중요성은 비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적용에 있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고 선언하셨다. 세리와 창녀는 유대인들의 사회적 종교적 계단에서 맨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고, 복음서에서는 표준적 죄인을 대표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의 사회적 위치 반대 극단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의 우선권은 예수의 가르침에서의 일반적인 역전의 이미지와 멋지게 들어맞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관한 것이 아닌 비유로는 매우 어색하다. 더군다나, 비유에서의 말과 행동에 대한 대조가 대제사장과 장로,세리와 창녀와 선뜻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어색함은 마지막 문장이 본문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예수는 결론적으로 요한이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다고 말한다(32). 그러기에 세례요한은 옮음의 표준과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믿지 않았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말이나 행동이냐가 아니라 세례요한을 믿느냐 안믿느냐이다. 물론, 세례요한과 예수의 권위와 지위는 서로 얽혀있다. 둘 다 옳은 길을 걸었고, 모르게 하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의 하늘나라에서의 지위는 예수와 세례요한에 대한 반응에 의존한다.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은 사람이 하늘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갖는 것은 믿음의 행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의 실패는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본문의 전통적 읽기는 누가 믿고 믿지 않는가라는 정체성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말하거나, 개신교적 읽기로 공로에 의존하고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카톨릭신자를 의미한다. 세리나 죄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인 기독교인을 말하거나, 믿음에 의존하고 공로에 의존하지 않는 개신교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읽기 어느 것도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니오라고 말하고 행동했던 첫째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아마도 반응자들을 알레고리하게 해석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대신에, 본문은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 공격은 남아있다. 그것은 옳은 길을 걷지 않거나, 그 길을 걷는 사람을 알지 못하는 리더들에게 언급되었다. 의인을 아는 것을 거부하는 이것은 말하고 행하지 않는 오랜 위선과 연결된다. 본문은 하나님나라에서 자신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경고가 된다. 그것은 믿음과 행함의 문제가 아니다. 마태의 신학에서는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산상설교를 행하는 것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세례요한과 예수를 믿는 것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옳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에게 권위에 관해 질문한 것은 이 구절 바로 앞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한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서정과 A해에서는 그 부분을 읽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설교자나 교인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23): 이것이 예수가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과 논쟁한 후 말씀하신 비유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이 구절의 핵심이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이며, 그가 하는 일을 하고 말하는 권한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아내려는 중요한 질문이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의 행동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어떤 선생의 이름이나 권위의 근거를 말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가 뭐라고 하든지 반박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것은 예수의 권위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때 세례 요한의 권위에 관한 질문이 자기의 권위에 대한 질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 하나를 확인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제사장과 장로를 정죄하는 것은 쉽다.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들 말하듯이, 한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가리킬 때, 세 개의 손가락은 우리를 가리키게 된다. 우리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이 되어보면 어떨까? 현상 유지를 위해 현재 상태를 그대로 두고 싶어하는 경향에 대해 묻는다면 어떨까? 변화에 대하여 우리가 저항하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종교 권력의 수호자들을 그렇게 쉽게 조롱할 때,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권위에 관한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고, 우리 신앙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신입 회원과 젊은 회원이 지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면 연장자들이 화를 내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시되고 실행되면 어떤가? 주일 예배나 성례전에서 무언가가 바뀌거나 가구가 옮겨지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서 이런 일이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28-31)는 이전의 만남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아들은 호언장담하고 반항적인 모습인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아버지의 지시에 대해 “싫습니다”라고 강하게 대답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고 포도원으로 간다. 공손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 물으시니까, 그들은 “첫 번째”라고 말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의 느낌을 파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올바른 답을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 않은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마음을 바꾸고자신의 존재 방식과 행동양식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예수의 질문은 옳은 대답에 관한 것이 거의 없다그 질문들은 추종자들과 청중들에게 변화하라고 요청한다.

이 비유에 따르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집중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누가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가에 대한 더 깊은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이것은 예수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오늘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태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여성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는가? 동성애자는? 마음이 병든 사람은? 노숙자는? 숙고해야 할 흥미로운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는 누구 옆에 서게 될까? 알게 되면 놀랄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이며,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지에 관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의로운 사람들과 잃어버린 사람들을 환영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환영한다. 베네딕트 수도사는 그의 수도원 규칙에서 그의 형제들에게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로 환영하라고 권고했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첫 번째 아들은 마음을 바꾸고 밭으로 갔다. 세리와 매매춘 여성들은 요한이 옳은 길을 보여주었을 때 그를 믿었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이 변하도록 하고,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는가? 우리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을 가로막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이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의 권위에 관한 문제는 중요하다. 그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교회는 사람의 조직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요한의 세례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과 두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지에 관한 질문에서 예수는 말하기를, 예수에게 권위를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죄인과 매매춘 여성을 환영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설교적 관점

  -몇 년전 채널을 돌리다가 TV에 많이나오는 심리학자이자 저명인사인 닥터 필(Dr. Phil)의 인터뷰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인터뷰하는 사람이 닥터 필에게 물었다. “만일 당신이 과거나 현재나 이 세상에 있는 누구와도 인터뷰할 수 있다면 누구와 하고 싶나요?” 닥터 필은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요. 나는 그와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닥터 필이 말하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다음과 같이 속으로 생각한 것이 기억난다: “안돼요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은 예수와 함께 앉아 그를 인터뷰하며 인생의 의미에 관해 묻기를 원치 않을거예요. 그는 당신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겁니다. 그는 당신의 질문자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아마 이렇게 대화를 끝낼거예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라고. 그러니 닥터 필, 안됩니다. 당신은 예수와 인터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도 원하지 않아요.

-이번 주일 성서정과가 보여주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와 대화하는 장면은 위험스러워 보인다대화의 진행이나 변화가 너무 빨라서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고 혼란스러워진다이 대화는 마치 한 어릿광대와(jester) 만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돌에 기록된” (written in stone)모든 것에 개입하여 “세상의 굳은 것을 녹이는” 역할을 한다.[기존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미-역자 주]. 그래서 사람들 특히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살아가도록 한다. 이 장면은 마치 거룩한 바보 (a holy fool)[예수를 의미]를 만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의 이상하고도 예측할 수 없는 기이함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한다 

   -예수와 종교지도자들간의 만남은 이러한 분위기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권위의 근거에 관해 질문함으로써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다가온다. 위험한 상황이다. 워렌 카터(Warren Carter)가 말하듯이 만일 예수가 “자기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는 제도적, 문화적 합법성이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되고 [단일종교 사회에서]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 또한 그들에 반하는 것으로 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는 신성모독을 범하고 (9:3) 그들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이 함정을 피하고 분위기를 바꾼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25). 그것은 특별히 곤란한 질문인데 왜냐하면 그 대답이 요한에 관한 것일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예수 자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권위“ (authority)를 인정하게 되면 종교지드자들은 또한 예수에 관한 요한의 증언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대화에서 질문을 받은 사람이 질문하는 상황이 된다.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의 함정을 피할 뿐만 아니라 그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그들에게 되묻는다. 더욱이 그의 질문은 그들보다 한 수 위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드러나게 한다.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권위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권력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25-28). 그들은 현존질서를 위협받지 않고 지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작은 박스에 넣어두려고 하였다. 예수의 질문 후에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말이 없었다. 인터뷰는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재빨리 한 비유를 말하여 또 다른 질문을 한다. 그래서 서기관과 장로들이 믿음이 없음을 알게하고 마침내 신실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이야기는 권위적으로 예수에게 질문했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천국에 이르는데 세리와 창녀 다음이라는 선언으로 끝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서 (그리고 아마 화가 나서) 서있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황당하고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지경에 빠졌지?  

-설교자도 교회도 예수와 만나게 되면 이런 결과를 만나게 된다. 예수는 인생의 의미에 관한 대화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자신의 정체성과 그를 믿는 믿음 안으로 초대하는 일로 우리에게 언제나 다가오신다. 요한에 관한 그의 질문을 통하여 예수는 복음서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Who do you say that I am?) 그는 이 대답에 우리가 주저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우리가 잘못된 것을 향하여 가는 것을 드러내고 우리를 그를 향한 믿음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와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고 그를 따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세상은 그 질서가 뒤집어지고 (is turned upside down), 창녀와 세리가 천국의 행진을 인도하며 특권층인 종교지도자들은 어리둥절하고 놀라서 남겨지게 된다.  

-설교자는 이 설교를 하면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표현하는 코믹하고 재미있는 역할극을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더 할 수 있다설교자는 또 거룩한 바보 예수를 상징하는 어릿광대를 보여줄 수도 있는데 그는 결코 잡히거나 조종되지 않고 항상 우리의 손바닥을 피해 있고 오히려 우리가 그에게 잡히게 된다설교자는 의로움과 특권경건과 권력이 종종 혼합되어있어서 혼란스러운 그 곳에 예수께서 오셔서 개입한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이 가능한 모든 방식을 통하여 설교자는 예수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동시에 천국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신실한 세리와 창녀의 삶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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