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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8장 15 ~2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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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교회론과 교회 생활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큰 부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뛰어난 지도자(누가 "천국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자리에 있어야 하고 낮은 자를 섬겨야 한다( 18:1-5); 제자들은 동료 신자들이 가는 길에 "걸림돌을 놓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18:6-7), 개인적인 윤리에 철저해야 한다(18:8-9); 신자들은 서로에 대해 열심을 갖고 보살펴서 한 사람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18:10-14).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에는 끊임없는, 그리고 제한 없는 인내가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18:21-35).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는 "형제"(, "교회의 일원") "너에게 죄를 지었을 때"(15)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다룬다.

  예수가 말하는 교회의 성격은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몸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신다: "내 이름으로 소자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18:5),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는 그들 가운데 있다"(18:20). 각각 신자는 매우 소중하고, 어느 누구도 다른 신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엘리트, 강자, 혹은 다수파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자발적 가입자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가 하나로 연합한 교제이다.

  예수께서는 사도 이후 시대를 위해 구체적인 규율을 제정하시거나 특별한 지도자나 기구를 지정하지도 않으셨다. 다양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늘의 예수의 위대한 가족의 각 분파는 수많은 방식 중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따라 나름의 성서적 원칙에 근거하여 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단체는 오늘 본문과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 제시된 교회론의 핵심적 특징에 충실해야 한다고 요구하신다. 교회는 계속해서 예수의 다림줄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교회 내의 갈등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갈등은 기독교 공동체를 괴롭혀 왔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종종 교인들 간의 입장의 차이를 "관리," "중재" 또는 "해결"하기 위해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는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거스르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은 목회자를 찾아 가 상담을 받을 수 있고, 목회자는 가족체계 이론에 따른 심리학적 통찰력을 갖고 행동의 역동성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물론 도움이 된다. 사실 예수도 그가 문제 해결을 위해 설정한 단계를 보면 오늘날의 표준으로 볼 때도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 사람에게 직접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만일 그 피해자가 겸손하고 친절한 매너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백, 용서, 화해 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 단계가 실패하고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남아 있다면, 두 번째 단계는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삼자의 시각에서 사태를 살피고, 오해를 미리 방지하며, 나중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가해자가 계속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면, 공적으로 문제를 보고하고 해결책을 고안하기 위해 이제 교회에 알릴 시간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악의 없는 견해 차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죄를 진"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한 죄에는 십계명에 요약된 죄들이 포함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합을 파괴하는 각종 이기적인 행동도 포함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교인 간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하는 신학적인 문제이다. 예수가 지시한 각 단계는 치유와 회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수행돼야 한다.

  오늘날 미국 교회를 보면 이런 일이 생길 때 한두 사람이 분노에 차서 교회를 떠나거나동네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아예 교회 나가기를 멈추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이 모든 경우에 죽음이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한다회중이나 관련된 당사자들은 앞으로 수년 동안 상처를 갖고 살 수 있다하나님의 은혜가그 은혜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손상되어 버린 것이다.

  가해자가 자신이 옳았다고 계속 주장하여 부활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의 대답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교회는 이 말을 파문이나 추방, 혹은 그 사람을 기피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손을 씻고 계속 길을 가는 것처럼, 그런 이해는 상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자주 이방 사람, 세리, 창녀 등의 부적격해 보이는 외부인들과 교제를 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기회 있을 때마다 종교의 이름으로 그런 외부인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분개했다. 그들은 예수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맹비난을 했다.( 11:19) 예수가 그들을 멀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예수는 우리에게 그들을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그들에게 손을 뻗치라고, 그들을 계속 사랑하고, 깨진 것을 회복하라고 명하신다. 다음 몇 구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올바르게 들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주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예수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답은 "무한히"라는 의미이다(21-22).

  세상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시점에 도달하면 사람을 쉽게 버린다.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라는 예수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이 말씀이 주기도문(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과 통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은 의도로 말씀하셨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용서하고 치유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누가 그것을 하겠는가?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 두세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실 것이다. 그런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주석적 관점

   18:15-20 16:13-20과 병행구이다. 두 본문은 모두에 마태복음서에서는 유이하게 교회(ekklesia)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매는 것과 푸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의 말을 담은 복음서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매뉴얼이었던 디다케(Didache)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이 예수의 말이라기보다는 마태나 그의 공동체 전통가 말한 것으로 여긴다. 마태 본문의 기저를 이루는 예수의 용서에 대한 말이나 제자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말이 있지만(예를들어 눅17:30), 현재 형태의 분문은 예수의 삶의 정황보다는 제도적 교회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본문이 일차적으로는 교회의 징계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초점은 처벌이 아니라 화해이다. 궁극적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이다(15).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과 같은 가족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자적 번역은 NRSV과 같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 나은데, 그러한 번역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개념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너 나은 번역은 성포괄적인(gender-inclusive) “형제와 자매”라고 하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을 막으려는 여러 가지 노력들을 제시하고 있다교인들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적으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형제나 자매를 찾아가야 한다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음의 공동체의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해결해야 한다유대 전통에서는 두 명이나 세 명의 증인이 필요한데(17:6;19:15), 여기에서 복수의 증인들은 잘못을 확증하려는 것이 아니라대화를 유효하게 하고 잘못한 사람의 책망에 힘을 더하기 위해서이다.

 15절의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란 단어는 권위 있는 초창기의 두 사본(Sinaiticus Vaticanus)를 포함한 여러 고대 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본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단어가 21절과 병행구가 되게 하기 위해 사본을 만드는 사람이 추가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본래는 있었는데 나중에 우연히 또는 좀더 광범위하게 적용하기 위해 생략한 것인지에 관해 의견이 갈린다. 둘 중에 어떤 경우든 주도권이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있다.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 간에, 또는 서로를 위해 책임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문제는 전 교회에 제기된다(16:17의 교회라는 단어는 보편적 교회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지역신앙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만약에 잘못한 사람이 전체 공동체 앞에서도 저항한다면, 그 사람은 외부인(이방사람이나 세리와 같이)과 같이 취급하게 된다. 상호 존중과 책임의 의무를 위반하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외부인과 같이 행동하는데, 그러기에 다시 복음화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외부인으로 취급해야 한다(“그를 이방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라는 표현은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단어들은 유대인 기독교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본문에 기술된 과정들은 흥미롭게도 사해사본에서 묘사된 쿰란공동체의 징계 절차와 유사하다. 거기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징계의 행동에서 공동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때로는 공동체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명백하게 성적 부도덕의 잘못을 저지른 교인을 제거하라고 충고하고 있다(고전5:1-8).

 이 분문의 나머지는 형제와 자매로서 빗나가는 문제를 토론하고 다루는 데 적절하다고 여긴 마태가 첨부한 여러 가지 말을 포함하고 있다. 마태는 이18절의 “매는 것과 푸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교회에 관한 본문에서 사용했다(16:19). “매는 것과 푸는 것”이란 것은 후기 랍비 문서에서 율법해석(무엇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에 관한)이나 징계해석의 표현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모인 신자들(18절의 ‘너희들’)이 잘못을 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면 그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권위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19절에서 마태는 분명히 독립적이고, 본래 기도에 관한 말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신자들이 협력하고 합심하여 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교회의 징계 결정에도 적용한다. 아마도 마태는 교회의 그러한 결정들은 신중하고 진심어린 기도를 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전 절과 같이 19절은 교회가 화해와 회복을 가져올 책임감으로 행동할 때에 비록 고집스런 개인을 추방해야 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20절은 징계에 관한 안을 다룰 수밖에 없는 교회에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공동체에 현존하고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상기시키는 것은 확신과 주의를 기하는데 모두 봉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현존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탄생설화에서부터(1:23) 마지막 까지(28:20) 강조하고 있다.

 18:15-20에 걸쳐 강조하는 것은 잘못한 형제자매를 벌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는데 있는데이것은 마태가 이 본문을 배치하는 문맥에서 보면 분명하다본문의 앞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을 말하고 있는 “잃은 양의 비유”(10-14)와 무한한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21-35)가 있다어떤 교회의 징계행위도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목회적 관점

이것은 특히 서양 교회에서 소화하기 어려운 구절인 듯하다. 존 로크의 계몽 철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교회에 대한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이해는 자율적인 개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었다. 특히 독립, 자립심, 개개인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인주의가 존중되는 미국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교회가 일요일에 예배를 위해 모였다가 자신들의 일을 하기 위해 일주일 내내 떠나 있는, 자립적인 개인들의 공간인 문화에서 교회의 규율에 관한 오늘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이 구절은 몸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전 12:12~16)고 말할 수 없다는 바울의 교회 이해로 시작한다면 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고전 12:12-16).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존 로크와는 정반대로, 상호 의존의 장소이다. 각 교인들이 서로가 없으면 불완전하고, 한 사람의 고통이 모든 사람의 고통이며, 한 사람의 영광이 모두의 기쁨이 되는 곳이다. 이것은 또한 교인들 간의 갈등이, 관련된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결합되는 곳에서, 소수의 분열은 모두의 분열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갈등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배신감과 저항감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우리는 가족, 직장, 학교에서도 갈등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교회에서 그럴 수 있을까? 우리는 기독교인 아닌가!”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히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싸우고, 의견이 다르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비방하거나, 험담하거나, 모욕하거나, 심지어는 서로를 고발하면서 싸우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마치 갈등이란 없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에,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화해하라는 더 높은 과제를 부여하고, 불가피하게 분열이 생길 때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화해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양 문화는 무엇보다도 기술적이고 공정한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 문화는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전자의 경우,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 후자의 경우, 다른 사람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들은 화해를 하려고 할 때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경계선이며,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긴장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와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먼저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고, 우리 자신 전부를 헌신함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탈진해서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킨 것을 극복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은 분별과 안내의 공적인 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구절을 개인주의나 혹은 율법주의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은 악용될 우려가 있다어느 쪽이든피해의식 때문에 법을 어긴 사람을 통제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교인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통찰력 있는 공동체에서 화해가 이루어질 때갈등은 교회 안의 두 세 사람흔히 장로나 목사에게 가져가게 된다만약 이 때 회개하지 않으면그 갈등은 몸 전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하기 때문에마지막 방법으로 교회 전체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만약 법을 어긴 교인이 여전히 전체 교회의 권위와 통찰력에 대해서 회개하고, 복종하고, 책임지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17) 더 이상 몸의 지체가 될 의향이 없는 사람들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묶는다. 더욱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별, 국적, 언어, 민족성, 사회적 지위를 벗어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기독교인들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세상과 우리를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롭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양한 지체들의 집단적인 지혜와 통찰을 모을 때 가장 자유롭다.

결론적으로, 화해의 목회는 기독교 공동체의 사명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교회가 “매임”과 “풀림”이라는 권력을 받은 것은(18) 교회가 항상 옳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와 분열이 일어날 때 고백, 회복, 그리고 화해가 교회가 우선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실시간으로 고백하면서, 교회에 대한 지지를 되찾기 위해 모두가 함께 책임을 지고 바로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기관이나 교파가 아니라, 둘이나 세 사람이 그리스도 아래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이것은 소외, 외로움, 불안, 불신의 원인인 개인주의의 멍에를 벗어 던지고, 우리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주고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갈등이 있겠지만, 갈등을 통하여 어떻게 서로 간에 적절히 매고 풀 것인가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목회를 세상에 증언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종말론적인 치유와 화해의 모형을 미리 보여준다.

 설교적 관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본문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어떤 법적 절차를 위한 안내서로 대하기 보다는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규율(the Rule of Christ)로 불리워 왔음을 상기시키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돌보는 것이 분규에 개입하는 목적임을 재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 마태복음 본문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이 본문 또한 예수의 수난예언 (17:22-23)에 이어 나온다. 이러한 구조적 맥락을 볼 때 마태복음은 교회론적 관점에서 제자됨의 길을(discipleship)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개교회에서 제자됨을 그리고 지난 주에서는 보다 보편적 교회에서의 제자됨을 말하여 합류가 일어나고 있다.  

 -교회상황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종종 이 본문을 모든 형태의 분규에 마치 전쟁에 임하는 매뉴얼처럼 적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본문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규율은 가해자(offender) 혹은 죄인(sinner)을 돌보는 것이지 피해자의 권리를 반드시 확립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의 과제는 가해자와 곧 여기서는 죄인과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만일”(if)이라는 구절을 이해함에 있어서 [예를 들어 15네 형제가 [너에게죄를 짓거든영어성경에서는 if로 시작한다: If your brother sins against you다른 사본에서는 “너에게” (15,aganist you)라는 구절이 없는 것도 있다이 구절이[너에게포함되건 혹은 생략되건 설교자는 피해를 입은 개인[너에게가 포함된 사본인경우]이나 교회공동체[포함안된 사본인 경우]모두에게 돌봄을 베풀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해를 이루려고 시도할 때 그 출발점은 기독교적 방식으로 단지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가해자가 다시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성을 바로잡는 것이다. 15절은 [화해를 통하여] “얻는 것” (gain)은 그렇지 못했더라면 잃어버렸을 관계를 “다시 얻는 것” (regain)임을 강조하고 있다. 16-17절에도 나오는 “만일”이라는 구절은 돌봄의 법칙이 공동체 사역자에게로 확대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설교는 이 공동체 사역자의 역할을 공유한다. 설교자는 공격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는 공동체적 돌봄사역자의 역할을 설교를 통하여 힘을 주고 이런 관여의 규율을 강조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교를 통해 공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든가 혹은 누구를 지적하는 강단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서정과 사이클에 따른 이 번주 본문이 지닌 장점은 설교를 교회적 돌봄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제자도의 형태를 얼마나 보여주는데 있다  

물론 우리가 하는 설교는 또 피해자를 돌보는 필요성을 놓칠 위험도 있다. 여기서 또 성서정과 사이클은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공동체적 돌봄 속에서 제자도를 이해하는 것을 보여준다.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자는 이 본문이 피해자를 향한 목회적 돌봄을 간과하고 있지 않음을 잘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 본문은 타자를 돌보는 정신 속에서 분규상황에 개입함을 강조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18장의 근간은 15-20절에서 강조된 공동체 사역자의 역할을 겸손한 제자도의 정신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정신은 어린아이의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겸손함을 지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4절과 5절은 겸손함으로 참여하는 역설을 보여주고 6-9절은 하나님의 겸손한 자녀들로서 해를 끼치거나 죄를 범하는 일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다음 예수께서는 극적인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돌봄을 말하고 있다 (10-14).  

-그리고 이번 주의 본문은 겸손함 가운데 제자도를, 가해자에 대한 어려운 돌봄을 배치하고 있다. 그런다음 베드로는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때 개인적 용서의 책임에 관해 묻는다 (21). 예수는 우리가 받은 용서를(22-35) 가지고 용서해 줄 힘의 근원으로 삼는 용서를 제시하며 응답한다. 여전히 예수의 가르침은 15-17절에서 추구하는 회복을 위해 회개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지 않는다. 회개에 대한 충분한 관심없이 용서의 필요성만을 설교하는 일은 수동적일 수 있고[가해자는 아무일도 안하므로] 또 상처를 입은 자에게 폭력이 될 위험이 있다.  

-돌봄과 용서해 줄 책임, 가해자와 화해를 추구하는 것은 교회에 주어진 권위에 있다. 매고 푸는 권세는 단순히 교회 지도자나 보편적인 교회 (universal church, 마태복음 16:13-20에 베드로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에 속해있을 뿐만 아니라 개교회(local church)에게도 있다. 이 치리는 (discipline) 돌봄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돌봄의 신학을 가르친다. 돌봄의 규율 심지어 율법조차도 어떻게 적용하는가 하는 권위는 교회에 주어져 있다.  

-학자들은 매고 푸는 이라는 용어를 주어진 상황에서 계명이나 율법을 해석하였던 랍비 권위와 연관시킨다매는 것 (binding)은 율법을 적용하는 일이다푸는 것(loosing)은 율법이 주어진 상황에서 적용될 수 없음을 결정하는 것이다매고 푸는 이런 가르침의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16장에서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여기 18장에서는 교회에게 그 권위를 부여한다전자에서 예수는 교회의 권위를 자신의 신적 정체성이 드러난 것 위에 (16:17-19) 두고 있다후자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자신이 약속한 현존에 둔다 (18:18-20).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도는 세상을 향한 사역 속으로의 부름과 희생을 느끼는 것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being) 어려운 훈련 혹은 함께하는 제자도를 따라 사는 것(living)이다. 우리는 누군가 다치거나 공격을 당했을 때 돌보아 주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하며 매고 또 푸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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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장 1 ~ 9절  (0) 2022.07.21
마태복음 16장 21 ~28절  (0) 2022.07.21
마태복음 16장 13 ~20절  (0) 2022.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