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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1장 2 ~11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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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러시아 정교 교회의 큰 성상 병풍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끌어왔던 성인들에게 바쳐진 성상(Icon)이 특별히 한 줄로 정렬되어 있다. 그 맨 가운데 인류를 구하시고 지금 높은 데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큰 성상이 있다. 그 오른쪽 첫 번째 있는 것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성상이 있고, 왼쪽 첫 번째에는 세례 요한의 성상이 있다. 이 둘은 서 있는 모습인데 둘 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 쪽으로 기대고 있어서 마치 모두가 예수와 한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대개 그가 정말 누구인지 혼동했다. 예수는 결국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13)고 물었다. 예수와 한몸이 된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이와 같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이 11:2-11에 나온다. 요한은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했다. 예수는 무리가 요한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예수만이 이 두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다.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알아본 첫 번째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고대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예수를 보기도 전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다른 예언자와는 달리 요한은 살아서 그가 예언했던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예수가 무리를 따라 요단강 가 광야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요한에게 오셨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셨다. ( 3:14)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요한의 눈앞에서 실현되었다.

   11:2-11은 요한과 예수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더 전해준다. 요한은 이제 감옥에 같혀있고 그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예수가 진정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분인지 묻는다. 이 질문에 우리는 조금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얼만 전에 세례를 주면서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명확하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마태의 이야기 흐름을 따르자면 요한이 헤롯에 의해 투옥되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생겼을 수도 있고, 혹은 그사이에 다른 중대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이제 요한은 더는 메시아의 선구자나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아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10)가 아니다. 도리어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는 이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가 요한이 받아야 할 증거를 대신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눈먼 자와 저는 자, 나병 환자와 듣지 못하는 자, 죽은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치유를 받고, 살아나고,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5) 예수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은 요한의 정체성이 예수의 정체성으로 싸여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고 묻는다. 연로한 도인과 같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인가?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가? 예언자인가? 예수는 요한이 진정한 예언자였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엘리야라고 본문 뒤의 14절에서 거듭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말이 요한의 정체성을 충분히 묘사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있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그에 견줄만한 사람은 없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으로서 어느 누구도 그보다 위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예수의 제가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자로서, 요한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이다.(11) 예수에 앞서 등장했던 요한이 이제는 예수를 따라야 한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청한 이래 기독교인들은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해 왔다때로는 광야에서 고독 가운데 금욕적 훈련에 매진하며 문명을 포기한 거룩한 남녀가 제자의 표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혹은 이 세상의 권력과 부가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오해에 근거하여위대한 왕이나 제후가 그런 표본이 된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그러나 또 다른 표본이 있었으니이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이 세상에 대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예언자들이다목회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예언자적인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가까이 가 있다고 믿는 유혹에 가끔 빠진다.

  이런 생각들은 군중들이 요한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잘못된 해답들이다. 참된 제자도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기 위한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우리의 금욕주의적 성취나, 세상의 권력이나 예언자의 신랄한 비판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우리의 허망한 상상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진정한 제자는 계속해서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할지 배운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세례 요한을 제자의 원형이라고 여겼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르트의 책상에는 1515년에 Matthias Grunewald가 그림을 그리고 Miclaus of Haguenau가 조각한 유명한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복제본이 놓여 있다. 그 그림 속 십자가 왼쪽에는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고, 마리아는 창과 못에 찔려 피범벅이 된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려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맨발에 낙타털옷을 입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손의 길게 그려진 집게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 그것이 참된 제자도라고 말했다.

  바르트와 동시대인이었던 본 훼퍼는 나치에 의해 처형당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감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신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그는 자기가 위선이나 나약함에 물들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모든 기독교인이 언젠가는 하게 된다. 세례 요한 안에서 우리는 답을 만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바라보기를 그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만을 가리킴으로 제자의 정체성이 마침내 명확해진다: “내가 누구인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석적 관점

-세 번째 대림주일에도 구시대에 속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한은 투옥되었는데, 이는 그의 예언자적 증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를 뚜렷하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1세기에 감옥은 종착지가 아니라 중간 기착지이다. 사람들은 무죄가 판명되거나 감옥형을 받거나 사형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린다. 구금 기간 동안에 죄수들은 그를 돕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래서 최근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요한의 경우에는 심지어 자기와 함께 회개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같이 투옥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질문을 예수께 전한 제자들로부터 예수의 활동에 관해 듣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하튼 마태에게 이 이야기의 목적은 요한과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질문은 상당히 단순하게 보인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합니까?” 많은 경우에 그러듯이 예수는 이 요한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한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치유 받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일견을 보여주는 이사야와 제2이사야서와 공명하며 질문의 범위를 확장한다.  

-다음의 병행구들은 마태가 이사야를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경이 볼 것이라는 마9:27-31과 사29:18;35:5; 절름발이가 걸을 것이라는 마9:2-8과 사35:6; 나병환자가 깨끗해진다는 마8:1-4 이것은 이사야에는 없고; 귀머거리가 들을 것이라는 마9:32-34와 사35:5; 죽은 자가 일어날 것이라는 마9:18-19,23-26과 사29:19;61:1-2;42:7. 전부 보면 이러한 행동들은 적어도 농촌이나 가난한 농민들의 기대의 목록과 위기의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치유를 요구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에게서 치유자와 귀신을 몰아내는 기도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이사야는 광범위한 선행을 기대하면서도, 이것을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사실 메시야가 이러한 역할을 성취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문서는 특별히 없어 보인다. 그런데 예수는 (만약 있다면) 이러한 틀을 부수는 것이거나 당시의 대화 속에 예상치 않은 복잡한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아마도 이 명단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에 들어가 있는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11:5)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ptochoi)은 빈곤하고, 낮은 곳에 쫓겨난 절망적인 사람들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대답하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은 흥미롭다. 새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올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가짜 의사가 아닌 참된 치유자에 의해 치유될 것이다. “백성들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4).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계약의 시범케이스이다. 만약에 율법의 공공적 계약이 지켜진다면, 그러면 신명기15장의 약속들은 통과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개인적 필요의 차원이 아닌 그룹으로 말하면서 시저, 갈릴리의 헤롯 안티파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등 누가 되었든 지배자에 의해 가난한 사람에게 닥친 불의와 억압에 대해 구조적 관심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그의 축복을 이 말로 결론짓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가 정책토론에서 우호적인 의견 차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석가나 아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차이가 개인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대립과 도전에서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강조는 ‘나’에 있다. 요한과 예수는 결정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잘 준비된 적들에 대항하여 공적 영역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했는데, 때로는 그것이 예언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십자가형에 처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자리에 앉아있는 권력자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그랬다. 이 모든 것은 구시대가 어떻게 계속해서 작동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민중들을 수탈한다. 그것은 오로지 강림만이(advent) 바꿀 수 있는 악순환이다. 요한은 예수는 모두 생명을 가져오는 투쟁으로서 대림절에 참여하고 있다.      

-11:7-11에서 예수는 초점을 요한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린다그는 세 가지 날카로운 이미지를 사용한다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 화려한 옷을 입고 왕궁에 있는 사람(8),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9-11). 갈대의 이미지는 헤롯 안티파스가 주조한 동전에 있는 갈대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이 말은 또한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매번 흔들리는 갈대(세워진 왕)일 뿐이라는 것을 비꼬는 해석이다다른 하나의 해석은  갈대바다에서 바람이 파도를 제어하는 출애굽과 연관하여 갈대를 보는 것이다만약에 첫 번째 해석이 맞다면예수가 로마의 신하로서의 헤롯 안티파스의 불안정한 위치를 은근히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이것이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면이 말은 희망을 신학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방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세 번째 이미지-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여러 곳의 인용에 의해 입증된다(23:20;3:1). 이것은 복잡한 부분이다. 어느 때는 요한은 여자에게서 난 자중에 가장 큰 자이다라고 하다가, 다음 번에는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요한은 예언자의 절정이자 결론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가교이다. 이 곤경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9-11절을 이런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이 지배하는 이 강림의 크기를 재려고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 강림의 차원과 크기를 잡아내는 것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초점이 되면 갑자기 요한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비록 그는 작지만 여전히 하늘에 속해 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대림에 관한 어떤 것은 단순히 측정하거나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매년 신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대림절의 셋째 주일을 위한 복음서 말씀은 하나와 절반의 인용문이다.

첫 번째 인용문은 마태복음 11:2~6, 감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응답이다. 그 다음 인용문은 마태복음 11:7-14이다. 개정성서정과는 11:11에서 끝나기 때문에, 하늘나라와 폭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퍼즐과 세례요한과 엘리야의 관계에 대한 퍼즐을 풀어야 하는 설교자와 목회자를 부담을 덜어준다. 오늘 본문은 목회의 실천과 번성을 위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한다.

 감옥에서 온 요한의 질문 (2-6 ). 설교적으로나 주석적으로 마태가 왜 요한의 질문을 이 부분에 두었는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3장에서 요한은 예수를 바르게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목회적으로 이 질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자로 보았고,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흩어놓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3:12). 지금 요한은 감옥에 던져져서 쭉정이 취급을 당하고 있는 반면 헤롯의 권력은 더 커지고 번영하고 있다 “오실 그분이 (정말)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1:3)”라고 묻는 건 당연하다.

목사는 대림절 동안 목회적 대화를 위한 추가 시간을 마련하고, 적어도 은유적으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할 시간을 가지라고 배워왔다. (어떤 사람들에게 은유는 단지 은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들뿐만 아니라 소비문화 전체가 이 시대가 메시아의 시대가 아니라 여전히 편안하고 즐거운 시대라고 확신하게 한다. 예수는 편안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오시는 분이고, 대림절이 그의 오심을 가슴벅차게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발표는 잔인해 보일 수 있다.

예수의 응답은 신학적으로 정답이지만목회적으로는 요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서너희가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죽은 사람이 살아나며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4-5).” 요한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면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지체장애인한센병 환자농아자 그리고 일시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지만 예수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는 여전히 감옥에 있다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지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쾌한 청년들이 양로원이나 병동에 와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리스마스를 즐거워하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노래한다든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때,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위로받지 못한다.

목사들이여, 대림절이 오면 이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라.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줄 수는 없지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회는 외롭게 캐럴을 부르고 교회로 돌아가 뜨거운 사이다와 도넛을 먹는 게 좋다. 청년회의 회원들에게 일대 일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이나 병원에 있는 사람이나 양로원이 있는 사람들과 결연을 맺도록 권하면 어떨까? 청년들을 초대해서 잠시 앉아 이야기하거나, 더 나은 것은, 앉아서 잠시 듣게 하면 어떨까? 물론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옳으시지만, 세례요한도 설득력이 있다.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언 (7-11). 사람들이 대림절과 크리스마스를 우울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대림절과 크리스마스를 우울하게 여기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것이 요한에게 바치는 헌사라면, 그 말은 요한이 감옥 안에서도 그리고 그의 죽음 앞에서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대림절과 일년 내내, 하나님의 나라는 타협할 수 없고 인기투표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환영했던 아기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되는 것도 볼 것이다. 대림절의 설교와 교육과 노래는 언제나 요한의 감옥과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한다.

왕궁에서 부드러운 예복을 입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종인 세례요한을 비교하는 것은 요점이 분명하다. 이것은 34번가의 기적과 베들레헴의 기적,  Macy의 유익과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단순한 크리스마스를 장려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건 자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그 자신의 삶의 단순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난을 예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크리스마스에 등장하는 유일한 부자들은 동방 박사이며, 그들은 무릎을 꿇고 선물을 바친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집에서 보내는 단순한 성탄절의 모델로 교회의 성탄절을 단순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성탄절 행사에 동원될] 관악대에게 200달러를 지불하지 말고 그 돈을 지역의 극빈자 식품구호센터에 주는 것은 어떨까? 이미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교인들에게 보낼 카드를 구입하는 데 쓸 돈을] 카드 한 장만 사서 교회에 전시하여 모든 교인들이 보게하고  카드회사에 들어갈 돈을 구세군에 보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부드러운 겉옷과 왕궁을, 특별히 이 계절에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것에 관한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이다마태복음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나님의 양이다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세례요한보다 더 크고그들은 목회자의 돌봄에 맡겨져 있다.

 설교적 관점

-누군가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을 대신하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 질문을 하는 어린이가 반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라면 우리는 이중으로 도움을 받는다. 만일 대답을 해야 될 사람이 답을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오늘 누군가 예수께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을 한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믿음이 굳건한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 예수님은 진짜인가? 우리가 믿는 종교는 무언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교회는 무언가를 정말 가지고 있는건가 아니면 성탄절이나 그리스도라는 비즈니스는 단지 관심을 끌기위한 상상의 이야기여서 궁극적으로는 희망이나 꿈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만나면 무가치하고 무기력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위험해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질의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이나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결코 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에 동의하기를 원치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질문은 그 핵심에 약함, 그냥 믿음 그리고 의심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서기위함이라고 전제한다.  

오늘 본문은 누군가 손을 들어 우리를 대신해 질문을 함으로써 [이런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손을 든 사람은 그 반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다. 요한은 예수에 관해 놀라운 일들을 말했던 사람이다. 마태복음 앞부분에서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 3:11)고 말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예수를 가리키면서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1:29)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가장 빛났던 때는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말한 지 조금 지나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 3:30)라고 말했을 때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어서 예수가 진짜이고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그가 같은 예수에게 “당신이 진실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입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나는 투옥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체포되어 헤롯왕의 정적으로 투옥되었다. 감옥은 어느 누구나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이다. 모든 것이 즐겁고 자유로울 때 즉 밝은 태양 아래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쉽다. 그러나 교도소의 철문이 닫히게 되면 어둠 속에서 의심이 생기게 된다. “당신이 진짜 예수님인가요?” “종교가 나의 소송사건에, 현재 상황에, 나의 바램에 도움이 되나요 혹은 지금 상황이라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요?”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힘든 경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요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 것은 비단 감옥이라는 상황만은 아니다그것은 예수 자신에 관한 무엇이었다무슨 일이[예수를 통하여더 일어나지 않았다마태는 이렇게 표현한다“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한 일을... 들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물었다‘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그렇지 않으면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2-3) 예수가 하고 있던 일들은 요한에게 그리 맞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예수는 요한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예수는 요한이 구세주가 응당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세상 죄를 가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헤롯의 죄를 갖고 가지 않고 있다예수는 요한의 신학에 안맞는 것이다그래서 요한은 의문이 생겼다요한처럼 굳센 신앙을 지닌 사람이 우리처럼 의심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이제 감옥에 있는 사람의 질문으로부터 구원자의 답으로 이동해보자. 예수는 요한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나?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당신은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증거를 보아라.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그리스도의 대답은 우리가 질문할 때와 정확하게 같다. 사람들은 그들이 보는 증거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설교자의 역할이 목회적, 예언자적 혹은 복음적으로 이해되건 아니건 간에 그 역할의 일부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증거들을 설명하고 보고하는 것이다. 거기서 예수가 진짜라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식은 개인적 간증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예수를 진짜라고 고백하게 된 때는 세상에 알려진 훌륭한 생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완고한 마음을 지닌 자들은 예수로부터 멀어져있었지만 투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굳건히 그를 믿었고 심지어는 그로 인해 힘든 시련을 겪은 후에도 그러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실수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설교자는  Saul of Tarsus, Augustine of Hippo, Calvin of Geneva, Lewis of Oxford의 이야기나 혹은 설교자가 알고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기를 소개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현재에서 보다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소개함으로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할 수 있다.

-설교의 클라이맥스는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닌 자신들의 경험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장 깊은 만남의 순간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설교의 역할은 이런 종류의 경험을 설명해주고 그 경험이 그리스도와의 경험이고 그가 현존하여 일하고 있는 능력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말씀과 찬양과 친교 속에 그리고 고요한 마음 가운데에 현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러시아 정교 교회의 큰 성상 병풍에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끌어왔던 성인들에게 바쳐진 성상(Icon)이 특별히 한 줄로 정렬되어 있다. 그 맨 가운데 인류를 구하시고 지금 높은 데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큰 성상이 있다. 그 오른쪽 첫 번째 있는 것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성상이 있고, 왼쪽 첫 번째에는 세례 요한의 성상이 있다. 이 둘은 서 있는 모습인데 둘 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 쪽으로 기대고 있어서 마치 모두가 예수와 한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대개 그가 정말 누구인지 혼동했다. 예수는 결국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13)고 물었다. 예수와 한몸이 된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 이와 같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이 11:2-11에 나온다. 요한은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했다. 예수는 무리가 요한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예수만이 이 두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다.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알아본 첫 번째 인물이라고 묘사한다. 고대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예수를 보기도 전에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다른 예언자와는 달리 요한은 살아서 그가 예언했던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예수가 무리를 따라 요단강 가 광야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요한에게 오셨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셨다. ( 3:14)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요한의 눈앞에서 실현되었다.

   11:2-11은 요한과 예수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더 전해준다. 요한은 이제 감옥에 같혀있고 그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예수가 진정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분인지 묻는다. 이 질문에 우리는 조금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얼만 전에 세례를 주면서 요한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명확하게 선포했기 때문이다. 마태의 이야기 흐름을 따르자면 요한이 헤롯에 의해 투옥되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생겼을 수도 있고, 혹은 그사이에 다른 중대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이제 요한은 더는 메시아의 선구자나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아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10)가 아니다. 도리어 이제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는 이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가 요한이 받아야 할 증거를 대신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눈먼 자와 저는 자, 나병 환자와 듣지 못하는 자, 죽은 자와 가난한 자가 모두 치유를 받고, 살아나고,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5) 예수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을 보러 광야에 나갔던 사람들은 요한의 정체성이 예수의 정체성으로 싸여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고 묻는다. 연로한 도인과 같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인가?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가? 예언자인가? 예수는 요한이 진정한 예언자였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엘리야라고 본문 뒤의 14절에서 거듭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라는 말이 요한의 정체성을 충분히 묘사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들보다 우위에 있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그에 견줄만한 사람은 없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으로서 어느 누구도 그보다 위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예수의 제가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자로서, 요한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이다.(11) 예수에 앞서 등장했던 요한이 이제는 예수를 따라야 한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분을 영접해야 한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청한 이래 기독교인들은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해 왔다때로는 광야에서 고독 가운데 금욕적 훈련에 매진하며 문명을 포기한 거룩한 남녀가 제자의 표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혹은 이 세상의 권력과 부가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오해에 근거하여위대한 왕이나 제후가 그런 표본이 된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그러나 또 다른 표본이 있었으니이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이 세상에 대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예언자들이다목회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예언자적인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최전선에 가까이 가 있다고 믿는 유혹에 가끔 빠진다.

  이런 생각들은 군중들이 요한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잘못된 해답들이다. 참된 제자도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기 위한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우리의 금욕주의적 성취나, 세상의 권력이나 예언자의 신랄한 비판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우리의 허망한 상상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진정한 제자는 계속해서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할지 배운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세례 요한을 제자의 원형이라고 여겼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르트의 책상에는 1515년에 Matthias Grunewald가 그림을 그리고 Miclaus of Haguenau가 조각한 유명한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 복제본이 놓여 있다. 그 그림 속 십자가 왼쪽에는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고, 마리아는 창과 못에 찔려 피범벅이 된 아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려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맨발에 낙타털옷을 입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손의 길게 그려진 집게손가락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 그것이 참된 제자도라고 말했다.

  바르트와 동시대인이었던 본 훼퍼는 나치에 의해 처형당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감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신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그는 자기가 위선이나 나약함에 물들지 않았는지 자문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모든 기독교인이 언젠가는 하게 된다. 세례 요한 안에서 우리는 답을 만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바라보기를 그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만을 가리킴으로 제자의 정체성이 마침내 명확해진다: “내가 누구인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석적 관점

-세 번째 대림주일에도 구시대에 속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한은 투옥되었는데, 이는 그의 예언자적 증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를 뚜렷하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1세기에 감옥은 종착지가 아니라 중간 기착지이다. 사람들은 무죄가 판명되거나 감옥형을 받거나 사형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린다. 구금 기간 동안에 죄수들은 그를 돕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래서 최근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요한의 경우에는 심지어 자기와 함께 회개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같이 투옥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질문을 예수께 전한 제자들로부터 예수의 활동에 관해 듣게 되었고 마침내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여하튼 마태에게 이 이야기의 목적은 요한과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질문은 상당히 단순하게 보인다.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합니까?” 많은 경우에 그러듯이 예수는 이 요한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한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치유 받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일견을 보여주는 이사야와 제2이사야서와 공명하며 질문의 범위를 확장한다.  

-다음의 병행구들은 마태가 이사야를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경이 볼 것이라는 마9:27-31과 사29:18;35:5; 절름발이가 걸을 것이라는 마9:2-8과 사35:6; 나병환자가 깨끗해진다는 마8:1-4 이것은 이사야에는 없고; 귀머거리가 들을 것이라는 마9:32-34와 사35:5; 죽은 자가 일어날 것이라는 마9:18-19,23-26과 사29:19;61:1-2;42:7. 전부 보면 이러한 행동들은 적어도 농촌이나 가난한 농민들의 기대의 목록과 위기의 이스라엘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치유를 요구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에게서 치유자와 귀신을 몰아내는 기도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이사야는 광범위한 선행을 기대하면서도, 이것을 메시야의 오심과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사실 메시야가 이러한 역할을 성취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문서는 특별히 없어 보인다. 그런데 예수는 (만약 있다면) 이러한 틀을 부수는 것이거나 당시의 대화 속에 예상치 않은 복잡한 문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아마도 이 명단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에 들어가 있는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11:5)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ptochoi)은 빈곤하고, 낮은 곳에 쫓겨난 절망적인 사람들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대답하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은 흥미롭다. 새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올 것이다. 그들의 상처는 가짜 의사가 아닌 참된 치유자에 의해 치유될 것이다. “백성들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6:14).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계약의 시범케이스이다. 만약에 율법의 공공적 계약이 지켜진다면, 그러면 신명기15장의 약속들은 통과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개인적 필요의 차원이 아닌 그룹으로 말하면서 시저, 갈릴리의 헤롯 안티파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등 누가 되었든 지배자에 의해 가난한 사람에게 닥친 불의와 억압에 대해 구조적 관심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그의 축복을 이 말로 결론짓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가 정책토론에서 우호적인 의견 차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석가나 아첨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차이가 개인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대립과 도전에서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강조는 ‘나’에 있다. 요한과 예수는 결정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잘 준비된 적들에 대항하여 공적 영역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했는데, 때로는 그것이 예언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십자가형에 처할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자리에 앉아있는 권력자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그랬다. 이 모든 것은 구시대가 어떻게 계속해서 작동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민중들을 수탈한다. 그것은 오로지 강림만이(advent) 바꿀 수 있는 악순환이다. 요한은 예수는 모두 생명을 가져오는 투쟁으로서 대림절에 참여하고 있다.      

-11:7-11에서 예수는 초점을 요한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린다그는 세 가지 날카로운 이미지를 사용한다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 화려한 옷을 입고 왕궁에 있는 사람(8),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9-11). 갈대의 이미지는 헤롯 안티파스가 주조한 동전에 있는 갈대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이 말은 또한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매번 흔들리는 갈대(세워진 왕)일 뿐이라는 것을 비꼬는 해석이다다른 하나의 해석은  갈대바다에서 바람이 파도를 제어하는 출애굽과 연관하여 갈대를 보는 것이다만약에 첫 번째 해석이 맞다면예수가 로마의 신하로서의 헤롯 안티파스의 불안정한 위치를 은근히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이것이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면이 말은 희망을 신학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방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세 번째 이미지-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여러 곳의 인용에 의해 입증된다(23:20;3:1). 이것은 복잡한 부분이다. 어느 때는 요한은 여자에게서 난 자중에 가장 큰 자이다라고 하다가, 다음 번에는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요한은 예언자의 절정이자 결론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의 가교이다. 이 곤경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9-11절을 이런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이 지배하는 이 강림의 크기를 재려고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 강림의 차원과 크기를 잡아내는 것을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초점이 되면 갑자기 요한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비록 그는 작지만 여전히 하늘에 속해 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대림에 관한 어떤 것은 단순히 측정하거나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매년 신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대림절의 셋째 주일을 위한 복음서 말씀은 하나와 절반의 인용문이다.

첫 번째 인용문은 마태복음 11:2~6, 감옥에 갇힌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응답이다. 그 다음 인용문은 마태복음 11:7-14이다. 개정성서정과는 11:11에서 끝나기 때문에, 하늘나라와 폭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퍼즐과 세례요한과 엘리야의 관계에 대한 퍼즐을 풀어야 하는 설교자와 목회자를 부담을 덜어준다. 오늘 본문은 목회의 실천과 번성을 위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한다.

 감옥에서 온 요한의 질문 (2-6 ). 설교적으로나 주석적으로 마태가 왜 요한의 질문을 이 부분에 두었는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3장에서 요한은 예수를 바르게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목회적으로 이 질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자로 보았고,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흩어놓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3:12). 지금 요한은 감옥에 던져져서 쭉정이 취급을 당하고 있는 반면 헤롯의 권력은 더 커지고 번영하고 있다 “오실 그분이 (정말)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1:3)”라고 묻는 건 당연하다.

목사는 대림절 동안 목회적 대화를 위한 추가 시간을 마련하고, 적어도 은유적으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할 시간을 가지라고 배워왔다. (어떤 사람들에게 은유는 단지 은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교회들뿐만 아니라 소비문화 전체가 이 시대가 메시아의 시대가 아니라 여전히 편안하고 즐거운 시대라고 확신하게 한다. 예수는 편안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오시는 분이고, 대림절이 그의 오심을 가슴벅차게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발표는 잔인해 보일 수 있다.

예수의 응답은 신학적으로 정답이지만목회적으로는 요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서너희가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죽은 사람이 살아나며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4-5).” 요한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면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지체장애인한센병 환자농아자 그리고 일시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지만 예수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는 여전히 감옥에 있다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지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쾌한 청년들이 양로원이나 병동에 와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더 크리스마스를 즐거워하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노래한다든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때,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위로받지 못한다.

목사들이여, 대림절이 오면 이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라.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줄 수는 없지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회는 외롭게 캐럴을 부르고 교회로 돌아가 뜨거운 사이다와 도넛을 먹는 게 좋다. 청년회의 회원들에게 일대 일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이나 병원에 있는 사람이나 양로원이 있는 사람들과 결연을 맺도록 권하면 어떨까? 청년들을 초대해서 잠시 앉아 이야기하거나, 더 나은 것은, 앉아서 잠시 듣게 하면 어떨까? 물론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옳으시지만, 세례요한도 설득력이 있다.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언 (7-11). 사람들이 대림절과 크리스마스를 우울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대림절과 크리스마스를 우울하게 여기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것이 요한에게 바치는 헌사라면, 그 말은 요한이 감옥 안에서도 그리고 그의 죽음 앞에서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대림절과 일년 내내, 하나님의 나라는 타협할 수 없고 인기투표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환영했던 아기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되는 것도 볼 것이다. 대림절의 설교와 교육과 노래는 언제나 요한의 감옥과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한다.

왕궁에서 부드러운 예복을 입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종인 세례요한을 비교하는 것은 요점이 분명하다. 이것은 34번가의 기적과 베들레헴의 기적,  Macy의 유익과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서 단순한 크리스마스를 장려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건 자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그 자신의 삶의 단순함으로 그리스도의 가난을 예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크리스마스에 등장하는 유일한 부자들은 동방 박사이며, 그들은 무릎을 꿇고 선물을 바친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집에서 보내는 단순한 성탄절의 모델로 교회의 성탄절을 단순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성탄절 행사에 동원될] 관악대에게 200달러를 지불하지 말고 그 돈을 지역의 극빈자 식품구호센터에 주는 것은 어떨까? 이미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교인들에게 보낼 카드를 구입하는 데 쓸 돈을] 카드 한 장만 사서 교회에 전시하여 모든 교인들이 보게하고  카드회사에 들어갈 돈을 구세군에 보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부드러운 겉옷과 왕궁을, 특별히 이 계절에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것에 관한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들이다마태복음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나님의 양이다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세례요한보다 더 크고그들은 목회자의 돌봄에 맡겨져 있다.

 설교적 관점

 -누군가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을 대신하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 질문을 하는 어린이가 반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라면 우리는 이중으로 도움을 받는다. 만일 대답을 해야 될 사람이 답을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오늘 누군가 예수께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을 한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믿음이 굳건한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 예수님은 진짜인가? 우리가 믿는 종교는 무언가 있기는 있는 것인가? 교회는 무언가를 정말 가지고 있는건가 아니면 성탄절이나 그리스도라는 비즈니스는 단지 관심을 끌기위한 상상의 이야기여서 궁극적으로는 희망이나 꿈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만나면 무가치하고 무기력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위험해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질의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이나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질문을 결코 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에 동의하기를 원치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질문은 그 핵심에 약함, 그냥 믿음 그리고 의심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서기위함이라고 전제한다.  

오늘 본문은 누군가 손을 들어 우리를 대신해 질문을 함으로써 [이런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손을 든 사람은 그 반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다. 요한은 예수에 관해 놀라운 일들을 말했던 사람이다. 마태복음 앞부분에서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 3:11)고 말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예수를 가리키면서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1:29)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가장 빛났던 때는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말한 지 조금 지나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 3:30)라고 말했을 때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어서 예수가 진짜이고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그가 같은 예수에게 “당신이 진실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입니까”라는 질문을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나는 투옥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체포되어 헤롯왕의 정적으로 투옥되었다. 감옥은 어느 누구나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이다. 모든 것이 즐겁고 자유로울 때 즉 밝은 태양 아래서 하나님을 믿는 일은 쉽다. 그러나 교도소의 철문이 닫히게 되면 어둠 속에서 의심이 생기게 된다. “당신이 진짜 예수님인가요?” “종교가 나의 소송사건에, 현재 상황에, 나의 바램에 도움이 되나요 혹은 지금 상황이라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요?”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힘든 경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요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 것은 비단 감옥이라는 상황만은 아니다그것은 예수 자신에 관한 무엇이었다무슨 일이[예수를 통하여더 일어나지 않았다마태는 이렇게 표현한다“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한 일을... 들었을 때 제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물었다‘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그렇지 않으면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2-3) 예수가 하고 있던 일들은 요한에게 그리 맞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예수는 요한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예수는 요한이 구세주가 응당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세상 죄를 가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헤롯의 죄를 갖고 가지 않고 있다예수는 요한의 신학에 안맞는 것이다그래서 요한은 의문이 생겼다요한처럼 굳센 신앙을 지닌 사람이 우리처럼 의심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이제 감옥에 있는 사람의 질문으로부터 구원자의 답으로 이동해보자. 예수는 요한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나?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대답할 수 없다. 당신은 내가 진짜인지 아닌지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증거를 보아라.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그리스도의 대답은 우리가 질문할 때와 정확하게 같다. 사람들은 그들이 보는 증거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설교자의 역할이 목회적, 예언자적 혹은 복음적으로 이해되건 아니건 간에 그 역할의 일부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증거들을 설명하고 보고하는 것이다. 거기서 예수가 진짜라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식은 개인적 간증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예수를 진짜라고 고백하게 된 때는 세상에 알려진 훌륭한 생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완고한 마음을 지닌 자들은 예수로부터 멀어져있었지만 투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굳건히 그를 믿었고 심지어는 그로 인해 힘든 시련을 겪은 후에도 그러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실수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설교자는  Saul of Tarsus, Augustine of Hippo, Calvin of Geneva, Lewis of Oxford의 이야기나 혹은 설교자가 알고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기를 소개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현재에서 보다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소개함으로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할 수 있다.

-설교의 클라이맥스는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닌 자신들의 경험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장 깊은 만남의 순간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설교의 역할은 이런 종류의 경험을 설명해주고 그 경험이 그리스도와의 경험이고 그가 현존하여 일하고 있는 능력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눈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말씀과 찬양과 친교 속에 그리고 고요한 마음 가운데에 현존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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