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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21장 33 ~ 46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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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악한 청지기의 비유는 오늘의 교회 상황에 대해 성찰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해석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 역사의 한계 속에 갇혀 있어도 안 된다. 복음에는 늘 현대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칼뱅은 이 비유에 대한 주석에서 그의 시대에 관해 많은 언급을 했다. 칼뱅은 늘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신학적 지침이 있다고 지적했다: (1) 우리는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저지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2) 교회를 반대하기 위한 어떤 형태의 시도가 있더라도, 최종 승자는 하나님이다. 칼뱅의 지침에 따라 오늘 본문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칼뱅의 첫 번째 지침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오늘의 비유에서 배척의 주제가 등장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상이나 주장의 체계, 혹은 동의를 해야 하는 일련의 명제로서의 복음에 대한 배척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철학이나 세계관, 심지어 삶에 대한 도덕적, 영적 해석이 아니다. 비유는 우리에게 복음이 배척받게 된 것을 예상하라고 가르친다. 결정적으로 예수가 배척받게 될 것을 예상하라고 가르친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에 대한 개인적 배척-사실은 살인(37-39)-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사야 28장 16절의 내용을 반영하는 시편 118편 22절의 인용(42)은 성경에 대한 성경적 주석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배척, 즉 그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 주(the Lord)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에 대한 배척과 치명적인 폭력에 관한 비유 속에는 예수와의 관계(relationship with Jesus)가 믿음의 핵심이라는 진리가 담겨 있다. 포도원 농부들은 사상이나, 원칙, 교리 체계를 죽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붙잡아 살해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격으로 다가온다.

배척하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가 오늘 일하는 포도원은 마태가 묘사하는 포도원의 모습에 많이 근접해 있다. 오늘날 복음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오늘날 공공 영역에서 "새로운 무신론" 주창자들이 매우 공격적인 합리주의적 비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해체하려고 한다. 그들의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상위에 있다. 순수한 이성에 대한 이런 확신은 신화적이라고 보일 정도로 임의의 형이상학적 구축물이 아닌가? 이러한 반감과 함께 "새로운 무신론자"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덜 적대적이지만,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냉담함이나 무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증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 경우 모두 예수가 배척당하고 있다.

그러나 칼뱅의 주석에 따라, 우리는 좀 더 깊은 차원의 해석으로 나아 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배경에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심각한 경고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밖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배격을 넘어서서 더 교활하고 위험한 공격으로 관심을 옮길 필요가 있다. 이 비유는 특히 예수가 배척당할 것이라는 논점을 제기하는 데, 그것도 낯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 교회, 특히 지도자들에 의해 배척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칼뱅은 윗사람에게 대항하는 사람들, 주인에게 대항하는 포도원 농부에 대해 언급한다. 이 비유 속에서는 건축가가 건물을 지탱하는 주춧돌을 내버리는 것에 관한 이미지가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깊은 차원에서 보면, 이 비유는 교회 지도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배반한 것에 관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예배에 관한 견해의 충돌, 지속적인 신학적 논쟁,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도덕적 일탈 행위의 보도 속에서 사려 깊고 정직한 자기 성찰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설교하고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우리는 언제나 회개와 갱신에 열려 있도록,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설교를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교회의 공인된 가르침에 의해 충실하게 설명된 복음에 잣대로) 검증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이 비유는 배신을 예상하라는 경고를 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이 비유는 더 나아 가 예수를 배신한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한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비유적으로 예수를 헤치려 하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44절은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는 매우 과격한 말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의 인격 안에 보여진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자들이 겪게 될 심각한 결말을 묘사한다. 예수를 배척하고 배반하는 결과는 죽음-육체적, 영적, 은유적 의미에서-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생명이신 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칼뱅의 두 번째 지침에 관해 살펴보자: 예수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반하고, 그를 제거하려는 악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머릿돌은 계속하여 견고하게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은 궁극적으로 효과가 없다. 예수는 배척당하거나 배신당한다고 손상을 받거나 위축되지 않는다고 칼뱅은 말한다.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부여받는 자리를 지킨다.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어떤 명예를 얻었든, 명백한 성공을 거두었든 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권세와 목적은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42)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보장된 승리에 대한 공격은 (그리스도가 그의 자녀들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보장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부분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에 대한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당신의 권리를 지키신다.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가꾸셨다- 첫째로 이스라엘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이 왕국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배반하는 사람들로부터 몰수되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비유의 부정적 성격의 교훈은 그리스도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이다. 그 비유의 긍정적 성격의 교훈은 공격이 있을 것을 이미 경고받은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을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교회가 건강한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마태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예수가 성전에서 말한 세 비유 중의 두 번째 비유이다. 비유의 배경과 맥락은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불리웠으며, 온 도시가 시끄러웠다(마21:6-10).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는 것은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책상을 둘러엎고 할 때도 계속되었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가 나서 예수께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립니까?”하고 물었다(21;16). 예수는 저녁에 그 성을 나갔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와서 예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성전지도력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이다(21:18-19, 마3:10참조). 이 일 후에 예수는 성전에 다시 들어갔는데 대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그의 권한에 대한 질문과 도전을 받았다(21:23-27). 이어진 세 비유는 이 도전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이 비유들은 유대 백성 모두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향해서 말해진 것이다.

그러기에 첫째 비유에서 예수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21:31)라고 말하며, 유대 백성이 아닌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했다(21:45). 우리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이것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을 유대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로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내부에서 구별한 것이다.

비유는 성전 가르침의 전형적 패턴을 따른다. 성경으로 시작하여 그에 대한 해설, 그리고 다른 성경의 인용이다. 비유의 근거는 이사야 5:1-7인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으로 말하고, 좋은 포도를 맺지 못해서 심판을 받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지도자들은 암시를 알았어야만 하는데, 특히 유대주석은 포도밭을 성전 그 자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는 이사야 5:1-7의 의미를 예언자의 거부라는 전통적인 유대인 모티브와 결부하여 해석한다. 그 이야기는 전형적인 마태의 양식에 따라 3인조로 진행되는데, 점점 올라가는 세 단계의 지위와 폭력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세 단계의 거부를 보여준다. 예수자신이 주인의 아들이라는 규정(37-38)은 다가올 폭력의 절묘한 힌트인데 독자들이 추론하도록 남겨주었다. 비유는 주인이 주재하는 심판으로 끝난다. 소작인의 죽음과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된다. 예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인 유대인 지도자들이 수사적 질문에(40) 대한 대답을 주목하자. 소작인을 심판함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오늘의 교훈의 나머지는 예수의 청중들에게 적용될 비유의 성서적 해석이다. 42절은 시편 118:22-23을 인용하는데, 예수가 예루살렘성에 입성했을 때 외쳤던 바로 그 시편이다(마21:9;시118:26). 이것은 할렐(Hallel) 또는 찬양 시편으로 유월절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을 축하하는 시편인데, 제자들이 예수와 유월절 식사 후에 함께 불렀던 찬양의 일부이다(마26:30). 그러기에 비유는 풍성하고 다층적인 암시를 보여준다: 구속으로부터 구원을 축하하는 유월절을 위한 찬양, 예수의 승리의 입성에 대한 회상, 모든 사람을 구속에서 구원을 성취하고 실행하게 될 예수자신의 임박한 거부와 폭력적 죽음의 힌트 등이다.

이 암시의 핵심은 자신들에게 임박한 심판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인식으로서 시118:22-23의 버린 돌과의 일치이다. 누가 무엇이 이 버린 돌인가? 마태는 44절의 다른 성서의 암시를 추가함으로써 단서를 준다: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 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 밑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이사야 8:14-15에서 만군의 주님은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걸리는 돌이 되신다(사28:16과 비교). 역사적 맥락은 이스라엘의 강력하고 호전적인 북쪽나라 앗시리아에 의한 임박한 침공에 대한 예언이다. 이 침공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5:8-30). 이사야는 외치기를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사5:7).

그러기에 악한 소작인 비유는 사5:1-7과 사8:14-15에서 언급된 심판의 예언들의 괄호와 같다. 이사야에서는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걸림돌이다. 시편118편과 이사야8장을 함께 읽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돌을 예수로 이해했다(행4:11;롬9:33;엡2:20;벧전2:6-8). 그러한 추론은 마21:42-44에도 마찬가지로 내포되어 있는데, 대제상들과 장로들의 반응에 나타난다. 예수 자신이 그들이 거부하고 걸려 넘어질 돌인데, 하지만 예수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늘 계시는 하나님이다(마1:23;사7:14인용).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이 심판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할까? 여기에서 예수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와 대제사장들과의 갈등은 성전 구역에 있는 소경과 절름발이들을 치유한 것에서 발단되었다(21:14). 고통 받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예수를 제대로 칭송했고, 공부한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사야5:8-30절의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은 여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의 배경과 일치한다.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은 고통 받는데, 부자들은 계속해서 더 부를 쌓는다. 성전에서 요구되는 헌물을 구할 수 없는 소경과 절름발이들은(21:12-13) 하나님 보시기에 호의를 받는 사람들이고, 세리와 창녀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31). 그러기에 심판이 종교지도자들에 떨어지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행동인(22:2-3) 하나님나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들의 실패(21:43)에 대한 결과이다.

목회적 관점

성서정과 A해의 마지막 몇 주간 함께 하게 되는 마태의 본문에서, 예수의 어조는 우리가 선포하는 소식을 거의 사순절 정도로 진지하게 만든다. 사실, 성전 당국이 예수의 권위를 비난하는 데 대해 예수가 응답한 하나님 나라의 비유(21:23)는 우리에게 심판의 불길한 소식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더욱 도전적인 것은 마태복음 18:23에서 22:14(평주일 19~23주)까지 펼쳐지는 우화적인 allegorical 비유들이 하나님을, 화가 나서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왕, 변덕스러운 고용주, ​​화가 난 아버지, 폭력적인 복수를 하려고 하는 지주, 분노 관리에 문제가 있는 결혼 잔치의 주최자와 같은 배역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청지기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을 두려워하게 해서 사람들을 교육하려는 전략은 마태의 청중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섬기는 교인들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설교자는 우화 allegory 가 영적 치료를 위한 문학적 도구로서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다. 예수는 이러한 가르침을 하나님의 왕국을 묘사하는 것으로 소개한다(예 : 21:31, 43, 22:2). 실제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주요 초점은 그의 메시지에 대해 경멸이나 위협으로 응답하는 사람들과 아주 유쾌하게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예수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우화를 이끌어낸다.

우화는 삐딱한 문학 작품이다. 우화를 사용하는 것은 예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다. 우화의 의도는 우리를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지평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여기기를 멈추고 우리 자신의 관계의 대리인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나단 예언자가 마침내 다윗 왕의 양심에 접근 할 수 있었던 우화에서처럼(삼후 12장), 이 이야기의 목적은 거부의 단층을 뚫고 인식의 수준에 도달하여 회개의 지하수를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삶이라는 물을 주어서 복음서의 용어로 “열매 맺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드릴의 날카로운 부분은 보복적인 폭력의 주기이다. 그 최저점에서, 보복적인 세입자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였을 때, 예수의 청중은 상승하는 주기의 참여자인 하나님의 이미지로 응답한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고 예수가 물었을 때, 그들의 충동적인 대답은 또 다른 복수의 이미지이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 없이 죽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본성을 하나님께 투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잘 모르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 준다. 그들의 가증한 행위에 대한 인식은 산에 천둥이 치고 연기가 났을 때(출 20:18)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들은 심판의 음성이라는 원초적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마태의,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세계관에서, 분개한 통치자들은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한다. 예수는 그들의 계획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복수라는 형태의 목소리를 준 것은 예수가 아니라 청중이다. Frederick Buechner가 “우리를 가장 결정적으로 심판하는 분이 우리를 가장 완전하게 사랑하는 분이 될 것”이라고 우아하게 쓴, 심판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인 이해가 그들에게는 싸구려 은총으로 여겨질 것이다.

예수가 설명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망(42-44절)은 폭력의 여운이 남아있는, 회복적 정의에 의해 정돈된 세계와 닮았다(Walter Brueggemann의 말에 의하면 “그들에게 속한 것을 정돈하여 그들에게 되돌리는 것”이다). 청지기직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43절)에게 주는 것은 징벌적인 행동이 아니라 회복적인 행동이다. 기묘하게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거나 부스러지게 하는(44절) “머릿돌”조차도, 죄인을 윤리적인 서투름을 드러내는 자연의 힘이나, 도덕적인 중력의 상징으로 여겨서 겨냥하는 하나님의 무기는 아니다.

두 가지 세부 사항이 특별한 관심과, 아마도 현대의 우화 해석을 담당하고 있다 : 집주인의 부재와 메신저의 순서.

우화의 시작에서, 집주인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모든 것을 포도밭에 설치해 놓고, 농부들과 계약을 맺고서, “다른 나라로 갔다.”(33절). 무슨 볼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있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비유를 행동으로 옮기는 불꽃은 주인공의 부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라는 “포도원”에 대한,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에 대한, 우리의 관계의 견실함에 대한 청지기직을 책임지고 맡으려고 하는 우리의 도덕성과 신념에 우리가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적어도 우리 자신의 열매를 많이 맺기로 결정하거나 우리 스스로 잘못을 범하기에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물론 하나님이 부재지주는 아니지만, 성숙한 신앙이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자신의 건전한 가치와 헌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입자들이, 집주인이 그들에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려고 했던 여러 차례의 시도를 거부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른 것은 이 비유가 심판으로 돌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우화에서 명확하게 언급하는 것은 예수 자신도 경험했던(마 13:57과 병행구), 하나님의 메신저인 예언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거부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살라고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정의의 메신저들의 죽음과 핍박을 너무 많이 보았던 것은, 이 우화의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셨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우리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친절을 베풀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권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하거나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우화는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준비해 놓으신 포도원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소작인들 사이에 있는 너무나 익숙한 오만에 대한 인식을 자세히 살피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오만이 우리가 너무 자주 우리 자신 위에 올려놓는 폭력과 심판에 대해 우리를 취약하게 만든다.

설교적 관점

-마태복음 21:33-46은 알레고리로 읽어야만 하는데, 알레고리라는 문학형태에서는 모든 단어와 상징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과는 실제로 다른 어떤 것을 뜻한다. 그래서 알레고리로 읽는다는 것은 쓰여진 단어들의 실제적인 의미 (actual meaning)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 알레고리 본문에서, 하나님은 집주인이고 이스라엘 땅은 포도원, 유대교를 믿는 이들은 소작인, 구약의 예언자들은 소출을 받으러 온 하나님의 대리자들, 예수는 마지막으로 소출을 받으러왔다가 죽임을 당한 아들, 그리고 교회는 이 비유의 마지막에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맡긴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이라는 구도가 이 비유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와같은 문제는 오늘날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단순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창조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알고 있다. 그들은 또 우주의 힘과 장엄함을 인정한다. 그들은 그 곳이 완전하게 조성된 “포도원” (vineyard)이고 그 안에서 살도록 허락되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만들었을 그 누군가에게 행할 어떤 의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창조를 우연히 되었다거나 일정하지 않은 상황으로 돌린다. 우리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부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 교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성” (spirituality)을 선호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점점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 교회, 성경, 정기예배 혹은 어떤 형태의 제자도나 봉사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삶에 약간의 이익을 주는 듯한 어떤 애매한 “영” (spirit)과의 모호한 결속을 원하고 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는 바알 제사장들 앞에 있는 백성들을 만나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섬기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21세기 세상이 듣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교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또 다른 방식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어떤 이유를 대서 거부할 때 일어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가치가 덜하거나 덜 인간적이라고 규정할 때 가혹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다른 것” (the other)으로 여기면 우리가 하게 될 혹은 그들에게 하도록 허용할 행동에는 제한이 없다. 우리는 마태복음 21:35-37에 때리고 돌던지고 그리고 사람을 주인 사람들처럼 그렇게 짐승처럼 될 수가 있다. 이 나라는 노예제도를 246년간 지속했고 그리고 또 다른 100년간을 분리정책[segregation, 흑인과 백인의 공공장소 사용분리-화장실,식당등]을 실시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은 흑인을 “다른 것” (the other)으로 규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다른 것”이라고 규정하고 거의 쓸어버렸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정함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던 또 다른 나라들이 있다. 독일은 홀로코스트(Holocaust,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위키피디아)를 도입했고 소련은 굴락(gouglas, 시베리아 노동교화수용소)을 운영했다. 남아공화국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이라 불렸고 유럽 발칸 지역과 중앙 아프리카에서는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고 했다. 21세기 인도에서는 여전히 불가촉천민 (the untouchables)이라는 집단이 있고 호주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보듯, 다른 사람의 인간됨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부할 때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알레고리는 마태복음 21:44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예수로부터 그리고 이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는 사람은 신실한 순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풍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욕심과 탐욕을 피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돌의 교훈에서 돌아섰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과 세계경제를 거의 파괴하였다: 이제 돌이 그들에게 떨어지고 그들을 가루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바라볼 때, 그 돌이 우리를 또한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그 돌이 새롭게 우리를 만들 수 있다. 그 돌은 우리의 자만심과 편견, 죄와 이기심, 탐욕과 죄책감등을 없앨 것이다. 일단 우리가 겸손해지면 그 돌은 우리의 삶을 강한 영적인 기초 위에 건설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영적건물의 각각의 층은 성령의 열매로 차게 될 것이다. 1층은 사랑으로, 2층은 기쁨으로. 성령의 건물이 완성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거주하고 있는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제를 보게 될 것이다 (갈 5:22-23).

-최근에 우연히 본 자동차 뒷 범퍼에 붙은 스티커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우연이 아니라 변화롤 통해 온다”(not by chance but by change). 한 글자만 바꾸었는데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교회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만들려고 하는 세상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상은 오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바꾸고,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사는 것을 향하여 애쓸 때 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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