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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8장 21 ~ 3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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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마태복음에서 취한 오늘 본문에 담긴 가장 두드러진 신학적 주제는 하나님의 본질과 교회의 특징이며, 이 주제들은 죄, 율법, 은총에 관한 질문과 연결된다. 동료 교인들을 몇 번이나 용서해 줘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배경에는 교회론적인 관심이 깔려 있다.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누가 가장 위대한가(1-4), 연약한 교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6-7, 10-14), 교회의 규범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치리할 것인가(15-20) 등의 주제가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씨름했던 질문, 즉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언제 멈춰야 하느냐는 질문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초대 교회 이래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대답-"일흔일곱 번"으로 번역되는 "일곱 번씩 일곱 번"으로 번역되는 상관 없이-의 의미를 매우 일관되고 명확하게, 즉 절대로 용서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 왔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지체도 같은 방식으로 행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조차도 한계가 있다.

  용서가 있으려면, 우선 죄 또는 빚이 있어야 한다. 왕 앞에 끌려온 종은 결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었다. 왕의 첫 번째 반응, 즉 그 종과 그의 가족을 팔라는 결정을 듣고 그 종은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었다. 독자들은 하나님이 이처럼 큰 부채에 대해서는 극한 형벌을 준비하고 그것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오래된 전통적인 해석, 즉 종을 처벌하려는 것이 왕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죄인들을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해석에 이미 익숙해 있다. 그와는 반대로, 왕의 엄포는, 하나님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거울과 같다. 빚진 자가 자기의 빚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달을 때만 하나님의 자비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 칼뱅의 "두려움에 잠길 때 우리는 겸손을 배울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없고, 큰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망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왕이 그 돈 한 푼 없는 종을 완전히 용서하기로 (빚을 탕감할 시간을 더 주는 정도가 아니고) 즉각적으로 결정한 것은 겸손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회개한 종은 빚을 탕감받고, 그리고 아마도 왕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자리를 뜬다. 이 비유를 연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제1막이 내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감사하는 마음은 자기에게 비교적 작은 빚을 진 동료 종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거울을 보고 곧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1:23-24), 첫 번째 종은 그가 방금 받았던 자비를 잊어버리고, 그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도 실패한다.

  2막에서는 제3막에서 생길 불행한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일이 생긴다. 3장에서 분개한 증인들이 그 일에 대해 왕에게 보고하고, 한때 자비로웠던 왕은 분노하게 된다. 하나님은 "값싼 은혜"의 사고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불의한 일을 고발하는 동료 종들의 외침에 침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자비의 위대함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그 자비를 다른 빚진 자에게 넘겨 주어야 한다.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구체화한다고 주장한다. 그 종이 용서하기를 거부한 것은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배은망덕함 때문에 그는 다시 원래의 빚더미에 깔리게 된다. 더욱이, 그가 용서를 받은 후에 받을 벌은, 그가 탕감의 기쁜 소식을 받기 전에 받아야 했던 원래의 벌보다, 훨씬 커졌다.

   교회론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마태복음(예수를 유대인 랍비로 그림; 유대인 저자에 의해 쓰여짐;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됨)의 예수가 용서, 특히 신자들 사이의 용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교회는 이웃의 눈의 대들보 보다는 자신의 눈의 티에 더 관심을 두는 겸손과 회개의 사람들의 모임이고, 세상과는 다른 용서의 공동체이다.(7:3-5) 루터는 개인적인 권리(personal rights)가 세속 왕국에는 존재하는 반면에, 완전한 용서라는 원리에 의해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 비유의 청자는 자신이 심판 날 용서하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용서받은 무익한 종의 뜨거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마태의 예수는 또한 연민에 근거한 실제적 행동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25:31-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너무 무분별한 용서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21세기의 독자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전통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Susan Hylen은 수세대에 걸쳐 목회자들이 배우자에 의해 학대당하는 기독교 여성들에게 학대자들을 용서하라고 반복적으로 설교했던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여성들은 그들을 대신하여 하소연해 줄 동료 종들-묶을 능력과 풀을 능력을 가진 자들(18)-을 갖고 있지 않다. Hylen은 죄를 인지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며, 용서를 행사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해석을 제안한다.

  다른 독자들은 인간의 타락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유해한 해석(역설적으로 자기도취적 자기증오<narcissistic selfhatread>로 빠질 수 있는 접근)을 피하고, 그 대신 인간의 용서 행위와 하나님의 용서 체험 사이의 시너지효과에 주목하는 해석을 선호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독자들은 빚 탕감에 관한 구약성서 가르침의 조명 아래 비유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 비유는 <강자가 약자를 돕는 더 정의로운 사회적, 경제적 질서>를 주창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적용하든,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 입장은 자비라>는 신학적 명제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와 같은 자비를 기쁜 마음으로, 구체적으로, 그리고 공동의 삶을 통해 실천해야 한다>라는 확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이 본문은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유명한 질문과 예수의 유명한 대답으로 시작한다. 이 질의응답에는 용서와 심판에 관한 직설적인 비유가 있다. 본문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교회) 내에 강력한 용서한 요청이 제기된다. 비유는 이러한 요청을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이라는 맥락에서 제기하고 있다. 기독자의 관점에서 이 본문은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두게 된다. 영원한 용서는 인간 공동체에 진정으로 좋은 것인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은혜에 제한을 설정하는 것은 아닌가?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한다고 제안한 것도 용서에 제한을 두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7이란 숫자는 완전 숫자이기에, 베드로는 아마도 “제가 완전한 용서를 해야만 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 예수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 해야 한다”(22)고 대답했다. 헬라어로 정확한 수자가 명확하진 않지만, 숫자의 초점은 이것이다. 너의 용서가 계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대부분 절대적 용서의 원칙은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영원한, 자격 없는 용서는 용서함 받은 공동체나 개인의 건강함을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어떤 행동에 대한 회개나 개혁이 필요한 것처럼도 보인다.

 비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고, 일곱 번 용서하는 것과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의 차이에 대해서도 규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의 용서를 하나님의 용서와 심판의 맥락 안에 둔다. 비유는 우리에게 직선적으로 서로를 용서하도록 요청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벌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에서 자주 보이는 예수의 비유와 하나님 나라의 연관은 이 경우에서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생활윤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3절의 ‘왕’은 나머지 비유에서는 ‘주님’으로 표현하는데, 왜냐하면 비유는 왕권의 역학관계에 관해서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5절이 명확하게 하듯이 마태는 이 주님을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비유의 초기 버전은 이 연관을 만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전마태적 버전을 자신있게 재구성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엄청난 돈을 빚진 종에게 빚을 갚으라고 주인이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만 달란트는 단순히 만 달란트가 아닌 것이, ‘만’이라는 것도 ‘달란트’라는 것도 헬라어에서는 가장 큰 숫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숫자가 워낙 엄청나 초기 헬라어 사본에서도 숫자를 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숫자의 부조리가 이야기에선 결정적이다.

 주인은 종이 그러한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에 엄하게 대하여 심지어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빚진 자를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은 유대법률에서는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헬라와 로마법에서는 비록 허용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거의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이 주인은 가혹한 주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참아달라는 종의 요청에 대해 아예 빚을 탕감하는 그의 반응이 아주 놀랍다. 종은 모든 빚을 없애주었다. 주인은 혹독함에서나 은혜로움에서 다 지나치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이어서 혹독함에 있어서 지나친 것으로 묘사된다. 아주 작은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며 그의 동료의 종의 멱살을 갑자기 잡았다. 그의 동료도 그가 주인에게 했던 간청을 했지만,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공동체에서 용서에 대한 명령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되었다(35). 예를 들어, “동료 종”이란 용어는 기독교공동체의 역학을 예상케 하고, 돈의 액수의 비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과 우리 서로가 용서해 주는 것에 대한 대조를 보여준다

 이 광경을 본 다른 종들이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을 때 주인은 그 노예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용서는 용서를 불러일으킨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않게 되면, 주인은 용서를 철회하고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준다.

 본문은 많은 기독교인에게 놀람과 분함이 되게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라고 결론 내린다. 비록 제한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마태의 독자들은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용서의 잠정적인 성격은 마태복음 전반에 걸쳐 서술된 것과 같다고 오랫동안 지적해 왔다. 적어도 마태복음에서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에 의존한다.

 가장 유명한 그런 순간은 주기도문과 그에 관한 마태의 해설에서 나타난다. 기도자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6:12)라고 청한다. 여기에 제시된 마태에 의한 하나님 용서의 조건적인 본질은 기도 끝에서 강조되고 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6:14-15).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아래 사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하나님에게, 주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은혜와 용서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심판당할 것이다.

  우리는 흥미 있는 연속적 사건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절대적 용서와 은혜를 주도록 요청받았다. 만약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아래 처한다. 이 모든 것들이 은혜, 용서와 심판에 대한 이어지는 기독교인의 토론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토론은 놀랍게도 다양하고, 마태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여러 목소리 중에 한 목소리이지만, 이러한 하나님 용서에 주어진 어려운 조건은 아직도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이러한 조건적 용서를 상기한다.    

 목회적 관점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야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설교자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잘 알지 못하거나 모르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우리의 적들과, 그리고 우리의 신앙 공동체와 맺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용서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비록 마태복음에서 베드로의 질문은, 성령을 통하여 매여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만, 용서의 범위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면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이 용서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치는 동안, 최근에 의학계는 건강과 웰빙에 미치는 용서의 중요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용서하지 않은 채 지난날의 상처와 분노를 간직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육체의 건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예수는 용서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개인과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가족들, 그리고 우리의 일터에는 수많은 상황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쓰라리게 하고 곪게 하는 씨앗을 뿌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 정말로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복수를 하려는 욕구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당한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황금률을 뒤집어서,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는 원칙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되돌려 주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반드시 상처를 치유하는 행동이나 말을 하거나,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용서에 조건을 두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부심 때문이거나 혹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큰 빚을 탕감 받았지만 작은 빚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은 종의 비유에서 그 종은 그에게 베풀어 준 관용과 자비로움에 대해 그의 가슴이나 마음으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용서란 놓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의 상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축소할 때, 그것을 얼버무리고,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말할 때, 우리는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인정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학대당한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한 행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용서가 가능해진다.

용서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보호관찰 상태에 놓고서, 그들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하면 그것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부당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 아니며, 용서하기 위해 반드시 잊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Ellinor Roosevelt는 남편의 부정행위에 대해 알게 된 후, “용서할 수 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사건과 상황들이 있다 : 홀로코스트, 노예 제도, 인종청소, 어린이와 여성 착취, 원주민의 학대, 배우자의 부정행위, 당신의 삶을 뒤집어놓는 거짓말, 학대 또는 배신.

개신교 목사이며, 작가이자 피정 지도자인 Marjorie Thompso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용서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정당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처벌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해도, 우리의 분노와 응징에 대한 선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그가 한 행동 때문에 받아야 하는 처벌을 면제해주는 것을 포함한다. 그 행동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 가해자는 용서하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 한 그 영향력으로부터 풀려난다. 용서란 우리를 가두어 놓은 상처의 힘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이번 주일 예배에서, 어떤 사람을 의식적으로 용서하는 기회를 갖게 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강단 앞에 놓는다; 아니면 용서하는 편지를 써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들음으로 용서를 경험하게 한다.

세 가지 삽화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어떤 전쟁 포로가 다른 포로에게 한 멋진 이야기다. “당신을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용서했습니까?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포로가 대답했다.

첫 번째 포로가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여전히 당신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있는 겁니다.

랍비 Harold Kushner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인 가운데 한 여성이 나를 보러 왔다. 그녀는 이혼해서 혼자서 자신과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남편이 우리를 떠나는 바람에, 나는 매달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새 아내와 함께 다른 주에서 살고 있고, 나는 아이들에게 영화보러 갈 돈이 없다고 말해야만 해요. 어떻게 나에게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나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한 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어서 용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가 한 일은 비열하고 이기적이지요. 내가 당신에게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그가 당신의 머릿속에 살면서, 당신을 원한을 품은 채 화를 내는 여인으로 만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 당신을 떠난 것처럼 완전하게 정서적으로도 당신의 인생에서 떠나는 걸 보고 싶어요.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그 사람을 붙잡고 있네요. 당신이 분노로 그 사람을 붙잡고 있다고 해서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요. 그건 당신을 해칠 뿐이에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는 스위스 교회협의회의 기록에 있는 16세기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주기도를 반복하라는 명령을 듣고서, 주기도를 모르는 체 했다. 왜냐하면, 주기도를 말하면, 자기를 속인 상인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설교자는 교회의 상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여기서 이슈는 개별적 인간이 얼마나 많이 그/그녀에게 죄를 범한 불특정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가가 아니다오히려 그 배경은 신앙공동체이다베드로는 죄인에 대해 교회가 따라야 할 절차에 대해 이전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에 대한 (15-20응답으로 이 질문을 하고있는 것이다(21). 베드로의 질문 자체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주님내 형제(another member of the church)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여기서의 관심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교회의 일상적인 일과 실천이다. 그 중심에는 용서가(forgiveness)있는데 그것은 개별적 행위가 아닌 공동체 구성원 간에 일어나는 지속적인 행동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에는 제한이 없는데 그 까닭은 용서가 교회의 삶에 있어 늘 계속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바로 단순한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용서를 말해야 한다. 특히 교회 내에 깊은 분열이 있을 때 이러한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할 수가 있다.  

-게다가 이 본문은 선행본문 (15-20)과 분리될 수 없다. 용서에 관한 설교에서 설교자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깊은 아픔을 무시할 수 없고 또 용서의 어려움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된다. 남편에게 학대를 받고 있는 여성에게, 용서는 쉽다거나 혹은 어렵다거나해서도 안되고 여전히 학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야한다는 설교를 해서도 안된다. 이 본문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행본문도 그런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선행본문 15-20절에서 윤곽을 보여준 공동체적 절차 (communal process) 곧 죄의 인정, 죄인의 회개 그리고 필요하다면 피해자에 대한 공동체의 돌봄을 포함한 그런 절차라는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죄를 약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격려와 돌봄을 제공하는 공적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다른 교회구성원들에게 무한정한 용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청하는 용서는 교회 내에서 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교회에 주신 말씀인 예수의 이 비유는 의도적으로 좀 극단적이다. 이 비유는 용서의 근원과 내용을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 들려주셨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베드로 즉 교회에게 “어떻게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할 수가 있느냐?”고 말하는 것 같이 들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불합리한 것(absurdity)임을 깨우쳐주고 그가 새롭게 보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극단적인 비유를 말하고 있다. 이 비유는 과도한 불합리성으로 (hyperbolic absurdity) 가득찬 충격을 주는 이야기로 설교해야한다. 

 -이 불합리성은 서두에서부터 명백하다. 왕이 계산을 시작할 때 만 달란트 빛진 종이 그 앞에 있다. 한 달란트는 한 노동자가 수년간 일한 임금을 뜻했다. 만 달란트는 불가능한 금액 (an impossible amount)을 뜻한다. 어떤 종도 이 금액을 빚질 방식이 없다. 또 이 땅위의 어느 종도 이 금액을 상환할 수 없다.(비록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서 (26) 또 다른 불합리한 요소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왕이 그런 어마어마한 빚을 용서해 줄 방식은 확실히 없다.  

 -설교자는 여기서 어떤 이상한 영역, 곧 “과도한 상상력”(hyperbolic imagination)의 영역으로 청중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청중들을 놀라게 하고 그 “근시안적 시각” (myopic vision)을 열고 무감각해진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여기서 설교자는 “초월의 수사학” (rhetoric of excess)을 만나게 된다. 그 수사학은 그것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처럼 일상적인 것에 개입하여 현상유지를 하려는 전제조건들을 뒤집어 엎었다. 그 예로 예수의 초월의 수사학은 베드로에게 들어와 그가 용서에 대해 계산하고 측정하고 또 한계를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개입하여 뒤집는다. 설교자 역시 이 비유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그런 과도한 상상력과 초월의 수사학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의 나머지도 이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상상불가의 빚을 용서받은 이 종이 상대적으로 매우적은 빚을 진 또 다른 종을 용서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용서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멱살을 잡으면서(28) 극단적인 방식을 취한다.  

그 때 종들의 공동체는 그 용서하지 않는 종을 왕에게 보고한다. 왕은 그를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곧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넘겨준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35)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도 설교자는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왕이 부여한 끝없는 고통은 이 과장된 이야기의 한 부분이고 이 이야기는 충격을 주어 놀라게 하기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마지막 언급은 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교회에 용서의 성격과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지 하나님을 고통을 주는 자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여기서 두려움에 대해 곧 다른 교인들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설교할 수 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과장된 비유의 중심주제는 은혜, 곧 왕을 통해서 보여지는 첫 번째 불합리하게 보이는 은혜이고 이 은혜가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이 은혜가 불가능한 빚을 용서받고도 매우적은 빚을 갚으라고 동료의 멱살을 잡은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행동을 추하게 보이게 한다. 바로 이 때 우리 독자들이 아마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친 거 아냐! 말도 안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그 때 이 비유는 베드로에게 했듯이 우리를 향하게 된다. 어떻게 네가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할 수가 있느냐 라고. 교회처럼, 여러분도 이 사실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얼마나 많이 용서해주었는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이 교회가 계속해서 용서해주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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