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관점
예수의 변모(metamorphosis)에 관한 말씀은 서구 근대주의적 사고의 막강한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근대주의는 "사실"이라는 위대한 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저 세상이나 초월적인 것에 관한 것은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은 "과학에 근거한 문화"에 익숙해 있으므로, 성경도 상식이나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와 모순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신비의 영역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오늘과 같은 본문을 만나면 불안함을 느낀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변모의 경험은 지각이 있는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 어떤 평범한 행동, 사건, 혹은 대화를 통해 갑자기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어 깜짝 놀랐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때로, 이미 돌아가신 분-부모나 조부모, 친구나 스승 등-의 삶에 대해 회상하다가, 자신이 그 사람의 진정한 성품을 얼마나 잘못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 사람이 나의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놀라는 적도 있다.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인간의 공통된 경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믿음의 핵심적 대상이 되는 분의 본성과 사명에 관한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당황스럽지만 매력적인 회상을 담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 그들을 당황하게 했던 대화, 만남, 사건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파악한다. 기억 속의 평범한 사건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주님의 현현의 경험(Epiphanies)은 현현 사건의 순간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눈을 뜨게 하는 특별한 경험은 그 의미를 반추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과 연관 지어 본문을 이해하려고 할 때 본문이 주는 생소함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접근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험은 평범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성경의 다른 많은 증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서가 던지는 아주 중요한 질문, 즉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질문은 디트리히 본회퍼가 던졌던 질문이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역사의 예수"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신앙의 그리스도"에 집착하는 사람들 사이의 오래되고 신랄한 논쟁에서 나는 항상 어느 한쪽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항상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변모에 관한 말씀은 정확하게 바로 그 점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가 갑자기 유령과 같은 존재로 바뀌고, 눈부시게 빛나고, 죽은 성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으니, 이제 제자들은 예수를 -어부, 세리, 창녀들이 예수를 알고 있었던 방식이 아니고- 초역사적인 인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변모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오히려 변모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육받지 못하고 하층민에 속한 사람들이 정확히 왜 그랬는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그들이 예수에게서 발산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에 이끌렸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예수가 떠난 지 오래된 후에, 예수의 광채가 눈에 생생하게 보일 정도로 가장 찬란했던 특정한 순간을 회상한다.
교회가 어떤 형태로든지 (언어, 이미지, 생동) 그런 "믿음의 도약"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실제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확신이 부족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아무리 많은 훌륭한 속성을 부여한다고 해도 "왜 예수? 소크라테스나 간디나 부처는 왜 안 되고?"라는 회의론을 종식할 수 없다.
고등 기독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주주의자들은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고상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바로 다음 순간에 자신의 제안을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는 매우 엄하게 그를 꾸짖었다: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마 16:22-23) 세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변모를 볼 수 있도록 특별히 선택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을 짓자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길은 그들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17:5) 즉 참된 제자도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확실하게 밝힌 그 분의 말을 제자들은 들어야 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가 진정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고백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고백을 승리주의적 종교(triumphalist religion)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신앙의 그리스도는" 항상 "역사의 예수"로 연결된다.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이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고,"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산상변모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의 강조가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는 메시아시요,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며(1:1), 둘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요(창12:1-3;삼하7:8-16;신18:15등),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며(1:18), 그의 탄생이 천사도 움직이게 하고(1:20), 동방박사들도 움직이게(2:1,16)하신 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예언자들이 그의 탄생을 예언했고(2:15, 3:1-12;5:17),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 분이며(3:17),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분이고(7:21-29), 그의 회복의 권세가 다른 모든 권세를 이긴 분이시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14:33), 고백하신 분이다(16:16). 마태복음 이곳에서 십자가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의미가 뚜렷하게 대조되며(16:21-24), 산상변모는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예수의 정체성을 확증한다.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도 그것은 십자가를 넘어 예수의 신실한 자로서의 삶이 기다리는 새로운 삶의 표지이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표지이기도 하다.
마태에 따르면 산상변모사건은 베드로가 가이사랴빌립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지 6일 지난 다음에 일어났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6:16)라고 고백했으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아와 그를 따르는 자들 앞에 놓여있는 고난의 종의 길을 보여준다. 예수는 그의 가까운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고 다볼산 또는 헬몬산이라고 보여지는 높은 산에 올라 메시아의 정체성과 목적지를 보여준다.
이 구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변모한 것이나(출24:16-17;34:29),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영광이 구름가운데서 나타나고 율법을 주는 것(출16:10;19:9;24:15-16)과 비슷하다. 마태는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요, 모세가 말했던 이스라엘의 선생(신18:15;마5-7장;17:5;28:18)임을 확실히 믿었다. 엘리야 또한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고(왕상19:9-18), 메시야의 예고자였다(말4:5). 말라기 예언 끝에서와 같이(말4:4-5) 마태가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를 짝을 지은 것은 초대교회에서 주님의 날과 신실한 자의 시대(살전5:1-11)의 묵시적 희망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의 모습이 변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준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의 얼굴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막9:3;출34:35). 그의 모습의 빛남은 그가 의롭고, 하늘나라에 가까움을(13:43) 반영한다. 더구나 세례 시에 하늘로부터의 음성(3:17)은 예수의 정체성과 의로우심을 확증하는데, 여기에서는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을 부가했다(17:5;7:21-25;28:19-20). 다름 아닌 바로 예수의 정체성과 이스라엘의 부활영광의 묵시적 희망이 이 순간에 나타나는데, 부활에서는 의로운 자가 해와 같이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단12:3계1:16). 산위에서의 제자들의 본 광경은 예수의 정체성의 확인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특징짓는 영광스러운 삶의 시사이다.
예수에게 집중하기(6-8).
예수의 달라진 모습이 제자들을 달아나게 하지는 않았다(출34:30비교). 도리어 베드로는 초막 짓는 것을 제안했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만날 것으로 예상했거나, 추수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축하하는 초막절(레23:33-43)에 대한 적절한 준비로 한 것이다. 아무튼 그 음성은 제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게 했는데(17:6), 구약에서 주님의 면전에서 언제나 행하는 모습이다(사6:5;겔2:1;단8:17-18;10:7-9). 예수의 가르침 또한 고난과 죽음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차 있었는데(16:24-28), 그러기에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17:6-7). 예수는 정신이 나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부활 후에 그러했듯이(28:18) 그들을 만지셨다. 나병환자(8:3,15)와 죽은 자(9:25)를 만지듯이,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고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17:8).
부활을 기다리며(9).
표적은 가끔 무슨 뜻인가 알기 쉽지 않는데 특히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 그렇다(막9:10). 마태가 제시하듯, 비록 제자들이 변모의 의미를 잘 파악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인자의 고난과 죽음(신21:22-23 비교)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과 변모의 의미가 명확해 질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17:9)고 명령했다. 그 때 제자들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할 그들 자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대하며 변모의 경험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광경은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중요성(17:10-13)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결론적으로 마태와 그의 공동체에게 변모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시켜 주었고, 예수와 함께 두려움 없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삶을 사는 제자들로 살아가는 희망의 신호를 주었다.
이 세상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준비하는 현명한 방법은 고대의 스토아 철학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감정에서 벗어나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멀리하라. 당신의 영혼에 요새를 세우라. 놀라움이나 고통의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십자가의 필연성은 회중들과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매주 출석하지만 종려 주일에 출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찬양을 거부하는 신실한 75세의 여인이 마음에 걸린다. 사순절 기간 동안 기적을 가르칠 방법이 있는지 묻는 교회 학교 선생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너무 끔찍하고 너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고통 받는 친구, 아픈 아이, 무너져버린 경력, 회복될 단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관계처럼 우리 자신의 평범한 삶에서 경험하는 상실을 견디면서 그 이야기를 기억한다. 우리 앞에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금욕주의에 의해 지배 될 것인가, 아니면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질 것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축하하고 놀라워할 것인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과 예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예수와 함께 산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안을 찾고, 다른 의견을 필사적으로 찾으며,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성소를 건설하고 그 때가 되었을 때 예수와 그들 자신을 다가올 고난에서 구해 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할 수 없고,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병실에서 그 순간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방금 일생에서 가장 나쁜 소식을 들은 두 사람과 함께 있다. 우리는 환자인 친구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원하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는 또, 저녁 뉴스가 혼돈만을 전할 때, 세상이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돌보며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는 사람의 은혜로운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 이것은 사람들이 고난이 있는 곳에 거룩한 터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약속과 잠재력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고난과 희생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 변화의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이다. 한편으로, 변화는 예수의 신성을 확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 죽음, 상실, 두려움과 부활, 초기 교회의 사역과 같은 혼돈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을 보게 한다. 제자들에 대한 도전은 예수의 육체적인 임재 없이 세상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고린도후서 4:6)에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면서 이 도전을 예견한다.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춰질 때,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매일 매일 현실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초월적 만남에서 사람들을 산 아래 세상, 십자가의 세계, 우리를 무너뜨릴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구속을 넘어서서 있는 것은 아닌 세상을 견디도록 준비시킨다. 이러한 만남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부신 빛으로 산꼭대기에서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교실, 회의실, 주방 같이, 어떤 곳이든 거룩하신 분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만든 공간에서 평범한 순간에 일어난다.
미묘하게도, 변화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고통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가장 어두운 순간에 희망을 뿌리는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자신을 가릴 수도 없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그 산은 하나님이 신성한 여행을 위해 인간의 동반자를 준비하고, 아래 세상의 부서진 현실로 내려갈 때 붙잡을 무언가를 제공하는 길이었다.
예술가는 그/그녀가 만드는 모든 것이 재료에 의존하기보다 빛에 대한 피사체의 관계에 훨씬 더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각, 사진, 그림 또는 소묘에서 예술가는 단지 대상이 반사하는 빛이나 아이디어를 묘사한다. 사과의 정물은 평평하고, 단조롭고, 따분할 수도 있지만 정서와 반응, 초월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다. 예술가가 그것을 어떻게 빛으로 나타내며 그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변화의 순간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기쁨이나 슬픔을 위해 준비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념물로 세울 수 없고, 하나님의 안전을 지켜드릴 수 없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가는 길에 비추시는 빛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정과 직장에서 찾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우리가 기쁨을 발견했을 때 우리를 찾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도망 갈 때, 그리고 우리가 지옥 같은 곳 한 가운데에 앉을 때 우리를 찾아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7절)
설교적 관점
-주님의 산상변모(the transfiguration)에 관해 설교할 때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풍성한 전통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전통의 근원을 알기란 불가능해보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감추어졌거나 드러났거나 간에) 하나의 이야기는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에 있었다.
-마가가 이 변모를 설교할 때 그것은 “메시아 비밀” (messianic secret)- 아마 더 좋은 표현은 “메시아 신비” (messianic mystery)-의 일부이고 그 뜻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역사적 예수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말을 더듬었다는 것(막 9:6)이 설교적 유머거리를 주고있지만,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환상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장엄함에 관한 것이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은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눅 5:1; 6:12; 11:1; 18:1; 22:45–46), 누가가 전달받은 전통을[복음서가 쓰여지기 전에 있던 산상변모이야기] 가지고 설교할 때 그는 그 이야기를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고 그가 기도하고 있는 중에” (눅 9:28-29) 변모가 일어났고 그 때 일어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반대는 잠자고 있는 것 (눅 22:45-46)이고, 산상변모에 관해 설교할 때도 누가는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눅 9:32)라고 설명한다, 누가의 설교에서 영광스러운 변모는 오직 기도하는 법을 알고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있다.
-마태가 산상변모에 관해 설교할 때 그는 모세를 중요한 해석적 틀로 삼고있는 청중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다. 마태의 설교는 모세를 모델로 하고 있고 변모가 일어난 산은 시내산을 생각나게 한다. 모세가 바로의 영아살해 명령 하에서 태어나듯이 예수는 헤롯으로 인해 동일한 위험에 놓인다. 모세가 율법을 시내산에서 받듯이 예수는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마 5-7장)을 가르친다. 모세는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하고 예수는 그 명령을 “너희는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마 5:21, 27, 33, 38, 43, etc.)라고 언급한다. 변모전승 (trnasfiguration tradition)은 모세라는 주제로 견고해진다: 세 명의 동행자 (출 24:1,9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마17:1], 산 (출 24:16), 산을 덮은 구름 (출 24:15)[마17:5] , 6일 (출 24:16)[마17:1], 그러나 마태가 변모를 설교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해 모세와 관련한 주제를 강조한다.
-마태는 “빛나는 구름” (5절)이라는 표현을 더하는데 그것은 성막에 함께했던 구름을 기억나게 하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얼굴이 빛났듯이 (출 34:29-30) 예수의 얼굴이 어떻게 “해와같이 빛났는지”(2절)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설교가 보여주는 천재성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과 떨림을 생각나게하는(출 20:19) 6절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의 임재와 명령하는 소리는 그것을 대했던 사람들이 압도당할만큼 두려웠지만, 오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그의 손을 내밀어 만지며 “두려워하지 말아라” (7절)라고 말씀하신다.
-단순한 인간의 만짐만큼(touch) 더 온전하게 우리의 두려움을 사라지게하는 것이 있을까? 칼뱅에게 있어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 그 분의 위대하심이 한이 없으셔서 하늘 위의 하늘 조차도 담을 수 없는 하나님; 우리는 그 분의 것이고 너무 위대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만지시고 심지어 우리의 두려움까지도 만지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태복음에 있어 예수는 우리와 함께계신 하나님 (God-with-us)이다. 마태복음 처음 이야기에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마 1:23)라고 한 천사의 약속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제자들의 어깨에 얹은 예수의 손은 하나님 자신께서 만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무한하시고 존귀하시며 놀라우셔서 평범한 인간의 만짐을 통해 하나님과 접촉이 이루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신다. 많은 사람들은 칼뱅을 매우 엄격하게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생각해왔으나 그가 어떻게 부드럽게 설명하는가를 들어보라: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을 느낄 수 없는 깊은 심연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 눈높이에 맞추시려고 스스로를 축소시켜서 낮추셨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마음을 평온케 하셔서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은 너무 크셔서 교회 안에 담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옳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셔서 땅 아래 그리고 하늘 위의 어느 것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명백히 우리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셔서 한 조각 빵이나 한 잔의 포도주 같은 작은 것들이 결코 담을 수 없다. 충분히 수긍한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크시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라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손이 잡을 수 있는 그러한 크기로 한 조각 빵과 한 잔의 포도주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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