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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6장 21 ~28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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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직후, 예수는 십자가-자신의 십자가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각자 져야 할 십자가-로 관심을 돌린다. 기독론은 속죄론을 내포한다. 본문의 "그 때부터"라는 구절은 십자가는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16:16)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어떤 이념을 위한 순교나, <폭력, 불의, 오해, 사고로 인한 죽음>에는 신학적 의미가 없다. 예수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것-예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근거해 자신이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혔다-이 진리일 때만 복음은 구원의 절정과 희망의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

  베드로(그의 기독론적 통찰력이 예수가 그 다음 신학적 단계로 진행하도록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고뇌에 차서 예수 말씀의 마지막 부분("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거나, 듣고도 부활의 개념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에 결함이 있다고 그를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제자들을 대표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들에게 단순히 "말하고" "설명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 관련하여 생길 잔인한 일들에 대해 행동, 비유, 제스처, 몸으로 흉내내기 등을 통해 생생하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성육신 교리에서는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가 그의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 복음을 구현하고 있음도 강조된다. 예수는 말로만 하는 강의를 하지 않았고, 비유, 치유, 축사, 연민, 대결 등을 통해 완전히 육화된 교육을 하였다.

  앞으로 당할 고난에 관한 자세한 묘사가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베드로가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 정도로 그 내용은 매우 참혹했다. 베드로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꾸짖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와 같이 나중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걸림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고전 1:23)이 되었다. 십자가의 피는 회피하면서 예수의 선한 모범은 품으려는 우리의 본능이 세상 속 하나님 선교의 걸림돌이다. 그의 윤리를 원하지만, 십자가는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고전 1:24).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8:7, 개역개정) 예수는 분명하게 이렇게 응답하였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16:23)  

  마태가 예수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한다고 해서 이것을 반유대주의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마태는 어쨌든 다윗의 자손에 관해 글을 썼던 (1장의 족보가 이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예수를 추종했던 유대인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의 처형에 관해 음모했다는 것은 복음의 유대적 성격을 드러낸다.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 배경, 제사와 속죄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이해 때문에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수는 새로운 유월절 양,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죽는다. 예수는 다시 나타난 다윗 왕을 메시아로 여기는 검으로 무장한 해방운동 분파의 지도자가 아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은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정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를 동료가 아니라 위험인물로 인식했다.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4:12) 매우 긴장된 순간에 예수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였다. 로마의 괴뢰 지도자 헤롯은 곧 감옥에 갇힌 요한의 목을 자르라고 명령한다.( 14:10). 예수는 자신의 운명이 그와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의 죽음, 즉 당시 로마 제국의 일반적인 공개 처형 방식, 즉 십자가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즉 이방 세계)이나, 다 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주장하고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라는 구약성서를 인용했다.( 3:9-19, 15)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로마 당국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21)는 것은 예수가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해 죽었다는 뜻이다그의 죽음이 죄의 보편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그가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난다는 사실도 보편적인 의의를 가진다복음은 특정 부족에 관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것이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그래야만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4-45). 진실한 속죄 신학은 그리스도가 모든 문화시대장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선언한다용서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생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놀랍게도,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준다. 하나님의 한 없는 은혜를 담대하게 표현하기 위해 예수가 택한 이미지는 이 세상 초강대국의 처형제도이다: "네 십자가를 지라" (24) 나를 따라오고 싶다면 자신을 부인해라; 네 생명을 찾고 싶다면, 네 생명을 포기해라.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도의 댓가 (the cost of discipleship)을 면제시키기 위해 죽으신 것은 아니다. 복음은 새생명을 주기 이전에 죽음에로의 초대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이 세상에서 이익만을 추구함으로 처하게 되는 삶의 허무함>으로부터 구원하고 새생명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예수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예수에게 우리 자신을 주고, 우리를 통제하고 장악하던 힘에 대해 죽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한 속죄에 우리가 아무 관련이 없을 수는 없다.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초대지만, 예수는 약속한 바를 지킬 것이라고 말씀했다. 이 생애 동안의 새생명은 쉬운 삶이 아니지만 "인자"가 영광 중에 나타나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27) 종말론적인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 ,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애통하고 울며 고통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21:4). -오실-왕의 언어 (soon-coming-king language)가 조금 모호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28), 구원의 완성에 관한 강력한 약속은 더없이 확실하다.

  주석적 관점

  16:21은 마태 예수 이야기의 전환점이다. 마가와는 달리 마태는 21-28절을 앞의 본문들과 분리했다. 마태는 마가가 연결짓는 단어로서 “그리고”를 사용한 것과는 달리(8:31) 21절에서“그때부터 예수께서는”으로 바꿨는데 이는 이야기의 전환을 의미한다. 예루살렘과 거기에서 사건들이 크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이 부분에서부터 예수의 가르침이 군중에게 보다는 전적으로 제자들에게 향하게 된다. 예수는 그의 다가올 죽음을 제자들이 준비하는데 초점을 둔다. 21-23절을 앞의 절과 분리하는 것 역시 16절의 베드로의 고백이 칭찬할 만한 것이 되도록 하는데, 왜냐하면 21-23절의 베드로에 대한 교정(마가와는 달리 꾸짖는다고 하지 않으셨다)이 더 이상 베드로의 고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게 하지 않으셨다.

 이 본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대한 첫 번째 예고이다(17:22-23;20:17-19;26:2). 역사적 차원에서는 예수가그의 가르침과 행동이 일으킬 반대를 알고그의 공생애에 대립적이거나 폭력적 결과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은특별히 그의 사명을 예언자나 이사야52-43절의 고난받는 종과 비슷하게 본다는 점에(비록 현재의 고난예고의 형식은 후기 기독교 형식이긴 하지만)있어서는상상할 수 없다그런데 21절의 “반드시”라는 단어는 예수가 단순히 그의 사명을 마쳐야 한다는 의무를 보여준다그것은 예수의 운명이 하나님 계획의 한 요소로서 신적 불가피성임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종말론적 세계관의 일부로서 정해진 세계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의 계획은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라죽음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부활까지 포함된다.

 예수의 말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그가 예수의 길에 대해 적절히 이해했거나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베드로는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반석과 같은 믿음과 제자도에서부터 걸림돌로 바뀌고 있다. 비록 예수께서 17-18절에 베드로가 복이 있고 하나님 계시의 수령자라고 칭찬하고 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의 제자됨에 있어서 더 많이 배워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는 24-28절의 제자됨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청중을 마가가 군중을 포함하는 것에서 제자들에게 한정된 것으로 바꾼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순교까지 포함하면서 그것에 한정되지는 않는 자기 부인의 생생한 비유이다. 십자가를 형을 받는 장소까지 메고 가는 죄인들은 마침내 힘든 죽음을 맞기 전에 조롱, 모욕, 거부와 수치를 받아야 한다. “제 십자가를 지는”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자부심, 자존심, 지위, 안락 그리고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람이다.

 이 표현은 아마도 역사적 예수와 부합할 것이지만(마가복음과 Q, 그리고 도마복음서에서 나오고, 십자가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또한 그의 죽음 후에 궁극적 신실함의 표시로서 초대교회가 정교화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마태의 시대에 이 말을 복음에 포함시켰는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충실한 제자도의 강력한 이미지였다.

 “누구든지 가지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는 역설적 표현은 일반적 격언에서 온 것이지만, 예수가 특별히 적용한 것이다. 제자도는 “나 때문에”,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고귀한 생각이지만 목숨을 이타적인 이유로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행해진 특별한 요구이다. 그들은 예수가 보여준 길을 따라 자기중심의 야망이나 목적 라이프스타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그러한 믿음의 보상은 마가에게는 26절에서 미래형으로 나타나는 동사를 바꾸어 종말론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초점은 27절과 연결되는데,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말로 한 고백이 아니라 스스로 행한 제자됨에 충실함이 심판을 결정할 것이다.

 막9:1절을 교정한 마지막 절은 계속해서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어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석가들에게 어려움을 주는데, 왜냐하면 이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터인데, 말하자면 이 예언이 예수의 변화, 부활, 또는 교회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이 마가나 누가가 말한 것에는 적용될 수 있겠지만(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마태는 분명히 예수의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태는 마가의 말을 바꾸었다). 예수가 금방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는 초대 기독교인의 믿음이었다(13:11;고전15:51;살전4:17;1:!,3;3:11;22:7,20).

 비록 마태는 예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을 알았고(25:1-30의 두 비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 일어날 것으로 선포하기도 했지만(24:14), 곧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도 두었다마태가 복음서를 쓴 때는(AD 85년경), 예수와 동년배들이 상상컨대 몇몇이 살아 있어서예언의 성취는 여전히 마태와 그의 독자들에게 선택하도록 맡겨져 있었다.        

  목회적 관점

  역사는 교회의 실패와 신앙의 결핍에 대한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메시지가 서서히 손상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개혁이 필요하게 된다. 개혁주의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선포는 교회가 타락과 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씀(13-20)에 이어서, 우리는 이제 교회가 오해하는 첫 번째 순간을 만나게 되고, 이 세상에서 예수의 몸의 한 지체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기시켜준다.

베드로를 정당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망하는 대담함을 가지고 있는가?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묶고 풀 수 있는 힘을 얻었으므로(19), 베드로는 예수를 묶기 위해 그의 새로운 감각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는 분명히 예수가 메시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속에 확실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는 갑자기 대본에서 벗어나고 있다. 메시아는 억압적인 제국을 전복시킴으로써 유대 왕국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예수는 고통 받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바로잡고 구하기 위해 예수에게 다가갔다 : “주님! 그건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내가 새로 가진 권위로 나는 당신을 가게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나라가 도래한다는 약속이 무너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고난과 죽음으로 더럽혀질 수 있단 말인가?

베드로의 불신앙에 대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기는 쉽지만, 이것이 역사를 통해서 교회가 투쟁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온전히 순결하고 죄와 고통과 죽음의 세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하나님을 품고 있겠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근 역사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인 마리아의 무염수태(無染受胎)를 의미했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주장을 하지는 않지만, 95개조 반박문이나 기독교강요 안에 있던 없던 간에, 마틴 루터와 장 칼뱅이 루터교와 개혁전통에, 생물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곧바로 하강하셨다는 순결 교리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미국 근본주의의 성서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월권과 부패에 대해 정당하게 항의하는 동안, 그들은 금방 그들 자신도 부패에 대하여 면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형적인 지역 교회가 겪는 갈등, 부패, 스캔들, 그리고 모든 굴욕으로 가득 찬 가시적 교회에 대비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불가시적 교회–회개하고 선택된 신자들의 연합-에 대한 개념을 회복시켰다. 대부분 우리는 가시적 교회의 혼란을 참아내기보다 지식(영지)을 통해 불가시적 교회의 순결에 추상적으로 머물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다시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듣는다. “주님, 그건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당신은 순수하고 거룩한 보이지 않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고난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눈물과 땀, 피와 인간의 더러운 일을 겪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우리를 구원해야만 한다! 방금 17-19절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한 예수는 이제는 깜짝 놀랄 대답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 판이 바뀌었다. 베드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를 보호하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으로 메시아의 삶을 살고 또 그렇게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재해석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예수는 멀찍이서 교회에 관해 가르치는 교수나 작가가 결코 아니고양떼와 함께 살고 인도하며 먹이고 상처를 치유하고 원수로부터 보호하며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고그들을 위해 그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신다그는 보이지 않는 순결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불가시적 교회 대신 실제적이고 지저분하고 살과 피가 있는 교회의 목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장로대제사장 및 율법학자의 손에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우리가 그를 따르기를 원한다면우리는 또한 피를 흘리고울며땀을 흘리고 죽어야 할 것이다“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25).

복음에 관한 놀라운 점은 하나님이 로마 제국에서 멸시당하는 유대인으로 와서 흠 하나 없이 받아들여지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이교도로 전락하고, 인류의 혼란 속에서 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총체적인 역기능의 희생자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덜 취약하게 될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결이나 교리의 올바름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그리고 십자가 위로 예수를 따르려는 의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제하거나 예수에게 우리의 제자직의 조건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삶과 기관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공개함으로써 오염과 불안정을 감수한다.

우리가 순결한 개념, 불가시적 교회, 또는 특수한 영적 상태라는 개념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충만한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더 큰 순결이나 거룩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예수 자신의 삶의 방식과 연대하여 교회의 지속적인 개혁에 참여한다. 우리 자신의 자기 보존을 위해 예수를 속박하는 대신에, 교회는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예수를 신실하게 따르고 증언(martys)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방식으로 참여하면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분명한 전환을(transition)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였다.... 이 구절은 방금 있었던 대화 곧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언했던 것과 연관이 있다. 설교자는 여기서 이 전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그리고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난을 향해 긴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는 제자들에게 보다 심오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이 여정과 중요한 가르침들은 이후 몇 장에 걸쳐 소개되고 있다. 21절에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해 긴급하게 가르치며 강조하는 점은 이보다 앞서 자신이 신적 존재임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한 것과 연관이 있다.

-앞으로 있을 예수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4번의 예언 가운데 첫 번째를 보면서, 우리는 제자들조차 예수께서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어떻게 수행할지 모르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이 계획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앙에 있어서 사실상 성숙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본질이나 선교를 이해하고 제자됨으로(discipleship)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주장했고 또 확실하게 했다하지만 여전히 예수의 가르침에 저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방식과 선교가 이해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예수의 고난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난에(suffering) 관한 질문은 기독론에서 언제나 난제로 남아있다고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의 고난을 설교할 때 주의와 관심이 요청된다설교에서 아무 생각없이 대속적 속죄를(ransomed atonement) 주장하는 일은 그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룬 희생을 놓쳐버리는 무책임한 설교가 될 수 있다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위해 또 우리와 함께 견디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목회적 치유자료가 될 수도 있다또 다른 인식에 기초하여 고난을 하나님의 어떤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이해하는 일은 강단에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이런 위험성은 설교자가 어떤 신학노선안에 있든지 간에 모든 설교자에게 존재하게 된다.

-고난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생명을 선물로 주신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서가 아닌 베드로에게서 일어난다. 베드로는 그가 앞에서 [예수께서]그리스도라고 확언하며 말한 것같은 담대한 말투로 [예수께서 고난을 받게될 것을] 반대한다. 이상하게도 예수는 그를 꾸짖는다. 앞서있던 베드로와 예수 사이의 질문-대답형식의 대화가 여기서도 병행구조로 나타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어 축복을 받고 사명을 받았던 이 제자가 이제 임박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당한다.  

-여기서 설교학적 관점은 베드로에 대해 앞서 그가 그리스도임을 드러냈던 것보다 고난을 반대하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잘 알지 못한 채 하나님에 관해 우리의 주장을 종종 과신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주장들도 심지어는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깊은 사랑에서 오기도 한다. 고백이 지닌 난해한 점이 설교의 과제가 된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응은 전혀 상냥하지가 않다. 그의 반응은 4장 그가 받은 유혹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베드로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선교를 특징지운다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베드로의 반대를 사탄의 유혹과 같은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유혹은 (temptation)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에서 나온 이 표현을 축복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신실함에 대해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다음 조금 놀랍게도 예수는 고난과 제자됨에 관한 긴 가르침을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이 그들이 받았던 계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를 아직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역설적인 병행구절은 “반석” (the rock)이 “걸림돌” (stumbling block)이 되는 장면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종으로서의 섬김”(servanthood)이 고난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로서의 길” (messiahship)이 죽음을 피하지 않을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죽음은 부활에서 행할 하나님의 행동을 어렴풋하게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임박한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권면을 한 후 제자됨(discipleship) 또한 생명과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24-26) 필요함을 설명한다.

 -대속신학을(atonement theology)을 무비판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문제가 되듯, 제자됨에 있어서 고난에 관한 것을 설교하는 일은 설교자에게 있어 하나의 도전이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을 제자도와 (discipleship)  연결시킨다. 실제로 그는 제자들을 단순히 제자도의 이런 면을 이해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길을 가려면 결단해야한다고 요구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축복을 신앙이나 사역과 연관시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고 설교한다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화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그렇다하나님의 지배적인 의지는 우리를 축복하는 것이다우리는 그 목적을 위한 그의 신실함을 가르치고 풍성함을 설교한다그렇다면 제자됨에 있어 받는 고난을 이러한 인식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겠는가고난이 신실함의 증거가 되는가?

 -우리는 분명히 유혹과 도전을 경험하는 데 우리는 그것을 악을 대면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혹은 영적인 결과로 혹은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성서는 우리를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바램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의 이 본문은 고난을 기독론의 관점에서 보고있고 제자됨을 그런 고난과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희생적 고난이 제자도 안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만날 수 있는가를 설교하는 일이다. [본문에서 이 두 항목이] 명제(thesis)와 반명제 (antithesis)로 등장하는데 [설교를 통해 나올] 합명제 (synthesis)는 하나님의 축복을 모독하지도 않고 희생적 고난을 비신앙적으로 잘못된 삶을 산 결과로 비난해서도 안되는 것으로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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