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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6장 13 ~20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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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루어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가장 중요한 기독론적 고백 중의 하나이다. 마태는 이야기의 전개상 거의 예상하기 힘든 대목에서 이 장면을 소개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를 다시 살아 돌아온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는 그런 다양한 의견에 관해 베드로에게 물은 후 이제 베드로에게 직접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마가복음은 늘 그렇듯이 더 간단하게 기술한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8:29) 마가와 마찬가지로 마태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메시아의 비밀"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으로 나온다.

  베드로의 영감으로 가득 찬 고백을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고백들(, 선생님, 다윗의 아들 등의 명칭과 차별되는 더 깊은 고백)과 비교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 1:24,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 4:41,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는 귀신들이 외치는 소리)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1:29,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고)

-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 ( 4:42,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여인이 예수를 소개한 후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온 고백이고, 그 고백 후 예수가 크게 축복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신학적 작업의 중요성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교리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에 부착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고, 총체적인 종교적 경험의 필수적인 한 요소이다. 신학과 영성은 신과의 만남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그런 신학적 성찰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17)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후대 교회에서 형성된 신학적 견해에 성경 본문을 억지로 뜯어 맞추려고 시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명확한 삼위일체 교리-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 됨-와 성자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에 관한 교리는 공관복음이 쓰일 당시에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 즉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적인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시몬 바요나의 별명인 베드로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예수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18)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의 역사적 근거와 의미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4세기경부터 가톨릭교회는 이 구절을 로마 주교의 우위를 위한 근거로 해석했다. 개신교인들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은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고 그의 신앙이라고 주장했다. 사도 계승에 관해 어떤 특별한 이론을 주장하든, 시간이 지나도 지속하는 하나님 백성의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시몬은 완고한 성격이나 융통성 없는 머리 때문에 그런 별명을 얻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예수에 관한 이 기독론적 고백 때문에 예수는 베드로라는 별명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앞으로 하나님이 쌓아 올릴 돌들을 떠받치는 바위가 될 것이다.

  예수는 아마도 이사야 51장을 마음에 두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나 주를 찾는 사람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바위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저 구덩이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나왔다." 예언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최초의 믿음의 바위로 묘사한다. ( 51:1-2) 베드로 전서에서는 이 이미지를 받아서 그리스도를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살아있는 귀한 돌>이라고 표현한다. (벧전 2:4) 이제 우리는 예수와 베드로,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고백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을 본받아 "살아있는 돌이 되어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벧전 2:5)

오늘날 다양한 교회 전통에 속한 설교자들은 이 본문으로부터 오래된 과거의 논쟁거리를 불러오지 않으면서 교회에 관한 신학을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교회론에 관한 한사도 신경이 옳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미국 공리주의는 틀렸다교회는 단지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 단체도 아니다그것은 신앙의 중요 항목이다예수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한다그는 자신이 짓고 있는 교회를 보호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해도 교회는 늘 승리할 것이다.

  예수는 그의 교회와 그의 나라를 연결한다. 교회는 단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거나 그 날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천국의 열쇠"를 주시고 묶고 풀 권세를 주실 때, 그는 교회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6:10)라는 예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핵심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이전의 위험한 시기에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다.(20)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후에는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주석적 관점

 마태는 이 본문을 마가에서 빌려왔지만(8:37-30), 여러 가지 중요한 변경을 했다. 마가에서는 이 이야기가(31-33과 더불어) 시몬 베드로(그러기에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성과 목적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예로서 들고 있다. 베드로의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처음엔 칭찬을 받았지만, 결국엔 고난과 죽음을 포함한 예수의 사명(궁극적으로 제자들의 사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으로 인해 예수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는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자(outsider)의 예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편이라기보다는 사탄의 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이 장면에 긍정적으로 보았던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는 제대로 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후 예수가 베드로를 칭찬하는 것을 삽입함으로써 베드로를 살리고 있다. 이 시점에 베드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참된 제자를 대표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용된 예수의 명칭 –인자,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모두 마태의 기독론에서 중요하다(그리스도만 마가에서 가져왔고, 다른 둘은 마태는 첨가한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한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자신의 통찰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예수가 말함으로 확증된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시몬에게 “반석”(헬라어로 베드로, 아람어로 케파)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는데, 둘 다 그때에는 팔레스틴에서 사람 이름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언어의 유희처럼 예수는 시몬에게 말하기를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한다(1:42에서 명시적으로 막3:16에서 묵시적으로 예수가 베드로에게 이 별명을 지어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예수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라 마태(또는 초기마태자료)에게서 온 것으로 여긴다오로지 여기와 마18:17에서만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나온다그런데 마태에게는 교회가 예수의 부활이후에 그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초기 예수가 그가 시작한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세운또는 최소한 청사진을 그린 것이라고 본다.

 18절의 Hades는 히브리어의 Sheol과 같은 죽음의 문을 가르킨다. “죽음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은 약속과 격려의 말씀이다. 즉 세상의 어떤 권력도, 심지어 인간에 가장 큰 적인 죽음 자체도 교회의 사역을 위협하거나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말은 아마도 유대인 회당에 대항하여 때때로 상반되는 신랄한 갈등에 있던 마태의 공동체에서 환영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내적인 갈등과 분열, 그리고 외적 공격이나 무관함의 주장에 직면한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큰 힘이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 본문에서 특별한 명성이 주어지는데, 마찬가지로 마태공동체에서도 높은 명성을 얻고, 제자들의 대변자로서의 역사적 역할을 했으며, 초기 예루살렘교회에서도 지도자였다. 예수는 교회를 반석(베드로) 위에 세우겠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고 했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랍비들의 용어로 교리와 권징의 권한)이라고 한다. 비록 몇몇 해석가(주로 개신교학자)들이 베드로의 역할을 낮추어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위에 세운다고 말하지만, 이 본문은 명확하게 제자들 가운데에서 베드로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카톨릭교회의 전통적 해석과는 반대로, 본문은 사도적 계승이나 베드로의 계승과 같은 주장을 지지하진 않는다. 사실 19절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은 명시적으로 제자들에게 묵시적으로 모든 교회에 주어진 것이다.(18:18에서 매고 푸는 것은 가르치는 권위가 아닌 권징에 대해서 주로 말하는데 이 둘은 연관되어 있다).

 책 전체를 통해 마태는 예수가 토라의 가르침을 “매고 푸는”자로서 묘사한다. 그것은 예수가 어떤 행동은 필수적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다. 예수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또한 예수가 이 가르침의 권위를 베드로와 제자들(교회)에 주는데 왜냐하면 예수는 그가 세운 공동체에 계속해서 현존하기 위해서다. 탄생설화(1:23)에서부터 마지막 제자들의 사명까지(28:20), 마태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권위로 일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다.

 마크 알랜 포웰(Mark Allan Powell)은 마태는 확신하기를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권위를 가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통찰력이나 대단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교회에 살아계시고, 그의 권위를 이 공동체를 통해 행사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교회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야 하는 벅찬 임무가 주어졌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무엇을 매고 무엇을 풀지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그의 과제를 수행하는 모델이 된다. 성서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상황에 재적용해야 한다. 예수가 토라의 가르침을 신선하고 창조적 방법으로 재적용했듯이, 교회도 예수의 가르침을 새롭고 영감을 받은 방법으로 해석하는 데 마태복음에서(다른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있는 교회들에게 예수가 말하고 있는 목소리에 열려있는 두 가지 것을 다 시도하는 데에 과감해야 한다.      

 목회적 관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그들이 이해하기로는,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으면서 시작되어 세대를 걸쳐 전해 온 사도적 권위는 교회를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그 권위를 사도 베드로 이후 계속 이어져서 전해 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서 받았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해석을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위가 세계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 권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권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열여섯 살이 되어 시속 160Km를 달릴 수 있는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열쇠를 처음 받을 때 긴장한다. 그들이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성숙한가? 우리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 이전과 이후 베드로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열여섯 살짜리만큼 성숙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는 끊임없이 요점을 놓치고 자주  생각하기 전에 말을 한다. 몇 구절 후에 예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에 마음을 두는 그를 “사탄”이라고 부른다(23)!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다( 26:69-75). 어떻게 이렇게 불안정한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까? 분명히 베드로의 권위는 자신의 올바름이나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기초는 무엇일까?

이 구절의 시작 부분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13)라고 묻는다. 사람들의 응답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다른 예언자들과 같은, 그들이 속한 특정한 당파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개혁교회에서 사람들은 루터, 칼뱅, 웨슬리, 다비, 바르트, 에이미 세펄 맥퍼슨 혹는 빌리 그래함의 렌즈를 통해 해석된 예수에게 반응한다. 이런 경향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예수에게 그들의 특별한 문화적, 신학적, 교단적 충성을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 구절에서 예수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라고 제자들을 지목하여 질문했다. 시몬 베드로는 자주 그러하듯이 말부터 먼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6)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Petros). 나는 이 반석(petra)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7-18).

그 말 때문에 베드로는 확실하게 승격되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의 우월함을 의심했었다면,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의 제자로서 그에게 특별한 강점과 업적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의 고백에 응답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예수 안에서 경험한 것은 예수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로 데려가는 메시아라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교회의 권위를 외적인 방법을 통해 상속하려는 유혹을 받아왔다. 사도적 계승이라는 교리도 그 가운데 한 예이다. 수세기 동안 서방 교회는 자연 신학, 논리, 형이상학,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목사의 권위는 특정 교단 전통에서 인증된 신학교 교육 및 안수에 근거한다. 그러나 예수는 매우 변화무쌍한 인물이어서, 이런 방식으로 속박하거나 이용할 수 없다. 교회의 기초는 로마 교회처럼, 왕적인 권위를 교황에게서 교황에게로 넘기는 맨 처음 감독 베드로가 아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성한” 고백을 외우고, 동의하고, 재포장하는 능력도 아니다.

교회는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루터 또는 칼뱅을 기초로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베드로를 기초로 하지 않는다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그러므로 이 구절은 교회에 경험적 힘과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근본적인 교훈은 교회가 믿음에 있어서 우리 각자만큼 유동적이거나 약하다는 것이다교회는 매일 힘과 무력함의 긴장 속에 있다우리 각자에게 하신 예수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너희의 고백은 무엇인가너희는 나의 증언과 현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것이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 바위이며 기독교의 권위의 근원이다. 이것이 땅에서 묶고 풀도록 우리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통치자가 아니라 연약하고 미성숙한 어린이에게 옳은 일을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신실하기도 하며 멀리 떠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맡기는 사랑하는 부모로서 교회와 관계하신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만족에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한 것에 의존하고 따름으로 우상 숭배로 빠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이 구절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이 각자에게 어떻게 다른지를 우리가 서로 진실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특정한 정치적, 교파적 파벌, 다양한 신학적 강조점, 그리고 각자의 민족적 충성심을 넘어서도록 요구한다.

사도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다 (고후 12:9-10). 우리는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적인 고백자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된다. 이렇게 “모든 신자의 제사장”을 실현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과 절망의 힘을 극복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서 그 자신의 권위를 실현한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의 전반적 구조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역과 정체성에 대해 대중들의 인식에 관해 묻는다. 그런 다음 예수는 그 질문을 제자들 자신의 인식으로 전환한다. 시몬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서 이미 제자들에게 드러난 정체성을 확인하는 말을 한다 (14:33):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 (16). 예수의 정체성과 권위를 이해하는 일은 기독교 공동체와 교회에 있어 근간이 된다. 설교자는 회중들이 자신들이 속한 교회 전통에서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돕기위해 질문-대답 형식을 도입해도 좋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교회론의 문제이다. 설교자는 14장부터 18장 전반에 걸친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교회의 근간에 접근할 수도 있다. 이 본문은 예수의 사역과 그의 신적 정체성을 부정한 그룹(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대한 응답으로부터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 간의 대화는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하며 도전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1-4)의 이야기에 이어 나온다. 예수는 그 요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성전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이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형성은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과 권위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생긴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뜻하는 용어인 에클레시아 (ekklesia)는 “부름을 받음” (called out)을 뜻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보다 교회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역이 드러난 데서 비롯된다. 베드로의 신앙선언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신적인 요소에 관한 질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몇몇 학자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예수의 정체성에 대한거부(rejection), 이어서 그들에 대한 예수의 대화단절을 새로 탄생한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유대교로부터의]거부(rejection), 새로운 정체성그리고 선교의 패러다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예수처럼 거부당했던 교회공동체의 권위와 사역을 설명함에 있어서 왜 이 본문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마 이 본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접근은 예수의 축복과 베드로를 교회가 세워질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19). 베드로의 이름을 “새롭게 지어준 일” [renaming, 바요나 시몬에서]과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형성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있어왔다예수가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는 일이 기름부음이나 혹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한 것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형성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또 다른 사람들은 아론이 모세의 그늘아래 있었던 것처럼베드로가 예수의 권위로 만들어진 그늘아래 있다고 추정한다가톨릭과 개신교는 사도적 전승(apostolic succssion) 과 교회의 권위를 두고 수많은 논쟁을 벌여왔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기자에게 있어서 베드로가 새로운 교회형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전히 이 본문은 교회의 권위 (authority of the church)와 교회에 대한 권위 (authority over the church)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근거로 남아있다. 특별히 마태는 거부당함(rejection)속에서 [유대교로부터]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마태는 그리스도 자신의 입을 통하여 이 교회공동체의 정체성과 권위의 문제를 언급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정체성과 권위는 교회의 정체성과 권위로 옮겨진다; 기독론은 교회론을 형성하는 계시가 된다. 여기서 마태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교회의 형성을 두고 드러난 계시의 본질과 특성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베드로는 어떤 종류의 반석인가? 얼마나 많은 구절들이 사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계시사건을 말하는가?등의 문제들이 남아있다.  

-마태복음의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마가복음에 기초하고 있지만 17-19절은 마가에는 없다. 교회의 정체성과 권위에 대한 입장정립이 필요한 마태의 상황에서 추가된 이 본문은 설교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를 시사해준다. 분명히 베드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름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그의 역할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반면에, 이 본문의 초점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권위의 근원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신적 계시라는 것을 말하는데 있다.

-매고 푸는 열쇠는 계시를 해석하는 열쇠이다이 본문에 대한 접근을 병행본문 18:15-20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 두 구절로부터 계시를 해석하는 권위 즉 매고 푸는 것-는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계시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을 간직하고 사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오늘의 설교신학 곧 교회 안에서 이번 주에 이 사건을 설교하는 일은 신앙공동체와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정체성과 권위에 관한 것을 두고 씨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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