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5장 (10 ~ 20절), 21 ~28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Dorothy L. Sayers의 라디오 드라마 The Man Born to Be King(예수의 생애를 다룬 라디오 연속극으로 BBC에서 방송됨-역자주) 1941 년에 처음 방송되었을 때, 일부 청취자들은 그 내용이 저속하고 불경스럽다고 불평했다. Sayer는 어떤 청취자가 헤롯이 자신이 법정에서 예수에게 "입 닥쳐"라고 말한 장면을 거론하며 드라마가 예수에게 너무 거친 언어를 사용했다고 비판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순수한 언어를 선호하는 그들은 분명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 여자를 대하는 예수의 태도와 언어는 매우 충격적이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귀신들린 딸을 낫게 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는 그녀를 개라고 부른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우선, 예수는 그녀의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23).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사명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24 )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자녀를 위한 "음식"(26)을 그녀와 같은 비이스라엘인에게 던져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편견,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자비의 한계 등에 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가나안"이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나안은 옛날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적했던 <우상을 숭배하는 적>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말, 라합, 룻과 같은 여인들과 관련이 있으므로 다소 긍정적인 의미도 지닌다.( 1:3-5)

 몇몇 최근의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예수가 동정심을 내려놓고 그 자신의 편견을 직면해야 했던 순간으로 본다. 보통 때의 역할이 뒤집혀서, 존경받는 선생이 외부인으로부터 "이스라엘 집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넓힐 필요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이 구절의 열쇠는 여자가 자신과 자신의 딸을 위해 추구하는 자비다.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와 그의 병고치는 능력에 관해 분명히 알고 있다. 그녀는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12:23)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윗의 자손"(22)으로부터 자비를 구한다.

 Kyrie eleison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는 그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수도원 회랑에서 낭송되었고 병원에서 속삭여졌고, 전장에서 외쳐져 왔다. 이것은 극한의 상황에 부닥친 영혼의 부르짖음으로 가장 깊은 불행에 처한 인간 상태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침묵한다. 놀랍게도, 그 여인은 예수의 무관심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 외친다.

 그녀의 확신은 확고한 근거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마태에 의하면 예수 사역의 절대적 핵심은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바리새인들이 정결 의식과 하나님의 율법 준수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는 두 번씩이나 호세아 6 6절을 인용했다: "나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자비는 예수가 그들의 종교와 삶의 방식을 비판하는 데 초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직전에, 바로 이 문제에 관한 바리새인들과 더 많은 충돌이 소개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세아서의 인용은 없다. 마치 이 여인이 "제사가 아니라 자비!"라는 예언서의 핵심을 지적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가 자비를 구하는 길에 하나의 큰 장애물이 있다. 그리고 그 장애물을 거기에 놓은 것은 예수처럼 보인다. 그가 주는 "음식"은 개가 아닌 자녀를 위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택에 관한 교리 -예수를 비판하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편애, 배타주의, 차별의 근거로 사용되었던 교리-에 따르면 그녀가 자비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전히 가나안 여인은 흔들림이 없다그녀는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그와 반대로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소망의 근거로 붙잡는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27). 그녀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본 근거가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되려는 결정이라는 사실을 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출 33:19; 롬 9:15) 자비를 통해서이것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로 결정하신 방식이다.

 그녀는 예수가 다른 외부자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온다"( 4:22)라는 말의 뜻을 이해한다. 자비는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거기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집안의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개들"에게까지 넘쳐 흐른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녀의 딸과 자신을 위해 충분하다는 명확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예수께 나아간다. 예수는 전에 다른 이방인에게서 이러한 신앙을 보았고 그에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예언했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8:11)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예수는 그녀의 "위대한 신앙"을 칭찬하고 그녀의 요구를 들어 준다.

  주석적 관점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15:1-9) 이어 나오는데, 두 사건은 비교된다. 여기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고정관념을 두지는 말라.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그들이 유대교를 대표하든가 또는 모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점에서 비교가 중요하다. 첫 번째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외부적 차이를 강조하고 마음의 문제를 놓쳤다고 하면, 두 번째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외부적 차이를 돌파한다. 비교는 아주 놀라운 점을 보여준다. 첫 번째 경우에 그의 질문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예수가 급소를 찌르고 있다면, 두 번째 경우는 여인이 예수의 반응을 바꾸도록 급소를 찌른다.

 마찬가지로, 본문에는 다른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비록 예수가 이방도시인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갔지만(21), 이것이 이방인들을 향한 의도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불확실한데, 왜냐하면 그 지방에는 유대인들 도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5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가지 않도록 가르치는데, 15:24에서 가나안 여인에게도 비슷한 도전을 한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이방인 선교에 주도권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이방여인이 예수와의 만남을 주도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녀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마태의 독자들이 이 여인에 대해 가진 문화적 전제는 무엇인가? 가나안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정복 때 이스라엘이 왔던 땅에 살던 주민들이기에, 우리는 유대인과 가나안 인들 사이에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종, 유산, 종교 그리고 성별에 있어 그녀는 유대의 사회적 규범과 거리가 있다. 더구나 그녀의 딸은 귀신이 들렸다.

 여기에 더하여 여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녀의 문화권에서는 여인들이 공적 자리에 나타나면 안 된다. 그녀는 예수를 만나는데 주도적인 뿐만 아니라 소리질러 요구했는데 이는 사회적 규범을 어긴 것이다. 사회적 모욕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기에 예수가 그녀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을 때(23), 예수는 당시의 사회적 규칙에 의거하여 행동한 것이다. 나아가 제자들은 그 여자가 소리지르는 것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므로 떠나보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제자들에게 이방인에게 가지 말라는 10:5의 가르침과 일치되게예수는 여인에게 그의 사명이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있다고 말했다나중에 더 많은 비유적인 용어가 나오므로 여기에서는 예수가 그의 사명은 오로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것(24)이라고 비유를 사용한 것만 지적하겠다.

 이 지점에서 여인의 태도가 바뀐다. 그 여자는 존경의 몸짓으로 예수께 무릎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25). 정서적 차원에서 이것은 마태의 독자들에게 사회적 모욕에서 동정심으로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예수는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한 사명을 고집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예수는 또 다시 비유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비유들은 문자 그대로 직역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사람(이방인)들과 나누는 것은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가 ‘작은 개’라고 비유하는 것은 여자와 그 딸을 격하하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주저하지 않는다. 비록 ‘작은 개’라는 비유적 용어가 비인간적이지만, 가나안 여인은 그것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와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사회적 모욕에서 확인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행동은 큰 믿음을 보여주었고, 그 여자의 딸이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함께 한 것이다.

 사건은 여인이 자비를 구하며 소리지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have mercy)(22) 번역은 명사형이지만 헬라에서는 동사이다. 같은 동사가 자비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5:7)는 팔복에 나온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이 치유를 요청할 때(9:27;17:15;20:30-31), 용서받지 못한 종이 18:33에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에서 그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단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예수 자신이 설명하는 것에서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12:28). 마태의 통전적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여인의 외침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도움을 받고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가 “도와 주십시오”라고 간청할 때, 그녀는 실제로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간청할 것을(14:30) 되풀이하고 있다. 베드로가 그 여인 모두 예수의 행동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간청하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가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확정하는가? 그 여인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신앙고백적 용어의 “주님”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22)이라고 부르는데 마태에서 예수를 말하는 기독론적 용어이다. 그녀가 예수를 주님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부를 때 예수가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는 반응이 없다. 그 무엇인가 더 있다.

 계속해서 그녀는 인종, 유산, 종교, 성별, 그리고 귀신에 사로잡힘 때문에 생긴 경계를 허문다. 심지어 그녀는 예수가 인종적 경계를 허무는 것을 주저할 때 예수에 대항한다. 마태가 큰 그림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딸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꺼이 장벽을 깨고, 장벽을 깨는 것이 그의 믿음을 극화했다. 가나안 여인과 그 딸이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자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다. 이 경우에도 마태의 예수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정도로 넓은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여인과의 만남 때문에 예수가 그의 사명을 이방인에게로 확장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마태의 끝에서 복음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28:19).  

 목회적 관점

성서정과가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 일련의 삽입구를 포함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마태는 이 신학적으로 함축적인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단히 구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15장의 처음 10절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이 장을 통해 다루는 한 가지 주제는 전통이 종교생활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다. 목회 사역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운 교회의 투쟁을 알고 있다. 전통은 교회가 대대로 행해 온 예배 의식에 한번 이상 등장하는 예배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통은 신앙을 위해 견고하면서도 유연한 기초를 제공 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방식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는 유대 전통의 공식적인 수호자를 질책한다. 유대의 전통에서 생명과 활력을 빼앗아, 전통과 관계없는 종교적 유물로 화석화시켰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다름 아닌 고대 역사의 현장이다. 마태는 예수와 예루살렘 당국 사이의 기억할 만한 논쟁을 단순히 기록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예루살렘 당국 사이의 만남을 되살려낸다. 마태는 당시의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이 점점 더 많이 섞이고 있는 교회, 기록되고 구전된 유대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과 그러한 전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섞이고 있는 교회로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 전통에서 자라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기록되고 구전된 그들의 전통들 가운데 어떤 것을, 왜 교회의 생활 속으로 가져오는가를 통해 분류된다. 1-10절에서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전통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해 왔는지 조롱하는데, 이런 논쟁의 반향은 21세기 교회에서도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오늘 말씀의 괄호 안의 구절(10-20)에서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설교했던 본래의 환경의 설교와 마태 시대의 설교, 그리고 수 세기 후의 설교까지도 하나하나 설명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결이나 종교적 신실함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는 말한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11) 이것은 예수님이 신자들을 좌절시키기 위해 대화에 던져넣은 호기심에 불과한 격언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과 전통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사랑이 오직 예전적으로 순결한 사람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만 남겨 두었다고 주장하려는 “거룩한” 이유로서 사용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 예언하는 것이다. 성서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없다고 슬퍼하는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10-20절에 나오는 예수의 사역에 시간을 사용하도록 초청하라.

예수와 예루살렘 종교권력 간의 이 만남은 이방출신인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소식인 반면, 교회 당국에게는 경고가 된다. 환대와 신실함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교회가 큰 관심을 가지라고 하는 주요한 경고로 작용한다. 설교자들이 듣지 못했거나 슬프게도 암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기에서 예배하는 것이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보다 “손을 씻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기독교는 종교적 전통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행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예수와 종교권력 사이의 논쟁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바늘 끝에서 춤을 출 수 있는가 하는 것처럼 애매한 신학적 싸움이 아니다예수에게는 종교적인 순결과 신실한 제자도란 궁극적으로 주일학교나 예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수의 출석도장을 받았는지얼마나 자주 성경을 통독하는지얼마나 많은 돈을 교회에 헌금하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순결과 신실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환대와 사랑을 말하고 생활하는지가 보여준다.

이 장 전체를 읽으면, 예수는 전통을 지키는 자들과 한 번의 격렬한 만남으로부터 전통이 만들어 놓은 "거룩한" 울타리 밖에 있는 익명의 두 여성들과의, 마찬가지로 격렬한 만남으로 나아간다. 예언자 전통에서 예수는 자신이 주장한 것의 비유를 실행한다. 그는 전통이 “해로운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생각하는 “부정한” 지역으로 여행한다. 제자도가 오염될 수도 있는 부정하고,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 간주되는 영토를 가리키지 않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누구인가?

마태는 목회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식이 빨리 사라질 것인가를 묻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회가 예수를 따라 세상의 “해로운 쓰레기 처리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는 말을 덜 받아들이고, 전통적으로 “부정”하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 온 사람들의 외침에 좀 더 귀 기울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이름 없는 이방 여인은 그녀의 이름 없는 이방인 딸을 대신하여, 예수가 “전통”으로 외적인 장벽을 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게 두지 않았다. 캐롤라인 루이스 Karoline Lewis 가 관찰한 것처럼 “그녀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알고 있는 여성이 그것들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들을 밝은 곳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들에 대해 질문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Karoline M. Lewis, Living by the Word, Christian Century, August 12, 2008, 18.]

마태는 이 구절들을 하나로 모아서 부활하신 예수의 마지막 위임으로 예시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28:19). 그렇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왔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15:24). 이 예리한 말씀으로 예수가 무엇을 의미하던 간에 마태는 교회가 항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이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계약 전통에 포함된 이방인들은 결코 이것을 잊을 수 없으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를 모든 나라에 미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설교적 관점

 -무엇을 그리고 언제 만질 수 있는지, 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긴 규범목록이 1세기 유대교 가르침에서 지배적이었다. 이 음식법은(dietary law) 개인의 성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그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대부분 종교공동체에서는 몸을 더럽히고 상하게 하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예수는 우리 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세상을 더럽히고 상처를 주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제 먹은 점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예수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는 줄 모르느냐? (17)라고 묻는다. 배설기관은 음식법이 부정하다고 한 것을 실수로 먹었더라도 모두 밖으로 배출한다. 하지만 부주의한 말, , 거짓말, 우상숭배등은 계속해서 해를 끼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더럽히고 상처를 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로인한 고통은 어제의 점심처럼 쉽사리 가버리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 음식법이 먼 옛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그 법이 기초하고 있는 원리는 여전히 오늘 우리 문화에서도 발견된다오늘날 여러문화에서도 비슷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우리는 훌륭한 어린이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는 것들로부터 정결해야 한다고 들어왔다이것은 여전히 옳지만마태의 오늘 본문은 청중들에게 개인적인 청결함을 요구하는 신학으로부터 보다 넓은 그리스도인들의 시민의식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예수는 우리의 몸에 해를 끼치는 게 무엇이 있을까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행동과 태도가 다른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지 모른다는 보다 넓은 생각으로 전환하도록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마태는 이 더럽힘 (defilement)에 관한 주제를 가나안 여인과 예수의 만남이야기와 연관시킨다. 이 가나안 여인이야기는 한 편의 설교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므로 설교하기에 참 어려운 본문이다. 이 이야기에는 귀신이 나오고, 처절한 어머니의 외침을 무시하는 예수, 화가 난 제자들, 제한적인 예수의 선교, 그리고 이 여인을 개라고 부르는 분명한 예수의 모욕등 한 편의 설교 혹은 몇 편의 설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본문을 설교하는 일은 우리들에게 인생은 복잡한 것이고 중요한 주제가 언제나 세 가지로 함축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설교자와 청중들은 함께 고민할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 지역에 있는데 그 곳은 신중한 유대인들은 혼자 걸어가지도 않는 곳이다.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이스라엘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제자들은 두 지역간의 반감과 폭력사태에 대해 잘 알기에 주변을 살피면서 걷는다. 그 때에 그들 중 하나인 이방인 지역 거주자가 예수를 향해 소리친다. 이것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예측가능한 반감의 외침이 아니다. 대신 이것은 한 어머니의 진정한 탄원이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다. 두로 혹은 시돈의 시민으로서 그녀는 헤롯을 경배하고 있다. 그녀는 가나안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고통을 안고있는 한 어린이의 어머니이다. 가슴아픈 부모의 한 처절한 외침으로, 그녀는 병든 자를 치유했다는 평판을 받고있는 한 사람에게 탄원한다. 그녀의 청원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다. 그녀는 예수를 “주님” (Lord)이라 부르고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문화의 장벽을 넘어 “다윗의 자손” (Son of David)에게 애원한다.

-설교를 하는데 있어 난해한 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예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제자들은 심지어 더 공격적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녀를 돌려보내십시오" (23)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그녀의 탄원에 한정된 선교 (a limited mission)라는 설명으로 답한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24) 이것이 제한적 선교이지만 예수는 분명히 자신의 선교를 이해하고 있음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기도한 때를(the time) 강조한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선교를 이해한다.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목적을  단념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념하지 않고 있다할지라도, 그 어머니는 고통을 당하는 딸을 대신하여 계속 탄원한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25) 이번에 예수는 그녀를 개라고 부른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6) 가나안 사람들을 개라고 부르는 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익숙하고 또 자주쓰는 모욕이었다.  

 -이 언어는 우리 가운데 보다 예민한 누군가 예상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르게 응답한다. 이 예수의 응답을

좀 부드럽게 하기위해 몇 가지 설교학적 시도가 있어왔다. 몇몇 사람들은 가나안 여인과 예수의 대화가 그녀의 인격을 철저하게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해 예수의 급진적 수용의 한 예로서 예수가 마침내 그 여인의 탄원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지평을 넓혔다고 본다. 예수의 대답은 반대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 관습적인 언어를 사용한 우스운 풍자일수도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 나온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설교하는 것도 가능하다하지만 설교자는 또 예수는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적 설교를 할 수도 있다이 이야기 속에서 또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언제나 인정하지는 않는다예수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솔직히 응답하고 우리의 신앙을 재정립할 수 있을까난해한 본문에 대한 솔직한 반응은 진실한 제자들의 질문을 의미있게 만든다.

 

728x90
반응형
LIST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16장 21 ~28절  (0) 2022.07.21
마태복음 16장 13 ~20절  (0) 2022.07.21
마태복음 14장 22 ~ 33절  (0) 2022.07.20
마태복음 14장 13 ~ 21절  (0) 2022.07.20
마태복음 13장 31 ~33절, 44 ~52절  (0) 2022.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