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태복음 14장 22 ~ 33절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2. 7. 2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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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5천 명을 먹인 사건 이후 무대는 광야에서 바다로, 주제는 <광야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에서 <풍랑에서 구출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전환된다. 여기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적 체험에 관한 기억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앞의 본문에서 순종과 기도의 종으로 묘사되는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번 본문에서 예수는 다른 유형의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 구절을 통해 기독론의 매우 중요한 측면이 드러난다.

 예수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고, 군중을 해산시킨 다음, 홀로 조용히 기도할 시간을 갖는다. 아침의 이른 시간에, 그들이 아직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가 그들에게 나타난다.      

 그는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왔다(25). 예수가 그들에게 도달하기 이전에도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지만, 그 위험에 관해 몇몇 어부 출신 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을 정말로 두렵게 한 것은 폭풍보다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유령이라고 생각했다(26). 요한복음의 평행 구절을 보면 그들은 즉시 예수를 알아보았지만, 여전히 두려워했다(6:19). 그것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예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거나 알거나 이해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것은 과연 어떤 성격의 존재인가? 눈속임 꾼? 마술사? 악한 혼령? 마태가 제시하는 답은 그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다.    

  히브리 사상에서 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든, 격류로 넘치는 강이든, 아니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홍수든, 물이 인간의 삶에 주는 위협에는 물질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다. 칼 바르트에 따르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물은 그 힘이나 양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와 반대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또한, 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구원에 저항하는 악한 세력으로 여겨진다.

 구약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가운데 드러난다. 세상의 창조( 1:2), 노아와 맺은 언약( 9:8-17),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놀라운 사건( 14:21), 수위가 높아진 요단 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사건(여호수아 3:14-17) 등은 물을 정복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파도를 짓밟으시고( 9:8,  3:15) 심연의 밑바닥을 걷는다( 38:16). 이것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징표다(참조,  93:4).    

 따라서 배 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가 접근했을 때 그들이 온갖 상상을 하며 두려워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권위를 갖고 자유롭게 물 위를 걸어올 수 있을까? 제자들의 반응과 연관된 행동은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만이 하나님께 속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을 걸 때 그 말은 이미 신성한 계시로 다가왔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27). 예수는 "ego eimi"라고 말했는데 그 뜻은 간단히 말하면 "나다(it is I)"이지만 그 안에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마태의 청중에게 이 헬라어 문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모세가 불이 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히브리 이름의 희랍어 번역(70인 역)과 매우 유사하다( 3:14).      

  예수는 그 신성한 이름을 사용하여 당신의 존재를 알리신다. "나는('I AM,' 야훼)"이 여기에 파도를 정복하여 짓밟고 서 있다.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이 말씀과 제자들 앞에 전개되는 놀라운 장면을 통해 예수는 당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해방자이며, 세상의 창조자와 무질서의 정복자인>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용기를 북돋고 두려움을 쫓아내는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그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풍 속의 상황이 기쁜 소식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이사야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실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사 41:10, 13; 43:5, 그리고 특별히 물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명백하게 연결된 43:1, 2).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한다. 특히 복음서 중 예수의 탄생과 부활과 관련된 대목에서도 등장한다.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은 피조물을 겁에 질리게 하거나, 위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하고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함이다.      

  폭풍 중의 현현은 그 속에 은총과 자비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성경에서 진정한 계시는 단순히 이론에 그치거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요청을 듣고 응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값을 치러야 한다. 영성은 반드시 제자직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베드로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와 함께 바다 위에서 우아하게 걷기를 원한다. 예수는 "오라"(29)고 말하고, 베드로는 담대하게 안전지대로부터 밖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곧 예수로부터 눈을 떼고, 대신 물질적 요소에 집중한다. 곧 그는 물에 빠지게 되어 구해달라고 외치게 되었고, 예수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았다(30-31,  69:1-2절 참조)      

 다급해진 베드로는 "주님"이라고 외치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주되심은 이 사건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깊은 물과 강풍과 파도는 물론 인간 생명을 억누르는 모든 파괴적 세력을 정복하는 주님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예수의 행동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출애굽 사건과 약속의 땅에 관한 언약을 새롭게 상기시킨다. "그들이 배에 오로니, 바람이 그쳤다"(32).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의 변형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해 깨닫게 되는 순간을 묘사한다. 모든 사건은 다음과 같은 확고한 신앙고백을 향해 달려간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3). 이것은 우선 예수를 장차 오실 임금인 메시아로 인식하는 것이지만, 이 구절에는 더 많은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부활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석적 관점

 앞의 성서정과인 마14:13-21절의 주석과 함께, 예수의 고향방문의 부정적 결과(13:54-58)와 헤롯의 세례요한 참수사건(14:1-12)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외딴 곳에서 약한 자들을 돕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점에 있어서 예수가 산에서 홀로 있는 것은 그의 고향사람들의 불신과 헤롯 안티파스의 잔혹한 제국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예수는 홀로 산에 있다. 그 시간에 제자들은 배에 타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는데, 이것은 예수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장면이 바뀌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베드로의 실패로 끝난 물에서 걷는 것과 연관된다. 여기에서 예수는 그를 구하면서 믿음을 가지도록 권고한다.

 산은 고대에서 하늘과 땅이 접촉하는 장소로 여겨졌다(예를 들어 시나이산이나 성전산). 14:23에서 마태는 처음으로 예수 자신이 기도하러 가신다고 말한다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들어있는 산상설교와 비교하여 이 산의 경험은 아주 간단하게 한 단어로 “기도한다”라고 표현했다예수의 기도의 내용이 없으므로예수가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는 것만 유독 강조된다“예수께서는 홀로 거기 계셨다”(23).

 예수의 홀로 계심은 바꾸어 제자들의 상황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의 고향과 헤롯 안티파스의 제국에 대한 대안과 결부하여 바람과 파도는 제자들에게 제시한 예수의 대안적 세계에도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하게, 제자들의 어려움은 예수의 부재와 연관된다. 바다에서 풍랑이 치는 요나의 이야기와 같이, 바다에서의 재앙은 죄악된 것이나 배안에 있는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신의 형벌로 이해되었는데, 오늘 본문이 딱 그 상황이다.

 바다의 위험은 처음에는 제자들의 반응에 대한 언급이 없이 묘사된다. 그들은 육지에 멀리 떨어져 있고,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다(24). 이 시점에서 마태는 마치 군중들을 먹일 때처럼 예수가 걸어서 나타나는 기적적인 행동을 말한다. 물위를 걷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연의 요소에 대한 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이 행동은 “자연 기적”(nature miracle)으로 묘사된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학자들은 소위 자연기적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적으로 14장 앞에서 음식이 늘어나 군중들을 먹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자연기적’으로 볼 수 있지만, 예수가 굶주린 사람들의 필요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선물 기적’(gift miracle)으로 해석한다. 예수가 물위로 걷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정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지만 그것도 역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선적 관심의 측면이 있다. 이 점에서 물위를 걷는 것도 군중들을 먹인 것만큼이나 선물기적에 다름 아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마태는 마가에 비해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 보다 더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결점이 있다. 13:51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비유로 가르친 다음 “너희가 이것을 모두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시니 그들은 “예”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바다에 풍랑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물위로 걸어오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한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그들이 겁에 질린 것은 예수의 접근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결과이다. 그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에 대한 문화적 배경에는 하나님과 악의 세력 사이의 우주적 전쟁에 관한 믿음이 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위험한 바다는 이러한 전쟁의 징후로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부재중에, 제자들은 이러한 전쟁에 대해 두려워하며, 겁에 질려 소리 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악의 세력의 투쟁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가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의 실재는 잘해보아야 애매모호했다. 한데 실제로는 더 나빴다. 그들은 예수를 유령, 즉 가짜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악의 세력의 대행자인가? 그들이 가진 문제의 하나는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예수가 찾아 왔을 때 예수의 실재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에 대한 첫 번째 해결은 예수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27).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대행자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악의 세력을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말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베드로에게는 분명히 아니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겠다는 요청은 여전히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과 관련된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위로 걸어서, 주님께 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의 애매모호함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베드로의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시험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는 두려워했고 물에 빠졌다. 그는 여전히 예수가 비유에서 선포한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라는 것을 믿지 못했다. 둘째로, 예수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했다. 그러므로 예수가 악의 세력을 이기는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적극적인 정체성이 확증되었다.

 주목할 것은 일반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물위로 걷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예수의 정체성을 세우지 못한다사실 물위를 걷는 것은 애매모호하다결정적인 것은 예수의 말과 그의 구하는 행동이다.

  목회적 관점

 마태복음 14:22-33은 생생한 이미지로 가득 차있다. 거친 바다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과 그들을 구하려고 바다를 걸어 와서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의 그림은 세대를 넘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도전을 준다. 오늘 본문과 마가복음 6:45~52과 요한복음 6:16~21에 있는 평행 본문은 예수가 우리에게 미지의 바다로 들어가라고 부르곤 하시지만,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들어가면 그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말씀으로 수 세기 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이라는 중요한 차원들이 담겨 있는 풍성한 그림들이 다양하게 있다:

-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예수께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그림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격렬하거나 긴급한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 오늘 예수가 우리를 선교사로 파송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시는 그림.

- 험한 바다의 그림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시작할 때, 우리가 종종 거친 물결에 빠지더라도, 예수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오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

- 예수와 그가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자연의 힘을 정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악을 이길 수 있다는 그림.

- 예수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림.

- 제자들을 위해 험한 물결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의 그림과 우리의 험한 물결 역시 잠잠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

- 예배와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33)라는 고백을 통해 예수의 구원의 은혜에 응답하는 제자들의 그림.

이 모든 그림들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선교에 대한 소명,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 마태복음의 독특함은, 베드로와의 대화와, 베드로가 주님의 명령에 응답하여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가려는 시도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게 하는 아주 풍성한 그림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제자들처럼 베드로는 사나운 파도와 이른 새벽에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사람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혔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에도제자들은 예수인지 확신하지 못했다제자로 부름받는 것이 예수와 고유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베드로는“주님주님이시면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라고 대답했다예수가 “오너라”고 명령하자 베드로는 믿음과 신실 함으로 배에서 나왔다믿음으로 바다를 건너는 여행을 시작하고서 그는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예수의 강한 팔이 그를 들어 올려서 배로 돌아가게 했다.

이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충실하다면, 거친 파도 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걸어가라고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걸어간다고 해서 거친 파도나 두려운 일을 만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예수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가장 필요할 때 예수가 그의 팔을 뻗어서 우리를 건져 올려서 배로 되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보증이 항상 우리에게 있다.

몇 년 전,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의 목사인 어니스트 캠벨(Ernest Campbell)이 교회의 위기에 관하여 강연하는 에큐메니칼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 필요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가 옳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사는 열쇠는 베드로의 모범을 따라 배의 안락함과 안전에서 벗어나 세상의 거친 파도를 향해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선포하는 것이다. 제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고 흥분되는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고 그렇게 되도록 부르신 바로 그것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배에서 나오면” 주님이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장해 주신다.

William H. Willimon "예수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설교에서 이것을 가장 잘 설명했다.

 베드로가 모험을 감당하지 않고 물 위를 걸으라는 부름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결코 예수를 인식하고 예수에게 구조되는 놀라운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얕은 곳에서 물을 튀기고 있을 뿐이어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고 심화시킬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늘 이야기는 당신이 예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바다로 나가야만 하고, 예수의 약속을 믿음으로, 위험과 모험을 통해 그의 약속을 증명해야 한다.

예수와 함께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장 위험하고, 가장 흥분되고, 가장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다. 마태복음 14:22~33은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설교적 관점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예수께서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오천명을 먹인 사건에 이어 나오는데 그 급식사건 또한 벗어나 홀로 기도하려는 예수와 끈질기게 뒤따르는 군중들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 군중들은 굶주림을 면하고 흩어졌고 예수는 다시 홀로 있으려 한다. 이전 이야기에서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 피하고 이어 군중들을 먹인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 피하고 그런다음 물 위를 걷는다. 마태는 예수의 기도생활과 그가 하는 놀라운 일들이 분명히 함께 가고 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이야기 후반부에서 베드로는 풍랑 속에서  "주님, 살려 주십시오" (30)라고 외친다. 예수를 향한 그의 외침은 여러 제자들의 기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예수는 풍랑 속이 아닌 풍랑 앞에서 (before the storm) 기도한다. 마태는 또한 이 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바람이 거세질 때 단호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풍랑 앞에서의 기도이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얼마나 되는가이것은 함정이 있는 질문이다물론 모든 제자들이 있다면 거기에는 13명이 있다하지만 설교를 위해서는 그 곳에 3명의 등장인물이 있다예수는 말하고 행동한다베드로는 말하고 행동한다그리고 제자들은 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11명의 제자들은 마태의 기록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로 여겨지고 있다이 점은 설교에 있어 중요한데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위험스런 행동이 그 공동체의 나머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이 이야기는 강조하기 때문이다이 이야기 끝에 제자들은 배 뒤편에 모두 가 있고 바람이 멈추었을 때 그들은 예수를 경배한다그들의 두려움과 경배라는 시간사이에 한 제자의 위험스런 행동과 은혜의 팔에 안기는 안전함이 있다한 제자의 신뢰와 위험스런 행동은 추종자들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부름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신자들의 삶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두려움은 이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두려워 했다” “두려움에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두려워하게 되었다”등 이 모든 것이 단 11절 안에 나타난다. 두려움은 이 이야기에서 여러 역할을 하고 있다. 만일 이 이야기가 그리스 비극이고 두려움이 한 배역이라면, 그것은 여러차례 가면을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가면은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걸어오는 모습을 본 제자들이 느끼는 단순한 두려움을 연출할 것이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어려움을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다. 두 번째 가면은 베드로가 풍랑 속에서 예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한 모험적인 행동의 동기 속에 숨겨져있는 두려움으로 표현될 것이다. 마지막 가면은 베드로의 눈길이 예수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채로 부딪혀오는 파도로 옮겨졌을 때 집중이 안된채로 혼란스러운 그의 두려움을 보여줄 것이다. 베드로는 풍랑을 주시하고 그의 상황을 알아채린 두려움이 그의 믿음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할 때 또는 우리의 두려움이 예수를 향하여 나아가게 할 때, 혹은 우리의 두려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때, 예수께서는 이 모든 두려움의 적대자로 한결같이 남아있는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27) 예수의 현존에 초점을 두는 것은 두려움을 물리친다.  

  -몇몇 설교자들은 베드로가 격렬한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세례의 이미지로 여기고 이 이야기를 세례의 눈으로 설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세례 이미지와 오늘날 대부분의 세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 심지어는 침례 (immerse)전통에 있는 교회에서도 세례는 위험한 요소들이 없다. 세례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온도조절장치를 갖춘 유리섬유로 된 수조로 걸어내려간다. 때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 물에 젖을까봐 낚시용 옷을 입기도 한다. 그런다음 세례를 마친 후 수세자는 따뜻한 수건과 헤어드라이어를 주는 세례위원회 위원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는다. 오늘날 세례예식은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 주님에게로 가는 위험스런 발걸음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의 발은 유리수조 바닥에도 닫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세례 이미지는 위험과 신뢰 그리고 헌신으로 차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라고 베드로가 외친 후에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았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1)라고 말했다. 이것은 수사적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왜 베드로는 의심하였을까? 왜 우리는 풍랑을 언제든지 다스리는 그 분의 현존을 의심하고 있는가? 베드로는 예수를 향하여 신뢰를 가지고 발을 내딛였다. 예수께서는 결코 그를 실패하게 하지 않았다. 여전히 강한 바람이 그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그의 위험스런 행동이 늘 베풀어주시는 은혜 안에서 더 깊은 신뢰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믿음이 적은 사람아왜 의심하였느냐?" 말씀하신 목소리의 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설교할 때 선택을 할 수가 있다주석서들이 어떤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 여러가지 답을 줄 수 있지만 설교자는 청중들이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적합한 것을 택해야 한다만일 설교자가 예수께서 화가나서 베드로의 “적은 믿음”(little faith)을 꾸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예수께서 장난기 어린 말투로  재미있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설교자와는 다른 방향으로 설교가 진행될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또한 설교자는 “적은 믿음”(little faith)을 해석해야 한다. 설교는 적은 믿음을 폄하하고 청중둘에게 큰 믿음을 가지라고 도전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마태는 또 다른 설교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17:20에서 마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이 이야기에 앞서 일어났던 이야기에서 오천명이 도시락 하나로 인해 먹었다. 베드로는 단지 적은 믿음을 가졌으나 어느 누구도 배로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의 적은 믿음이 두려움으로 시작한 이야기를 경배로 마치는 이야기로 바꾸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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