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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마가복음 11장 1-10절 “주님께 합당한 겉옷”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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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10주님께 합당한 겉옷

(2018.10.09. 수도침신 목회자예배)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에 앞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의 장면입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고통에 집중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마음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12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맞은편 마을로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매여 있으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명령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맞은편 마을에 가서 매여 있는 어미 나귀와 나귀새끼, 두 마리를 끌고 옵니다.

이 두 마리 중 예수님은 어떤 나귀를 타셨을까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 마태복음 215을 보면짐승의 새끼를 탔다고 말씀합니다.

어미 나귀를 탈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럼 당신은(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왕이면 크고, 넓고, 튼튼한 거.....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어미 나귀의 높이가 3feet(92센티)정도인데, 나귀새끼는 그 보다 더 작았겠죠.

당시 예수님의 키를 대략 6 피트정도 추산하면 발이 땅에 끌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순례객들을 모두 수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예루살렘 성이었기에, 감람산 베다니와 벳바게에는 순례객들을 위한 임시 텐트촌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텐트촌에 구름 떼처럼 모여든 순례객들은 갈릴리에서 온 예수님을 보고 승리의 환호를 외칩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했지요.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내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 앞길에 자신들의 겉옷과 나뭇잎을 깔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길거리에는 만왕의 왕이라고 소리치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있는데....

6피트 되는 건장한 청년이 어미나귀는 제켜두고, 아주 작은 새끼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안장도 없는 나귀새끼에 건장한 어른이 탔기에 이리저리 기우뚱하며 걸어가는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만약, 권위 있어 보이려 했거나 편히 가고자 했다면 나귀가 아니라 비싼 명마를 타야 합니다.

어디 폼이 납니까?

볼만 한가요?

아닙니다.

볼품이 없습니다.

 

가난한 무리들은 남루한 헌 옷을 길에 펼쳤고 그 위를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늘의 왕의 모습이 아니라 거지 왕초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이죠.

왜 하필 말이 아니고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새끼를?

발은 땅에 질질 끌리죠, 차라리 걸어가는 편이 낳습니다.

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유치하고 초라한 모습이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떠한가요?

저라면 이런 나귀새끼를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탑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스가랴 99의 말씀대로(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만왕의 왕, 겸손과 평화의 상징으로 오시기에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새끼는 어리기에 사람을 태울 줄이나 알까요?

마치 이 모습은 다 큰 어른이 아이들 세발자전거를 타는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어린 나귀는 어른 한 사람을 태우기에 힘이 부족하여 휘청거리며 겨우 걸음을 옮깁니다.

정확히 말하면 타는 것이 아니라 페달이 없는 자전거처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 다른 곳에 관심 가져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어떤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가?’가 아니라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가?’ 

물론 본문의 핵심적 메시지와 다른 해석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었을까?’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심정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을까요?’

주님께서 이미 수난을 거듭 밝혔듯이로마제국의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죽임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고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만 활동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을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아마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산나외침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기에 로마의 폭력에 맞서 정의의 길, 십자가의 길로 향한 것은 아닐까요?

 

,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호산나 외침은 평화의 왕을 향한 찬가가 아니라 버림받은 무리들이 구원을 바라며 외치는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본문 111절을 보면 예루살렘 입성행렬이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시작되는데, 무화과나무를 뜻하는 벳바게와 슬픔의 집을 뜻하는 베다니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메말라버리고 슬픔에 빠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정확히 묘사해주는 단면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누구였나요?

사회에서 외면당한 사람들,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 그 무엇도 기댈 것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예루살렘의 입성은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는 환호였기에 예수님이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어 몹시 외로웠습니다.

환호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메시야의 갈망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적 소망을 보았기에,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수많은 순례객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 위에 폈고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 제자들은 나귀새끼의 등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으며, 많은 무리들은 먼지투성이의 길에 겉옷을 폈던 것일까요?

 

겉옷을 길 위에 깔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겉옷을 깐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의 발아래 두겠다는 표현입니다.

겉옷은 히브리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몸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겉옷에는 옷단술과 율법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어 매우 중요한 물건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외투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는 상징적 도구였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겉옷은 하나님 앞에 613개 계명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담겨진 옷이었기에 땅에 깐다는 것은 굉장한 액션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였지요.

 

그러기에 겉옷은 자신의 전부를 의미합니다.

겉옷을 벗어 깔았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고백입니다.

 

겉옷을 길가에 핀다는 것, 그것을 예수님이 밝고 가신다는 것은 나의 전인적인 모든 것을 당신의 발아래에 두겠다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걸 길가에 깔았다는 것은 엄청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이런 모습들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목사란 직업이 하나의 권력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그 직업에 맞는 책임을 다하지 못해 질책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물론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많지요

저는 신학생 시절의 물질적인 어려움이 보다, 요즘 사회적인 중압감이 더 가중됨을 느낍니다.

아무리 주님과 살려고 노력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타락하여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세상의 재판장이 교회의 문제를 심판하고 판결하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려야 할 교회가 도리어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 심판하고 조롱하고 다스리도록 교회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목회자들은 세상처럼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성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빛을 버리고 어둠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목회자와 교인들이 다투고 있는 교회에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이 없어서 세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한국교회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하고 올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교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죄의 길에 서서 스스로 세상의 조롱거리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 진실 된 모습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여 안주하다보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안위와 물질,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이 일상화 되어 한국교회의 곳곳에서 각종 문제를 야기하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쓸 데 없는 권위의식, 이게 청산되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합당한 나의 겉옷을 내려놔야 합니다.

자신의 이력, 겉모습, 체면, 소유, 능력, 타이틀, 이거 하나님 앞에 서면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요.

 

2. 겉옷은 사회적 권위의 상징입니다.

한 벌뿐인 겉옷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지요.

왕은 왕으로서의 권위가, 선지자는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신부는 신부로써의 권위가 자신의 겉옷 한 벌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겉옷을 남에게 줌으로써 권위가 상대방에서 전가 될 수 있고 겉옷을 갈아입는 예식을 통해 새로운 권위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소년이 자라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이 입던 겉옷을 벗고 성인의 겉옷을 갈아입는 예식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겉옷을 갈아입음으로 새로운 권위와 신분이 주어지던 로마의 배경처럼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신분이 주어짐을 서신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당시 무리들의 삶은 녹녹했기에 그들에게는 지금 입고 있는 남루한 겉옷 한 벌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흙먼지 풀풀 나는 길에 깔면 더러워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 위를 낙타가 걸어가면 허름한 옷이기에 찢어져 다시는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그 일에 사용했습니다.

 

이들이겉옷을 예수님 발밑에 두었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온전히 맡기고 순복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삶 따로, 내 맘대로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겉옷을 깔아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앞길에 자신들의 권위와 정체성이 담긴 겉옷을 깔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 아래 순종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앉으실 안장대용으로만 자신들의 더러운 겉옷 깔았고,

무리들은 용기는 가상했지만 진정한 의미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겉옷을 길 위에 폈던 것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왕하 913처럼 주님을 왕으로만 존경하며 겉옷을 깔았습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심정으로 당신의 겉옷을 길 위에 폈고 있으신가요?

혹 예수님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해 세상의 더러움이 찌든 겉옷을 깔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지금까지도 그 마저 펴지도 않고 혹시 구경만 하고 있는 중은 아닙니까?

깔기는 깔았지만 의미도, 내용도, 뜻도 모른 채 눈에 보이는 대로 그저 사람들의 움직임만 따라하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13에 많은 무리들이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여라며 찬양하지만,

이들은 침례요한의 뒤를 잇는 슈퍼스타로서 예수님의 인기몰이를 잘 보여 주는 씁쓸한 장면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으로 호산나를 부르며 주님을 환영했을까요?

솔로몬 왕처럼 막강한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왕이 오시는 줄 알고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답니다.

순간적인 흥분의 상태에서 나오는 고백과 행동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서 있는 지금의 위치를 돌아봅시다.

 

세상의 유혹과 탐심,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탐하려고 겉옷을 깔고,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입니까?

자신의 겉옷을 바닥에 내려놓는 사람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예수님의 발아래 내려놓지 못하는 모든 것들, 내려놔도 별 다를 것 없는 것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이 쓰시겠다. 십니다. 주님이 쓰신답니다,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남의 집에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오라는 상식에 벗어난 명령에도 순종한 제자들,

자신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나귀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내어준 주인처럼 우리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산다고 장담하면서도 정작 주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에 가진 것을 서슴없이 내어드릴 수 있겠는지요?

그것이 우리의 시간, 물질, 재능, 심지어 생명일지라도 말입니다.

 

네가 가장 아끼는 세상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를 지자고 하시는데 세상의 겉옷 벗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쟁기를 잡은 자는 뒤로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앞으로 가지고 하시는데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힘과 물질과 권세, 훌륭한 목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무리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더 이상 너를 위한 능력을 행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처럼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지 ,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귀새끼처럼 주가 쓰시고자 할 때에 등을 내어드리고, 온전한 나의 겉옷을 주님 발아래 깔아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행복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자기 겉옷을 나귀의 등에 깐 제자들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행복한 자는 나귀새끼입니다.

만왕의 왕을 태우고 가니까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죠.

물론 예수님을 태우고 가니까 무거워 힘은 들었겠죠.

그러나 주님을 태웠기에 힘든 것도 몰랐을 겁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당신의 목회가 힘이 듭니까?

당신이 걷고 있는 인생길이 고달픈가요?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귀중한 말씀은.

아무리 위대하게 보려고 해도 예수님의 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가여워 보일 뿐이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아픈 것이 있어답니다.

행렬이야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어린 나귀새끼를 타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췄는데요.

인원이 적으면 어떻습니까?

함께 있어주고, 함께 기도하고 눈물 흘려줄 성도가 있다면 그들이 적은들 어떻습니까?

그것들은 슬프지 않습니다.

정말 아프고 슬픈 것은 다른데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를 흔들며 환호했던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두고 모두 어디에 숨어 있는가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재물과 문제의 해결과 힘을 달라고 찬양하며 손을 흔들던 저와 여러분은 왜 십자가 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당신을 바라보시며 걱정하지 말라, 내가 죽어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당신은 왜 그 눈을 피해 세상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이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의를 버리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결국 예수님의 눈을 보면서 배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종이라면, 살고자 하는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옮겨 하고, 불순종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옮겨야 하며, 불평과 불만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옮겨 앉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겉옷을 펴 드리지 말고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 곁에 선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하늘의 능력을 맡기실 것이고 이 고난의 길을 함께 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썩어 냄새나는 이 세상에서 목회자라는 이름표를 당당하게 붙이고 영원한 나라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역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

우리 가는 길에 우리의 힘으로, 수단으로 가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 합당한 겉옷을 까는 신실한 종이 되길 원하오니 우리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세상의 방법 때문에 십자가가 무겁다고 벗어던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방법으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되길 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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