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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골로새서 2장 20 ~ 3장 4절 세상의 옛 것은 없다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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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장 20~3장 4절 세상의 옛 것은 죽고 없다 474,458,356, 456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평균연령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래도 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도 유족들에게는 슬픈 것인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유족뿐 아니라 모든 조문객들의 마음도 슬픔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요, 인생의 전부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먼저 간 성도들이 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셨건 반대로 그렇지 못해셨건 부활을 확신하는 자에게는 몇 년을 살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무덤의 자리는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자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부활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의 종지부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활은 모든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삶에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엣 것을 찾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엣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변했습니까?
복음을 받기 전 우리 눈은 땅을 향해 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의 본질인 줄 알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위엣 것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엣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상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출발하느냐 입니다.
땅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아니면 위엣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느냐 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위엣 것이 내게 임해서 내가 위엣 것으로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위를 보는 사람은 위엣 것으로 밑엣 것을 해석하는 자입니다.
위엣 것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이 가득한 사람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며 삽니다.

그러나 위엣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 붙잡혀서 삽니다.
귀신은 무엇을 합니까? 붙잡습니다. 마귀는 붙잡습니다.
붙잡힌 자는 포로 된 자입니다.
과거를 붙잡습니다. 현재를 붙잡습니다. 무언가를 붙잡습니다.
그렇게 꽉 잡아서 여러분들을 넘어지게 만듭니다.
여러분을 자꾸 붙잡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자가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붙잡힌 것과 다스리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붙잡힌 것은 그것을 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빼면 망할 것 같습니다.
다스리는 사람은 다스립니다. 마음대로 이것도 저것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엣 것을 생각합니다.
영광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소망이 있기에 땅엣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내용과 목적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8:32 부활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입니다.

골로새서 2장 20절을 보면,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골로새 교회 안에는 당 시대에 선진문화라고 생각하던 세상의 초등 학문과 금욕주의의 잘못된 사상이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탁하게 만들고, 성도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 금욕주의는 스토아학파나 영지주의 사상으로 결코 인류를 구원하거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얽매는 초등학문과 의문 두 가지는 믿는 성도들에게는 전혀 가치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은 세상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을 말하고 의문은 율법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나 겸손, 그리고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육체의 삶을 쫒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가르침들은 자기 자신과 사회 이득에는 지혜롭다고 할지는 모르나, 죄악 된 삶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은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철학이나 사상은 우리를 종속시켜 끝내 우리를 사망의 속박 가운데 가두어 버리는 것을 아시나요.
믿는 우리는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은 세상의 생각과 가치관과 관습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그와 동시에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를 믿는다면서 세상의 초보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관습들을 따르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주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은 천국 백성으로 세상의 모습과 가치관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옛 사람은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주안에 생명이 있는 자만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서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백성이 되었기에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참된 모습은 음란과 탐욕과 악한 행동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한 행실을 하며, 용서와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섞어질 것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슬기로운 자입니다.

믿음은 육체를 죽이는 금욕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삶을 버려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세상에 있지 않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열심히 좇아야 하지만,
그러나 저와 여러분의 뿌리는 나의 영원한 생명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골 2:6-7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세상에는 망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망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흥하는 삶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속에 거하기에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지워지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으로 하늘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비와 겸손과 온유의 모습에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온전히 이루려면 주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풍성히 넘쳐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모습을 이루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모습은 내 주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고 그 평강 안에서 한 몸, 한 마음의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풍성하여 하늘의 지혜로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의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말이나, 일이나 모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사는 자입니다.

세상의 방해와 공격을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순수한 믿음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마음 중심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성숙된 마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속에서 일어나기에 내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형식만 남고 주님은 계시지 않는 그런 성도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것을 조심하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철학과 율법주의, 방언이나 이적이나 환상과 같은 것들로 믿음을 저버리는 신비주의를 조심하라 십니다.
금욕주의와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도록 나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계 2:25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라 하신 것은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나의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 했습니다.
바울이 나의 믿음을 지켰다고 한 것처럼 주님 오실 때까지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길 바랍니다.
이 순수한 믿음을 위해서 우리의 생을 다 바쳐서 지키도록 하십시다.

어떤 아들이 산에 오르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와 산보하다가 조르고 졸라 마침내 둘이서 함께 높은 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아들은 흥분해서 외쳤습니다.
"아버지 저 아래를 보세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이 녀석아, 고작 저 아래가 얼마나 멋있는가 보여주려고 나를 이 꼭대기까지 끌고 왔느냐?"
뒤를 돌아다보지 맙시다.
여러분이 지금 지나온 계곡을 들여다보지 맙시다.
예수님과 함께 면류관을 쓰기 위해 은혜의 동산에 오른 여러분, 그곳에 서서 위를 보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쳤다고 바울은 빌3:12-14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생활을 뒤돌아보지 맙시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땅엣 것은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은혜의 산꼭대기에 오르고 있으면서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동경한다면 여기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기 전, 구원 받기 전에 살던 생활 습관이나 생활 방식을 그리워한다면 여기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엣 것을 찾읍시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더 큰 사랑을 구합시다.
은혜의 오묘한 비밀은 그 높이와 깊이가 한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가장 은혜스럽고 행복한 자리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더 깊은 은혜의 세계가 있고 더 행복한 세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등산을 하는 것과 같아 계속 올라갈 때만이 무한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해도 예수가 없으면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요.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해도 예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골로새서 2: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듯이 우리의 모든 복과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감추어 있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자신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해 나가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기도 -테레사

주님!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매일 겪는 고통과 싸움을 견디어 내고
죽는 모범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이로써 더욱 충실하며 적극적으로 생기를 띠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은 십자가의 수난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까지도 견디어 내시며 자신을 낮추어 받아들이셨습니다.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싸움을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더더욱 당신을 닮은 자가 되어가는 기회로 알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이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인내롭게 또 용감하게
모든 일을 타개해 나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자기 자신과 자기중심적인 바램에 죽음으로써만 더 충실히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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