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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히브리서 5장 7 ~ 10절 주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자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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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자 히 5:7~10
2005. 04. 03 주일오후 청주새힘교회 설교문

오늘날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안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불순종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을 감성시대라고 하여 진리와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도 그것이 나에게 맞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고난 받는 순종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원래 순하게 따른다는 말로,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것을 말하지요.
즉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며 뜻하시는 일을 살펴 이유 없이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으셨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요 6:38~39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매일 매 순간의 결단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결단의 순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는 자세가 순종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한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살지 않으셨기 회개한 적이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권위에도 순종하는 아름다운 겸손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눅 2: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공생애를 사시기 전에 30년간 동안에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 앞에 섰을 때에도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너희들이 이렇게 대접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소리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악한 행동에 이적을 행하여 혼내지 않으셨고 침묵하시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생각하기를 순종이라는 말은 비굴한 말로 생각하는데 사실상 순종은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의 삶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숨질 때까지 모습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보다 십자가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종종 사형수들이 십자가를 지고 처형을 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사형은 잔인하기가 말로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끔찍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당시 가장 큰 욕은“십자가에 달려 죽을 놈”이라는 욕입니다.
그 만큼 십자가형이 무섭고 잔인하고 소름끼치고 전율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 이런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자녀들에게 독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듣기 싫은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로마서 3: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죄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음과 심판과 멸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은 천번 만번 죽어도 죄인일 뿐입니다.
죽음으로서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이 죽음으로서 자신의 죗값을 갚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인간의 죄는 죽음으로서도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고 죽어서도 지옥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상태가 되어버린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속죄하는 길은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죄 없는 자가 이 세상에 와야 하고 그가 이 세상에서 죄 없이 살다가 대신 죽어야만 합니다.
그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를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먼저 배웁니다.
죄속에서 태어나서 죄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죄 많은 이 세상에 인간의 육신을 입혀서 보내어 주셨고 그 예수님이 죄 없이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내 아들 예수여! 그대가 인간을 위하여 깨끗하게 살다가 그들을 위하여 죽어줄 수 없는가?
그들의 죄를 지고 죽을 수 없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어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상한 목적도 아닌 좀 엉뚱한 아니 납득이 가질 않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죽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가장 흉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셨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순종하기 쉬울 것 같습니까? 이것은 순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예수님은 기쁨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시편 40장 7절~8절을 보면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는데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님의 법이 예수님의 심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대속 제물로 예수님을 고통의 길로 내몰아 치실 때에 주님은“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순종합니다.

그 분의 순종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삶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했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이렇게 어려운 일을 순종할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종 순종하기를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삶은 기도만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순종은 힘이 듭니다. 너무 고달픕니다.
사실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을 하지만 그러나 순종의 삶은 우리의 삶을 전폭적으로 무너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종의 삶이 힘듭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순종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아픔도, 배고픔도 느끼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서 걱정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과 고난과 순종의 제사가 있었기에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영예로운 직분도 아니고 화려한 직분도 아닙니다.
저주의 직분이고 희생의 직분이고 고통의 직분이고 죽음의 직분입니다.
몸뿐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과 끊어지는 저주를 받는 직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일은 무서운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도 막상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같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의 도움을 요청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순종의 길을 가능케 했던 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람을 구하는 그 길은 정말로 필요한 일이고 반드시 가야 할 길이지만 그 길을 순종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으로 완전한 순종을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떼를 써서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겠다는 행동입니다.
순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히브리서5장8절에 말씀합니다.
모든 고난이 다 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은 순종을 배우게 해주시고요, 또한 순종을 통해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은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고난을 즐겨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고난은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벽안개가 짙을수록 우리는 날씨가 밝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지요.
그렇듯이, 고난 뒤에 있을 순종에 온전함을, 우리 함께 기대하며, 이 힘든 고난을 즐겨봅시다.
그러면 고난은 우리에게 영광으로 다가올 테니까요.
그래야만 고난을 이겨낼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온전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온전함을 입는 복된 축복을 우리 함께 누리는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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