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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히브리서 6장 1 ~ 9절 자주 비가 내리는 데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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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1-9절  자주 비가 내리는 데  
 2006.01.15 청주새힘교회 주일오후 설교문

그제께 전국적으로 내린 비는 겨울 가뭄로 마음조린 자들에게 참으로 반가운 단비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 7절에서 『땅이 그 위에 자주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말씀하며 신앙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에 있는 심령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땅위에 비는 똑같이 내립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밭은 유익한 채소를 냅니다. 반면에 어떤 밭은 가시와 잡초를 내기도 합니다. 
같은 흡족한 비를 맞으면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지만 죽은 나무는 썩게 됩니다. 
같은 아침 이슬을 먹으며 꽃은 꿀을 만들지만 뱀을 독을 만들어 냅니다. 
가나안 땅을 같이 정탐하고 돌아왔지만 독을 품어 내는 10명의 정탐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불어넣는 여호수아 갈렙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3년 동안 똑같이 말씀을 배우고 기적의 현장을 체험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본문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성도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비를 흡수했는데 결과가 다르듯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단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직설적이며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려야 완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먼저 우리는 은혜 받고 성숙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2절에『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다 어린아이로 태어납니다.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장하지 않을 때 비극이 됩니다. 
부모는 어린아이를 안고 한없이 귀여워하지만, 부모의 간절한 기대는 그 아이가 커서 어른으로 성숙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은혜 받고 성숙하는 성도는 초보를 버립니다.
성도는 날마다, 때마다 은혜를 받아 어린아이의 일,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려야 합니다.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지를 무시하거나, 등한시 하거나, 잊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심령 속에 그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그 가르침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의 부분이 되고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그 기초가 놓인 이상, 우리는 그 위에 건물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진리를 배움으로써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가르침에 머물러서는 결코 안 됩니다.
믿는 자가 구원의 기초만을 계속적으로 놓아서도 결코 안 됩니다.

에스겔 47장 성전에서 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그 다음에는 무릎을 적시고 그 다음에는 허리를 적시고 그 다음에는 헤엄칠 정도의 많은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장하는 순서입니다.
왔다 갔다 성전 뜰만 밟고 다니는 성도에서 기도할 줄 알아 차차 기도가 깊어져 자진하여 무슨 일이 필요한지를 발견하여 허리를 움직여 자기 일보다 교회 일을 우선으로 발 벗고 나서서 일하며 가정과 교회가 구분이 없이 집이 예배 처소이고 교회가 침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단비를 맞으면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어떤 성도가 은혜를 받고 성숙하는 성도입니까?
은혜 받고 성숙하는 성도는 죽은 행실을 회개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항해는 항구에서 시작하고, 공부는 유치원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회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첫 설교는『회개하라』였고, 
예수님의 첫 설교도『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회개 없이 믿음 없고, 회개 없이 응답 없습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려면 죽은 행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입니까?
죄악으로 더럽고 사망으로 이끄는 세상의 행실입니다.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지 못하는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적 행실입니다.
게으름을 버려야 합니다. 시기, 질투, 미움, 음란, 호색, 술 취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이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 버려야 할까요?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죄를 버리는 성도가 성숙하는 성도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말하며 자기가 완전한 곳으로 나가고 싶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7:21에『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쉬고, 살고, 깨닫고, 힘을 얻고 계속해서 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삶 속에서 거하시는 그 분의 임재와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1-2절에『…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데 나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깨달음과 주를 위해 살아갈 힘을 주신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도록 간구하여야 합니다. 

당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옛 율법으로 돌아갔다면, 그것은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으로 그리고 성숙을 미숙한 것으로 바꾸는 결과 밖에 안 되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기초를 닦았고 초보를 알았으니 이제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고 성숙하는 성도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고 배반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흡족한 비를 맞고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배신하는 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의 제자 중에 한 명은 가시와 엉겅퀴가 되었습니다. 
전진하는 60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언제나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잡족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7절에서 이런 자들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에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모든 내용 가운데 가장 엄중한 경고의 말씀들 가운데 하나이며, 많은 학자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 난해구절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가 타락하여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은 죄를 또 지어도 또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큰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는 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와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아무리 윤리와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를 많이 하고 사회사업을 많이 해도 오히려 그것이 심판의 빙거가 되어 망하는 것이라고 롬 14:23에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에『내가 저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했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이니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땅은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갈고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과실과 곡식을 냅니다.
반면 나쁜 땅도 비를 흡수하지만 그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을 통하여 진정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심코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한 결과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무심코 지은 죄는 회개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부하는 자들은 더 이상 그 어디에서도 구원자를 발견치 못하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계속 성장하지 못하고 예전의 저주받은 상태로 되돌아가면 구원을 잃게 되어 그 구원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 받은 이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남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살인죄와 간음죄에 도둑질까지.  어마어마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시편 6:6에 보면『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는 타락을 해도 다윗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타락이 아니라 도리어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타락을 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다윗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성도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해져야 합니다. 
성도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성도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견고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을 다 담당하여 구속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합니다. 저주함을 받습니다. 마지막에 불사름을 당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9절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아니 너무나 타락하여 다시는 결코 회개할 수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려워하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은혜의 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적당한 때에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비를 흡수하여 배반하는 교인이 아니라 장성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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