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사도행전 4장 32 ~ 35절

by 주님과 함께하는 삶 2023. 4. 12.
728x90
반응형
SMALL

 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교회의 역사의 중 원시 교회공동체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누가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신학적 의미에 관해 서술하는데, 이는 후세 교회에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특히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를 나누고 모든 것을 공동소유 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물질주의에 물든 현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들린다. 오늘의 본문은 길이가 짧지만, 모든 시대에 걸쳐 우리가 교회와 선교에 대해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니케아 신조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오늘 본문은 교회에 관한 이런 신조의 의미를 더 구체적이고 심오하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묘사가 너무 이상적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 묘사가 역사적 근거에 기초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가가 참된 성도의 교제의 모범으로 제시한 내용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에게 귀중한 지침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는 이 작은 공동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한 마음과 한 뜻.” 이 일치는 행정이나 조직 차원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목적, 사명, 가치 차원에서의 일치다.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확신을 통해 그들은 세상을 향한 증거와 선교를 위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33) “모든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이웃들이 보여주었던 호의 속에서 초대교회 공동체가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세계선교를 제대로 하려면 이와 같이 은혜의 삶과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한 마음과 한 뜻”을 세계적으로 통합된 단일 기구를 만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세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르고 심지어 이견을 갖고 있는 다양한 신앙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도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보면 복음의 보편성과 세계성이 방언을 통해 드러났다. 뒤에 36-37절을 보면 바나바 요셉이 모범적인 제자로 언급되는데, 그는 유다 지역 밖에 살던 키프로스 태생의 디아스포라 레위인이었다. 누가가 그의 출신을 굳이 밝힌 것은 복음이 국가나 부족의 제한 없이 모든 유대인(나중에는 이방인 포함)에게 전달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바나바는 <주로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이루어진 초대교회 공동체>에 맨 처음으로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바친 사람이 되었다.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들의 중요 역할을 통해 구현되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4:35, 37; 5:2) 사도들이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로 높은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그 가르침과 선포의 내용과 구체적인 리더십의 내용에 있어서 사도적이었다.

   이 작은 공동체의 거룩성은 소유를 다 같이 나누어서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34)라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거룩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구별해 놓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부에 관한 이와 같은 태도를 통해 초대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내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라는 짧은 구절은 초기 수도원 운동으로부터 현대의 구세군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개혁하려는 사람들의 구호로 사용되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이 세상의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부활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었다. 이 세상의 부가 아니고 그리스도께 주권을 드림으로 바나바와 같은 제자의 삶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와 재벌의 지배를 받는 소비문화 속에 살고 있다. 세계적 자본주의의 놀라운 확장을 통해 가치의 변환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상승세이고, 전통문화와 성서적 거룩함은 점차 무시당하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물질주의 원칙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살려고 할 때, 주위로부터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게 되고, 왜 자연스러운 가치체계를 따라 효율성, 계획 경제, 건전한 재정 운영 등의 원칙을 무시하고 사는지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풍토가 만연해 있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을 포함한 성경 전체는 이런 가치의 전도에 관해 매우 비판적이다. 땅이나 음식, 부귀영화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위해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8:17-18;  5:19) 성경은 부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한다. 부와 관련된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다. 부는 쉽게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가고,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든다. 돈이 악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만 가지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딤전 6:10). 그래서 제자들은 “돈을 사랑함이 없이” 살아야 한다.( 13:5). 이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명확하다. 기독교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와 반대된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라는 말이 월스트리트에서는 통할지 모르나 성경과는 상반된다. 오늘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오늘 읽는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1:8)를 향한 교회의 선교와 관련된다. 요엘 선지자에 의해 선포되었듯 성령의 부으심은 이제 치료의 기적들과 놀랍게 능력있는 전도 설교들(2:14-41;4:4)을 포함해서 사도들에 의해 성취되는 “많은 기사와 이적들”(2:19,22; 2:19,22,43; 4:30)에서 매우 명확하게 보여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체는 또한 심각한 도전들에 직면한다. 성전의 권력자들로부터 오는 반대인데,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서 심문한다.(4:1-22) 거기에는 그들의 설교를 정치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드러난다.(4:23-31)

또한 생계유지에 대한 어려움도 있다. 의심할 바 없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좋은 경제적 환경임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이제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을 포함하여 “천하각국”에서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듬으로 심각해졌다(2:5,10). 사도행전 2 42-47절과 6 1-7절과 함께 4 32-35절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4:34) 될 정도로 재산을 나누는 관행을 묘사함으로써  어떻게 교회가 이 경제적인 도전에 대응했는지에 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4:34)

“사도들의 행적들” 안에서 이 세 개의 본문들의 위치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교회의 선교가 서로서로를 돌보라는 근본적인 명령에 뿌리를 두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작(32)부터 마지막(34-35)까지 이 본문은 광범위한 범주로는 “땅 또는 집”으로 묶을 수 있는 공동체의 “소유”라는 한 가지 관점으로 짜여진 것이다. 누가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한 마음과 한 뜻”(32)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의 청중들에게 익숙했던, 단지 자기의 만족을 넘어 우정을 기반으로 모두를 위한 최고선 (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Ⅷ, )을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들의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덕목들을 포함하는 그리스적인 연대(solidarity)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이상에 의해 고무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선교적인 면을 여전히 더 중요한 목적에 두고 있다. 마태복음(22:36-40)과 마가복음(12:28-31)은 계명들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가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9:18)는 변치 않는 명령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했다고 전한다. 누가는 이 동일한 명령의 중요성을 확증하지만 다른 상황 안에 배치한다. 계명들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 질문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물음으로 더 분명한 답을 구하고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로 선한 이웃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와 연민으로 응답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10:29-37).

누가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4:32)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다.(4:34)라고 보도한다. 이 보고의 두 가지 면은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면을 말해준다. 신약성서 곳곳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집들을 소유했으며, 그것들은 종종 마을 사람들의 친교와 기도를 위한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었다.(예 행12:12) “때때로”(NIV)로 번역될 수도 있는 “가능한 한 많은”이라는 구절은 필요한 경우, 땅이나 집들을 가진 이들이 그것들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그 수익금을 전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들의 발 앞에” 그 수익금을 놓음으로써(4:35; 참조 5:2), 그들은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참조. 삼상25:24; 8:6;110:1; 7:58;22:3)과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돈을 분배 하는지를 사도들에게 맡기는 의식을 행했다. 그들 가운데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신명기 15 4절의 약속을 상기시키는데, 개인들이 정기적으로 지게 되는 부채의 짐을 경감시키라는 안식년의 요청으로 제한하여 생각할 수 있다. 누가의 예루살렘 회의(15)에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와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 중에도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2:10; 15:26) 위하여 돈을 모금하는 것을 기억해야한다고 요청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재산의 공동소유보다 자원의 넉넉한 나눔의 실천에 더 집중했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게다가, 오늘의 본문 뒷부분은 공동체에 속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대응이 자동적이거나 지속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나바는 그의 자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35) 내놓은 사람으로 유독 지목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의 자산을 팔았지만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어 일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5:1-2) 두었다. 사도행전 6 1-7절은 그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연약했던 미망인들이 “매일의 식량나눔에 누락되었다”고 전한다.

32절과 34-35절은 본문을 위한 문학적 틀을 제공한다. 가운데 있는 33절은, 복음을 제시한다. “주 예수의 부활”은 그 공동체가 목격해왔던 기사와 이적들 배후에 있는 “큰 권능”이다.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부여된 권위의 원천이다. 교회를 낳고 교회의 사명을 정의하는 것이 바로 이 권능이다. 그러나 이 사명이 명령하는 것은 단지 부활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충만함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서로 서로를 돌봄으로써 복음에 속한 구원의 진리를 체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33절은 부활의 “권능”을 선언하는 것 이상을 행한다. 그것은 또한 신앙의 공동체가, 실제 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때에도 변치않는 비전을 유지하게 하는 “위대한 은혜”를 송축하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쇼가 시작되면, 장면은 깔끔한 방갈로가 있는 인근 주택가를 천천히 지나가는 자동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여준다. 뒤에서, 한 남자와 여자(우리가 곧 Archei and Edith[1970년대에 방송한 All in the Family라는 미국 시트콤의 남녀 주인공으로 노인 부부; 역주]라는 걸 알게 될)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봐, 글렌 밀러의 연주 말이야. 연달아 히트했잖아. 우리 같은 놈들이 만든 거야. 그 때가 좋았지.” 그 주제곡은 Archie Bunker 1960년대와 70년대의 도전에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담은 코미디 쇼 All in the Family의 무대를 장식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더 명확하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쉬운 세상을 갈망했다.

‘좋았던 옛날’을 갈망하는 향수병 놀이를 하는 것은 교회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특히 주류 교단에서는 종종 1950년대를 의미하는 “그 때는” 이랬는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교회는 가득 차 있었고, 주일 학교 프로그램은 아이들만큼 어른들로 빽빽했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합창단이 4개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통합 미션”에 기꺼이 기부했다.

195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설명이 매우 선택적인 기억의 사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첫째, 묘사되는 교회는 대체로 백인 중산층들의 교회였고, 미국인들의 종교 생활의 상당 부분을 무시한 설명이다. 둘째, 1960년대에 발생한 개인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불안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여성들이 고등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배제의 전통을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이미 수면까지 떠오르게 되었다.

“좋았던 지난 날”이라는 말을 떠드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향수가 그리고 있는 함정을 안다. 한편으로는, 향수에 빠지는 것은 현재의 현실에서 상상 속의 과거로 사람을 끌어낸다. 다른 한편으로는, 향수가 주는 가장 진실한 즐거움조차도 냉소적인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과거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장밋빛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 4:32~35과 같은 구절은 이런 경험의 배경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색칠된 그림이 책 속에서 아주 밝게 빛나고 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강조 추가!) 이것은 확실히 우리들 대부분이 경험한 어떤 교회들과도 같지 않다. 개인 소유를 포기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놀라운 의지를 제쳐두고서라도, 신앙 공동체가 ‘하나의 마음과 영혼을’ 가지게 되는 비전은 우리의 신뢰를 한계 너머로 이끈다. 우리는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인간 공동체를 알지 못한다!

현 상황의 어려운 현실을 처리하기보다는 이런 구절을 무시하거나 혹은 심지어 이를 이용해서 지나간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우리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이 텍스트의 잠재력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다룬 후, 이야기의 다음 단계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많은 “요약” 설명 가운데 하나다. 누가복음 4:14~15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설명하고 세례에서 나사렛에서의 설교에 이르는 다리/요약을 제공한다. 누가 복음 6:17-19 8:1-3은 마찬가지로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요약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엿볼 수 있는 요약들을 제공한다. 이 요약문의 다른 기능은 누가가 자신의 서사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주요 주제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있다고 선포하고, 치유를 통해 그 증거를 제시하는 예언자다. 예수가 나사렛 설교에서 인용한 이사야의 말씀이 복음의 개요라면, 이 요약문은 예수가 이 말씀을 성취했다는 증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도행전 4:32~35(사도행전 2:43~47과 함께)은 예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사역 사이의 연속성을 제공하는 요약문으로 나타난다. “주님의 은총의 해”가 실제로 “희년”이라면, 사도행전 4장은 그것을 실제로 펼쳐보이는 것이다. 부채는 탕감 받고, 모든 사람이 살기에 충분했다. 공동체가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삶의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도 가난하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의 표징은 공동체의 삶이 무너진 것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이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표징은 모든 사람의 삶이 지속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창조다.

33절에서 누가는 이 특별한 행동의 근원이 예수의 부활임을 분명히 한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과 파괴의 힘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예수의 부활이 여전히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스도 안에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에 대한 승리에 있어서도 함께 하고 있다는 표징은 무엇인가? 부활절 이후 절기는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신비”(성례전)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새로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시기였다. 오늘날 부활절 이후 절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노력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임재의 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일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누가에 따르면, 부활의 힘의 가장 극적인 표징은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공동체였다. 부활은 단지 찬양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공동체의 경제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설교적 관점

 

부활절 절기로 들어가면서 (This side of Easter)

-밤새 기다림이 지나고 부활은 이제 그 모든 영광과 신비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사도행전 4장에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 4장 서두에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5천명 정도로 성장했다고 보도한다(4:4).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과 그 도시의 종교지도자들의 만남 후에 누가는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4:31)라고 말하고 있다.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행 4:32-35으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려 준비할 때, 이것이(4:31) 배경이 된다. 그래서 부활절 절기로 접어들면서 본문으로부터 무엇이 공유할 메시지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러 가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두 가지 주제가 다가온다. 하나는 다양성 가운데 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함 가운데 풍성함이다.

다양성 가운데 일치(Unity in the midst of diversity)

-누가가 오천명이라는 믿는 자들을 “전체 그룹”으로 묘사할 때 이것은 1세기 예루살렘 회중에 대한 놀라운 진술을 보여주고 있다. 믿는 자들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에서 비롯되었고 우리는 이들이 그룹 내에서 서로 다른 인종적 배경, 지향하는 삶의 태도 그리고 신학적 관점등을 지녔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증언자인 누가는 이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32)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는 능력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평화가 없었다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리고 다양성 가운데 일치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21세기로 접어드는 오늘날 교회와 교단 안에서, 나라 안에서 또 미국과 세계 여러나라들 간에 고통스런 전환과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예수를 주님이시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 ( 5;9)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라는 주님의 요청과 명령을 부인하려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된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알렉산더 솔제니친 (Alexander Solzhenitsyn)이 그의 작품 수용소 군도 (The Gulag Archipelago)에서 언급한 의미있는 표현을 생각하며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악행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만 있다면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해서 제거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1)

-그래서 부활절 둘째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양성 가운데 일치에 관해 우리가 공유해야 할 명확하고 분명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51:10)이다. 주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우리 죄를 고백할 것을 요청하시고, 우리들이 다른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가족들과 동일시하고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설 수 있지만 나뉘어지게 될 때 우리는 쓰러진다.

빈곤함 가운데 풍성함 (Generosity in the midst of poverty)

-“부활절 절기로 접어들면서” 설교자가 집중할 수 있는 두 번째 주제는 빈곤함가운데 풍성함이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4:34-35) 이런 처음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매와 형제된 사람들을 돌보고 가진 것을 공유하도록 격려하고 돕는 성령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우리 교회들과 교단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에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이 간격(gap)이야말로 (그는 이것을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골(chasm)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경고했다.2)

  -잡지 Sojourners 창간자이자 미국에서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짐 월리스는 (Jim Wallis) 쇠퇴하고 있는 경제를 이렇게 묘사한다: “미국 내에서 6명 어린이들 가운데 한 명은 빈곤 수준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고... 더 심각한 것은 세계적으로 10억의 사람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3만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깨끗한 마실물의 결여와 같은] 예방원인과 관련한 질병으로 죽는다. 이 빈곤이라는 사실들 앞에서는 정치적 보수진보를 떠나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만을 떠들어대는 것은 빈곤을 해결하지 못했다.3)  

 -부활절 둘째주일에 설교자는 마치 1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던 선물들을 나누고 돌보아주었던 것처`럼 회중들이 부활절 이후의 삶을 다양성 속에 일치를 그리고 빈곤함 가운데 풍성함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요청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 12:4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 신앙인을서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누가 할 것인가?

728x90
반응형
LIST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4장 5 ~ 12절  (0) 2023.04.12
사도행전 3장 12 ~ 19절  (0) 2023.04.12
이사야 25장 6 ~ 9절  (0) 2023.03.21
이사야 50장 4 ~ 9a절  (0) 2023.03.21
예레미야 31장 31 ~ 34절  (0) 2023.03.21